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간병인
김현철
가을이 홀쭉해지면 실어증에 빠집니다
심장을 보관할 뿔이 없는 난,
출구가 될 수 없어요
연신 코 끝을 자극하는 초유를 만들지도 못하죠
나는 형체 없이 투명하지만
가끔은
사막 한 가운데 서면 소리로 체적이 그려집니다
파마머리처럼 풍성한 뿔과 신체 곳곳을 장식하는 파란들
바람의 어깨 위 견장이 늠름해요
밤이 잠긴 피라미드의 발목에서
숨,
하나 하나를 닦아 냅니다
이럴 때면 고민이 돼요
난
계절의 손발을 닦아 주는 간병인이었을까
헝클어진 뿔을 손질하는 손바닥에 손금이 없어요
햇빛에 데여 가렵다고 불평하는 스핑크스
입술 주위를 팔랑팔랑 긁어 줍니다
노란 모래각질이 벌레처럼 쏟아져요
바짝 마른 나일강변을 따라 계절의 주검들이 미이라처럼 서 있어요
헝클어진 뿔들과 색깔바랜 견장
살랑살랑 흘러내린 모래알까지 모두 내려놓은 민몸,
앙상한 가슴의 전라全裸가 빛나요
이럴 땐 오아시스를 겨드랑이에 끼고서
느린 산책 어때요?
떨어져 나간 손가락을 봉합하는 상상을 해요
봄이 오면,
어부의 비늘
제주도 남쪽 먼 바다에서 강한 비를 동반한 A급 태풍이 한반도로 올라오고 있다는 뉴스속보가 티비에 나옵니다. 여수 국동항 인근, 거칠어진 바람과 굵어지는 빗발 속에서 우비를 입은 채 마이크를 잡고 현장을 중계하는 기자의 입놀림이 급박합니다.
빗물 잔뜩 묻힌 칼바람은 여린 나뭇가지의 목을 치기 적당합니다. 대바늘처럼 꽂히는 장맛비에 꽃잎들 하나·둘·셋 속절없이 낙화합니다. 꽃잎들은 비늘이 되어 울적한 바다에 눈발처럼 뿌려집니다.
온 천지가 비늘 비늘 비늘무덤. 빗발에 구멍 난 남해의 옆구리에서 축축한 소리도 포구를 끄집어 냅니다. 간이 방파제 구석에는 어로작업을 끝낸 자망이 풀어헤친 머리칼처럼 너부러져 있습니다.
며칠 전 서울로 간 트럭 물칸에 실린 물고기의 비늘이 우두둑 그물들 사이로 떨어집니다. 어선의 항해술과 투망 기술 그물질의 고단함까지··· 몇 권 책으로도 모두 표현할 수 없는 어부의 생애는, 비늘 무덤 곁 비석에 단 한 줄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향일암을 넘어오던 새벽 초승달이 어둠에 길을 잃고 목이 날아간 가지들의 밑동에 주저 앉습니다. 한기 밴 돌산의 갯바람은 어부의 찰갑을 으스스하게 흔듭니다. 물 속 생물에게 전해줄 안부 몇 장 들고 육지 사람들은 잘 가지 않는 난바다로 향해, 어부는 중단할 수 없는 생의 한가운데로 달려갑니다.
손죽열도의 작은 애기섬 끝 수평선으로 수중 암초의 생리혈이 온 바다를 벌겋게 물들입니다. 어둠을 자근자근 씹어 먹는 붉은 물살은 어부가 좋아하는 해창*입니다. 본격적인 어로작업 신호입니다. 수많은 비늘을 모두 내어 준 앙상한 우듬지가 향일암을 비추는 달 그림자 속으로 삽입됩니다.
새벽 마파람을 둘러 입은 검은 저승사자가 손죽열도의 파도를 위장처럼 몸에 바르고 어부의 생을 짊어진 바람의 어깨에 올라탑니다. 그리곤 폭우와 강풍에 실어서 어부의 비늘을 하늘로 데려갑니다. 캄캄한 밤하늘, 어부는 그 곳에서도 다시 그물을 펼칩니다. 집에서 기다리는 식구들을 위해 싱싱한 활活별들로 만선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뉴스 속보입니다. 어젯밤 어로 작업 중에 실종된 어부의 수색이 한참 동안 계속되고 있다는 소식이 티비에 나옵니다. 우비를 입은 채 마이크를 잡고 거센 비바람 속에서 현장을 중계하는 기자 목소리가 긴박합니다. 손죽열도 근처에서 실종된 어부의 시신을 아직 찾지 못했나 봅니다.
