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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
롬 14:1-9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5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롬 14:1-9 / [형제를 심판하지 말라] 여러분의 동료가 되기를 원하는 형제가 있거든 그의 믿음이 약하더라도 따뜻이 맞이하십시오. 옳고 그른 일에 대해서로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2) 우상 앞에 놓았던 고기를 먹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논쟁하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먹어도 해로울 것이 없다고 믿고 있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런 고기를 먹느니 차라리 채소를 먹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3) 고기를 먹어도 된다고 생각한다해서 먹지 않겠다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또 먹지 않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이나 다 받아들이셔서 당신의 종으로 삼으셨습니다. 4) 그러므로 종의 행동을 판단할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누가 옳고 그르냐는 하나님께서 일러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르게 행동하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5)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특별한 날인 유대교의 명절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어느 날이나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성가시게 만드는 것은 잘못되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따위의 문제는 각자 자기가 결정할 일입니다. 6) 만일 누가 주께 예배드리는 특별한 날을 정해 놓았는데 그것이 주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라면 나쁠 게 없습니다. 우상 앞에 놓았던 고기를 먹는 사람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주께 감사드리고 먹는 것인데 무엇이 나쁘단 말입니까? 그리고 그런 고기에는 손을 대지 않으려는 사람도 주님을 기쁘게 하려는 간절한 심정으로 그러는 것이니 그 역시 잘못이 없습니다. 7) 우리는 우리가 죽고 사는 문제를 마음대로 선택할 권리가 없습니다. 8)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9)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은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 되시기 위한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대두되는 가장 큰 문제점 가운데 하나가 내적인 분열입니다. 본 서신의 수신자인 로마교회에는 식사법과 절기 문제로 인한 분열이 있었습니다. 아직 유대교회의 율법에 미련이 남아 그 율례와 법도를 고집하는 이들이 있다 해도 그의 견해를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으로 확정할 지니라(1-5) 그 확정한 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이 일로 인하여 서로 비판하고 자기의 생각을 따르라고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로마의 성도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우상의 제단에 올려졌다가 시장으로 유통되는 육류를 부정하게 여겨 채식만을 먹어야 한다고 고집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음식 자체가 더러운 것이 아니라고 여겨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음식 문제와 함께 절기를 지키는 일도 분쟁의 소지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절기들, 월삭 등을 지켜야 한다고 했고 다른 이들은 어느 날만이 아니라 모든 날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주장하고 부활의 날 주일을 더 소중히 지켜가려고 했을 것입니다. 만일 이들이 자기 신념을 자기에게만 적용을 하고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가르침을 받아 복음의 의미와 복음 안에서의 섬김의 규례와 법도를 만들어 갔다면 별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서로가 자기의 신념만이 옳다고 주장하고 다른 쪽을 비판하는데 있었습니다. 바울은'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는 일이라고 지적합니다. 모든 성도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판단은 주님이라는 견해입니다. 율법에 치우쳐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성도에 대해 그 연약함을 비판하고 업신여기지 말며 믿음이 강한 자 편에서 먼저 받아들이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견해는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이며 확신이란 우리를 붙들고 있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나 죽으나(6-9)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주님을 위한 것인가? 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중심에서 나온 서원과 작정이라면 하나님과 그 개인의 관계이니 만큼 각자 마음에 확정한 대로 행하는 것을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 중심인가, 자기 중심인가'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해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기에 더 이상 자신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성도이어야 합니다.
평화는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서로 사이좋게 지낼 능력이 없습니다. 모든 관계는 위태위태합니다. 사람들은 전에 없이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병을 앓고 있습니다. 가정이 깨지고 학교에서마저 무질서가 난무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평화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투영물일 뿐인 그의 세상도 혼돈투성이입니다. 특별한 사람들, 그리스도께서 화평케 하는 자로 부르신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절들입니다.
< 설 교 >
형제에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로마서 14:1-12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의 신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권면과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 권면과 가르침은 한 믿음의 공동체가 사랑이 넘치고 평화로우며 행복한 공동체가 되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입니다.
로마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각자의 종교적, 사상적 배경이 다양했을 것입니다. 유대교를 믿던 사람들도 있었고 이교를 따르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갖고 있던 각 종교나 철학사에는은 다양한 형태의 고유한 종교적 의식이나 생활관습이 함께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금욕주의적 관행을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식생활에 관련된 각자의 규율이 있었을 것입니다. 음식에 곤한 한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다 먹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동물적 생명을 지닌 음식물은 일체 삼가고 채식만 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교에서 온 사람들 가운데는 특히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 먹기를 아주 꺼려하는 경향이 컸을 것입니다. 로마 세계에서는 이교 신전에서 제사가 끝나면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은 그 일부만 태워지고 나머지는 종종 시장에 보내져 팔리곤 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자들은 알지 못한 채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살 수가 있었습니다. 또는 믿지 않는 친구의 집에서 그 고기로 만든 음식을 먹을 수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또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삼일에 하루씩만 식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것도 빵과 소금과 물만 먹고 마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음식이 아니라 일 년 중 어떤 날에 관한 관습도 있었습니다. 안식일이나 몇몇 날에다가 특별한 의미나 중요성을 부여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모든 날을 꼭 같이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교인들 중에는 새롭게 받아들인 기독교신앙에도 불구하고 예전의 식생활이나 기타 생활습관을 아무 양심의 거리낌 없이 계속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신앙에 위배될까봐 과거의 습관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극도로 조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기의 소신을 자기 자신의 행위에만 적용시키지 않고 다른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는 잣대로 삼으려 하는 것 때문에 교회 안에서 신자들 간에 시험들 일이 발생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우상에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행위나, 포도주를 마시는 행위나 안식을 지키거나 안 지키는 일 등입니다. 자기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비판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은 공동체를 위하여 해로우므로 모두가 조심해야 할 일임을 사도 바울은 가르칠 필요를 느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 첫 절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부른 사람들은 주로 아무 것이나 자유롭게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지칭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15:1에서 “믿음이 강한 우리”라고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로 인해 무엇을 먹고 안 먹고 하는 일에 관한 제약으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을 가리킨 것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우상에 바쳐졌던 고기를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고 거짓된 것이기 때문에 그 앞에 바쳐졌었던 아니던 아무 상관없이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은 그런 여러 가지 입장 중에서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 하는 판단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속으로 자기의 판단은 있었을 것이지만 공개적으로 그것을 밝힘으로써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시험에 들게 할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어떤 태도가 옳으냐 그르냐 하는 문제를 넘어서서 그는 교회에 덕이 되는 길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먼저 본문 1절에 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부르면서도 그들의 입장을 거부하지 말고 받으라 하며, 그들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연약한 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2절에서는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도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연약하여 채소만 먹는 사람을 대비시켜 말하면서도 그 둘 중에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 하는 가치판단을 표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직 양쪽의 사람들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식생활 문제에 있어서 모든 것을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 빠지기 쉬운 경향은 신앙생활 잘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과 지나친 조심성 때문에 채소 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반대로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뜻으로 먹는 것도 극도로 가려서 하는 이들이 또한 갖게 되기 쉬운 성향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다 먹는 사람들을 불신앙적이거나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뭐든지 먹을 수도 있고 철저히 가려서 먹어도 되지만 누구를 자기와 달리 행한다고 해서 업신여기거나 비판하는 것은 공동체를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이유를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뭐든지 다 먹는 사람이든 채식만 하는 사람이든 하나님께서 믿음의 공동체로 불러주신 사람들이라면 다른 사람이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다른 사람의 하인에게 이래라 저래라 함부로 간섭할 수 없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종에 대해서 누가 감히 비판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본문 4절을 봅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무엇을 먹고 마시는 문제에 있어서 뿐 아니라 어떤 날이나 절기를 지키는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임을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의 생활에서 의미 있게 여기며 지키던 날들을 계속 지킬 것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는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본질에 위배되지 않는 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설날이나 추석같은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을 예수 믿게 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지켜야 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제사를 지내는 일은 우리의 기독교신앙과 조화되지 않기에 폐한다 하드라도 그저 가족들끼리 만나서 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음식과 정을 나누며 즐겁게 지내는 것은 얼마든지 계속할 수도 있는 일이고 또 주일을 잘 지키는 것 외에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 모든 것은 더 이상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날을 지키고 안 지키고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이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의중에 있는 생각입니다. 