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10월 필리핀 북부 루손섬 앙헬레스 시의 자택에서 한인 사업가 지익주(당시 53) 씨를 납치, 살해한 주모자에게 내려졌던 무죄 선고가 2심 재판에서 뒤집혀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11일 필리핀 주재 한국 대사관에 따르면 지난달 말 마닐라 항소법원은 사건 당시 경찰청 마약단속국 팀장이었던 라파엘 둠라오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reclusion perpetua)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둠라오가 지씨 납치와 살인 등을 주도하고 공모한 혐의가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 유죄로 인정된다며 이렇게 판결했다.
또 둠라오의 하급자로 지씨를 직접 납치, 살해한 마약단속국 소속 경찰관 산타 이사벨과 국가수사청(NBI) 정보원인 제리 옴랑에 대해서는 원심처럼 무기징역을 유지했다.
재판부는 또 둠라오와 이사벨, 옴랑에 대해 지씨 유족에게 모두 35만 필리핀페소(약 828만 원)를 공동으로 손해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검찰은 주모자로 지목된 둠라오가 지난해 6월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자 "판사의 중대한 '재량권 남용'(abuse of discretion)이 있다"며 항소했다. 필리핀에서는 1심에서 무죄 판결이 나온 피고인을 상대로 판사의 중대한 재량권 남용이 있을 경우에만 항소가 인정되는데, 2심 재판부는 이를 이례적으로 인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8일 tvN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는 지씨 사건을 다루면서 '결정적인 증언을 해주면 죄를 사면하는' 필리핀 사법제도 때문에 둠라오가 무죄를 선고받았다고 전했는데 항소심은 이를 재판부의 재량권 남용으로 본 것이다.
아시아N에 따르면 한국대사관 관계자는 “필리핀에서는 통상 항소심 판결이 나오기까지 2년 이상 걸린다”면서 “1심 무죄 판결이 뒤집힌 것은 물론, 지난해 9월 항소 이후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2심 판결이 나온 것도 매우 이례적”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둠라오 측이 항소 재판부에 재심을 신청한 뒤 기각되면 대법원에 상고할 것으로 예상하면서 “그가 계속 사법적으로 단죄될 수 있도록 필리핀 관계 기관에 협조를 요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필리핀 당국은 아직 둠라오 신병을 확보하지 않은 상태이며, 이날이나 12일에 체포영장과 출국 금지 조치를 신청할 것으로 알려졌다.
지씨는 지난 2016년 10월 18일 오후 2시쯤 필리핀 북부 루손섬 앙헬레스시 자택에서 이사벨, 옴랑에 의해 납치됐다. 당시 이들은 지씨를 본인 차량에 강제로 태운 뒤 경찰청 마약단속국 주차장으로 끌고 가 살해했다. 그리고 이튿날 오전 11시쯤 근처 칼로오칸 시의 화장장에서 지씨 시신을 소각하고 유해를 화장실에 유기한 것으로 수사 결과 드러났다.
또 범죄 과정에서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누군가가 지씨가 납치돼 피살된 사실을 모르는 유족에게 몸값을 요구해 500만 필리핀페소(약 1억 1800만원)를 뜯어냈다.
이 사건은 현직 경찰들이 대낮에 직접 납치·살해를 저질렀으며 특히 경찰서 주차장에서 잔인하게 살해하고 화장한 뒤 화장실 변기에 버리는 참혹한 범행으로 필리핀 한인 사회는 물론 많은 현지인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2017년 1월 30일 로드리고 두테르테 당시 필리핀 대통령이 지씨의 아내 최경진씨를 만나 "깊은 유감과 함께 심심한 위로를 전하며 매우 미안하다"고 위로하는 한편 충분한 배상을 약속하기도 했다.
지씨의 아내 최씨는 연합뉴스에 “둠라오가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너무 기뻐 눈물이 났다”면서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다시 생겼다”고 심경을 밝혔다. 그는 “1심에서 둠라오 무죄 판결이 났을 때 큰 충격을 받아 거의 정신을 잃었다”면서 “1심 결과를 뒤집기 어렵다고 들어 크게 기대 안 했는데 너무나 다행”이라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남편이 살해된 이유 등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이 많다”면서 “둠라오가 유죄 판결을 받아 앞으로 윗선 관련 여부 등 남편이 숨진 이유에 대해 새롭게 밝혀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특히 두테르테 전 대통령이 약속한 국가 배상과 관련, 최씨는 “필리핀 공무원들이 한 짓이었으므로 필리핀 정부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다만 필리핀 정부에 소송을 내도 정부가 거부하면 방법이 없다고 하니 개인인 내가 풀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우리 정부가 도와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덧붙였다.
대사관 관계자는 “이상화 대사 등이 필리핀 법무부·검찰청 등 관계 기관들을 계속 접촉하면서 사법 정의 실현을 위해 판결이 너무 늦어지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또 “한인 사회도 추모식 개최 등을 통해 이 사건에 대한 여론과 관심을 지속하려 애썼다”면서 “사법 정의의 승리로서 이번 판결을 크게 환영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