|
영웅 전두환 | | | 사설,칼럼,논평 |
0 | / | 2013.02.09 19:53 |
전두환 대통령 일대기
창씨개명을 거절한 당찬 소년
일해 전두환 선생은 1931년 1월 18일 경상남도 합천군(陝川郡) 가야면에서 전상우 선생과 광산 김씨 김점문 여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해 선생의 성은 전씨(全氏)이고 이름은 두환(斗煥), 아호는 일해(日海). 본관은 완산(完山)으로 본래 전라북도 전주가 선향이다. 일해의 조부 전영수 공의 대에 경상남도 합천에 정착하였는데 경상남도 합천에는 전두환 가문과는 파가 다른 방계 선조가 합천 가야면에 와서 정착해 있었다. 일해의 직계 선조분 중에는 임진왜란때 현감으로 왜적에 대항하다가 전사하고 사후 호조판서에 증직된 전제라는 분이 있다. 이 분이 잠시 합천군수로 재직한 적이 있었다.
한편 일해의 조부 전영수 공이 1936년 별세하자 합천군 가야면 산중턱에 모셨다. 풍수지리에 일가견이 있던 그의 셋째 삼촌이 조부의 묘소를 잡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예전부터 이곳은 용이 날 명당자리라는 말이 있었으므로, 그의 파가 다른 먼 일가, 일찍부터 합천에 정착했다는 먼 일가들은 이 자리를 빼앗긴 것을 뭇내 아쉬워했다고 한다. 합천에는 전두환 일가와는 같은 문중이었으나 파가 다른 먼 일가들이 조선시대부터 수백년간 그곳에 정착하여 있었다.
일해의 형님 기환씨 위로 두 명의 형님이 있었다. 그러나 맏형 전열환은 고향 친구들과의 놀이 도중 사고로 사망하였고 둘째 형 전규곤은 사고로 사망하였고, 셋째형 전기환과 그, 동생 전경환과 누이들만 살아남았다. 사실상 일해는 집안의 대들보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일해가 5세 되던 해에 그의 조부 전영수 공(1867년~1936년)은 경상남도 합천에서 대구로 이사하였다. 이후 전두환의 집안은 대구에 뿌리를 내렸고, 전두환의 고모들도 경주, 울산, 대구, 성주 등의 명망가의 집안으로 출가하였다.
1938년 3월 소년 전두환은 호란보통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아버지 전상우 공은 독립운동가였고 노름빚을 크게 진 일가의 빚도 대신 갚아줄 만큼 의협심이 강하였다. 전두환 대통령은 아버지 전상우 선생으로부터 의협심을, 어머니 김점문여사로부터는 불굴의 정신을 물려받은 듯 하다. 그러나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 전상우 선생에 대한 일본 경찰의 감시와 탄압은 강하였고 상우공은 하루는 벼랑에서 그를 추격하던 합천경찰서 일본인 순사와 마주치게 됐다. 횡포를 부리는 합천경찰서 일본인 순사를 벼랑에서 밀어 떨어트린뒤 가솔들을 이끌고 만주 지린성으로 피신, 그곳에서 만주 독립군에 가담하여 독립운동가로 활약하셨다.
그로부터 2년만인 1940년 일해 선생의 모친 김점문여사는 자녀교육 문제로 자녀들들을 이끌고 귀국하였다. 모친께서 자녀들을 이끌고 귀국하게 된 데에는 아들에 대한 남다른 기대가 숨어 있었다. 김점문 여사는 아들들 중에서도 전두환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다고 한다. 하루는 김 여사께서 지나가는 승려를 극진히 대접했는데 그 승려가 말하길 어머니의 튀어나온 앞니가 아들의 운세를 가로막고 있다고 하자 어머니 김씨는 부엌으로 달려가 쇠 집게로 자신의 생니 3개를 뽑을 정도였다. 소년 전두환의 영특함 만큼이나 자신의 생니를 스스로 뽑았고, 홀로 여러 자녀들을 데리고 귀국할 할 정도로 자녀들의 교육과 성공에 대한 어머님의 기대는 컸다.
만주에서는 독립군 검거에 혈안이 된 일본경찰과 특무대원의 탄압을 피해 수시로 거주지를 이주하는 바람에 소년 전두환은 그곳에서는 친구를 사귀지 못하였다. 당시 만주에는 독립군을 검거후 살해한 악명높은 특무대원 가나이 에야치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언제 그들이 들이닥칠지는 알수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만주의 한국인과 생계유지를 위해 이주한 자들 중에는 중국인과 결탁하거나 앞잡이가 되어 동포들을 학대하거나 인신매매를 하는 한국인들도 존재했다.
만주에서의 생활은 열악할 수 밖에 없었다. 1940년 2년간 만주생활을 하고 귀국하게 되어 다시 합천으로 돌아온 소년 전두환은 다시 호란보통소학교로 복학, 또래들보다 2~3년 늦게 호란보통소학교를 졸업하게 됐다. 소학교(초등학교) 당시 전두환의 성적은 항상 상위권을 유지하였다.
전두환 대통령에게는 창씨개명이 없다. 다른 학생들은 창씨개명을 해 왔지만 전두환 소년은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했던 것이다. 1940년대 무렵 일제는 조선인의 혼을 말살하고 황국신민화를 위해 조선인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했고, 태평양전쟁이 지속되면서 그런 정신적 세뇌화는 더욱 거세어졌다. 창씨개명은 일본식으로 이름과 성을 바꾸는 것으로 허리춤에 칼을 찬 학교의 훈도는 말을 심하게 거역하는 학생을 그 자리에서 벨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전두환은 훈도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창씨개명을 거절하는 비범한 용기를 발휘하기도 했다. 소년의 용기로서는 비범한 것이었다. 당시를 살던 사람들은 성인의 나이에도 총독부의 위협에 굴복해 창씨개명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독립운동가의 집안이라 전두환 집안에 대한 일본경찰의 감시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소년 전두환은 좌절하지 않고 구김살 없이 학업에 정진하였다. 옆구리에 칼을 찬 일본인 훈도 앞에서도 담대하게 창씨개명을 거절하는, 소년시절부터 전두환은 비범하고 당찬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변화된 것은 없었고 혼란의 연속이었다. 전두환의 부친 전상우공도 기나긴 만주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였다. 그럼에도 가정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조숙한 소년이었던 일해는 일반 인문계 중학교 대신 생계를 위해 공업중학교 진학을 결심한다. 1947년 3월 대구공업중학교에 입학한 일해는 50리나 되는 먼길을 걸어서 통학하였다 한다. 중학교 성적이 수석과 차석을 놓치지 않을 만큼 우수하여 사범고등학교 진학이 가능했지만 소년 전두환은 사범고등학교 대신 어려운 가정 형편에 보탬이 되고자 공업고등학교를 선택, 일해는 대구공업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고등학교 재학 당시 상위권의 우수한 성적이었고 6.25전쟁 중 1951년 2월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학구열이 뛰어났으나 대학 진학 대신 가정형편상 그는 육군사관학교로의 진학을 택하였다. 웅지를 품은 전두환 청년은 이 무렵 아호를 일해(日海)라고 정하였다. 일해는 동해에 떠오르는 아침의 밝은 태양을 말하는 것이다. 아침의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과 같은 웅지를 지니고 군인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군부에 입문하여
1951년 3월 일해는 육군사관학교의 제11기로 입학하였다. 사관학교에서 일해는 노태우·정호용 등 장차 우국 거사의 동지들을 만나, 그들과 친분을 쌓고 인맥을 튼튼히 다졌다. 1955년 2월 일해는 육군사관학교를 제11기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에 임관되었다. 한국의 육군보병학교 과정을 수료한 뒤 1958년 일해는 미국으로 유학, 미국 육군보병학교 고군반 과정에 입교, 1960년 미국 육군보병학교 고군반 과정을 수료하고 귀국했다. 1960년 4.19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하였다. 그러나 그 뒤는 부패한 구 기득권 정치인인 민주당이 집권하게 되었고 사회는 일년에도 수십번의 데모로 날을 새는등, 혼란에 빠져갔다.