본문 5절을 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한 것은 그런 일은 각자의 자유에 속한 일이므로 각자가 알아서 하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남이 뭐라고 말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바울은 여기서도 어떤 날을 중요시하든 안 하든, 무슨 음식을 먹든 안 먹든 중요한 것은 그것이 주를 위한 것이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의 표현인지 아닌지 하는 것입니다. 본문 6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이렇게 그리스도인에게서 언제나 상위의 가치는 무엇을 하고 안 하고 하는 것보다도 하든 안 하든 그것을 주님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살거나 죽는 것까지도 그렇습니다. 무릇 그리스도인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살아도 자기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자기를 위하여 죽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 7-9절에서 사도 바울이 하는 말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7절의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다”는 것은 모든 신자는 그들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결산하듯이 산다는 뜻입니다. 무릇 그리스도인이라면 고기를 먹는 일이나 무슨 날을 지키는 일이나 각자 나름대로 이해하는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은 없고 다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여 살고자 한다는 말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사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고 죽을 때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신자가 하나님께 속해있다면 하나님 외의 그 누구도 신앙의 본질과 중심문제에 속하지 않는 다른 사람의 먹고 마시는 문제와 어떤 날들 지키는 일에 관하여 이러쿵 저러쿵 판단할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목적이 그가 죽은 자들과 살아 있는 자들 모두의 주가 되시기 위한 것이라는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은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들도 모두 그의 권위 아래 속해있습니다. 그럴 만큼 모두가 주님께 속한 자들이라면 믿음이 약한 사람이나 강한 사람이나 누구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인 되신 하나님만이 자기의 사람들을 판단하실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지 다른 사람의 심판대에 설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특권이기 때문에 남을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권을 찬탈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 10-12절에서 사도 바울의 말을 계속 들어봅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사45:23)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12절에서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한 것은 모든 사람이 각각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모든 말과 행위에 대하여 직접 결산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하여 심판하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심판하실 사람을 다른 그 누구도 심판하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살아온 환경도 각각 다르고 믿게 된 계기도 다 다르며 윤리관이나 생활방식도 다 다릅니다. 교인들 사이의 그 다양한 차이 때문에 상호간에 오해도 있을 수 있고 의견충돌도 있을 수 있으며 때로는 갈등과 분쟁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일들을 방지하는 길은 자기의 생각을 절대화하거나 남에게 강요하려 하지 않도록 서로가 조심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믿음과 그 사고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함부로 업신여기거나 비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같은 믿음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누구에게서나 같아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다 같이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본질에 관한 한 일치를 추구해야 할 것이고, 비본질적인 일에 관해서는 각자의 자유를 존중해야 할 것이며, 모든 일에 있어서 사랑을 앞세워야 할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교회 안의 모든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향해 너그러운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생활을 영위하며 이를 위해 자기 자신을 훈련시키는 자세나 방법은 얼마든지 자유롭고 다양할 수 있습니다. 엄격하고 높은 신앙의 기준으로 자기의 말과 행동과 삶을 다스려가는 것은 존경할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그 엄격한 잣대를 다른 이들에게도 요구하는 것이며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무시하고 비난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엄격해도 다른 이들에게는 너그러운 사랑의 자세가 교회를 더 푸근하게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서로서로 너그러운 마음으로 사랑이 넘치고 평화가 넘치며 행복이 넘치는 교회를 만들어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교회공동체를 세우는 윤리
이정익 목사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로마서 설교도 거의 종반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신앙인의 조화로운 삶에 대해서 말씀을 주십니다. 사도바울은 본문을 통해 교회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한 조언을 주고 있습니다. 그동안 여러 교리들을 말씀했습니다. 또한 하나님 자녀로서 받는 은혜와 복에 대해서도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렇게 교회에 들어와 있는 성도들을 섬기고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질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모두 모여 함께 살아야 합니다. 신앙도 교회에서 모여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야 세워지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다양한 계층들이 모입니다. 나이, 환경, 생각, 수준이 다 다른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래서 교회는 반드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 구성원들은 서로 조심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갈등이 유발됩니다. 사도바울은 이쯤에서 교회 성도간의 상호윤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강조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교회에도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유대에서 개종한 사람, 이방인으로서 개종한 사람, 디아스포라, 타국인이 함께 모였습니다. 그들은 자연히 생활 습관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많은 문제들이 생겨났습니다.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성도간 상호간의 윤리가 필요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몇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음식물에 관한 윤리
2절에서는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채소만 먹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교회 안에는 유대인으로서 유대교에서 개종해서 그리스도인이 된 신자가 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직도 유대교 전통의 습관을 완전히 끊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그들은 레위기 11장에서 말한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에 관한 율법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채식주의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당시 이방인으로서 개종해 온 성도들은 믿음이 약한 자라고 여겼습니다. 또 교회안에 이방인으로 개종해 온 성도들은 율법이나 유대인의 전통을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음식에 대해서 아주 자유로웠습니다. 아무것이나 다 잘 먹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 성도들은 그들을 향해 먹는 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부류만 해도 먹는 문제로 상호 갈등을 겪었고 여러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여기는 로마입니다. 이곳에는 개종해온 이방인이 유대교인 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로마교회 안에서 음식물에 대한 분쟁이 일어 “먹지 않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음식물은 신앙의 본질은 아닙니다. 그 문제는 다만 민족이나 문화에 따라 규정이 다른 차이일 뿐입니다. 신앙의 본질이나 중심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 때문에 갈등하고 불화하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3절 끝에서 “서로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도 이해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유대인들은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우상제물로 바쳐진 고기를 시장에 갖다 팔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아예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습은 그 문화를 모르는 이방인 개종자들은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서로 먹고 먹지 않는 사람을 비방하지 말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날짜와 절기에 관한 윤리
5절을 보면 “어떤 이는 이 날이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이 중히 여기는 날이 있었습니다. 그날이 안식일, 절기, 월삭 등입니다. 또한 개종한 이방인들도 나름대로 특정한 날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자기들이 지키는 날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다 보니까 분쟁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자기들 나라에서 지키던 중요한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업신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날을 의미있게 지키면 됩니다. 또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들이 소중히 지키는 명절이나 국경일이 중요하다고 외국인들에게 그 날을 지키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 스스로 지켜주면 좋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그 날 때문에 분쟁이 발생하고 불화하고 분열이 야기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 당시 로마교회에는 그런 일들 때문에 분쟁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래서 6절에서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이 두 문제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서는 이 문제로 서로 고소까지 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고전 1:10-13, 6:1,10:14-33,11:17-22)
