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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월 30일
독일 초호화 여객선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소련 해군 잠수함에 격침
1945년 1월 30일 아침 동프러시안 가드
니아.초대형 유람선이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한 채 유유히 항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날 밤 발트해 한복판에 있었던 유람선
이 갑자기 바다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1937년 5월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의 진수
식이 열렸다.
나치 독일은 국민들의 심신 단련과 휴양
을 목적으로이 배를 제작했는데 당시 폭스
바겐의 비틀 자동차, 국민 라디오와 함께
나치 선전도구로 이용되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안락하고 쾌적한
해외여행을 위한 각종 운동시설,대형수영
장 등 다양한 위락시설들이마련 되어 있어
배 안에는 연일 사람들의 웃음 소리가 끊
이질 않았다.
그러나 1929년9월2차 세계대전이 발발
하고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더이상 출항
할 수 없게 되었다.빌헬름 구스틀로 프호
가 발트해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배 안에서는 신음소리와 절규만이 가득
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가 부상병을 나르는
병원선으로 그 목적이 달라졌기 때문이었
다.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독일군의
패색이 짙어졌고, 그동안 독일군의 만행
에 시달렸던소련군은 군인들 뿐만 아니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민간인 들까지 학
살했다.
이에 독일의 칼 되니츠 총통은 부상병과
민간인 200만명을 독일 서부의 안전한
곳에 이주시키기 위한 ‘한니발 작전’을 명
령했고 당시 여객선이나 화물선, 군함 등
모든 종류의 배가 이 작전에 총동원되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도 피난민 구출작전
에 투입되었다.전쟁의 공포에 떨었던 피난
민들에게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자신들의
목숨을 지켜줄 마지막 희망이자 구원의 배
였다.
당시 승무원이었던 하인츠 쉰의 증언에 따
르면 총 승객은10,582명이었고,그 중8,9
56명이 피난민이었으며, 대부분이 여성과
아이들이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에는 총 4명의 함장
이 타고 있었는데,당시 최고 연장자 였던
프리드리히 패터슨의 의견에 따라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발트해의 깊은 바다를 항
로로 삼았고, 항해등을 켠 채 운항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항해등을 켠 채로 달린 빌헬름 구스
틀로프호는 어두운 밤에도 너무 쉽게 눈에
띄였고결국 출항한지 하루도 못되어 소련
잠수함 S-13호에 의해 발견되었다.
S-13호는 4발의 어뢰를 발사시켰고 그
중 3발이 명중했다.어뢰를 맞은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아비규환이 되었고 어뢰
공격을 당한 후 1시간 10여분 만에 침몰
했다.
배에 타고있던 피난민들은 어뢰에 직접
적인 충격으로 사망하거나 발트의 차가운
바닷물에 빠져 저체온증으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100,000여명이 넘는 피난민 중
9,343명이 목숨을 잃었고,이는 최대 해상
사고로 알려진 타이타닉호 침몰 사건의
사망자보다 무려 6배나 많았다.
전쟁이 끝난 후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의
비극은 침묵 속에 묻히고 말았다.그리고
사고 발생 57년 후인 2002년 독일의 대표
작가 귄터 그라스의 ‘게걸음으로 가다’가
발표되면서그동안 금기시 되어오던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사건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 소설이 아니었다면 빌헬름 구스틀로
프호 침몰 사건은 영원히 수장되었을 수도
있었던 것이었다.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
려 안타깝게 죽어갔던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의 피난민들은 지금도 그 비극을 간직한
채북위 55도 7분, 동경 17도 41분, 수심
60m 해역에 조용히 잠들어 있다.
▶2011년 김재순 前 성심여대 총장 별세
▶2010년 국악학 선구자 이혜구 선생 별세
▶2010년 길창덕 화백 별세
2010년 1월 30일 오후 1시쯤 한국 명랑만화의 뿌리이자 평생을 명랑만화 작가로 살았던 ‘꺼벙이’ 와 ‘순악질 여사’ 의 원로만화가 길창덕(吉昌悳·81) 화백이 노환으로 숨졌다.
