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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2. 묵상글 ( 주님 봉헌 축일. - 완전한 사랑을 향하여, - 빚의 탕감(용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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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2. 주님 봉헌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2.02 04:50
- 완전한 사랑(Perfectae Caritatis)을 향하여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주님의 봉헌 축일에 왜 교회는 초를 봉헌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주님은 초처럼 세상의 빛이시니
주님께서 봉헌되신 것처럼 초도 봉헌되는 것이고
우리도 주님과 초처럼 봉헌되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부모에 의해 봉헌되고 세상의 빛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스스로 봉헌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초처럼 자신을 태움으로써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그런데 세상의 빛이 되는 것에 관해 전에 많이 생각했던 것이 생각나면서
그러나 이제는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뭐가 되려고 해서 되기보다 초처럼 저를 태우다 보면 빛이 되겠지요.
사랑하면 되지 빛이 되려는 것은 유명인 되는 것처럼 욕심일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랑하다 보면 빛도 되는 것입니다.
불을 피우고 태우면 불에서 빛도 나오고 열도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수도 생활을 이만큼 하고 나서야
축성생활자들의 날인 오늘 이런 성찰과 반성을 합니다.
그런데 불을 피우고 태워 열과 빛을 내되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정화의 불이 먼저 타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말라키서의 말씀처럼 제련사와 정련사이신 주님께서
붙여주신 불로 시작되고 지속돼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때 보면 사랑한다는 수도자에게 화가 더 많습니다.
사랑의 불이어야 하는데 분노의 화가 더 많은 것입니다.
우리말 사전에 화를 찾아보면 화(火)라고 나오고, 그 뜻풀이를 보면
‘못마땅하거나 언짢아서 생기는 노엽고 답답한 감정’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불에 이런 불순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너를 사랑하지만 ‘사랑할 만한 너’이기를 바라는 욕심이 함께 자리하고,
그럴 때 사랑하는 것만큼 ‘그렇지 못한 너’에 대해 화가 나는 것입니다.
훌륭하고 성숙한 수도자란 수도 생활에 관한 공의회 문헌의
그 ‘완전한 사랑(Perfectae Caritatis)’을 향해 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사랑은 정화에서 시작되고 점차 열을 내고 빛을 내는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축성 생활의 날을 맞이한 수도자들이 저를 포함하여
이 사랑의 완성을 향해 가는 수도자들이 되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오늘입니다.
여러분도 오늘 하루만이라도 수도자들을 위해 기도해주시기를 바라고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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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2. 주님 봉헌 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빚의 탕감(용서)!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빚의 무거움 속에서 영혼이 짓눌린 적이 있으셨습니까?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안식일과 희년 경제
빚의 탕감(용서)
2026년 2월 1일 일요일
리처드 로어 신부는 예수님의 기도, 곧 주님의 기도 안에 담긴 경제적 강조점을 짚어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곧 주님의 기도 안에서 "양식"과 "빚"이라는 표현은 분명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간구입니다. 양식은 내일의 생계를 염려하는 농부와 서민들의 삶을 드러내며, 빚은 단순한 잘못이 아니라 사회적 억압과 경제적 짐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바치는 기도 속에서도 ‘내일 무엇을 먹을까, 어떻게 빚을 갚을까’라는 근심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옛 영어에서는 "debts(빚)"을 "trespasses(잘못)"으로 옮겼지만, 원문은 분명히 경제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는 단순히 죄의 용서만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희년의 정신 안에서 빚의 탕감과 해방을 청하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하느님 나라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이 청원을 영적으로만 해석해 왔습니다. 복음서의 많은 부분을 그러했듯이, 이 기도를 개인적인 잘못의 용서, 곧 ‘네가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의 용서’로만 이해해 왔습니다. 물론 그러한 의미도 담겨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 청원은 실제로 경제적 빚의 문제를 가리킵니다.
이 기도의 힘은 레위기 25장에 묘사된 희년(禧年, Jubilee) 제도 안에 있습니다. 희년은 하느님께서 친히 명하신 해방과 회복의 해로서, 빚의 탕감과 땅의 반환, 종의 자유를 선포하는 하느님 나라의 정의를 드러냅니다.