그래서 이 고기 먹는 문제와 절기에 관한 문제를 로마서 14장에서 집중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8장과 갈라디아서 4장, 골로새서 2장에서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그 시대 그렇게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사도바울도 전도하다 보니까 다문화권에서 비롯되는 많은 문제들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지금이 어느 때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로마서가 쓰여진 시대는 복음 시대였습니다. 이제 구약시대가 지나고 신약시대 즉 복음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그 때는 구약시대에 사용하던 안식일이나 율법으로 규정해 놓았던 음식이나 특정한 날들이 이미 지나간 시대의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복음시대답게 마음이 주께로 모아져야 합니다. 문제는 율법에 매이고 음식에 매이고 절기에 매이다 보니까 신자들끼리 본질도 아닌 것들을 가지고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안에 들어와 있는 그리스도인은 모든 생각과 기준의 초점이 예수께 맞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이 하나로 통일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효과적으로 교회공동체를 세워나갈 수 있게 됩니다.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
오늘도 이 문제가 자주 발생합니다. 그런데 당시는 더 많았습니다. 교회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워나가려면 서로 비판하거나 잘잘못을 따지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시대는 특히 영적인 비판이 많아서 형제를 비판하고 지적하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1절에서 “믿음이 약한 자를 비판하지 말라”고 하였고 3절에서는 “먹는 자도 먹지 않는 자도 서로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또 10절에서는 “네가 어찌하여 형제를 비판하느냐 형제는 업신여기느냐”고 하였고 20절에서는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문제들은 구원이나 진리나 복음과는 상관이 없는 것들입니다. 어찌 보면 아주 사소한 문제들일 수 있습니다. 이 사소한 문제들로 형제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고 교회 공동체를 허물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해결책 - 상호간의 행동강령
그러면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본문은 서로 포용하라고 합니다. 3절에서는 “먹는 자도 먹지 않는 자도 서로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은 서로 포용하고 용납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좋게 여겨 받으신바 된 것을 성도끼리 서로 비판하거나 업신여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또 5절을 보면 “혹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마음에 확정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로마교회 안에는 여러 민족이 함께 들어와 있었습니다. 자연히 문화가 다르고 음식이나 습관이 다르다 보니까 서로 부딪치는 것이 많았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복음시대가 되었지만 내심 안식일에 대한 미련이 상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 개종자들은 안식일 개념이 없습니다. 그러니 갈등이 왜 없었겠습니까? 당시는 주일을 지켰는데 한편에서는 왜 주일을 지키느냐고 따졌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고 상대를 비판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율법시대가 지나고 복음시대가 되자 주일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주일은 주님이 주인이 되는 날이기 때문에 지키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유대인들처럼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키는 것은 주님이 주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할 때 모든 기준은 주님께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판단하거나 결단하거나 선택하거나 헌신할 때 이것이 주님을 위하여 하는 것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전통을 따지며 안식일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고집한다면 그것은 율법신앙이고 주님과 아무 상관없는 신앙입니다. 음식도 그렇습니다. 이것을 먹어야 하는가, 먹지 말아야 하는가 갈등할 때에는 그것이 주님의 뜻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전 10:31에서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지상에 살면서 판단하여야 하는 공통된 목적입니다.
흔히 교회가 갈등하는 것을 보면 대부분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고 부수적인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면 제도문제나 우선순위 문제나 자존심 문제들입니다. 여기 음식문제나 날 문제도 본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소송이, 갈등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중재하는 방법이 “아디아포라”(adiaphora)입니다. 아디아포라는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행위나 윤리중에서 성경이 직접 금하거나 행하라고 언급하지 않은 것은 성도 개개인의 신앙양심에 따라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주초문제는 성경이 직접 언급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개인의 신앙 양심에 따라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흡연문제에 대해서 어떤 교단은 관대하고 사소하게 다룹니다. 그런데 어떤 교단은 엄격하게 징계를 합니다. 이런 문제들은 본질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행위가 누군가에게 시험에 빠지도록 한다면 신앙양심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아디아포라 방법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하나 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 방법이 이 방법입니다. 이 세상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다른 문화, 다른 역사, 다른 생활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방법은 약간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사람들은 문화가 다를지라도 예수를 중심으로 모여야 합니다. 그래야 일치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것이 “주를 위하여”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이 세 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그것이 모든 기준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할 일
여기서 주의할 일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서로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3절에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주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음식은 아무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음식은 상대방에게 거리낌이 되고 시험이 되기도 합니다. 그 때는 먹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음식이든 먹어서 죄가 되는 음식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음식은 내가 먹음으로 타인이 시험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15절에서는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네 형제를 음식으로 망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를 들어 만약 제가 목사로서 술을 마시는 것을 누군가 본다면 그 사람은 큰 시험을 당할 것입니다. 술을 마시는 것은 구원받는 문제나 복음 진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인해 누군가 시험을 당한다면 나는 그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13절, 15절에서 “고기를 먹거나 포도주를 마시거나 너희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그 무엇이라도 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고전 8:13에서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하게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도 하였습니다. 이것이 주의할 일입니다.
두 번째는 비방 받지 않도록 처신하라는 것입니다. 16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받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내 신앙양심의 자유가 타인의 신앙의 자유를 방해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잘 세우려면 나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만큼이나 너도 중요합니다. 상대방의 생각을 무시하고 내 생각, 내 주장을 자꾸 내세우면 공동체가 무너지게 됩니다. 처신이 지나치거나 편파적이면 비방받게 됩니다. 그래서 비방받지 않도록 하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 신앙은 영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17-19절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라고 말씀합니다. 교회에는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먹고 마시는 음식물이 중심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령안에서 구원의 즐거움을 나누는 곳입니다. 그래서 여기 17절을 보면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씀합니다. 의는 죄사함 받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뜻이고 평강은 의롭게 됨으로 주어지는 은혜를 말하며 희락은 그런 은혜를 입은 사람의 삶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금세나 육신이 목적이 아니고 내세가 목적이고 주님이 중심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에서 너무 음식이나 전통이나 습관이나 문화나 법에 너무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네 번째로 덕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19절에서는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로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라고 말씀합니다. “덕을 세운다” 말은 헬라어로 “오이코도메오”(oikodomeo)입니다. 이 말은 “집을 지어 올라가다”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데 음식물로 하나님 사업을 무너지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인도에 썬다씽이라는 전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눈 덮인 히말라야 산을 넘어 전도하러 가고 있었습니다. 가다 보니까 한사람이 눈 속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는 그를 들쳐 엎고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뒤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나 혼자 데리고 가기가 어려우니 같이 가자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나 혼자 가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가느냐고 먼저 가 버렸습니다. 얼마 가다 보니까 그 사람이 저체온증으로 쓰러져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썬다씽은 두 사람이 한데 엉겨서 엎고 가게 되니까 서로 체온이 유지되어 둘 다 살았다고 합니다. 교회는 교회라는 공동체를 잘 세워야 합니다. 그러려면 모두가 형제애를 발휘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동체를 이루는 일원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먼저 온 사람은 나중 온 사람을 잘 돌보아야 합니다. 건장한 사람은 노약자들을 잘 돌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서로 돌보는 일입니다. 그때 교회 공동체가 건강하고 건실하게 세워져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에서 주시는 메시지이고 교훈입니다.