1930년 1월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난 그는 6·25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의 청소년들에게 꿈과 웃음을 선물한 한국 명랑만화의 개척자였다. ‘허서방’(1955) ‘홀쭉이와 뚱뚱이’(1959) ‘꼴뚜기 영감’(1960) ‘재동이’(1966) ‘꺼벙이’(1970) ‘순악질 여사’(1970) 등 고유의 캐릭터와 작품을 통해 전후(戰後) 다양한 세대를 가로지르며 웃음과 희망을 줬다. 그의 후배이자 제자인 ‘로봇찌빠’ 의 신문수(71) 화백은 ‘명랑만화’ 라는 장르를 개척해서 반석에 올려놓은 분이라고 고인을 추모했다. ‘맹꽁이 서당’ 의 윤승운(67), ‘별똥 탐험대’ 의 박수동(69), ‘철인 캉타우’ 의 이정문(69) 등의 작가들 모두 직·간접적으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
1980년대 잠시 신문 시사만화를 그린 적도 있었지만 곧 명랑만화로 ‘복귀’ 했다. 공식적인 데뷔는 1955년 잡지 ‘야담과 실화’ 에 ‘허서방’ 을 연재하면서부터였지만, 실제로 그가 만화가로 인정받은 것은 열네 살 때다. 평양과 묘향산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평안북도 정주 조일보통학교 고등과 2학년생들은 기행문을 써내라는 지시를 받았고, ‘소년 길창덕’ 은 엉뚱하게도 그 숙제를 파노라마 만화 형식으로 제출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화를 냈던 선생님은 작품을 보고 나서 감탄사를 연발했고, 이후 그를 ‘만화가’ 로 공식 인정했다. 그의 캐릭터들은 얼핏 단순한 선(線)으로 대강 그린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보이지만, 정제된 소박함과 명쾌함으로 세대를 뛰어넘는 사랑을 받았다.
1970년대 땜통자국 머리에 콧물을 흘리던 ‘꺼벙이’ 는 요즘 표현으로 하면 ‘국민 남동생’ 이었고, 일자 눈썹의 순악질 여사는 억척스럽고 강인한 ‘대한민국 아줌마’ 였다.
폐암진단과 수술을 받은 뒤 1997년 12월 이후 모든 연재를 중단했다. 한국 만화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2002년 대한민국 출판만화대상을 받았고, 2003년 보관문화훈장, 2006년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 어워드대상을 받았다. 만화가 김수정씨는 한국만화의 거대한 뿌리가 가셨다고 안타까워했다.
▶2009년 북한 "남북 기본합의서 NLL조항 폐기"
2009년 1월 30일 북한이 한국 정부가 남북관계를 긴장관계로 몰아가고 있다며 한국 정부와의 군사, 정치적 합의를 모두 무효화 한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는 30일 중앙통신(KCNA)통해 남북간 "정치군사적 대결 상태 해소와 관련한 모든 합의사항들"에 대한 무효화를 일방 선언하고, 남북기본합의서와 부속합의서에 있는 "서해 해상군사경계선에 관한 조항들"을 폐기한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 17일 북한국 총참모부 대변인이 대남전면대결을 선언한 뒤 2주만의 일이다.
조평통은 "북남 당국 사이에 지난 시기 채택된 합의들에는 서로의 사상과 제도존중 문제, 비방중상 중지 문제, 무력충돌 방지 문제를 비롯한 정치군사적 대결을 해소할 데 대한 문제들이 반영돼 있다"며 "그러나 현실은 북남 합의사항의 그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조평통은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해 미국 방문과정에서 말했던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의 통일' 발언과 대북전단지 살포, 급변사태론, 선제공격론 등을 거론하며 "북남합의사항들을 무참히 파괴, 유린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 측은 “오늘 성명은 지난 17일 북한 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 성명 등 최근 일련의 대남 강경 언동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면서 “상황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대응책을 논의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블룸버그 통신, AFP를 비롯한 외신들도 "북한이 남한과의 군사, 정치적 합의에 대해 모두 무효화 선언을 했다"는 긴급뉴스를 전했다.