1961년 5월 16일 장도영 중장, 박정희 소장 그리고 여러 청년군인들이 한강철교를 건너 5·16 군사혁명을 거사하였다. 5월 17일, 혁명의 열기가 고조되었을 때 육군 대위 전두환은 애국심있는 청년장교들과 시민들을 모아 육사의 5·16 군사혁명 지지 집회를 선도, 이로서 육군 소장이며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박정희의 신임을 얻어 5·16 군사혁명 직후에 조직된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의장실 민원비서관에 선임되었다. 이는 일해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일해는 1962년 육군 소령으로 진급, 이때 윤필용과 함께 친목계인 <하나회>를 결성하여 군내 건전한 클럽, 동호회의 모범이 되었다. 자칭 민주화 계열 인사들의 왜곡과는 달리 하나회는 처음부터 정치적인 목적을 갖고 출발한 단체는 아니며, 하나회가 정치적인 목적을 갖고 출범했다는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못했다. 이후 하나회를 본따 현역과 예비역에 여러 개의 군내 친목조직이 창립되는 모범이 되었다. 1963년 중앙정보부 지원처 인사과장과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인사과장을 거쳐 1964년 육군대학에 입교, 2년만인 1965년 봄 전두환은 육군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1966년 일해는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 대리로 부임하였다. 이어 공수특전단 부단장을 거쳐 1967년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장 이후락의 특별 추천으로 청와대를 경호하는 수도경비사령부 본부연대 제30대대의 대대장으로 발탁되었고 이 해에 부친 전상우 공이 별세하였다. 부친의 별세에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전두환에게는 막중한 업무가 부과되었다. 1968년 1969년 육군본부 참모총장실 수석부관이 되었다. 1970년 육군대령인 일해는 백마부대인 제9사단 제29연대 연대장으로 베트남전쟁에 파병, 참전했고 1971년에는 장군으로 진급, 임기제 준장으로 제1공수특전단 단장을 지냈다. 1972년 귀국하여 1973년 정식 육군 준장으로 진급했다. 장군이 되고자 하던 그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1976년 청와대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를 거쳐 1977년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그의 육사 11기 동기생 160명 가운데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던 것이다.
육군 소장 진급 후 전두환은 1978년 제1사단장이 되었으나 하나회 윤필용의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강제퇴역 위기를 겪었다. 설상가상으로 이 해애 모친 김점문 여사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천운은 일해를 도왔던지 옥중에서 윤필용은 퇴역당하였지만 일해는 기적적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79년 3월에는 또 한번의 기적이 나타나 일해는 극적으로 국군 보안사령부 사령관에 임명되어 서울로 복귀하게 되었다.
하나회 내에서 용호상박을 이루는 윤필용이 나감으로서 일해는 이때 비로소 하나회의 실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어 대통령 비서실장 차지철에게 발탁되었다. 이는 일해의 인생을 바꾸는 기회가 되었다. 이어 동기인 노태우 소장 등과 함께 경호실장 차지철에 의해 청와대 경호실을 출입하게 되었다. 이 곳에서 그는 하나의 처세술을 배웠다. 아내를 잃고 외로움에 시달리던 박정희는 외로움을 달래는 일로 측근들을 과신하였다. 전두환은 부하를 신뢰하되 과신하지는 않았고 결사적으로 충성을 바치도록 매료하는 카리스마적 면모를 강화시켜 나갔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회식중 김재규의 저격으로 시해되는 10·26사태가 발생했다. 김재규와 중앙정보부 일당은 궁정동을 점거하고 청와대 보좌진들을 살륙했다. 안가에서 열린 회식자리에 차지철 이하 경호원들의 무장이 허술했었고 일설에는 차지철이 당시 권총이나 호신용무기를 휴대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었다. 급작스러운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사건은 또하나의 파국을 불러오는 계기를 마련했지만, 전두환 장군의 인생을 또한번 바꾸는 계기도 되었다. 10월 27일부로 계엄령이 하달되었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인 계기로 청와대에 각종 군부가 난립하고 권력을 차지하려는 더러운 음모가 판을 치자, 전두환 장군은 구국의 일념으로 반역적 세력의 소탕을 결심, 이후 혼란한 정국을 틈타 노태우, 정호용, 유학성, 허삼수 등 육사 11기출신의 모임인 '하나회' 멤버를 주축으로 하여 신군부를 형성하였고 신군부가 중심이 되어 내란을 수습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0월 27일 전두환 장군은 보안사령부 사령관으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을 겸직하게 됐다. 이어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대통령 시해사건의 수사책임을 맡아 김재규 등 관련자들을 체포, 11월 6일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범죄자들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함으로서 매스컴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어 의리를 강조한 전두환 장군은 역적 김재규를 패륜아로 단죄하였다. 80년 5월 전두환 소장은 이 "패륜아"들에 대한 강경 처벌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1979년 12월 8일 최규하 권한대행이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내분은 수습되지 않았고 12월초, 10·26사태를 수사하면서 일부 군벌들의 반발의 조짐이 보이자 전두환장군은 구국의 결단을 내려 12월 12일 새벽, 합동수사본부 소속의 허삼수·우경윤 대령 등을 긴급히 소환, 신군부 세력을 이끌고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鄭昇和) 육군참모총장 등 10.26 당시 대통령 암살범 김재규의 관련자 및 관련의심자의 체포, 연행을 지시했다.
"이 아비는 군인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왔다!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고. 너희들도 아주 잘 자라주었다. 그점에 대해선 너희 어머니와 너희들에게 감사한다. 너희 아비는 이번에 군복을 벗어야 할지도 모른다.
세상을 살다보면 누구나 한번쯤 큰 어려움에 직면할때가 있어! 사람들은 대부분 그 어려움에 순응하면서 살기도 하지만 이 아비는 그렇게 살지 않기로 했다.
사나이란 말이야. 자신이 정의다 라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도 있어야 된다! 이 아비는 후회하지 않는다. 만일 아비에게 불행한일이 일어나 세상의 온갖 모욕과 멸시가 너희에게 주어진다 해도 결코 좌절하거나 용기잃지 말고 험난한 세상, 꿋꿋하게 살아가야 한다! "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암살범 김재규는 자신이 민주열사라는 허위 주장을 하여 억지로 동정심을 얻으려 하였고 당시 군부 지도자나 정계 지도자들은 전부 김재규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이런 불의하고 썩은 군부를 보고 여러 청년장교들이 전두환 소장을 찾아와 거사를 건의하였다.