이스라엘의 옛 전통 안에서, 오십 년째 되는 해에는 모든 것이 본래의 주인에게 돌아갔습니다. 이상적으로는 모든 빚이 탕감되었고, 이는 하느님의 크신 은혜와 관대하심을 드러내는 위대한 평등의 표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시고(루카 4,18–19.21), 사도직 전반에 걸쳐 이 가르침을 드러내셨습니다. 곧, 희년의 정신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해방과 자비, 정의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희년의 법을 따라 살았다면, 공산주의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고 자본주의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희년적 사고의 정신은 그리스도교 초천 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당시에는 대출에 이자를 붙이는 것을 고리(Usury:고리 대금)의 죄라 불렀고, 심지어 교회에서 파문될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청원의 기도(주님의 기도)는 여전히 경제에 관한 질문을 던집니다. 곧, 오늘날 소비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짊어지고 있는 개인적 빚, 그리고 특히 남반구 국가들이 떠안고 있는 국가적 빚이 어떻게 사람들을 그들의 역사 속에 갇히게 하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Story From Our Community
랜디 우들리의 『조화로운 선함』(“A Harmonious Goodness.”)에 담긴 통찰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하나의 온전한 공동체로부터 멀어져, 마치 핵 파멸과 기후 혼란, 총격 사건, 오염, 그리고 가난한 이들·병든 이들·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벼랑 끝을 향해 달려가는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과 지배가 불가피한 결말이라고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정의의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져, 모든 만남을 하느님의 선하심을 나누는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Andy H.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Jesus’ Alternative Plan: The Sermon on the Mount 2nd ed. (Franciscan Media, 2022), 178–179.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Wei Feng, untitled (detail), 2025,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들판에 서서 두 팔을 자유롭게 펼친 이 사람처럼, 우리는 경제 정의를 지지할 때 솟아오르는 참된 자유를 체험합니다. 더 이상 끝없는 빚의 굴레와 억압적인 채무 관계에 매여 있지 않고,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 안에서 해방된 삶을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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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빈 종이와 정말 아름다운 [축성]의 이해!~~~
오늘 복음 말씀에서 '율법'이라는 말은 세 번 언급됩니다. 모든 것이 '율법에 따라', 곧 모세의 율법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안에 온전히 계시며, 모든 것이 올바르게 이루어지고, 그분은 유다 민족과 완전히 하나가 되셨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이를 ‘인류 안에 완전히 잠기셨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뒤돌아보는 시선으로 본다면, 이 아기가 장차 율법에 따라 죽임을 당할 성인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을 언급한 뒤에도 여전히 여드레 된 아기의 모습을 볼 수 있겠습니까?
또한 오늘 복음 말씀에서 세 번 언급되는 것은 '성령'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성령은 아직 삼위일체의 제3위격으로 계시는 성령이 아니라, 창세기 1장 2절에서 창조의 시작에 물 위를 감돌던 하느님의 영, 곧 구약의 성령입니다. 새로운 성령은 사람들을 율법의 품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 안에 온전히 계셨지만, 성령의 새로운 은총은 율법을 넘어서는 자유를 선포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유다 민족의 전통과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을 존중하시며, 그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인간의 역사와 조건을 온전히 받아들이셨던 것이지요. 그러나 율법은 옳고 그름을 가르쳐 주지만, 인간은 그 율법을 완벽히 지킬 수 없기에 늘 한계를 느낍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오심으로써, 우리는 단순히 규칙을 지키는 데 머무르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은총을 받게 됩니다. 즉, 성령은 우리를 억압하는 율법의 틀에서 해방시키고, 사랑과 자비의 길로 이끌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은 규칙을 지키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성령 안에서 사랑으로 살아가는 자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뒤돌아봄"(hindsight)을 잠시 내려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뒤돌아봄이 앞선 시선을 가로막을 때, 그것은 빛을 주기보다 오히려 눈을 가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라나실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그분 안에서뿐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자라나실 시간을 말입니다.
뒤돌아봄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나 과거의 경험에만 의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뒤돌아봄에 의지하게 되면 오히려 새로운 깨달음과 은총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신앙은 늘 새롭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빛을 받아들이는 길이기에, 때로는 과거의 틀을 내려놓고 현재의 은총을 바라보는 눈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성장하듯, 우리 안에서도 예수님께서 점차 자라나실 수 있도록 기다려야 합니다. 이는 곧 성령의 인도 안에서 우리의 믿음이 성숙해지고,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이 드러나도록 인내하며 준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생활은 단순히 외적인 의무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점차 커져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기도와 성사, 말씀 묵상 속에서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뿌리내리고 성장하시도록 시간을 드려야 하는 것이지요! 이는 단순히 기다림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도록 공간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신앙 생활 안에서 가장 소홀히 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 아닐까요?! 매일, 매 순간의 삶을 살아 가면서 주님께서, 성령께서 내 내면 깊숙한 곳에서 일하시도록 자리를 내어 드리는 일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 수도 생활은 신앙 생활의 여정에 더 깊게 집중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수도 생활을 축성 생활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자기의 힘으로 하느님께로 가는 여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믿음 안에서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법을 더 심오하게 배워 가는 삶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축성 생활을 하는 이들이 더 특별한 이들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축성 생활을 하는 이들은 신앙 생활의 여정에서 근본적인 의미를 드러내 주는 이들이라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입니다.