은혜받기 은혜주기
로마서 14:1-12 / 채규현 목사
이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삽니다. 물론 전 세계적으로 볼 때 다양한 종족들, 다양한 풍습들, 이런 것들이 다 있지만 멀리 종족까지 갈 필요 없이 같은 민족 안에서도, 같은 주변 사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다양한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저도 우리 교회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거듭거듭 느끼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는 정말 신기하구나.’ 하는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렇게 독특할 수가 없어요. 정말 하나님은 개별적으로 다 만드셨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서로 다른 인생길을 가고 서로 다른 성격 ; 어떤 사람은 급한 성격, 어떤 사람은 느긋한 성격, 아무리 태풍이 불어쳐도 주저앉아 있는 그런 성격, 이렇게 성격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취미도 전혀 다르고 입맛도 전혀 다릅니다. 또 믿음생활의 여정도 다 다릅니다. 누구나 다 다른 배경, 얼굴과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 때에 이 세상에 사는 방법은, 그 중에 자기와 연결되고 자기와 비슷하고 자기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사람과만 서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나와 맞는 사람-조금 다를지라도 나와 맞는 사람-이런 사람들을 골라서 어떤 일정한 사회를 형성하고 삽니다. 그러니까 내 나름대로의 원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나갈 때는 어떤 특정한 목적과 이익이 있을 때입니다. 맞지 않아도 회사를 다녀야 되고 맞지 않아도 어떤 그룹에 속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이 이루어졌을 때, 그 그룹의 어떤 특정한 일이 다 끝났을 때에는 다시 돌아와서 자기원래의 원 안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 원안에는 언제나 자기와 맞는 사람들과만 함께 생활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와 지나치게 다른 사람과는 만나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나보다 월등하게 돈이 많은 사람, 월등하게 돈이 적은 사람, 월등하게 교육정도가 높은 사람, 월등하게 교육정도가 낮은 사람 전부 안 만난다는 말입니다. 또 지역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에서 사는 사람들은 서에 사는 사람들을 만날 필요가 없고, 또 서에서 사는 사람들은 동에 사는 사람들을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자기들끼리만 그 안에서 살면 됩니다. 내 생활의 둥지 속에서만 살게 됩니다. 이게 자연스러운 삶인데, 이러한 삶에 익숙해져 있다가 교회에 들어오게 되면, 교회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교회는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오직 교회는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라고 시인하는 사람들”, 이 한 가지 조건만 맞으면 전부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입니다. 다양한 성격과 다양한 입맛과 다양한 여러 가지 특징이 모인 곳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와 동질성을 가진 사람들, 나와 어느 정도 조화를 이루고 어울릴 수 있는 사람들과 사는 데에 누구나 다 익숙해져 있는데 교회 와서 보니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 중에서 나와 맞는 사람들을 고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나와 맞는 사람들하고만 교제하게 됩니다. 나와 맞는 사람들끼리만 서로 만나게 되기 때문에 내버려두면 교회도 세상과 똑같아 집니다. 이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면 자연적으로 우리 인간은 나와 다른 면이 있는 사람에 대해 본질적으로 두려움이 있습니다. 본질적인 거부감이 있습니다. 다른 취향이 있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 어색하고 힘듭니다. 본질적인 힘듦도 있고 실질적인 면도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미국에서 한 교수님이 오셔서 그 분 강의를 제가 통역하고 3, 4일쯤 시간을 내어 이 분께 제주도 여행을 시켜드렸습니다. 제주도는 섬이라 다양하고 풍성하고 신선한 생선요리가 아주 많습니다. 먹을 게 참 풍성하고 많은데, 저와 같이 간 이 미국 교수님은 생선을 안 먹습니다. 내륙지방인 오클라호마 출신이라 생선을 먹어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서도 계속 돼지고기, 소고기만 찾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식당을 가더라도 1인분을 안 주고 꼭 2인분만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 있는 3, 4일 내내 그 좋은 생선요리들 다 놔두고 돼지고기, 소고기만 먹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끼니때마다 제가 뭐 먹겠냐고 물었고, 그 분은 끝까지 돼지고기를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일 마지막 식사는 제가 안 물어보고 매운탕을 먹으러 가버렸습니다. 그 분은 거의 못 먹고 저만 오랜만에 포식을 했습니다. 먹는 게 다른 사람과 여행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본질적으로 나와 다른 사람과 함께 같은 길을 간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인 것입니다. 교회라는 곳이 어떤 곳입니까? 같은 길을 가지 않습니까? 싫던 좋던 일주일에 3번, 4번 같이 만나는 곳입니다. 만나면서 얼굴보고, 작은 그룹마다 모이고, 일을 함께 해야 하고 그런데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연적으로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불안감과 거부감이 있어서 그 사람들과는 교제를 안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부러 관계를 끊습니다. 이렇게 나와 같은 종류의 사람만 모이려고 하는 경향이 유난히 한국 사람이 강합니다. 한국뿐만 아니고 일본,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서양 사람들, 미국 사람들은 훨씬 그런 면이 적고 다양함을 인정합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 전에는 미국을 일컬어 “Melting Pot" 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부대찌개’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다양한 인종들이 다 거기 모여서 녹아져서 새로운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녹아지는 찌개와 같다 해서 “Melting Pot” 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Melting Pot” 이 아니고, “Salad” 라는 것입니다. 샐러드는 양배추, 상치, 여러 가지 야채, 토마토, 버섯, 양파 등 다양한 재료를 넣지만 그 속에서 각각 자기의 맛을 내지 섞이지 않습니다. 마치 미국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인종이 모여서 섞이는 줄 알았는데 결국 안 섞이더라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흑백논리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니던 곳이 필라델피아였는데, 그 곳은 도시 한 가운데가 전부 흑인 동네입니다. 40번가에서 63번가까지 약 20블록 이상이 전부 흑인 동네였습니다. 63가의 길에 한쪽은 흑인 동네, 한쪽은 백인 동네였고 양쪽으로 가게들이 쪽 있는데, 흑인 동네 쪽의 가게에는 흑인들만 갑니다. 백인들이 길을 건너지 않습니다. 백인 동네 쪽의 가게에는 백인들만 갑니다. 흑인들이 절대로 길을 건너오지 않습니다. 무언의 선이 그 길에 그어져 있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단 말입니다. 또 제가 회계학을 공부할 때 미국에서 ‘회계사’ 하면 아주 정형적인 틀이 있었습니다. 회계사는 언제나 두 가지 색깔의 양복-회색과 짙은 곤색-만 입습니다. 만약 입사시험을 보러 회계법인에 면접을 보러 갈 때면 언제나 회색이나 짙은 곤색으로 새로 양복을 맞춰 입고 가야합니다. 멋 부린다고 다른 여러 가지 옷을 입고 갔다가는 첫눈에 떨어집니다. 그런 무언의 선이 있습니다. 회계사는 전부 회색과 짙은 곤색의 양복만 입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유색인종도 못 들어갑니다. 그곳의 중요 계에는 유색인종을 한 명도 받지 않습니다. 사실 이게 미국 법에 걸리는 일인데, 걸리더라도 벌금을 내고 그 사람에게 보상을 해 주는 한이 있어도 그 안에 넣어주지는 않습니다. 자기들끼리의 색채를 끝까지 강하게 유지하려는 경향이 아주 강합니다. 다양함이 인정된다는 미국도 이렇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다양함을 인정하지 않는 면이 한국, 일본, 중국은 더 심합니다. 훨씬 더 획일적인 사회입니다. 그래서 뭐든지 다 같이 합니다. 만약 온 직원들이 다 회식을 하게 될 때 여기서 빠지면 역적이 됩니다. 나쁜 짓도 같이 해야 되고, 언제나 같이 해야 합니다. 빠지는 사람이 없게끔 끝까지 체크를 합니다. 음식을 시킬 때도, 제일 먼저 윗사람이 무엇을 시키느냐에 따라 나머지는 자동으로 결정됩니다. 