거듭된 거사 요청에 전두환 장군은 청년장교들의 애국적 의지를 담담히 받아들인다.
우수와 고뇌, 구국의 결의
"이 아비는 군인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왔다!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고. 너희들도 아주 잘 자라주었다. 그점에 대해선 너희 어머니와 너희들에게 감사한다. 너희 아비는 이번에 군복을 벗어야 할지도 모른다.
세상을 살다보면 누구나 한번쯤 큰 어려움에 직면할때가 있어! 사람들은 대부분 그 어려움에 순응하면서 살기도 하지만 이 아비는 그렇게 살지 않기로 했다.
사나이란 말이야. 자신이 정의다 라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도 있어야 된다! 이 아비는 후회하지 않는다. 만일 아비에게 불행한일이 일어나 세상의 온갖 모욕과 멸시가 너희에게 주어진다 해도 결코 좌절하거나 용기잃지 말고 험난한 세상, 꿋꿋하게 살아가야 한다! "
12월 12일 새벽, 군부를 장악한 내란세력을 진압하는 작전에 출정하기 전, 우수와 고뇌의 찬 전두환 장군의 한마디였다. 거사 전 아내와 자녀들을 모아놓고 전두환 소장은 비장에 찬 결의를 다짐하였다. 이어 사전에 연락조치된 노태우 준장과 신군부, 하나회 계열 현역·예비역 군인들, 지역 향토사·군단의 사단장과 군단장이 이끌고 온 군벌이 서울 주변에 결집해 있었다.
이날 전두환 장군은 결연한 의지로 소수의 청년군인들과 함께 육군본부를 장악,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강제연행을 추진하던 중 총격전을 벌였고 정 총장 편에 서 있던 김오랑 소령 등이 사살되었고 3,4명의 사병들이 부상당했다. 이는 불가피한 희생이었고, 명령지휘계통은 달랐으나 참모총장에게 충성을 바친 장병들의 충성심도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전두환 장군은 비록 정 전 총장에게 충성을 바쳤지만 그들의 용기를 높이평가하여 사후징계 등의 처리는 하지 않았다.
정승화 총장 연행과 중앙정보부 김재규 잔당 체포를 계기로 전두환 장군은 군부내 박정희 대통령 시해음모에 가담하거나 동조한 세력들과의 전면전을 선포하여 색출, 처단하여 권력 공백기에 박정희 시해세력의 발호와 타군벌의 권력 장악음모를 차단하였다. 신군부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구금하고 이와 함께 김재규 등의 암살 관련자 세력을 체포, 일망타진함으로서 청와대 내부의 혼란을 잠재웠다. 군부를 평정한 뒤 일해는 광주사태를 진압, 평정함으로써 국가를 안정시키고 민심을 얻는데 성공하였다. 1980년 3월 전두환은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그러나 같은 3월, 북한에서 파견한 간첩들이 경기도 고양과 서울 은평구 등에서 검거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파견된 북한의 간첩들은 북한 인민무력부 본부대 심리전대대 전술중대 소속 공작원들로 밝혀졌고 이 중 일부의 사진이 신문과 전파를 타고 방송에 보도되었다. 북한 간첩들의 출몰로 민심이 어수선한 중에 대학생들의 데모는 계속되었고 4월 강원도 정선군 사북면에서 사북(舍北炭鑛) 탄광 노동자 파업이 발생하였으나 임금과 처우관련 문제로서 쉽게 해결되었다. 4월 14일 전두환 장군은 보안사령관으로 공석 중이던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곧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이 되어 혼란기에 새로운 실권자로 부상하였다.
그런데 4월말 반체제인사들의 반정부 시위에 이어 5월초 전국 좌경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계속되었고, 5월 1일부터 20만 명의 친북 좌파 대학생들이 지상 서울역 광장을 점령하고 상가와 노점상을 약탈하고 전봇대와 가로등을 파괴하고 상가를 파괴하고 여행객들을 폭행하는 등의 난동을 부리다가, 군경의 투입 정보를 빼돌린 전국 대학생의장단의 사전연락으로 자진해산됐다.
정부는 3월에 서울 은평과 경기도 고양군 벽제 등에서 북한 인민군 간첩들을 생포한 정부로서는 잔뜩 긴장하게 되었다. 남파된 간첩은 북한 인민군 인민무력부 심리전 대대 소속으로 인민군 대위 이창룡 등이 이끌고 내려온 심리전대대원 중 생포자의 사진이 찍혀 보도되기도 했다.
1980년 5월 17일 저녁 제42회 임시국무회의에서는 국방부가 제출한 비상계엄 확대선포안이 발표되었다. 그런데 18일 새벽, 갑자기 시민군이 병기고를 탈취하고 경찰과 군병력과 교전 중, 경찰과 군인들 29명 등이 전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국무회의가 다시 열렸고 비상계엄령 확대선포안은 반대없이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1980년 3월에 이미 북한에서 파견된 간첩들이 서울 인근지역에서 생포되어 언론에 보도가 되었다. 이어 계엄군이 쳐들어 온다, 경상도 군인이 씨를 말리러 온다, 계엄군이 여고생의 가슴을 도려냈다, 여대생이 강간당했다 등의 증거도 불분명하고 사실확인이 되지 않은 유언비어들이 확산되면서 사태는 긴박하게 되어 갔다. 다급한 일해는 퇴근도 하지 않고 국방부에 있었다. 18일 새벽, 이미 0시를 기해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하는 조치를 내리고 당시 국무회의는 만장일치로 경찰과 군병력을 사살하고 무장한 폭도들의 진압을 위해 긴급히 계엄군 투입을 지시, 전두환 장군은 국무회의 대표 자격으로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표하였다.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 이후 시민군의 봉기는 거세졌고 전남도청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고, 광주의 보병학교 병력과 31사단 병력이 상대방을 폭도군으로 오인하는 교전까지 발생하는 등의 혼란이 나타났다.
18일 저녁늦게 퇴근했다가 5월 19일 새벽 전두환은 출정의 각오로 출근하였다. 출정 전 전두환 중장은 가족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아비는 말이다. 군생활을 하면서 한번도 부끄러운 일은 하지 않았다. 이번 거사가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나의 살아온 인생에 대한 후회는 없다."
위기일발의 순간 결연한 의지로 사태진압에 임하였으나 시민군들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고 혼란이 계속되는 중 신속한 주변 31사단, 32사단 병력으로 구성된 계엄군 투입으로 5월 20일, 사태가 발생한 지 3일만에 광주사태를 어느 정도 진압하게 됐다. 전두환은 광주사태의 배후가 북한군이었다고 짐작하였으나 심증만으로는 북한의 침투를 입증하기 어려워 발표하지는 않았다. 광주폭동은 자칭 시민군들이 5월 18일 새벽부터 29인의 군경을 학살하고 병기고를 탈취하면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그리고 5월 21일부터는 광주 해방구를 결성하고 공산혁명을 꿈꾸다가 5월 30일 폭동발생 2주만에 진압됐다.
