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병원 생활
고윤아 님| 간호사
간호학과 졸업 후 종합 병원 중환자실에서 3년간 일했다 어떻게든 버터 보자고 다짐했지만, 말을 듣지 않는 몸 상태가 발목을 붙잡았다 여기저기 아픈 게 고된 노동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어느날 혈변을 스무 번 넘게 쏟고 나서야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입원해 여러 검사를 받은 끝에 크론병 진단을 받았다. 근무하던 곳에서 동료들의 간호를 받으며. 짐작은 하고 있던 터라 크게 숨 한 번 내쉬고 친구 효선이에게 전화했다. ''나 크론병이래." 전화기 너머 효선이가 엉엉 울었다. 그녀의 울음은 내가 앞으로 결어갈 길이 험난함을 예고했다.
크론병은 희귀 난치성 질환이다. 입에서 항문까지 소화관 전체에 걸쳐 어느 부위에서든 발생할 수 있는 만성 염증성 장 질환으로 설사, 복통. 체중감소부터 관절염, 포도막염. 신장 결석 등 장관 외 증상도 자주 나타난다. 학교 에서 배운 이 딱딱하고 차가운 내용이 내 이야기였다니. 앞으로 닥칠 끊임없는 일들에 단단히 각오하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간호사인데 뭐가 걱정이야." 효선이를 안심시키고 통화를 마쳤지만. 눈앞이 캄캄하고 믿기지 않았다. 아니, 믿기 싫었다. 오진이길 바라는 실낱 같은 희망을 안고 서울에 있는 다른 병원으로 향했다. '크론병 맞습니다." 진료실로 들어가 앉자마자 의사가 말했다. 재차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정신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간호사임을 밝히니 그는 제주와 서울을 오가기보단 가까운 병원에서 치료할 것을 권했다.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진료실을 나와 제주로 돌아오는 길이 어땠는지, 그사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을 지우고 싶었던 것 같다. 눈물이 쏟아지거나 우울하진 않았다. 오히려 누구보다 잘 이겨 낼 거라는 자신감으로 무장했다. 자만이었다. 나는 간호사인지 환자인지 모를 경계에서 이리저리 휘청거리며 상처받고 좌절했다. 하루 열 차례 이상 반복되는 설사와 견디기 힘든 복통 때문에 외출은 자연스레 피하게 됐다. 못 먹는 음식이 점점 많아지면서 사람들과의 만남은 서서히 줄어들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직장생활이었다. 휴식을 충분히 취해도 밤낮이 바뀐 교대 근무는 버터 낼 수 없었다. 일이 끝난 뒤 곧장 병실로 퇴근하기도 했다. 그런 나를 동료들은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간호사실에서 환자에게 투여할 약을 준비하며 이야기 나누던 동료에게 팔을 내밀어 주사를 맛는 상황, 간호하던 환자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으며 병실로 들어가는 내 모습이 낯설고 서글펐다.
퇴원 후에도 한 달에 몇 번씩 응급실에 드나들었다. 입원을 연중행사처럼 반복하게 한 15년간의 투병 생활은 한 인간을 점점 무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오늘까지 내 삶을 지탱해 준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가족, 친구, 동료, 그리고 든든한 지원군인 의료진이다. 고통스러울 때마다 친구들에게는 따듯한 위로를, 가족들에겐 힘찬 웅원을 받았다. 동료들은 격려하며 나의 빈자리를 채위줬고, 의료진은 끔찍한 통중을 덜어 주려 최선을 다했다. 한 환자가 질병에서 회복해 사회로 복귀하기 위해선 많은 이의 돌봄과 관심이 필요하다. 처음엔 누군가를 돌봐야 하는 이가 돌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어색하고 미안했다. 그러나 이제는 힘들 때 잠시 기대어 쉬고 충전이 되면 벌떡 일어나 내 몫을 한다. 우리는 아플 수도, 지쳐 기댈 수도 있다. 환자로서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누군가와 함께 가는 일. 간호사로서 타인과 나를 보살피며 살아가는 일. 이것이 지금 나의 최선이다.
환자가 된 뒤 오히려 감사한 일이 생겼다. 예전보다 타인의 고통을 빠르게 알아차리고 그 고통이 사라질 수 있도록 더 노력한다는 점이다. 나는 오늘도 환자와 간호사. 그 중간 어디쯤에 있다. 앞으로도 후회 없이 하루하루를 살며 스스로를 지키고 아픈 이들을 책임질 것이다. 모든 이가 건강하고 행복한 날을 보내길 바라며.
과거의 어려움을 딛고 지금. 여기에서 당당히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매달 다른 필자가 용기 내 꺼내 놓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