다양하게 시키지 않고 한꺼번에 다 몰아서 시키는 것입니다. 거기서 유별나게 다른 것 시키면 그 사람은 소외당합니다. 이런 사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다 보니까 나와 다른 사람을 더욱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와 다르면 안돼요. 그리고 생각조차도 흑백논리로 갑니다. 우리 편 아니면 적, 그냥 다른 사람이 아니고 적이 됩니다. 함께 융화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고 내가 이겨야 될 대상, 내가 마침내 누르고 일어서야 될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문화가 교회에까지 들어올 때 문제가 생깁니다. 교회까지 들어와서, 신앙생활에서도 획일적인 신앙생활을 요구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신앙생활의 특징도 나와 똑같아야 된다는 것이죠. 나와 다르거나 나와 다른 종류의 신앙생활의 색깔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리고 세상적 의미의 동질성을 교회 안에서도 찾으려고 거듭거듭 노력합니다. 제가 여러 군데 설교하러 다닐 기회가 많았었는데, 그때마다 제일 먼저 물어보는 말들이 있었습니다. “고향이 어디십니까?” 지금 현재 제가 목사인 것이, 설교자인 것이 중요하지 제 고향이 어디인가가 왜 중요합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면을 우리나라의 각 지방 사람들 전부가 그것을 벗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요. 또, 모르는 사람끼리 서로 만나 이야기를 하면 고향 이야기 다음에 가장 알고 싶어 하는 게 나이입니다. 상대방의 나이를 알아야 나와의 상하관계를 어떤 식으로든 결정하니까 나이를 가장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몇 입니까?”하고 직접 묻지는 못하고 “애들은 몇 학년입니까?” 또는 “언제 학교를 다니셨죠?” 이렇게 물어봅니다. 사실은 이게 다 자기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한 노력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어찌하던지 여러 가지 면에서 자기 나름대로 동질감을 찾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이리 찾고 저리 찾아도 동질감이 없을 때 ,연결점이 없을 때에는 갑자기 분위기가 서먹해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요즘의 한국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초대교회에도 얼마든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연적인 심리가 그러니까요. 오늘 로마서 말씀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가장 대표적인 예가 고린도 교회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유별나게, 가진 자와 -경제적으로 풍족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들의 구별이 아주 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성찬을 할 때에 서로 다르게 부자들은 많은 것을 가져와서 먹고 취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가져온 것이 없어서 못 먹는 일들이 벌어졌다는 말입니다. 또 신분에 따라서 갈라지기도 하고, 남자와 여자의 차별도 많이 두고, 이런 일들이 교회에서 비일비재했습니다. 오늘 특히 로마서 14장 말씀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은 서로 신앙의 색깔이 다를 때, 신앙에서의 믿음의 정도가 다를 때 그 “다름” 때문에 갈라지는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그 당시에는 함께 모여서 파티하고 식사하는 일들이, 집을 떠나서 집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식당이 없었으니까요. 유일한 것이 어떤 신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나오는 음식을 함께 그 주변 사람들이 모여서 먹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니까 오랜만에 파티를 한다면 그 종교의식과 관련된 파티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 때에 믿는 사람들이 같이 동참을 했을 때 어떤 사람들은 그 음식을 먹더라는 것입니다. ‘아니, 저건 신전에 드려진 예물인데 왜 믿는 사람이 저걸 먹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신전에 드려지면 뭐 해, 그 신이 살아있는 신이 아니니 결국은 하나님 것인데.” 하고 먹는 사람, 이렇게 다양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다양함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면 ‘등산 갔다가 절에서 해주는 밥을 과연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런 문제와 비슷합니다. 심지어는 주일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우리가 거룩한 삶을 어떻게 사는 것이 맞는 것인가, 포도주를 먹을 것인가, 카페인이 들어있는 커피를 마실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런 모든 문제들(본질적인 것이 아닌 면의 문제들)에 있어, 다양하게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다양한 믿음의 색깔, 다양한 취향, 다양한 성격, 다양한 배경, 수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교회에 모였을 때, 과연 우리도 세상 사람들처럼 그렇게 그 중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모일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극복하고 보다 더 새롭고 건전하고 건강한 미래지향적인 방법을 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처럼 나와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내 옆에 있을 때에 “과연 내가 어떻게 행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세 가지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선 다양성을 인정해 주자는 것입니다. 우선은 겉으로 보기에 하고 다니는 모습-옷을 입는 것하며, 여자들이 얼굴에 화장하는 것하며- 이런 모든 것들이 다 다릅니다. 그런데 그 다른 다양성을 서로 인정해 주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우리 한국 사람들은 친구들끼리 둘이 길을 가면서도 자기들 이야기를 하지 않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평가하고 다닙니다. “저 사람 옷 입는 게 왜 저러나……. 저 사람은 화장하는 게 뭐 어쩌고…….” 이렇게 다른 사람에 대해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를 서로 인정해 주자는 겁니다. 예를 들어 입술을 빨갛게 칠하던지, 까맣게 칠하던지 서로서로 상대편을 보고 그냥 웃어주자는 것입니다. 다른 면이 보일 때 괜히 거부감을 보이고 “저 사람은 왜 저러냐?” 그렇게 하지 말자는 겁니다. 서로 다를 수 있으니까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주고 존중해 주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다양한 면을 아우를 수 있는 면이 교회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취미나 성격이나 모든 다양한 면을 다 인정해 주자는 것이죠. 그리고 그 다양한 면이 모여서 우리가 모여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그룹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공식적인 그룹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오늘 갑자기 만나서 같이 어디를 가야하는 경우도 있고, 함께 만나서 교회에서 꽃꽂이를 하는 경우도 있고, 같이 종이를 접는 경우도 있고, 같이 김장을 담는 경우도 있는 등 우리 성도들끼리 만남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자기들 끼리끼리 모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럴 때에 나와 다른 그 면을 싫어하지 말고 인정해 주자는 것입니다. 아까 제가 제주도 여행 때의 일을 이야기했지만, 서로 다른 면이 보여지기만 해도 괜찮은데 다른 면이 한꺼번에 모여서 한 그룹에 있다보면 불편한 점이 반드시 생깁니다. 불편한 점이 있게 될 때, 불편하더라도 상대편과 끊임없이 어울리려는 노력을 할 때에 그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그 결과, 내가 변합니다. 성숙한 인격이란 보다 더 다양한 사람들을 내가 포용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성숙의 정도입니다. 내가 적은 분량의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가, 많은 분량의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가가 성숙의 정도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정도의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습니까? 이제까지 저희 교회는 몇 천 명의 성도들이 나와서 크지만, 결국 각 개개의 성도들이 만나는 사람들의 수는 극히 제한적입니다. 한 번 1대 1구역이면 영원한 1대 1구역이었단 말입니다. 이사를 가도 옮기지 않고 계속 따라다닙니다. 