일전에 한 번 언급해 드렸듯이 토마스 머튼은 우리 같이 수도원에 사는 사람들이 하는 착각 중 하나가 바로 다른 일반 사람들과 우리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여 말했습니다. 그 내용을 일부분만 보자면 이렇습니다.
"‘세상으로부터의 분리’와 같은 개념은 우리와 같이 수도원에 사는 사람들이 너무도 쉽게 가질 수 있는 완벽한 착각인 것이다: 이 착각이란 우리가 서원을 발함으로써 다른 존재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 가상의 천사, ‘영적인 사람’, 내적인 삶의 사람 등이 되었다는 착각인 것이다.
우리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 이 세상은 폭탄을 퍼부으며 전쟁을 하는 세상이며, 증오로 가득 찬 인류의 세상이고, 과학기술의 세상이며, 방송매체의 세상이고, 거대 기업의 세상이며, 혁명의 세상이고… 기타 등등.
우리는 하느님께 속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다른 입장을 취할 따름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도 하느님께 속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 우리는 모두 늘 새롭게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성령의 이끄심에 우리 영의 시선을 두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집중하기보다는 주님께서 '나'를 어디로 이끌어 가고 계시는지를 영의 눈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수양)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축성 생활의 날" 행사 중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함께 모인 어떤 모임에서 강사가 물었습니다. "누구든 한마디로, 당신이 생각하는 '축성'(consecration)이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첫 줄에 앉아 있던 연로한 한 수녀님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강사는 그분께 손짓하며 대답을 청했습니다.
오랜 세월 선교지에서 사도직을 수행하며 살아온 그 수녀님은 하얀 빈 종이를 들어 보이며 말씀하셨습니다.
"'축성'이란, 이 빈 종이 맨 아래에 당신의 이름을 적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채워 가시도록 맡겨 드리는 것이지요. 그 안에서 기쁘고 평화롭게 머무는 것, 그것이 '축성'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축성]의 이해이지 않습니까? 곧,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기고 그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리는 것 말입니다....
이 정의는 단순히 축성 생활자(수도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이들에게 해당되는 정의입닙니다. 축성 생활은 믿음의 여정에 있어 근간이 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우리 신앙의 선조요 어르신들이신 시메온과 안나는 축성 생활자들과 모든 믿는 이들의 삶의 본보기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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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2. 주님 봉헌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며, 또한 "축성생활의 날"입니다.
“축성생활이 어떻게 변화를 만드는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이는 콘솔라따 선교 수도원 소속으로 현재 교황청 축성생활부와 사도생활단 장관으로 있는 시모나 브람빌라 수녀님과 살레시오회 소속으로 수도회부 장관 직무대행을 맡고 있는 페르난데스 아르티메 추기경이 작년(2025년)에 로마에서 열린 UISG모임에서 한 강의의 제목입니다.
그리고 지난 2021년부터 ‘시노달리따스’를 주제로 개최된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의 [최종문서](2024.10.26.)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축성생활은 고유한 예언자적 목소리로 교회와 사회에 도전을 제시하라.”
“오늘날 많은 축성생활 공동체는 교회와 세상을 위하여 예언자적 역할을 하는 상호문화의 실험실이다.”
그렇다면, 예언자란 누구인가?
<성경>에서 예언자란 무엇보다도 초월적이면서도 인격적인 하느님의 메신저로, ‘부름 받은 자’, ‘하느님의 사람’, ‘환시를 보는 자’,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사람’ 곧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대변자 역할을 합니다. 그들은 알 수 없는 미래를 말하는 사람이기보다 지금 이 시대 안에서, 역사와 사회, 동 시대의 고통과 현실에 깊이 관여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예언자적 목소리’를 우리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두 예언자적 인물인 시메온과 한나를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께 깨어있음’과 ‘사랑을 담은 귀 기울임’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강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기다림에 충실할 때 감각이 더 예리해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령께서 바로 이 일, 우리의 감각을 밝혀주시는 일을 하십니다.”(2022.3.22.)