사후 전두환과 신군부 일파의 무분별한 양민학살로 왜곡되었고 1993년에는 민중항쟁, 98년에는 민주화 운동으로 일방적으로 격상되었으나 각종 낭설과 유언비어, 무고한 민간인들에 대한 살상 등으로 시민군을 자극하게 된 데에는 5월 18일 해안가로 침투한 북한군 1개 대대의 침투사실이 있었음을 당시 안보전문가와 외신들의 증거자료와 여러 역사학도님들, 지만원 공학박사 등의 연구 결과에 의해 드러났고 2002년 이후 탈북자와 북한군 출신 인사들의 증언으로 북한군의 침투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남한 정권을 전복시킬 목적으로 수시로 간첩을 보내고(1980년 3월), 특수부대를 이용해 일으킨 북측의 무력도발은 완벽한 실패로 끝났다. 광주사태는 5월 30일경 완전히 진압되었다. 광주사태 진압 과정에서 보여준 침착함과 결사의 각오로 명망을 사게 된 일해는 전국비상계엄하에서 대통령 자문 및 보좌기구 성격의 비상소집기관인 1980년 5월 31일 각군과 대학교수, 민간 안보 전문가, 사회원로들을 소집하여 국가보위비상대책회의를 신설하고 국보위 위원장은 대통령 최규하, 전두환은 국보위 상임부위원장에 취임하였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안보 자문회의적 성격으로 행정과 군사, 안보 부문 중 대통령에게 자문 및 제부서의 감독 및 의사결정기능을 수행하는 기구였다.
국보위, 국보비상위 등의 약칭으로 불리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군인, 정치인, 대학교수, 안보전문가, 사회원로 등을 각 분야별로 10인씩을 위원으로 피선하여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국가보위위는 실질적인 명령집행기능은 없는 자문기관의 성격으로 일종의 각종 안보 관련 안건이 나타나면 이를 심의하고 조정하기 위하여 상임위원회를 두고 상임위원회 안에 13개 분과위원회를 설치하여 제반 업무를 분담, 토론후 결정하였고 이를 청와대와 주무부서에 건의하는 형식으로 업무를 처리하였다. 국보위는 보안사령부 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전두환을 국보비상위 상임위원장으로 선출했다.
국보비상위는 상임위원장 전두환 계열의 인사들 외에도 각 시민사회와 안보전무가들로 구성되었으며 혼란이 가중되면서 자문기관 성격보다는 최고군사회의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국보비상위는 안보태세 강화·경제난국 타개·사회안정으로 정치발전을, 사회악 일소로 국가기강을 확립한다는 명분을 결의하고 붕괴된 구 유신체제하의 공화당 부패정치세력 및 야당 부패정치세력과 부정부패 무능 공무원과 공기업 직원 등을 대거 포함한 공직자 숙정 및 공직사회 개편, 중화학공업투자와 중소경공업 육성에 대한 재조정, 중·고등학교 졸업정원제와 시험선발제도 과외금지, 이적행위물·욕설·음란물 출판 및 인쇄물 심의안과 제한안, 삼청교육대 실시 등의 안건을 심의, 처리하였다.
이어 8월 13일에는 당시 가택연금상태에 있던 신민당 총재 김영삼(金泳三)이 정계은퇴를 선언하기도 했다.
1980년 8월 5일 일해는 국정혼란과 북한의 남침을 진압한 공로로 육군 중장에서 육군 대장으로 특별 진급하였다. 8월 13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국회의장인 박충훈씨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로서 정계의 세대교체를 이룩하였고 1980년 8월 22일 일해는 육군대장으로 군문에서 예편하였다. 51년 3월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30년의 파란만장한 군생활을 마치는 것이었다. 군 생활 30년 동안 청렴하고 소신, 박력있는 행동으로 뭇사람을 사로잡던 전두환 장군이었다.
전두환 장군은 정치투신을 심각하게 고민하였는데, 내란과 혼란을 조장하고 그 파급효과로 정권을 차지하려는 야당 정치꾼들에게 쉽게 조국을 맡길 수가 없었다. 전두환은 곧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결심을 한다. 그리고 8월 27일 일해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 제7차 회의에서 대통령선거 후보자로 출마, 등록하였다. 8월 29일 선거에서 3,000명의 재석 인원 중 2,524표를 얻어 84.13%의 득표율을 얻고 제11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로서 기나긴 혼란을 잠재우고 제5공화국 출범의 종을 울리었다. 이로서 전두환 장군과 여러 우국충정으로 일어선 청년군인들의 지난 10개월에 걸친 우국충정의 작전이 최종적으로 종결되는 순간이었다. 좌익세력들 조차도 장기간의 쿠테타라 부를 만큼, 좌익세력들의 유혈사태를 진압한 10개월의 진압 과정은 끈질긴 한국 국민 전체의 은근기와 끈기의 결실이었고 전두환 장군은 이런 민심을 적극적으로 대변하고 민의를 따랐던 것이다.
구국의 성웅
대통령에 당선된 후 〈당선에 즈음한 담화〉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국정운영에 있어 항상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정직하고 능률적인 정부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소신을 발표하였다. 이어 8월 30일, 박정희 전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등 암살범들에게 사형을 구형하여 정의를 바로세우고 구원을 갚음으로써 많은 국민들이 통쾌해 하였다. 이어 경제 안정으로 물가인상률을 억제하는 정책을 시도하였다. 79년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이후 30,40원대의 평균 물가는 50원선, 60원선까지 인상했다. 라면, 필기구, 학용품 등의 가격이 79년의 1배, 1.5배까지 급격히 인상되었는데 물가인상 억제정책을 추진하여 87년까지 물가의 인상을 억제하였다. 경제력은 연 8%로 꾸준히 성장하였음에도 물가가 안정됨으로서 서민과 중산층들은 경제적 안정을 구가할 수 있었다.
1980년 9월 1일 전두환 대통령은 구 왕조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연좌법 등 각종 부조리한 법안의 폐지를 지시하였다. 이로서 과거 일만년 가까이 한국사회에서 전통이나 관습이라는 명목으로 존속하던 낡은 인습등을 없애고 쇄신하는 일대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근래의 유신잔재의 청산을 위하여 과감한 제도적 개혁을 단행하여 각 교과서에서 5.16 혁명정신을 삭제하였고 이어 1인 장기집권을 배격하기 위하여 대통령의 임기를 7년으로 하고 중임을 금지하였다. 9월 29일 전두환 대통령은 7년 단임제를 선언, 같은 날 청와대와 행정기관에도 훈시를 내리고 여의도에도 대통령 임기 7년 단임과 간선제에 의한 대통령 선출을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보내, 대통령 7년 단임제안이 공고되었고 이에 따라 대통령의 연임과 장기집권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단임제 채택으로 대통령의 연임과 장기집권을 사실상 차단하여 민주정의 쇄신을 가져온 것이다. 그해 10월 22일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우리 나라 투표사상 가장 높은 95.5%의 투표율과 91.6%의 찬성율이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10월 27일 대통령 선거를 단임제로 하는 새 헌법이 공포되었다.