그러니까 자기 구역 사람들만 계속 만나게 되고 자기 대 사람들만 알고, 상대편 대는 전부 나와 경쟁상대밖에 안 됩니다. 그렇게 되니까 다양한 사람들을 알지 못하고 이미 나와 어느 정도 동질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 계속해서 만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법입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만 만나기 원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하나님이 교회로 성도들을 모으신 궁극적인 목표가 없어집니다. 왜 교회로 모으십니까? 모으시는 데 여러 가지 목적이 있지만 그 중의 하나가, 믿는 사람들끼리 다양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같이 한 체에 넣고 흔들어서 서로 갈고 닦이어서 아름다운 품성으로 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됩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여러 가지 조직적인 면에서 새롭게 해 주는 것이 저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우리 교회의 많은 모임들을 다 한번씩 흔들고 뒤집어서 새롭게 새로운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조직들을 계속해서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그러면, 수십 년을 한 교회에 다니면서도 처음 만나는 사람을 드디어 만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새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힘듭니다. 새로 사귀어야 되니까 힘들고, 새로 맞춰야 되니까 힘들지만 그것이 지나져야만 합니다. 이것이 계속 순화되고 어떤 조직이든지, 어떤 새로운 사람이든지 만나서 서로 같이 교제하고 사랑하고 아우를 수 있는 능력, 이것이 모든 성도들에게 생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겨질 때 비로소 우리 교회는 완전히 새로운 분위기로 바뀝니다. 누구나 새로운 사람이 올 때도 능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가서 안아주고, 가서 맞아주고, 사랑해주고, 같이 끌어들이고, 같이 일을 하게하고, 이런 면이 중요한 것이죠. 그게 살아있는 교회의 특징입니다. 교회가 죽어지게 되면 자기가 아는 사람들, 자기가 편한 사람들끼리만 모이게 됩니다. 그 물을 한 번 흔드는 겁니다. 마치 고여 있는 물을 태풍이 흔들 듯이 그래서 새로운 물을 만들 듯이 말입니다. 새로운 물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계속 여러분이 만나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사람들, 여러분과 전혀 다른 특징과 성격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만나게 될 때에 그 다름이 본질적인 차이-신앙의 근본과 뿌리에서의 차이가 아니면 우리가 인정해 주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아우를 수 있는 면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신앙적인 여러 가지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믿음의 색깔도 여러 가지 다양한 면이 나타나길 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경배할 때,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찬양할 때 손을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경배할 때 손을 안 들어야 제대로 경배가 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을 서로 판단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서로 상대편을 인정해 주자는 것입니다. 나와 다르다고 상대편을 무시하거나 멸시하거나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경건이란 이름이 다양하게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찬송을 하는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방언을 못하면 마치 천국의 3등시민처럼 생각하는데 그것도 옳지 않습니다. 하는 사람도 있고 안 하는 사람도 있고, 찬송도 이렇게 하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하는 사람도 있고,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습니다. 본질이 아닌 부분의 다양한 것은 우리 교회에서 얼마든지 서로가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 그런 은혜가 있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로 우리가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판단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차피 제한적인 존재라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편의 뜻은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럴 때에 잘못하면 내 중심적으로, 알지 못하는 상대편을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습니다. 그러지 말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어떤 때에 성경이 막 읽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막 성경을 읽고, 성경이 머릿속에서 돌아가고, 밤에 자다가도 성경이 생각나고, 성경 속의 역사가 그림으로 보여지기도 하고 그러면 정말 성경에서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보면 ‘왜들 성경을 안 읽지?’ 이런 생각이 듭니다. 또 어떤 경우에 막 기도를 하면 기도의 은혜가 있습니다. 3일씩 금식기도하고, 계속 기도하고 또 성도들을 보면 ‘정말 기도생활 안 한다’ 이렇게 느낍니다. 내가 열심히 하나님 일을 하기 위해서 매일 교회에 오고 일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은 왜 한번도 교회에 안 오지?’ 할 수 있습니다. 내 주관적인 생각과 주관적인 삶 속에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게 되는데 그러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전에 어느 미국 목사님들과 한국 목사님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기회가 있었습니다. 미국 목사님이 새벽 예배를 인도하고(그 분에겐 새벽예배가 생전처음이었죠) 다들 기도했습니다. 새벽예배가 다 끝나고 나서 거기 모여 있던 한국 목사님들 중 한 분이 “미국 목사님들은 도대체 기도를 안 한다, 기도할 줄도 모른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 그랬더니, 한국 목사님들은 나무뿌리 뽑을 정도로 막 흔들어가면서 기도하는데, 미국 목사님들은 의자에 앉아서 턱을 괴고 눈을 감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기도 안하고 왜 그러고 있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미국의 다른 목사님은 “그 분은 그게 기도하는 겁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의 크리스천들도 개인적인 기도 생활 정말 열심히 합니다. 한국적 신앙의 특징이 뭐든지 모여서 하는 것입니다. 새벽기도도 모여서 해야 하고, 경건생활도 성경 읽기도 모여서 하는 데에 보다 더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 사람들은 모여서 하는 것보다 개인적으로 하는 데에 훨씬 더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함께 모여서 통성기도하자고 하면 별로 잘 못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신앙이 우리보다 못한 게 아닙니다. 서로 다른 것이죠. 그 다른 면을 서로 인정해 주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이것을 꼭 당부하고 싶습니다. 함께 교회 일을 하면서 서로 의견이 부딪히고, 서로 의견이 달라지고, 감정이 상할 수도 있고, 같은 그룹에 모여서도 다른 면 때문에 서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와 다른 그 측면에 대해서 언제나 최선으로 해석을 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최악으로, 제일 나쁜 쪽으로 해석을 해버리는데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이죠. 나와 다르고 의견이 다르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나름대로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자는 것입니다. 내가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그리고 저 사람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이 최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다르더라도 나는 나름대로 하나님 앞에 최선을 행하고, 그 사람도 그 사람 나름대로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걸 인정해 주자는 것이죠. 이런 면만 있으면 교회의 수없이 많은 문제들이-거의 대부분의 문제들이 그냥 잠재워집니다. 다르다고 한 면 때문에 무조건 상대편을 공격해서는 안 됩니다. 그 분 나름대로 은혜롭게 무엇인가 하려고 하는 것을 판단하지 말고 서로 인정해 주자는 것입니다. 이런 면이 서로 필요할 것 같습니다.