남해의 중심에서 한 줌 흐트러짐 없는 꼿꼿한 비석에 한 줄로도 기록되지 않을 어부의 생애가 깜빡입니다. 거친 비바람
찰갑의 비늘이 한 점 한 점
*
해창 : 낚시인들이 쓰는 말. 일출 1시간전에서 일출까지, 일몰 1시간 전에서 일몰 때까지를 말함
노래 가사보다 형편없는, 나의 詩들을 위하여
주말에 고향으로 가는 길이었다.
새벽 3시에 승용차를 몰고 운전 중이었다. 라디오를 켜니 DJ도 없이 음악만 연속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를 사랑하고도 늘 외로운 나는 가눌 수 없는 슬픔에 목이 메고 …… (중략) 너를 처음 보았던 그 느낌 그대로 내 가슴 속에 머물길 원했었지만 서로 다른 사랑을 꿈꾸었었기에 난 너의 마음 가까이 갈 수 없었네.
저 산 하늘 노을은 항상 나의 창에 붉은 입술을 부딪쳐서 검게 멍들고 멀어져간 그대와 나의 슬픈 사랑은 초라한 모습 감추며 돌아서는데 ……’
학창 시절, 여자 친구가 대학로 노래방에서 많이 불렀었던 노래가 흘러나왔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내 귀에서만은 편안한 가락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한참 노래 가사를 음미하는 동안 불현듯 다음과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났다.
아- 노래에도 시참詩讖이 있구나…
그때 그 소녀는 그 노랫말이 먼 훗날 자기 운명이 될 줄도 모르고 그 노래를 항상 18번으로 불렀다. 시인에게도 자신의 미래를 본인의 시에 그려 넣는 시참이 있듯이, 그 시절에 ‘너를 사랑하고도’라는 노래를 좋아했던 내 어린 여자 친구도 어쩌면 본인의 운명을 노래로 불렀던 시참을 의미한 게 아니었나… 생각이 들었다.
가왕 조용필의 시대에 양인자라는 걸출한 작사가가 있었다. 그녀도 한 때는 신춘문예 등단을 꿈꾸는 시인 지망생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시인 등단의 꿈을 포기하면서 본격적인 작사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곤 당대 최고의 가수였던 조용필의 히트곡 대부분을 작사했다. ‘그 겨울의 찻집’ ‘바람이 전하는 말’ ‘킬리만자로의 표범’ 등 양인자의 노래를 듣노라면 거의 시 한 편을 읽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또한 김국환의 ‘타타타’와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 등도 그녀의 전성기 시절 대표 작품이다. 특히 양인자는 ‘알고 싶어요.’을 작사하고 그 노래를 작곡한 김희갑과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을 보면, 노래 가사에도 시참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시를 쓰면 시인이고 노랫가락을 쓰면 작사가지만 사실 그 출발점은 같다. 사서삼경의 하나인 시경詩經이란 것이, 원래 중국 고전의 노동요와 민요 가락을 집대성해서 만든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시는 운문이다. 시는 노래처럼 가락을 타고 놀아야 한다. 지금은 산문시가 현대시의 주류를 차지하는 트렌드를 보이는 듯하지만, 누가 뭐래도 시의 출발점이 시경이듯이 시는 운율을 타고나야 시의 생명력을 다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나도 위와 같은 생각을 늘 하면서도, 굳이 조금 더 있어 보이는 체하려는 측면에서 난해하고 해석이 어려운 산문시를 곧잘 쓰곤 한다. 그래야 시인으로서 고상하고도 품격을 논할 자격이 있어 보이는 것 같기도 해서인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 부쩍 노랫말에 신경이 많이 쓰이고 관심이 많이 간다. 어떤 노래는 내가 아무리 써보려고 해도 잘 안되는 훌륭한 감성을 지닌 가사가 있다. 그런 노래를 듣다 보면 시인인 나보다 여느 작사자가 더 훌륭한 시인이 아닌가 싶어 깜짝 놀라기도 한다.
동시에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자학에 빠지기도 한다.
‘나는 아직도 시인의 발꿈치도 못 따라 가나 보다.’
‘노래 가사보다 못한 시를, 시라고 쓰는 자신이 부끄럽고 초라하다.’
시의 출발은 노래다.
노래의 생명력은 가락이다.
그래서 시의 생명은 시구의 감성과 아름다운 운율이다.
차가운 북서풍이 불어오는
또 한 번의 내면이 시린 겨울을 맞으면서,
시인으로서의
기본적인 자세와 자질에 대해
다시 한번 되짚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