▶2005년 이라크의 첫 자유 총선거
▶2000년 에밀레 박물관장 조자용씨 별세
▶2000년 케냐항공 소속 에어버스 A310
기 아비장 이륙 후 바다추락. 169명 사망
▶1999년 강원 동계아시안게임 개막
제4회 동계아시안게임이 1999년 1월 30일 오후 용평 실내빙상경기장에서 화려한 막을 올렸다. 사진은 29일 벌어진 개회식 식후공연 ‘하늘 땅 사람’ 의 리허설 장면.
제4회 강원 동계아시안게임이 30일 오후 3시 용평 실내링크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개회선언으로 화려한 막을 올렸다.
‘영원한 우정, 빛나는 아시아’ 를 다짐하는 강원동계아시안게임은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41개회원국 중 23개국에서 807명의 선수 임원이 참가해 2월6일까지 용평과 춘천, 강릉 등 강원도 3개 지역에서 8일동안 계속된다. 7개 종목 43개 세부종목의 경기가 열릴 이번대회의 개막식은 간단한 환영 마스게임에 이어 네팔을 선두로 참가국 선수단이 한글 가나다순에 의해 입장함으로써 시작됐다.
개최국 한국은 노랑, 빨강, 은색의 원색 유니폼을 입고 심의식 기수의 선도 아래 관례에 따라 마지막으로 들어왔다.
김대중 대통령의 개회 선언에 이어 태백산 천제단에서 태양열로 채화, 강원도내 943㎞를 달려온 성화가 최종주자인 유선희(전 빙상국가대표)에 의해 점화돼 성화대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1996년 아프리카 잠비아주재 북한대사관 현성일 3등서기관 서울 도착
▶1994년 국산주전산기 III 개발 완료
▶1992년 이재형 前 국회의장 별세
▶1992년 KT(구 한국통신), 국제영상
회의 시스템 서비스 발표
▶1992년 북한,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안전협정 서명 및 핵사찰 실시
▶1991년 미국의 물리학자 바딘 사망 -
바딘 [Bardeen, John, 1908.5.23~1991.1.30]
존 바딘 (John Bardeen, 1908년 5월 23일 – 1991년 1월 30일)은 미국의 물리학자이다. 노벨 물리학상을 두 번 받은 유일한 사람이다. 1956년 윌리엄 쇼클리, 월터 브래튼과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공로로, 1972년 레온 쿠퍼, 로버트 슈리퍼와 초전도 현상을 설명한 BCS이론으로 수상했다.
위스콘신주 매디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해부학 교수, 어머니는 교육자 경험이 있었다. 바딘은 일찍부터 수학에 재능을 나타냈다. 1923년에 위스콘신 대학에 입학하여 1928년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후 프린스턴대학등에서 수학, 물리학을 공부했다. 1938년부터 미네소타 대학 조교수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하자 해군무기연구소에서 4년간 근무하였다.
1945년 10월부터 벨 연구소에 들어가 1948년 쇼클리 등과 트랜지스터를 개발해낸다. 1956년 그 공로로 첫번째 노벨상을 받았다. 1951년 쇼클리와의 관계가 악회되어 일리노이 대학 교수가 된다. 1957년 레온 쿠퍼 등과 초전도 표준이론인 BCS 이론을 유도해낸다. 그 공로로 1972년 두번째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다.
▶ 1991년 1월 30일.
김부남 사건이 발생하다.
김부남이 9세 때 자신을 성폭행을 했던 송백권을 식칼로 살해했던 사건.
김부남 사건, 김부남 살인사건은 어릴적 당한 성폭행의 상처가 얼마나 비참한 복수를 낳는지 보여주는 반면교사적인 사건이며 한국의 성폭력 피해자보호법의 필요성을 알려주는 사건이다.
1991년 1월 30일 당시 30세 여성인 김부남은 자신이 어릴적 성폭행을 한 범인 송백권(55세)를 살해한 사건이다.