자, 다양함을 인정해주고, 판단하지 말고, 마지막으로는 우리에게 있는 자유를 현명하게, 지혜롭게 사용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하나님을 믿다보면 하나님의 은혜 안의 자유가 무엇인지 점점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에 오히려 내 자신을 자유롭지만 절제시키는 행동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까 제가 절밥(절에서 해 주는 밥)이야기를 했는데, 결혼 전에 믿지 않았을 때에는 절밥을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지금 목사로서 절에 가서 절밥을 먹는다면 시험들 성도들이 혹시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안 먹습니다. 이것은 아주 특정적인 예이지만, 다른 수많은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할 수 있는 일이 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 보기에 시험 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안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일을 할 때에도 과연 내가 이 일을 함으로써, 내가 이 행동을 함으로써, 내가 이 말을 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절제입니다. “누가 뭐라든 나는 기어이 이 일을 하겠다.” 이것은 자유를 남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모였을 때 서로 서로 상대편의 뜻을, 상대편의 입장을 생각해주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입장을 생각해 주다가도 아차 생각 잘못한 것은 받는 사람이 선하게 해석해주면 되고, 서로서로 그래도 상대편을 어느 정도 생각해주고 사랑해주고 상대편 때문에 내가 절제한다는 뜻이 전달되는 그 순간에 서로 화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천국이 “관계”에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좋은 인간관계, 사랑의 관계 속에 천국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더라도 관계가 깨지면 여러분은 지옥 속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천국의 관계, 그리고 그 천국의 관계를 전천후의 천국의 관계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다양한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 모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양한 사람들끼리 서로 모아서 서로 부딪히면서 그 속에서 어떠한 환경, 어떠한 관계에서도 천국을 놓지 않는, 전천후 천국 신앙 이것을 위해서 교회로 모으십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그러한 전천후 천국 신앙들이 더 꽃을 피우기 원합니다. 모든 주의 백성들이 함께, 서로 서로 누구나 포용하면서 갈 수 있는 천국 백성들의 모임이 우리 중앙교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비판하지 말고 이해하라
로마서 14:1-12 / 조상호 목사
스코트 팩이라는 유명한 종교 작가가 있는데 그가 쓴 글 가운데 <랍비의 선물>이라는 대단히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진리를 찾고자 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산간에 수도원 비슷한 것을 지어놓고 공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 완벽한 이상향을 건설하려는 이상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동생활을 하다보니 문제가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갈등이 커지고 서로 간에 불신만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진리를 찾기는 커녕, 서로 간의 비판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나중에는 그곳에서의 공동 생활이 지옥과 같은 생활이었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 그곳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많은 수로 시작했는데 하나 둘씩 흩어지다보니 결국 5명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수도원 문을 닫을 것인가, 아니면 계속 존속시킬 것인가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고민하던 그들은 자신들이 평소에 존경하는 랍비 한 사람을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수도원 문을 닫아야 할까요?" 지혜로운 랍비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다섯 사람 남았지? 자네 중에 한 사람이 꼭 메시아가 될 걸세.." 존경하는 랍비의 말을 들은 5명의 젊은이들은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중에 한 사람이 메시아가 된다고? 누구지? 의심 많은 토마스일까? 의심은 많지만 그는 정직한 사람이 아닌가? 그의 정직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혹시 그를 쓰시려는 것은 아닐까? 제임스? 대항을 잘하는 그 친구, 그러나 그 친구 마음속 밑바닥에 깔려 있는 정의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메시아로 쓰시려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필립? 필립은 아주 무능하고 무력해 보이지만 사랑은 많은 사람이지. 하나님께서 필립을 쓰시는 걸까? 아니면 요한? 감상적인 사람이긴 하지만, 기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쓰실지도 몰라. 아니면 아론인가? 그는 욕심 많은 사람이긴 하지만, 열정적인 사람이니까 혹시 그를 쓰시려는 게 아닐까?
그들 중에 한사람이 메시아가 될 것이라는 존경하는 랍비의 말에 젊은이들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동료들의 모습 속에서 단점밖에 찾을 수 없었는데 이제는 동료들에게서 가능성과 장점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일까? 그들이 시각을 바꾼 날부터 그 수도원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서로를 비판하던 그들은 서로를 존경하고 서로를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 수도원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수도원은 더 이상 문을 닫아야 할지, 계속 존속시켜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태도에 따라서 우리의 공동체는 달라집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교회가, 우리의 공동체가 계속 발전할 수도 있고 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을 하면 사랑이 되돌아옵니다. 그러나 비판하면 비판이 되돌아옵니다. 사랑은 산산조각이 난 공동체를 하나로 만듭니다. 그러나 비판은 하나된 공동체를 산산조각으로 만듭니다. 물론 어느 분들은 발전하려면 비판을 들어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그래서 날카로운 비판의 칼을 휘두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비판과 충고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희승씨의 국어사전을 살펴보니, 비판은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충고는 충심으로 남의 허물을 고치도록 타이르는 것, 착한 길로 권고하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진심 어린 마음으로 충고할 수 있습니다. 이 충고는 남을 살려줍니다. 그러나 비판은 남을 내 기준대로 판단하고 평가하다보니, 남을 아프게 합니다. 남에게 해를 끼칩니다. 그러므로 날카로운 비판은 사람을 죽이지만, 사랑스러운 충고는 사람을 살립니다. 이와 같이 비판이란 위험한 것입니다.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대단히 무서운 작용을 합니다.
사도 바울이 활동할 당시의 로마교회는 많은 문제 중에 특별히 비판하는 문제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두가지 문제를 놓고 비판하였습니다. 하나는 먹는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날짜 문제였습니다.
먹는 것이 문제
첫째로 먹는 문제를 놓고 서로 의견이 갈려서 비판하게 되고 급기야 교회 안에서 큰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먹는 것이 문제입니다. 과거 사람들도 지금 못지 않게 먹는 일을 중요시 한 것 같습니다. 로마교회의 어떤 성도들은 고기는 쳐다보지도 아니하고 정육점 근처에도 가지 아니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에서는 고기를 우상에게 제물로 바친 후, 그것을 시장에서 판매하곤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상에게 제물로 받쳤던 고기를 먹는 것은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아예 고기는 전혀 먹지 아니하고 채소만 먹었습니다. 반면에 어떤 성도들은 구운 고기 먹고 싶으면 구워서 먹고, 튀겨먹고 싶으면 튀겨 먹고, 날 것으로 먹고 싶으면 날 것으로 먹었습니다. 거리낌없이 마음껏 고기를 먹었습니다.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라 할지라도 내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감사하고 먹으면 아무 문제될게 없다고 주장하며 주저하지 않고 먹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의 문제는 고기 먹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상대방의 인신을 공격하며 비판하는 단계로 크게 발전했습니다. 자치 잘못하면 교회가 깨어지게 될 위기에 직면하였습니다.
비판보다는 이해하라
사도 바울은 이러한 위기 상황에 처해있는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나와 의견이 다른 형제를 비판하지 말고 사랑으로 이해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여기에서 '받으라'는 말은 호의적으로 친절하게 맞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즉 믿음이 약한 사람을 비판하지 말고 사랑으로 이해해주라는 말입니다. 수주일 전에 말씀 드린 적이 있지만, 지금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자리를 둘러보면, 나이, 성별, 직업, 학력, 등 여러 종류의 분들이 앉아 계십니다. 또 믿음의 생활을 시작한지, 1주일 되신 분, 한달 되신 분, 1년 되신 분, 10년, 20년, 수십년 되신 분 등 믿음의 정도가 제각기 다릅니다. 한 자리에서 함께 찬양을 드리며, 함께 기도를 하며,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믿음의 키 높이는 각각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키 높이가 서로 같지 않고,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장성한 분들은 믿음이 아직까지 연약한 분들을 비판하기보다는 따뜻한 사랑으로 이해해 주어야 합니다. 물론 이 말은 믿음이 연약한 자의 잘못된 행동까지 무조건 인정해 주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해'와 '인정'의 의미에 대해서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이해는 영어로 understand, 즉 '누구 밑에 서다'라는 원래의 의미로서, 자기 자신이 밑으로 내려가서 상대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반면에 인정은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이 옳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을 하는 사람을 보고, 그 잘못을 인정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아직까지 믿음이 연약하다면 그 사람을 이해해주어야 합니다.