1980년 10월 17일 전두환은 부정부패한 구 정치세력을 척결하고자 정당해산령을 내려 구정당인 민주공화당과 신민당, 민주통일당, 민주사회당 등 부패 구태정치세력들을 강제해산시켰고 정치활동을 금지시켰으며, 구정치인이 착복한 뇌물과 비자금을 압수조치하였다. 이들 야당의 구정치인들에 대한 정치활동은 4년뒤인 1984년에 해금되어 이때부터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1980년 10월 23일 헌법개정으로 구태정치인의 소굴인 국회와 제정당,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해산시키고 국보비상위는 국가보위입법회의로 개편되었다. 개편된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입법회의 의장에 선출되어 겸직하였다.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제반 법과 제도를 정비하며 사회내분 수습에 기여하였다. 전두환 대통령이 독재를 꿈꿨다면 부정부패로 회수한 정치자금이 60억 이상이었던 구정치인들에 대한 정치활동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자칭 민주화 세력들이 말하는 "전두환이 민주세력을 짓밟고 군사독재를 행했다"는 객관성이 부족한 주장들과는 거리가 멀다. 이때 해산당한 신민당, 민주통일당, 민주사회당의 당원들은 1980년 12월 1일 유치송(柳致松)을 초대 당수 겸 대통령후보자로 선출하고 민주한국당을 발족하고 81년 1월 1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정식 창당했다. 81년 3월 25일 11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주한국당은 지역구에서 58명이 당선되었고, 전국구 의석은 24석을 배정받아 82명이 당선되었으며, 무소속의원 1명이 입당하여 당시 국회 200석 중 83석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따라서 전두환 대통령이 야당활동을 전면 탄압했다는 민주화세력의 주장은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평화와 안정의 기반을 구가하다.
1980년 10월 17일 민주정의당이 창당되었다. 81년 1월 14일, 일해는 80년 10월 창당된 민주정의당에 입당, 1월 15일 민정당 총재 겸 대표최고위원에 추대되었고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1981년 2월 25일 대통령선거인단의 간접선거로 치러진 제12대 대통령선거에 대통령 후보자의 한 사람으로 출마하였다. 이 선거에서 총선거인 5,277명 가운데 5,271명이 투표에 참가하였고, 이 중 4749표를 얻어 투표자의 90.1%, 총 선거인 중 89.994%의 득표를 얻어 민주한국당 대통령후보 유치송 등을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제12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어 3월 3일 임기 7년의 제12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정식 취임하였다. 1981년 3월 4일 잠실체육관에서 거행된 대통령 취임식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장구한 세월에 걸친 시련과 고뇌의 시대를 넘어서서 이제야말로 제5공화국의 출범으로 자기완성시대를 형성하여야 할 성장과 성숙의 시대에 들어서는 찰나에 있다"는 취임소감을 발표하였다. 이어 국정 비전으로 정의사회 구현, 복지사회의 건설, 민주주의의 토착화, 교육혁신, 보국안민, 문화창달을 비전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기독교적 시민민주주의에 기초한 민주사회 건설 노력을 보이면서 박정희 전임 정권에 강력히 항거하였던 재야인사 윤보선, 함석헌, 문익환 등의 잠재적 동의를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이어 비상사태 해결과 국정자문기관이었던 국보비상위를 발전적 해산을 시키고 새로운 정부에 배치하였다.
전두환 대통령은 윤보선 전임대통령 등을 국정원로로 대우하여 국가원로자문회의 위원으로 위촉하여 어른 예우를 하였고 박정희 정부때 말성을 빚었던 문익환 목사도 전두환 대통령 8년간은 조용히 근신하며 지냈다.(임수경 등 학생들을 데리고 상습방북한 것은 노태우 취임 2년때부터 일이다.) 외교면에서도 박정희 정권때의 반미적 정책은 대폭 수정되어 안보동맹을 더욱 강화하는 체제로 나가게 되었다. 또한 사회안정의 대책으로 흉악 극성범죄에 대한 강경한 대응을 하였다. 81년 보국안민과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이념을 구현하고자 살인범, 조직폭력배, 도박범, 강도·강간범, 음주운전자, 약물중독자, 뺑소니 등의 각종 흉악범과 경미한 범죄라도 상습범, 감옥과 교도소 등에서 교화가 어려운 재범, 삼범 이상의 흉악 범죄자와 상습범들도 삼청교육대 등에 보내 인격을 개조시켜 보냈다. 그 결과 범죄없는 정의사회를 구현하기도 했다.
72년 이후 유신헌법에 의해 국회의원의 1/3을 대통령이 추천하게 하는 제도를 폐지하였고, 국회의 비판기능을 강화하고 국회의원의 의정활동에 대한 면책특권을 부여하였으며, 국회의원에 대한 임의체포가 불가능하게 하는 등 국회의원의 입법 권한을 대폭 강화하였다. 또한 72년의 유신헌법에서 결정했던 대통령의 일반법관 임명권을 폐지하고, 일반법관의 인사이동임명권을 대법원장에게 부여하여 사법부의 독립성을 강화하였다.
전두환 대통령은 11대 대통령 취임 직후 가장 우선적으로 물가 안정을 중점과제로 삼고, 물가 인상률을 억제하였다. 경제의 전문가가 아니었던 전두환은 노재봉, 진념 등의 경제전문가와 전문행정관료들을 영입해서 경기부양과 민생안정을 일임했는가 하면 그들 경제통 출신 경제관료들의 고견을 적극 수렴하기도 하였다. 이로서 1980년 이후 1987년 전두환 대통령 퇴임시까지 7년간 물가가 단 2회 인상되는 기록을 달성하였다. 경제력의 꾸준한 상승과 물가 인상 억제로 서민의 생계에 대한 부담을 덜게 되었다. 동시에 물가인상의 원인이 된 생필품가격 인상을 적극적으로 억제하고 저물가·저금리·저환율의 3저(三低)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대북한 정책으로는 1981년 1월 12일 남북한 당국 최고책임자간의 상호방문을 제의하고 북한 괴뢰주석 김일성을 조건 없이 서울에 방문토록 초청하였으나 북한은 이를 거부했다. 1981년 8월 15일에 있었던 광복절 기념식의 연설에서 그는 "우리는 나라를 잃은 민족의 치욕을 둘러싸고 일본의 제국주의를 꾸짖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당시의 정세, 국내적인 단결, 국력의 약함 등 자책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훈시하였다.
1982년 1월 22일 전두환 대통령은 국회 제109회 임시국회에 출석하여 국정현안 질의답변시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을 제창 발표하였다. 안건의 내용으로는 남북간 민족적 화합에 기반하여 통일헌법을 제정, 평화적인 방법으로의 자유민주통일 달성, 자유민주통일 후 통일단일국회와 단일정부를 수립함으로써 통일민주공화국을 완성시킨다 는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는 1민족 2국가의 북측 중심의 연방제통일론에 대응하여 1민족 1체제를 지향하는 단일통일론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외교적 노력에도 기울였다. 민족자주에 치중하였던 전임 박정희 정권의 외교소통 부족에 한계를 느끼고 외교의 필요성을 인식한 전두환 대통령은 이후 외교적 노력을 중요시 여겨 국제사회와의 외교노력을 기울였다. 매년 수십차례의 외교사절을 각국에 파견하였고, 전두환 대통령 그 자신도 직접 외국을 순방하였으며 외국 국가원수와 부수반 등을 초청하기도 했다. 81년에는 캐나다 국무총리 피에르 트루에도(Pierre E. Trudeau)의 예방을 받고 정상회담을 개최하였고 코스타리카의 대통령 카라소(R. O. Carazo)의 예방을 받고 정상회담을 하기도 했다. 82년 1월말에는 레이건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공식 방문하여 82년 2월 3일 한미 정상회담을 갖고 주한미군 철수 백지화 등 14개항의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아시아 국가들과의 선린우호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6월 25일 ASEAN 5개국(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싱가포르·타이·필리핀) 순방을 위해 출국하였다. 이어 그해 5월 24일에는 오스트레일리아 국무총리 프레이저(Johan. M. Fraser)의 예방을 받고 정상회담을 하였다.