“이 두 노인을 바라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들은 인내로이 기다리며, 영적으로 깨어있고, 기도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세월도 그들을 약하게 만들지 못했는데, 그들의 눈이 늘 하느님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결코 좌절하지 않았고, 희망을 ‘거두지’ 않았습니다.”(2024.2.2.)
또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눈은 무엇을 보는지요? 시메온은 성령으로 가득차서 그리스도를 뵙고 알아봅니다. 그리고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30)라고 말하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믿음에서 나온 위대한 기적입니다. 이 기적은 눈을 뜨게 하고 다른 시선으로 보게 하고, 관점을 바꿉니다. ~이 시선은 겉모습을 보는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약함과 실패의 틈바구니로 들어가서 그곳에서도 하느님의 현존을 식별할 수 있습니다.”(2022.2.2.)
오늘 우리는 기다리는 사람인가?
그래서 ‘성령께 깨어있음’과 ‘사랑을 담은 귀 기울임’을 지니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놀라운 일을 하시도록 하는 인내와 믿음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눈이 늘 하느님을 바라보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하느님께서는 시련을 통해서도, 우리가 복 받을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아니, 오히려 시련을 통해서 복을 내려주기도 하십니다. 그러니 ‘축성의 삶’, ‘축복의 삶’은 어려움과 시련이 없는 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축복하시는 그분의 뜻에 봉헌하고 사는 일일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깨어 있으며 희망으로 기다릴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 사랑의 힘을 경이감과 감동으로 알아볼 수 있는 시선을 시메온과 한나에게 주셨듯이, 저희에게도 그 시선을 허락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30)
주님!
구원을 보는 눈을 열어 주소서.
포대기에 싸인 아기에게서, 알몸으로 매달린 십자가에서,
구원을 보게 하소서.
양팔로 제 삶의 무력함을 쳐들고, 구원과 자비의 찬미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무력함에서 흘러내리는 당신의 구원을 따라 관상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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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2. 주님 봉헌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마틴 루터는 교회를 개혁하면서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i)’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와 업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로 이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행위와 실천을 통한 믿음을 강조한 야고보서를 쓰레기처럼 여겼습니다. 개신교회의 전통에서도 야고보서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톨릭에서는 야고보서를 의미 있게 생각했습니다. 야고보서를 통해서 ‘병자성사’의 성서적 근거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야고보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면 교회의 원로들을 불러오게 하십시오.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고 그 사람 위에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믿음에서 우러난 기도는 병자를 구원하고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저도 야고보서의 말씀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오늘은 야고보서의 신학 사상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믿음과 율법의 실천을 대립시킨 바오로 서간들과는 달리 야고보서는 윤리를 가르치는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말과 행동을 대립시킵니다.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둘째, 야고보서는 세 가지 실천적 믿음, 곧 행동하는 믿음과 인내하는 믿음과 기도하는 믿음의 모범을 제시합니다. 행동하는 믿음의 모범은 아들 이사악을 제단에 바친 아브라함과 유대인들이 보낸 심부름꾼들을 친절하게 맞아들인 예리코의 창녀, 라합을 이야기합니다. 인내하는 믿음의 모범은 욥을 이야기합니다. 욥은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했다면 하느님께서 나쁜 것을 주셨을지라도 감사드린다고 하였습니다. 기도하는 믿음의 모범은 엘리야를 이야기합니다. 엘리야는 기도로서 바알의 거짓 예언자들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셋째, 야고보서는 공동체 윤리와 사회 윤리를 강조합니다. 고아들과 과부들에 대한 배려, 전쟁과 살인의 뿌리는 인간의 지나친 욕심과 교만에서 나온다고 이야기합니다. 고통받는 사람, 앓고 있는 사람에 대한 배려를 이야기합니다.