김부남은 9살 때 옆집 아저씨였던 송백권에게 강간을 당하게 되는데 이러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성인이 된 김부남은 좋은 사람과 만나 결혼을 하게 되는데 성폭행을 당한 후유증 때문에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하지 못하였다. 김부남은 송백권을 고소하려 하였으나 당시 친고죄 고소기간은 6개월이며 증거가 있다 하더라도 공소시효 또한 지난 상태이다.
이러한 결과를 듣고 김부남은 자발적으로 송씨를 처벌하기로 굳게다짐하였고 송백권을 찾아가 식칼로 그를 여러차례 찔러 현장에서 검거되었다. 그의 아내가 김부남의 칼을 뺏었지만 이미 송백권은 피범벅이 되었고 병원이라는 말을 남긴채 숨이 멎었다.
1심 재판에서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았고 1년 7개월은 공주 치료 감호소에서 치료를 받은후 석방되었다. 김부남은 공판에서 "나는 짐승을 죽였으며 사람을 죽인것이 아니다"라며 진술하였다.
이후 비슷한 사건인 김보은 김진관 사건과 같이 성폭력 특별법개정에 대해 영향을 주었다.
▶1972년 초전도이론 개발으로 노벨상 수상
▶1988년 소설가 소영(素影) 박화성 별세
▶1984년 일본, 세계최초의 256KS램 개발 성공
▶1980년 북한, 총리회담 예비접촉 수락
▶1975년 독일 작곡가 보리스 블라허 사망
▶1974년 한일대륙붕협정 체결
한일대륙붕협정이 1974년 1월 30일 체결됐다. 체결목적은 제주도 동남방 약 8만4천 평방km의 대륙붕을 공동개발하기 위해서였다. 1970년 11월부터 대륙붕문제를 둘러싼 일본과의 교섭이 시작된 이래 1차의 외무장관회담, 4차의 실무자회의와 5차의 실무소위원회를 거쳐 1973년 7월 4일 협정문안에 양측이 합의함으로써 이날 체결됐다.
협상과정에서 양국은 조광료(租鑛料)및 세금 납부방식과 공동개발회사의 법규적용문제 등으로 심각한 대립을 보였으나 1973년 4월16일 김용식 외무장관과 오히라 일본 외무장관이 이를 정치적으로 해결함으로써 협상이 타결되었다. 한일대륙붕협정 비준서는 1978년 6월 22일 교환됐다. 협정체결로부터 4년5개월이나 늦어진 것은 일본의회가 협정발효에 필요한 비준을 지연시켰기 때문이었다.
▶1972년 ‘피의 일요일’, 북아일랜드 사태 격화
1972년 1월 30일 영국의 공수부대가 시민권 쟁취를 위한 가두행진을 벌이던 아일랜드 구교도 시민 13명을 사살하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 테러와 보복이 난무하는 북아일랜드 사태를 한층 격화시켰다.
1972년 1월 30일, 북아일랜드 런던데리 시내에서 구교도 시위대들이 친 바리케이트를 영국군들이 돌파하고 있다
북아일랜드 사태는 1921년 아일랜드 공화국이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하면서 북아일랜드와 분리되자 북아일랜드 구교도들이 독립을 요구하며 IRA라는 단체를 조직한 것이 시초가 된다. 이들은 영국 본토에서 이주해 정착한 신교도가 정부를 장악하고 소수민으로 전락하게 된 구교도에 대한 차별정책에 항거, 196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폭력으로 치달았다.