1982년 8월 2일 전두환 대통령은 캐나다를 방문하여 트루에도 캐나다 국무총리를 예방하여 정상회담을 가졌고 8월 15일 오전 광복절 기념식 참석을 위해 일시 귀국했다가 그날 오후 출국, 8월 16일 전두환 대통령은 다시 ASEAN 5개국에서 아프리카대륙을 방문, 케냐·나이지리아·가봉·세네갈 등 아프리카 5개국을 순방하였고 아프리카 정상들과의 회담에서는 이중과세방지협정 등을 체결하였으며 캐나다와 프랑스·서독·벨기에·영국 등을 방문하여 정상회담을 갖기도 했다.
1983년 1월 11일에는 일본 국무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총리가 방한, 나카소네와 첫 회담을 갖고 경제협력 문제를 포함한 두 나라간의 현안을 논의하였고 이에 따라 12개항의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때 일본과의 협정 이후 교과서 왜곡 등에 대한 반일 기운이 고조되자 전두환 대통령은 '이민족 지배의 고통과 모욕을 다시 경험하지 않기 위한 확실한 보장은, 우리를 지배한 나라보다 살기 좋은 나라, 보다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내는 길 밖에 없다'고 하여 일방적인 반일이 아닌 실력을 키워 실력을 바탕으로 한 극일정신을 강조하였다. 86년말에는 독일을 순방하고 돌아왔다.
경제와 물가와 민생의 치적
1983년, 77년부터 박정희 정부에 의해 유치 추진하였던 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 유치의 숙원을 달성, 88년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해 9월 초 요르단 국왕 후세인의 방한을 받고 한-요르단 정상회담을 개최하였다. 9월 30일 주체사상 등을 수용한 친북 운동권들이 모여서 민주화운동청년연합(民主化運動靑年聯合) 이라는 단체를 결성하였고 제5공화국 정부에 대한 투쟁을 선언하였다. 그해 10월 8일 전두환 대통령은 동남아·대양주 6개국 순방을 위해 출국하였다. 10월 9일 첫 방문국인 버어마 랭구운 시내의 아웅산 묘소 참배가 결정되었다. 아웅산 묘소는 아웅산 수지 여사의 아버지이자 버어마의 독립운동가인 아웅산 장군 외 8명의 막료들의 시신을 안치한 국립묘지로 오전 10시 전두환 대통령 일행의 참배에 앞서 함병춘(咸秉春) 대통령 비서실장, 이범석(李範錫) 외무부장관, 서석준 내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하동선(河東善) 경제기획원 해외협력단장, 심상우 청와대 행정관 등 한국인 각료들과 KBS, MBC 등에서 파견한 각 취재진, 버어마 현지 안내인 80여명이 참배 예행연습을 할 때였다.
애국가가 울려퍼지는 순간 건물에 설치한 세 개의 폭탄이 터져 함병춘 비서실장, 심상우 행정관, 이범석 외무장관, 하동선 경제기획원 협력단장 등 한국인 각료들과 수행원, 이중현 동아일보 기자 등 취재기자 그리고 버어마 안내원 등 80여 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 부상을 당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애국가가 울려퍼질 즈음 2진으로 도착하던 전두환 대통령 일행은 이 사건으로 차를 돌리게 됐다. 현장에서 붙잡힌 북한군 중좌(한국의 중령급) 장교는 현장에서 사살되고 북괴군 소좌(대령급) 2인, 북괴군 상위(대위와 소령의 중간급) 1인, 북괴군 대위 2인이 붙잡혔다. 이 중 부책임자급인 북괴군 상위 1인은 처형되고 나머지는 수감중 사망했다. 이 일로 버어마는 북한과 단교하게 됐다. 북한에 의한 폭탄 테러사건이 발생하여 수행 각료들과 수행원들이 순직하는 비운의 사태가 벌어져 큰 충격을 받기도 했다. 이어 9월 30일에 결성된 친북단체 민청련의 정권타도 저항운동은 더욱 거세졌다.
북한과 친북세력의 이같은 비겁한 행위에도 전두환 대통령은 남북대화에 관심을 기울여 1984년 11월부터 모두 5차례의 남북경제회담이 개최되었고, 1985년 5월 남북적십자회담이 재개되었다. 1985년 9월 20일 분단 후 처음으로 이산가족 고향방문과 예술공연단 교환방문이라는 민간교류가 이루어졌으나 북측의 성의없는 대응으로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반대로 통일을 가장한 친북이적행위는 철저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85년 9월 반정부투쟁을 선동해온 친북단체의 조직원들이 일망타진, 대규모로 검거되어 가장 빠른 친북인사는 86년 9월에 석방, 이후 친북이적단체들의 활동은 87년 6월경까지 비교적 감소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전두환 대통령은 1983년 11월 12일에는 방한한 레이건 대통령과 안보문제를 비롯한 두 나라간 현안을 논의하고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재정립하는 등 대외관계에서 적극성을 보였다. 이처럼 대외관계와 대북관계 및 스포츠외교 분야에서 다소 진전된 모습을 보였으며, 경제부문에서도 3저호황에 힘입어 물가안정·수출신장·대외무역 흑자를 기록하는 등 경제적인 안정을 구가하여 경제번영의 기반을 닦았다.