오늘은 주님의 봉헌 축일입니다. 많은 본당에서 오늘 1년 동안 전례에 사용할 초를 축성합니다. 봉헌 축일에 초를 축성하는 것은 초가 가지고 있는 3가지 특성 때문입니다. 초의 3가지 특성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삶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첫째, 초는 밝은 빛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진리의 빛을 가려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둘째, 초는 따뜻함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었습니다. 나의 멍에는 가볍고, 편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외로운 이들, 슬퍼하는 이들은 모두 나에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돌아온 탕자를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마음은 곧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셋째, 초는 자신의 모든 것을 태워서 세상을 밝게 비추는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희생과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십자가의 희생은 가장 숭고한 봉헌입니다. 그것이 우리 구원의 시작이었습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내면서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봉헌과 기도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와 부유한 바리사이파의 헌금을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시는 봉헌은 가난한 과부의 정성 어린 헌금이었습니다. 부유한 바리사이파의 봉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의 겸손한 기도와 바리사이파의 교만한 기도를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시는 기도는 세리의 겸손한 기도였습니다. 바리사이파의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신앙생활의 정점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아드님이 누추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늘 겸손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제자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제자라고 하셨습니다. 봉헌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봉헌은 나에게 잘못한 이들을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봉헌은 나의 허물과 잘못까지도, 나의 원망과 실망까지도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봉헌은 나의 삶을, 이웃들을 위해서 나누는 것입니다. 오늘 봉헌 축일을 지내면서 야고보서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행동하는 믿음, 인내하는 믿음, 기도하는 믿음’을 봉헌하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되신 외 아드님께서 오늘 성전에서 봉헌되셨듯이 저희도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저희 자신을 봉헌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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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2. 주님 봉헌 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매일의 삶 전체가 봉헌의 대상입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봉헌한다’는 말이 뜻하는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웃어른께 좋은 것을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선물을 드린다는 말입니다.
귀한 사람에게 선물을 드릴 때는 아무것이나 드리지 않습니다. 내게 필요 없는 것이니 드리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내가 지니고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좋은 것, 가장 가치 있는 것, 가장 의미 있는 것, 가장 흠 없는 것을 골라 드립니다.
선물한다는 것은 그냥 물건 하나를 던져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 정성을 담아, 내 마음을 담아, 내 영혼을 담아 드리는 것입니다.
돌아보니 하느님께서는 제게 과분한 정도로 많은 선물을 주셨는데, 제게 그분께 돌려드리는 것이 너무나 보잘것없어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당신 전체를 주셨는데, 제가 드리는 것은 너무나 제한적인 것이어서 참 부끄러운 오늘입니다.
봉헌한다는 것은 드린다는 말, 바친다는 말, 내어놓는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나를 고집하지 않고, 내 안에 갇혀있지 않고, 나만 생각하지 않고, 보다 큰 흐름, 보다 큰 물결, 보다 큰 선, 보다 큰 가치관이신 하느님과 합일하기 위해 내 전 존재를 내어놓는 행위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봉헌한다’고 할 때 주로 뭔가 좋은 것, 고가의 것, 귀중한 것, 가치 있는 것을 바쳐야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데,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봉헌되신 아기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삶 전체에 대한 봉헌, 아무런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그냥 바치는 봉헌도 좋은 모습의 봉헌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어깨를 내리누르는 일상의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돌아보기도 싫은 끔찍했던 지난 세월도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바쳐야 하겠습니다. 죽어도 용서하기 힘든 그 누군가도 ‘그냥’ 하느님께 드려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헤어날 수 없는 내 한계, 부끄러움, 죄...이 모든 것 역시 하느님께 맡겨드려야 하겠습니다.
결국 우리 매일의 삶 전체가 봉헌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매일 겪는 기쁨과 슬픔, 고통과 십자가, 좌절과 방황, 한계와 모순, 회한과 눈물, 이 모든 것들 주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봉헌의 대상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참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의 빛나는 외모, 그의 재산, 그의 성공, 그의 젊음만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의 부족함, 그의 실패, 그의 한계, 그의 쇠락, 그의 죽음조차도 사랑해야, 그것이 참사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열렬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의 장점, 우리의 긍정적인 측면, 우리의 성공만을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한 부분만을 사랑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통째로 사랑하십니다.
이토록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주님께 우리 역시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 존재 전체를 온전히 내어 맡김으로 인해, 우리가 더 성장하고, 더 큰 해방을 얻는 그런 주님 봉헌 축일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봉헌하고 온전히 빈손으로, 완벽히 텅 빈 마음으로 하느님께 나아갈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상상을 초월할 대자유를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텅 빈 충만, 완벽한 평화가 반드시 찾아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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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2. 주님 봉헌 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생활묵상 : 할머니가 돼도 내 맘 변치 않을게 누나
오늘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묵상글을 하나 작성하려고 하다가 그만 예전에 짝사랑했던 누나가 생각나 그만 밤을 새고 말았습니다. 현실에서는 잊었는데 내 영혼 안에서는 잊지를 못하나 봅니다. 언젠가 성당 감실 앞에서 누나가 기도를 할 때 용기를 내 감실 앞에서 하면 내 진심을 더 알아줄까 하고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방패 삼아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보시는 앞에서 말하는데 설마 거짓을 말할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한다면 제 진심을 믿어줄 수도 있을 거란 희망을 가졌지만 그때 누나가 한 말 중에 정확하게 그 말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내용과 의도는 이랬습니다. 말이 되느냐고 이 말입니다. 누나는 기억을 할지 모르지만 분명 그랬습니다. 누나 상식으로써는 열두살이나 그것도 여자가 많은데 말하자면 어린 남자랑 그게(결혼)이 가능하냐고 하는 뜻이었습니다. 또 제가 처음에 고백을 했을 때 솔직히 문자로 고백을 했는데 아마도 많이 놀라웠을 겁니다. 제가 세례명을 가명으로 하겠습니다.