IRA는 영국과 영국계 신교도에 대한 무차별 폭탄테러에 들어갔다. 오랫동안의 협상 끝에 이들은 1998년 4월 신·구교계 모든 정파가 모인 가운데 북아일랜드 평화협상을 타결, 3천5백여 명의 목숨을 빼앗은 30년간의 피의 대결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평화협상 타결에도 불구하고 1998년 8월 북아일랜드 오마시에서 또 IRA의 강경분파인 ‘리얼(Real) IRA’ 가 다시 폭탄테러를 저질러 28명이 죽는 등 2백여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
▶1971년 한국-피지 국교 수립
▶1969년 이희승 등 140명, 한글전용
반대 성명
▶1967년 조달기금법안 통과, 한국외환은행 발족
▶1964년 베트남 군부쿠데타(2차)로 웬칸 장군 집권
▶1964년 미국 달 위성 레인저 6호 발사 성공
▶1959년 오스트리아의 자동차 공학자 포르셰 사망1
▶959년 일본 외상, 국무회의에서 재일교포 북송을 발표
▶1958년 독일의 항공기 설계자 하인켈 사망
▶1958년 김포공항 국제공항으로 정식 지정
▶1954년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발족
▶1953년 부산 국제시장 대화재
1953년 1월 30일 오후 7시40분, 해방 후 가장 큰 화재가 부산 국제시장에서 발생했다. 화재 원인은 신창동의 요리집 춘양원에서 손님과 종업원이 석유등잔을 발로 쳐 넘어뜨리면서 불이 순식간에 옮겨 붙어 이 지역 일대인 신창동, 부평동 등 상가 1천여호를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로 만들었다. 부족한 물과 장비부족도 대형화재의 한 원인이었다.
부산국제시장 화재현장
부산 국제시장의 화재는 해방 후 발생한 화재사건 중 가장 손실이 컸을 뿐만 아니라, 부산시민의 경제생활면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날 화재로 이재민 2만 2천명에 가옥 4천2백60동이 전소해 무려 5백억원이란 거액의 피해를 냈다. 화재는 부산시민의 경제생활을 더욱 피폐하게 했다.
▶1952년 국제전기통신연합(ITU) 가입
▶1951년 폴크스바겐 원형의 설계자이자 포르셰의 창업자 페르디난트 포르셰 사망
▶1949년 중국군 북경 입성
▶1948년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 초판 간행
▶1948년 한국, 첫 동계올림픽(제5회 스위스 생모리츠 동계올림픽) 참가
▶1948년 마하트마 간디 피살
간디 [Gandhi, Mohandas Karamchand, 1869.10.2~1948.1.30]
인도의 사상가 마하트마 간디가 1948년 1월 30일 인도 뉴델리에서 반 이슬람 극우파 청년이 쏜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79세였다. 1947년 7월 인도의 분할독립으로 힌두.이슬람의 대립소동이 벌어져 이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벵갈에 이어 뉴델리를 방문중이었다.
1869년 포르반다르에서 출생한 간디는 1887년 영국으로 유학가 법률을 배운 후 1891년 귀국해 변호사로 개업했다. 1893년 소송사건을 의뢰받아 남아프리카로 건너갔다. 이 남아프리카 여행에서 간디는 인도사람의 지위와 인간적인 권리를 보호하고자 결심하고 차별받는 인도인을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1915년 귀국한 간디는 인도국민회의파를 지도하며 납세거부, 취업거부, 상품불매 등을 통한 비폭력저항운동을 실시했다. 1924년부터는 국민회의파의 의장으로 있으면서 인도인이 자력에 의한 농촌구제에 나설 것을 역설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기도 했으며 1930년에는 소금세 신설반대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인도의 사상가이자 민족 운동 지도자인 간디는 인종 차별 압박에 대한 투쟁, 자기 실현을 위한 인격 수양, 무상해 이 세가지를 가르치며 진리 구현을 평생 실천했다. 1922년 12월 인도의 문호 타고르로부터 마하트마(Mahatma, 위대한 영혼)라는 칭송을 받은 이래로 마하트마 간디로 불린 간디는 그의 평화사상뿐만 아니라 모범적인 실천을 통해서도 인도인들만이 아니라 20세기 인류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948년 미국 비행기 발명가 오빌 라이트 사망
▶1939년 조선일보, 조선 여성백과사전
`청규박물지`의 첫 발견을 보도
▶1933년 히틀러 독일 수상에 취임
힌덴부르크 독일 대통령이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를 수상에 임명했다. 히틀러가 수상이 되기까지에는 복잡한 정쟁이 있었다. 나치당은 1932년 11월의 독일 총선에서도 7월 총선처럼 여전히 제1당이었지만 61개 의석과 200만표를 잃는 나치당은 사상 처음으로 후퇴를 경험했다.