1984년 전두환 대통령은 86 아시아경기대회와 88 서울 올림픽에 대한 대비 및 준비작업을 지시하였다. 각종 공중도덕 문란자와 풍기위반행위자에게 범칙금과 과태료를 물리는 법안들이 통과되었고 깨끗한 거리를 만들자는 홍보캠페인과 함께 거리는 청결하게 변하였다. 68년 한국의 서울에서 개최되기로 결정된 아시아게임을 태국에 양보하여 방콕에서 개최된 일이 있다. 이 대신 86년의 아시아경기대회는 한국의 서울에서 개최되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77년 이후 유치하려는 올림픽은 7년여 만에 한국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결정되었다. 서울 아시아경기대회와 서울 올림픽에서 깨끗한 거리와 질서정연한 움직임으로 지저분한 고아와 거지와 미망인의 나라로 알려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국위를 크게 선양시킨 바 있다. 그러나 이미지 쇄신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미스러운 일이 연이어 발생했다. 구 소련 상공에서 대한항공 KAL기가 격추되는 불행이 일어났고 이어 87년 북한 공작원 등에 의해 KAL 비행기에 폭탄이 설치, 한반도 상공에서 KAL기가 폭파되는 불행이 발생하였다. 신속히 군경을 투입해 폭탄테러 용의자를 잡고 두 번의 대한항공 폭파사건의 배후에 북한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7년간의 대통령 임기 가운데 마지막 1년 여를 남겨 놓고 있던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생 박종철(朴鍾哲)이 서울 중구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수사를 받던 중 갑자기 사망했고 이는 좌경세력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고문치사의 책임을 물어 내무부장관 김종호와 치안본부장, 경찰청장, 대공분실장 등 관계관들을 전격 해임하고 고문근절대책 수립을 지시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다. 그러나 반발은 계속되었고 박모 치안정감 및 대공간부들을 징계조치하였다. 그해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국민들의 개헌요구와 헌법을 절충하여 선거를 실시할 것과 1988년 2월 정부를 새로운 정치지도자에게 이양하고 이를 위한 대통령선거를 연내에 실시한다는 내용의 특별담화인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4·13 호헌조치에 반대하는 폭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한국정치사의 커다란 분기점인 '6.10 사태'로 발전되었다. 일부 친북 운동권 세력에 의한 호헌조치 반대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일부 직장인들에게도 넥타이 부대로 동참시킬 만큼 호응을 얻자 전두환 대통령은 한발 더 물러서 1987년 6월 10일 민주정의당 전당대회에서 노태우 대표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여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국민들의 거센 직선제 개헌요구를 수용한 전두환 대통령은 6월 24일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와 청와대 회담을 통해 개헌논의를 즉각 재개키로 하였다. 이에 따라 6월 29일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표가 수습안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및 정치범 사면복권 등을 포함한 8개 항목의 시국수습방안인 '6·29선언'을 발표하자 전두환 대통령은 7월 1일 시국수습에 관한 특별담화를 통해 6·29선언을 전폭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7월 10일 민주정의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11일 민주정의당 명예총재에 취임했다. 명예총재로서 전두환 대통령은 무보수로 당과 국정현안 전반을 자문하였다.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자 정권인수인계 절차를 거쳐 제6공화국에 정권을 이양하고 1988년 3월 노태우 당선자에게 대권을 인수한후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국민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서울 연희동 사저로 돌아왔다. 민주적 선거절차와 단임제 공약에 대한 약속을 이행한 것이다. 구국의 열의로 일어서 파란만장한 1979년과 80년 10개월간의 내란을 수습하고 국론을 평정, 각종 북한의 무력도발 진압, 물가인상 억제 등 물가 안정과 경제성장의 대업을 이룩한 지도자의 영광스러운 퇴장이었다.
정치적으로 안정된 사회와 경제지도자의 필요성을 생각했던 전두환은 83년 노재봉을 외무부장관에서 일약 국무총리로 기용했다. 그리고 노재봉을 차기에 염두해두기도 했으나, 군부의 반발이 거셌다. 결국 전두환은 군부의 직면한 반발로 노태우와 정호용 중에 후계자를 고르게 되었다.
영원한 지도자 전두환
전두환 전임 대통령은 노태우 대통령에게 각종 자문을 하였고 국가원로자문회를 통해 정치적 조언을 하고자 했으나 일부 좌익세력의 빗발치는 탄핵과 5공청문회 요구에 굴복한 노태우 정부의 안이한 대응으로 내란이 발생하자 전두환 대통령은 내분을 잠재우고자 1988년 4월 13일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에서 스스로 용퇴하였다. 제6공화국 초기의 '여소야대' 상황에서 국회 청문회가 진행되면서 5·18 광주폭동 강경 진압과 제5공화국 당시 일부 권력비리에 대한 진상 규명 및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전국민적인 요구에 직면하였다.
1988년 11월 23일 빗발치는 좌파·주사파 세력의 반발여론 무마와 국민여론 통합을 위해 전두환 대통령은 대 국민 사죄와 함께 재산헌납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여당측에서는 백담사 은둔을 강요하였고 전두환 대통령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이어 전두환 전임 대통령이 비자금을 수수했다는 음해성 루머도 5공청산 요구와 함께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해 11월 24일 전두환 대통령은 좌파세력의 선동과 국론분열을 무마하고자 전 대통령, 영부인 이순자 여사와 함께 설악산 백담사(百潭寺)에 수도자 자격으로 입산, 은둔생활을 하였다. 백담사에 은둔생활 중에도 전두환 대통령은 긍정적인 시각을 잃지 않았다 하며 한 회견에서 내가 스님들보다 불경을 많이 안다는 농담을 건네기도 하였다. 백담사에 은둔 중이던 1989년 12월 31일에는 국회의 줄기찬 요구에 의해 국회 5공 청문회 특위, 광주사태 특위 등의 연석회의에 출석하여 직접 125개 항목에 걸친 서면질문을 답변, 증언하기도 했다.
1990년 1월 3당통합으로 민주자유당, 신민주공화당, 통일민주당이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으로 개편되었다. 당시 뉴스에는 노태우, 김종필, 김영삼이 손을 잡고 미소를 짓고 주변에서 환호하는 모습이 클로즈업 되었다. 그러나 한켠에서 서운한 마음으로 물러서야 했던 전두환 대통령의 모습은 고려되지 않았다.
3당통합의 배경은 이러하다.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통일민주당에서 김대중이 경선에 불복하고 돌연 탈당, 그해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김대중은 그해 10월의 통일민주당 대통령 경선에 불복종하고, 호남은 자신이, 부산과 경남은 김영삼, 대구와 경북, 강원은 노태우, 충청권은 김종필이 차지한 뒤 김대중 자신이 호남과 수도권을 차지하면 승리가 가능하다는 4자필승론을 내세웠던 것이다.
김대중의 탈당과 평민당 창당으로 통일민주당은 원내 제2야당에서 제3야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88년부터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민주정의당 측과 3당합당의 논의를 하였다. 전두환 명예총재는 이에 반발하지 않고 허용하였다. 1990년 1월 백담사에 수도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은 민주정의당의 해산과 함께 명예총재직을 사퇴하고 정계에서 물러나야 했다. 1991년 1월 1일 신년을 맞이하여 하산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백담사에 입산한지 2년 1개월 만의 일이었다.
경제지도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경제전문가에게 차기를 위임하려 하였으나 군부의 반발로 전두환은 노태우와 정호용 중에서 후계자를 낙점하여 노태우를 선택하게 되었다. 그뒤 노태우가 후임자를 고를 때 전두환은 군부와 경제통 인사 중에서 고를 것을 조언하였다. 그러나 노태우는 어찌된 일인지 김영삼을 후계자로 낙점했다.
1993년 2월 김영삼 정부 출범 후 같은해 5월 문민정부는 광주민중항쟁을 계승한 정부라는 발표와 함께 광주사태가 광주폭동이나 광주사태에서 민중항쟁으로 정부적 차원에서 격상되면서, 12·12사건 진상 규명문제가 다시 여의도에 대두되었다. 이 무렵 전두환 대통령은 당시 계엄사령관 정승화 등으로부터 반란·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 등의 혐의로 피소당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1994년봄 총무처 장관 서 모로부터 비자금 의혹이 제기됐고, 박 모 의원으로부터 비자금 의혹이 제기되었다. 의혹이 없었던 전두환 대통령으로서는 8월, 새벽등산길에 만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너털웃음으로 대응하였다.