저를 아는 본당 신자가 보면 다 알겠지만 그래도 가명을 하겠습니다. 안나로 하겠습니다. 저를 선교한 자매님은 안나 기분 좋겠는데 이런 식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마음을 받아주지 않으니 언젠가는 선교한 자매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마도 베드로가 어리니 나중에 혹시나 버림받고 제가 차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지 않을까 하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영세주신 신부님도 언제 한번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결혼) 사람들이 안나를 어떻게 볼까 하고 걱정 안 하겠나 하신 것입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 이런 것도 고민을 했을 겁니다. 그때 성전에서 할머니가 돼도 내 맘 변치 않을게 하고 눈물로 애원했던 그 말을 지금도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문자에서도 그런 문자를 수도 없이 보냈지만 정말 나쁜 의미로 하는 건 아니지만 독하다고 할 정도로 한 번의 답장도 없을 정도로 정말 독했습니다. 차라리 그만 좀 해라고 그런 답장이라도 줬으면 하는데 그런 답장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한 번 언젠가는 성당 로비에서 한 번 제 진심을 다 고백했지만 그래도 꿈쩍 안 했습니다. 차라리 싫으면 뭐 때문에 싫다고 하는 식으로 말이라도 했으면 저도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과감히 포기했을 겁니다. 사실 처음에 문자로 언지시 고백을 했을 때 요즘 말로 말하면 계속 씹었습니다. 초창기에 거절 의사를 분명히 했더라면 저는 바로 단념하고 말았을 겁니다. 제 성격상 그랬을 겁니다. 아무런 답장이 없으니 제가 이런 사실을 저를 선교한 자매님께 최초로 고백을 했습니다. 자매님과 저는 둘 다 이상한 소설을 쓴 것입니다. 마음으로는 아주 좋을 것이라는 소설입니다. 이게 결국 사단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상상이 계속 부풀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초기에 확실히 거절 의사를 했더라면 짝사랑을 하지 않았을 텐데 이미 제 가슴은 계속 타게끔 만들어놓고 그러니 정말 미칠 지경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밤을 샌 게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 노래를 듣다 보니 그 가사가 또 옛날 그 애달픈 마음을 떠오르게 해 그만 이렇게 된 것입니다. ' 외로움을 마시며' 라는 가사가 제 마음을 후벼파는 것입니다. 1년을 그렇게 하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깨끗이 머리로는 단념을 했습니다. 포기했습니다. 저도 포기를 한 줄로 알았는데 이게 머리로만 이성으로만 포기를 한 것이지 제 가슴은 포기를 한 게 아니었습니다.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성당에서 식사 때 가까이에서 봤는데 누나 얼굴을 보고도 그때 이루어지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얼굴이 그때랑 비교해 보면 많이 변했던 것입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두 번 다시는 생각도 나지 않고 해야 정상인데 솔직히 고백하면 그래도 생각나는 것입니다. 정말 미치겠더군요. 두 달 반쯤에 우연히 마트에서 장을 보고 오다가 신호등에서 가까이 나란히 마주쳤습니다. 인사도 할 그런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워낙 거부만 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사실 성당에서 마주치면 서먹서먹하니 그것도 힘들고 해서 한번은 "이제 깨끗하게 잊었으니 그만 누나 동생으로 지내면 안 될까요" 라고도 했습니다. 역시나 항상 그랬듯이 답이 없었습니다. 누나가 그때 거부를 한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혹여 그때 나이도 어리고 해서 철없이 어떤 순간 감정으로 했다고 철부지 취급해서 만약 그랬다면 만약 이 이유 하나만으로 거절했다면 이제는 후회를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도 보이지 않게 13년이라는 세월을 멀리서라도 제가 그동안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봐왔기 때문에 어쩌면 속으로 그때 베드로 저 사람이 한 말 " 할머니가 돼도 내 맘 변치 않을게 누나 " 이 말은 어쩌면 진심이었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제가 처음에 고백을 하지 않고 그런 감정을 보이지 않고 했더라면 누나랑 아주 잘 지냈을 겁니다.