1932년 12월 파펜 수상을 실각시키고 자신이 수상이 된 국방장관 슈라이체는 선거결과를 이용, 히틀러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공작했지만 파펜 전수상과 히틀러가 비밀회동을 해 히틀러를 수상에, 파펜을 부수상에 임명한다는 연립내각 수립에 합의했다. 파펜과 히틀러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설득, 슈라이체를 수상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히틀러를 연립 내각 수상에 임명하도록 했다.
수상직에 오른 히틀러는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조작해 공산당과 사민당을 불법화시키고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며 1당 독재체제를 만들어 갔다.
▶1927년 스웨덴 올로프 팔메 수상 출생
▶1924년 제1차 국공합작(중국 국민당 제1회 전국대표자대회에서 집행부에 공산
당원이 선출)
▶1919년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출생
▶1913년 발칸동맹, 대 터키 강화 담판 결렬
▶1909년 미국-카나다,
나이아가라 폭포 공동보호협정 체결
▶1902년 제1차 영일동맹 조인
영일동맹이 1902년 1월 30일 조인됐다. 영일동맹협약은 근대 일본이 세계의 대국과 체결한 최초의 군사동맹이었다. 이 군사동맹의 배경에는 양국 모두 19세기말 동아시아지역을 둘러싼 제정 러시아와의 대립에 있었다. 특히 일본으로서는 의화단사건 이후 만주에 계속 잔류하고 있는 러시아에 항의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삽화가 첨부된 런던신문`에 영일동맹을 알리는 `극동(極東)의 전운(戰雲)`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조약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영일양국이 청국과 한국에 각각 갖고 있는 권익이 제3국에 의해 침략받거나 청국과 한국에서 소요가 일어나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경우 이를 서로 승인한다. 2. 영일양국 중 어느 한 쪽이 제3국과 전쟁을 할 경우 다른 한쪽은 엄정중립을 지킨다. 3. 전쟁이 2개국 이상을 상대로 치러질 경우 다른 한쪽은 바로 전쟁에 참가한다.
▶1902년 시베리아철도
(블라디보스톡 - 하바로스크 구간) 개통
▶1899년 대한천일은행(현 상업은행) 창립
▶1895년 러시아 황제 전제정치 선언
▶1882년 미국 26대 대통령 데오도르 루즈벨트 출생
▶1878년 러시아,터키 휴전조약 체결
▶1781년 독일 시인 샤미소 출생
▶1649년 영국 국왕 찰스1세 처형
▶1637년 병자호란때 인조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항복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에 피신해 있던 인조와 왕세자가 1637년 1월 30일 성문을 열고 나와 삼전도에 마련된 수항단에서 청태종 홍타시에게 항복했다. 근세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조선의 치욕이었다.
병자호란 직후인 1639년 삼전도(현재의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 세워진 청 태종 공덕비
조선은 명나라와의 우호관계를 중단하고 청에 대해 신하의 예를 지킨다는 항복조건에 따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두왕자를 인질로 보내고, 척화파인 홍익한, 오달제, 윤집 등 3학사를 청나라로 보내야 했다. 항복 2년뒤인 1639년 청에서는 삼전도에 청태종의 송덕비를 강제로 세웠으며 조선은 사실상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병자호란은 9년 전 벌어진 정묘호란때 조선과 후금(청)이 형제지국이 된다는 화친을 체결했음에도 청나라가 이를 무시하고 군신의 예로 자신들을 섬겨야 한다는 무리한 요구를 조선에 강요하자, 조선은 도리상 두 임금을 모실 수 없다고 완강히 거부한데서 비롯됐다. 군신의 예를 조선이 거부하자 청태종 홍타시는 즉위년인 1636년 12월 자신이 직접 12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 친정에 나섰다. 인조는 강화도로 몽진하려 했으나 청군이 이미 도성에 나타났다는 정보에 따라 강화도를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1만 3000여 명의 군사와 50여 일치의 식량으로 근 40여 일을 버텼지만 강화도의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전의를 상실하고 항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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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PVMHXfMGDoU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 솦트리종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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