1995년 12월 김영삼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정책이 추진되면서 12·12사태와 5·18 광주사태 유혈 진압, 수천억원에 이르는 대통령 비자금 사건 등의 이유로 수감, 5·18특별법이 제정되어 뇌물수수혐의로 구속되었다.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이 군인 시절 결성을 주도한 하나회, 신군부 등은 정권의 보복으로 강제해산을 당했으며 문민정부 하에서 정치적 보복의 결과로 1996년 1월, 12·12사태와 5·18 광주사태 유혈 진압 재판 1심 공판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사형을 구형받았다가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에서 무기징역 및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은 비자금이 없었다. 비자금이 없었던 전두환 대통령으로서는 사실상 납부해야 할 금액이 없다. 2006년 친북좌익 정권에서 청문회를 열고 전두환 장군을 모독하자 전 장군은 특유의 배포로 29만원 밖에 없다는 유머를 발휘하기도 했다. 이는 과거 부패구태정치세력으로 척결의 대상이었던 구정치인들의 후신들이 반대로 전두환 대통령과 하나회, 신군부 등 개혁성향의 군인들을 부정부패 비리로 엮어넣으려는 것에 대한 무언의 항변이었으리라.
1997년 12월 22일 정권교체 후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한때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 아래서 '5공신당' 창당 등의 설이 퍼지면서 일해는 정치활동 재개 가능성 여부가 주목받기도 하였다. 이는 자칭 민주인사들의 집권으로 경제가 어려워진것에 대한 국민들의 바람이 낭설로 확산된 것이다. 2000년대 이전에 이런 전두환 대통령의 업적을 재평가하는 분위기가 나타나 전사모(전두환 전 대통령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등의 팬클럽이 출범하였으며 5·18 광주사태에 북한군 개입설이 주장되면서 전두환 대통령을 다시 평가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부 애국시민들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2002년 일해 선생은 안중근의사 여순순국유적 성역화 사업추진위원회 고문에 추대되었고, 2006년에는 전두환 선생의 대통령 재임기간의 치적을 기념하고자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황강변에 일해대공원이 개장되기도 하였다.
5.18 광주폭동 재평가
5.18 광주폭동을 비롯한 각종 폭동 사태를 전두환 장군이 직접 진압했다는 루머들이 확산되고 있다. 또한 폭도들이 광주폭동 등을 일으키기 전에 전두환이 계엄군을 보냈다는 논픽션에 가까운 루머들이 확산되고 있다.
1993년 이후 자칭 민주화를 가장한 구태정치세력에 의해 계엄군의 사령관이다, 광주시민을 일방적으로 학살하였다 등의 악성 정치공세와 루머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광주사태에 있어서 계엄군 사령관은 이학성 준장이었고 보안사령관 전두환과는 명령지휘계통이 달랐다. 광주시민을 일방적으로 학살하였다는 설의 어폐도 5월 17일 새벽 자칭 시민군들이 일어나 시청과 도청, 군부대와 광주시경찰서 등을 습격하여 군인과 경찰 등 29명을 사살하고 병기고를 습격하여 M16 등의 소총 등 총포류를 탈취하였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없다.
계엄군 투입 이전에 시민군이 관공서를 선제공격한 것이다. 시민군이 군인과 경찰을 사살하고 병기고를 탈취하자 계엄사령부는 그제서야 부랴부랴 계엄군사령부를 구성하여 광주에 주둔한 31사단과 32사단으로 계엄군을 조직하여 광주폭동 현장에 투입시켰다. 갑자기 조직되어 투입된 31사단 병력 중 일부는 보병학교 병력을 시민군으로 오인하여 상호 총기난사가 발생했다. 치밀한 계획하에 계엄군이 일방적으로 시민군을 학살하여 광주폭동이 확산됐다는 등 책임을 국군에게 몰아가려는 자칭 민주화 세력들의 주장은 허위인 것이다. 또한 광주사태에는 계엄군이 구성되기도 전에 유언비어가 확산되어 있었다. 계엄군이 구성되기도 채 전에 계엄군이 나타나 여고생의 가슴을 도려냈다, 여대생이 살해됐다, 임산부의 배를 갈랐다, 경상도 군인들이 씨를 말리러 온다는 등의 사실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유언비어가 널리 확산되었다.
5.18 광주폭동에 대한 전두환 책임론은 사실상 설득력이 부족하다. 광주폭동 당시 명분이 정당하였다면 유언비어가 확산될 리가 없다. 또한 전두환은 당시 집권자가 아니었음에도 시민들이 전두환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는 것도 수상하다. 그리고 제5공화국 8년이 부정한 일로 첨철된 것은 아니며, 주요 치적으로는 86년 서울아시아경기대회와 88 서울올림픽에 대한 확실한 준비 및 성공적 개최와 진행, 물가 안정, 저금리·저환율의 정책으로 민생을 안정시켰으며 살인자와 조직폭력배 등 민생침해사범에 대한 강력한 단속으로 국위를 안정시킨 바 있다.
진정한 애국 민주주의자 전두환 대통령! 전두환 대통령은 재임기간 중 북괴의 폭동 진압, 물가안정, 서울올림픽 유치, 무역흑자 등의 탁월한 업적을 남기고 지금도 일반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우리 국민들 곁에서 늘 함께하며 용기를 북돋워주고 계신다. 부인 이순자 여사와의 사이에서 아들 3남과 1녀를 두었고 상훈으로는 육군 복무시 수상한 화랑·충무·을지무공훈장, 동성훈장, 월남엽성무공훈장, 5.16 민족상 등을 수상 받았다.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겨례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잘사는 이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
1986년을 흑자원년으로 만드셨나니
안으로는 한결 더 국방을 튼튼히 하시고
밖으로는 외교와 교역의 순치를 온 세계에 넓히어
이나라의 국위를 모든 나라에 드날리셨나니
이나라 젊은이들의 체력을 길러서는
86아세안 게임을 열어 일본도 이기게 하고
또 88서울올림픽을 향해 늘 꾸준히 달리게 하시고
우리 좋은 문화능력은 옛것이건 새것이건
이나라와 세계에 떨치게 하시어
이겨레와 인류의 박수를 받고 있나니
이렇게 두루두루 나타나는 힘이여
이 힘으로 남북대결에서 우리는 주도권을 가지고
자유 민주 통일의 앞날을 믿게 되었고
1986년 가을 남북을 두루 살리기 위한
평화의 댐 건설을 발의하시어서는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육천만동포의 지지를 얻어셨나니
이나라가 통일하여 흥기할 발판을 이루시고
쉬임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이 민족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
이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3줄요약
1. 어려서는 창씨개명을 거부했고
2. 젊어서는 구국의 결단으로 나라를 지켰고
3. 늙어서는 끝없는 신념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남자
God Save The Queen !
<대긍모-대한민국 긍정파들의 모임>
< http://cafe.naver.com/rightofkorea >
[출처] 영웅 전두환 (대긍모-대한민국 긍정파들의 모임) |작성자 자우연
첫댓글 민족의 영웅중에 한분이신 전두환 전대통령각하!
육푼이 영사미 수사도 없이 간첩을 유공자로 수십억 보상하고 영웅을 감옥에 보낸 어중이 전교조의 간첩 교육으로 나라의 기둥이 썩어갑니다 정박아 김용옥 한홍구 김용민이 교수라니 사상 교육의 폐악 심각 해군이 해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