누나는 제가 한 달 교리를 받을 때 사실 저는 마지막에 한 달만 교리를 받고 영세를 받았습니다. 몇 년 전에 다른 성당에서 교리를 받은 것을 대충 가만해서 그렇게 얼렁뚱당 해서 받았습니다. 박도식 신부님 유명한 책 그 책을 완전히 혼자 통독을 하고 해서 그런 조건으로 받게 된 것입니다. 제가 교리를 받을 때 누나는 복음화분과장을 맡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때는 결혼을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냥 봉사하는 분이라고만 생각을 했고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우연히 미혼이라는 사실과 함께 왜 미혼이었는지 그 사연을 듣고 안 후에 언젠가부터 조금 약간 연민의 감정 같은 게 싹이 튼 것이었죠. 왜 미혼이었는지 그 이유는 이 자리에서 밝히기엔 예의가 아니라 생략하겠습니다. 그때 그 연민의 마음이 제 마음을 흔들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때 이루어졌다면 지금 행복할까 하는 질문을 던지면 저는 아마도 그때 누나를 좋아했던 그 마음 변치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누나 동생하고 만나 이야기를 하면 남동생이 하는 말로는 여자는 남자보다 빨리 늙는다고 했습니다. 설사 그게 맞다고 해도 저는 그래도 변치 않을 거라고 확신을 합니다. 설령 늙었다고 해서 마음이 변할 것 같으면 애시당초 그때 제 나이 마흔에 영세를 받았고 해가 바뀐 시점에 고백을 했으니 마흔 하나라고 해도 쉰 셋인 누나를 보면 앞으로 몇 년 후면 나이가 어떻게 된다는 걸 제가 계산을 하지 않았으면 모르지만 그런 것도 계산하지 않을 만큼 멍청한 놈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돼도 그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좋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은 단순히 저의 개인적인 슬픈 짝사랑 사연을 넋두리하기 위해 한 게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할 수는 없고요. 저의 이런 사연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바로 안목이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제가 원래 '충신과 간신'이라는 제목으로 묵상글을 하나 올리고 싶었습니다. 제가 생각한 내용이 있는데 그 내용의 핵심이 바로 사람을 보는 안목입니다. 이 안목은 누구나 가지면 다 좋겠지만 특히 성당에서는 사목자는 사목을 하는 데 있어서 필수조건이라는 걸 묵상한 내용입니다. 그 내용을 언급하고 또 잘 이해를 하려면 이런 저의 개인적인 아픈 과거 이야기가 도움이 될 수도 있기에 한번 공유를 하는 것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에게 영세를 주신 신부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본당을 떠나신 후에 지금은 은퇴를 몇 년 전에 하셨지만 10년의 세월을 천주교 4대 축일과 제 축일에 좋은 글과 함께 항상 보내주십니다. 이 사실을 몇몇 신자는 알고 있습니다. 또 저만 그런 게 아니고 몇몇 신자도 그렇게 신부님께서 보내주십니다. 저는 신부님과 고작 인연이라고 해봐야 불과 채 2년도 되지 않을 겁니다. 그렇고 또 저를 보는 본당 신자들도 저런 어린 놈에게 어떻게 신부님께서 그렇게 문자를 보낸다는 사실을 알면 조금 의아해할 것입니다. 제가 제 입으로 그 이유를 말하기엔 좀 그렇지만 그 이유는 제가 우회해서 표현하겠습니다.
저에게 영세를 주신 신부님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저의 특이한 면을 보셨고 또 제 마음이 신부님을 감동하게 할 만큼 따뜻한 놈이라는 사실을 신부님은 그걸 캐치하신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저에게 비록 문자이지만 하찮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기억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안목이라는 건 단순히 사람만을 보는 것만 해당하는 게 아닙니다. 안목은 내가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그런 것을 볼 수 있는 것도 안목에 해당됩니다. 사목자는 군주에 비유하면 어떤 사목 위원이 충신인지 간신인지 구별을 할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의 교훈을 보면 이 자질이 부족하면 유능한 군주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사목자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목자는 신학과 성경과 같은 것도 많이 알아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역사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특히 인물 역사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편 묵상글 '충신과 간신'에서 다시 한 번 더 이어 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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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2. 주님 봉헌 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2,22-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지요. 우리는 보통 하느님께 내 것을 봉헌하면, 그것을 ‘잃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더 이상 내 손 안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관점을 바꿔서 생각하면 더 이상 내 작은 손아귀 안에 갇혀 있지 않기에 더 넓은 세상으로 뻗어나가 더 큰 존재로 성장할 수 있기도 하지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그런 점이 드러납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예수님의 부모가 아기를 자기들 품 안에 가둬두고 새장 속의 새처럼 키우는 사람이었다면, 예수님은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편협하고 자기 중심적인 인간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하느님의 지혜를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상과 삶을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시각으로만 보게 되어 하느님께서 나에게 얼마나 큰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지를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예수님이 고정관념과 편견이라는 껍질을 깨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참된 자유를 누리도록, 하느님 품 안에서 그분 사랑을 듬뿍 받으며 더 큰 존재로 성장하도록 길을 열어준 것이지요. 그것이 봉헌이 갖는 참된 의미입니다. 나 자신을 봉헌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온전히 순명하는 것을 답답한 ‘구속’으로 느끼지만, 그분 뜻을 철저히 따르면 내 자유가 침해당한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인 겁니다. 내 욕심과 고집을 버리고 하느님께 온전히 순명하면 내가 처한 상황이나 조건이 더 이상 나를 옭아매는 족쇄가 되지 못합니다. 내가 세상이라는 작은 틀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라는 큰 세상에 속한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뜻과 계획을 내려놓고 철저하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부족하고 약한 내 능력과 힘이 더 이상 내 앞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지 못합니다. 내 삶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 안에 사시며 이끌어가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성모님처럼, 그리고 예수님처럼 나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부족한 나를 이 세상에 당신 뜻을 이루기 위해, 온 세상에 당신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쓰시도록 기꺼이 내어드려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중요한 것은 참 사랑이신 하느님을 내 안에 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그분을 닮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정점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사랑하면 우리를 위해 당신의 전부를 내어주신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 사랑을 깨달으면 우리도 주님처럼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초가 자신을 태워 세상을 밝게 비추는 것처럼, 우리도 자신을 희생하여 세상을 큰 사랑으로 물들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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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2. 주님 봉헌 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봉헌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바치는 일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2-32)”
1) 예수님의 지상 생애는, 당신의 모든 것을 아버지께 바치신 ‘봉헌의 생애’였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그 봉헌의 절정이었고 완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루카 23,46).”
신앙인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또 예수님과 함께 ‘나의 모든 것’을 아버지께 바치는 ‘봉헌의 생애’를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봉헌은 우리를(나를) 살리기 위한 일이었지만, 우리의(나의) 봉헌은 우리 자신이(나 자신이) 살기 위한 일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또 ‘예수님을 위해서’ 라고
거창하게 말할 것은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의 구원과 생명을 위해서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봉헌’에 대해서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고, 어려운 일이라고 말할 것도 없습니다.
어렵든지 쉽든지 간에 살고 싶으면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 즉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당연히 하게 되는 일입니다.
생색낼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2)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바치신 이야기는,
‘봉헌이란 무엇인가?’를 잘 나타냅니다.
“그들이 카파르나움으로 갔을 때,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는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님께서 먼저,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남들에게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마태 17,24-27)”
이 이야기에는, 예수님은 봉헌을 받는 위치에 계시는 분인데도 우리를 위해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분이라는 가르침도 들어 있고, 봉헌이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께 다시 드리는 일이라는 가르침도 들어 있습니다.
만일에 잡은 물고기를 다른 사람에게 팔아서 돈을 마련하고, 그 돈을 ‘성전 세’로 바쳤다면, ‘내가 노동해서 번 나의 돈’을 바친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작은 기적’으로 마련된 돈을 바쳤으니,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께 바친 일이라는 것이 생생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3)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는, 봉헌을
‘어떻게’(어떤 마음으로) 해야 하는가를 잘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1-4)”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것은 과부의 ‘마음’과 ‘정성’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과 정성은 ‘사랑’입니다.
가난한 과부가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전부 다 봉헌한 것은,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루카 10,27).
<사실 하느님에 대한 사랑 없이,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즉 자신의 신심을 과시하려고 전 재산을 봉헌하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봉헌이 아니라 ‘위선’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마음속을 모르지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4) ‘참 사랑’에는 ‘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하기 때문에’ 바치는 일에서는,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을 전부 다 바치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사랑만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형편 때문에 지금은 모든 것을 바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일부만 바친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언젠가 인생을 마칠 때가 되면, 모든 것을(목숨을)
하느님께 돌려드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임종은 단순히 생을 마감하는 일이 아니라, 신앙인으로서 봉헌을 완성하는 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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