EX) 불란서의 나폴레옹은 구라파를 점령하고, 점령지마다 부대를 주둔시키며 곳곳에 보초병을 세웠습니다. 하루는 나폴레옹이 한밤중에 보초병들의 경계태세를 살펴보려고 나갔습니다. 어느 보초막에 갔더니 한 사병이 너무나 지치고 피곤해서 자신의 총을 옆에 세워 놓은 채, 쭈그리고 앉아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 때 나폴레옹은 화가 났지만, 화를 내지 아니하고 손수 그 사병이 놓아 둔 총을 들고 보초를 섰습니다. 한참만에 깨어난 보초병은 자기 대신 보초를 서고 있는 사람이 나폴레옹 장군임을 알게 되자, 어찌할 줄을 모르고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래, 얼마나 피곤한가? 잠깐 쉬지. 내가 대신 보초를 서 줄께"라고 위로했다는 것입니다. 이 때 그 사병은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일생 동안 나폴레옹을 위해서 충성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용납합시다. 그리고 이해합시다. 나폴레옹은 경계근무시간에 졸고 있는 병사의 잘못을 알았습니다. 그 병사는 무서운 형벌을 받을 수도 있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그 병사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폴레옹이 그 병사의 잘못을 인정해 준 것은 아닙니다. 나폴레옹은 단지 그 병사의 피곤한 상태를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잘못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지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비판하기보다는 사랑으로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받아 주셨는데
그들도 하나님께서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그들도 하나님께서 받아주셨습니다. 그들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받아주셨다면 우리도 받아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셨다면 우리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또 4절을 보겠습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주님께서 믿음이 약한 자들도 세워주셨습니다. 주님이 세우셨는데 누가 끄집어내리겠습니까? 누가 허물어 버리겠습니까? 아무도 허물지 못합니다.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비판하지 마십시오. 비판하면 다 도망갑니다. 비판하면 앞에서는 듣는 채 하다가도, 다음부터는 아예 저만치 그 사람의 얼굴만 보여도 도망갑니다. 비판하지 마시고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잘못을 하고 있지만, 우리 젊은 청년들을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고 있어도 우리 자녀들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연약한 분들을 사랑으로 용납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가정에서, 사업장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어디에서나, 남을 세워주시는 사람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날짜 지키는 것이 문제
로마 교회의 두번째 문제는 날짜 문제였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금요일저녁부터 토요일저녁까지를 안식일로 거룩하게 지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 날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안식일 대신, 주일에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토요일이나 주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날이 중요하기 때문에, 아무 때나 예배 드려도 좋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예배날짜 문제 때문에 교회가 어려움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소식을 들은 사도 바울은 날짜문제로 말미암아 언쟁을 하는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5절 말씀을 가지고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한대로' 즉 자기 믿음의 분량대로 소신껏 판단하고 행하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각자가 알아서 판단하고, 알아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목사님! 목사님께서 분명히 내 믿음의 분량대로 하라고 하셨으니까, 이제부터 나는 내 마음대로 행동하고 내 마음대로 살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기준이 있습니다.
6절 말씀에서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주를 위하여 행하라:
6절에서 반복되는 말이 있는데 바로 '주를 위하여'라는 말입니다. 주를 위하여 날도 지키고 주를 위하여 음식도 먹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소신껏 돼지 삼겹살을 바비큐 해서 먹든지, 찌개로 끓여서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주님을 위한 것인지 아닌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또 비늘 없는 생선인 뱀장어를 먹지 않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주님을 위한 것인지 아닌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지국을 먹든지, 회를 쳐서 먹든지, 소주를 마시든지, 담배를 피우든지, 믿음의 분량대로 소신껏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준은 주님을 위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또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고 토요일에 드릴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아닌, 저 푸른 초원 위를 예배당 삼고 골프장에 가서 예배를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준은 주님을 위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또 사람 낚는 훈련을 한다고 낚시터를 무대 삼아 그곳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준은 주님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피 값으로 사셨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 몸은 우리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대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7절과 8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할렐루야! 여러분!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입는 것도 바르는 것도 항상 주님을 위하여 행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를 위하여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위하여'라고 외칠 때, 저와 여러분들은 '주를 위하여'를 외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입니까?
판단은 주님께 맡기라
그런데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과연 저 형제가, 저 자매가, 저 집사가 '지금 주를 위하여 살고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답지 못한 모습들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따지지 마십시오.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판단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별로 바람직한 모습이 눈에 보인다 할지라도 그 판단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판단은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이 다 옳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EX) 어떤 기차의 차장이 승객의 표를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기차를 잘못 탔으니 다음 역에서 내려서 갈아타십시오"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차표 검사를 해 나갈수록 잘못 탄 손님들이 점점 늘어갔습니다. 기차 안이 온통 수라장이 되었을 때, 손님 한 사람이 차장에게 "차장님! 실례지만, 혹시 차장님께서 기차를 잘못 타신 것 아닙니까?" 알고 보니 정말로 차장 자신이 기차를 바꿔 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차장처럼 내가 잘못되어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내 생각대로 판단하고, 지적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우리는 재판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어차피 우리 자신들도 불완전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판단하는 것은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10절~12절까지 말씀을 보겠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모든 사람은 한사람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되는 데, 그 때 주님이 재판하고 주님이 판단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보다 먼저 다른 형제들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월권행위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은 내 권한밖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고유 권한입니다. 우리가 결코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고 따뜻한 사랑으로 세워주고 격려해 주십시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의 공동체에 믿음이 장성한 분 뿐 아니라, 믿음이 연약한 분들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도 받아주시고 세워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연약한 분들을 비판하지 말고 사랑으로 이해하고 세워 주십시오. 모든 판단은 선악간에 판단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하시며, 매일 매일 주님을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무엇을 위해 먹고 마시는가
로마서 14:1-23 / 이병일 목사
현재 우리나라에서 지키는 명절 중에 크게 지키는 명절인 설입니다. 마을 공동체의 해체로 수많은 풍속과 놀이들이 사라졌지만, 가족들 끼리 지내는 명절인 설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설’이란 이름의 유래는 3가지 정도로 전해져 옵니다. 먼저, 새해의 첫날이라 아직 익숙하지 않고 낯설다는 의미로 ‘낯설다’의 어근인 설에서 전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처음 시작이라는 뜻의 ‘선다’라는 말에서 비롯되어 시간이 흐르면서 ‘선날->설날’로 연음화 되었다는 설이 두 번째입니다. 마지막으로 삼가다는 뜻의 옛말인 ‘섧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인데, 설을 한자어로 신일(愼日)이라 표현했던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암튼 설이라는 의미에는 새해 첫날부터 “몸가짐을 조심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신라시대에 새해아침에 서로 축하를 하며 왕이 군신에게 잔치를 베풀고 해와 달 신에게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설을 쇤 것이 오래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현재와 같은 가족중심의 설은 [고려사]에 9대 속절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고, 조선은 4대 명절의 하나였습니다. 한때 1895년부터 태양력을 채용하면서 서양의 양력설과 음력설의 논쟁이 되어 일제와 광복 후 국가적인 유도로 양력설을 지정한 적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실제로 대다수가 음력설을 지냄에 따라 1985년 “민속의 날”로 공휴일이 지정되고 현재는 3일 연휴의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까치설날”의 유래를 아시나요? 국어학자 서정범 교수가 제시한 이론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섣달 그믐날을 ‘까치설’이라고도 하는데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라는 노래(윤국영 작사작곡, 1927년)가 있기 전에는 까치설이 없었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작은설을 가리켜 ‘아치설’, ‘아찬설’이라고 했습니다. ‘아치’는 ‘작은’(小)의 뜻을 지니고 있는데, 아치설의 ‘아치’의 뜻을 상실하면서 ‘아치’와 음이 비슷한 ‘까치’로 엉뚱하게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 외에,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신라 소지왕 때 왕후가 한 스님과 내통하여 왕을 해하려 하였는데 까치(까마귀)와 쥐, 돼지와 용의 인도로 이를 모면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쥐, 돼지, 용은 모두 12지에 드는 동물이라 그 날을 기념하지만 까치를 기념할 날이 없어 설 바로 전날을 “까치의 날”이라 하여 까치설이라고 하였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암튼 어렸을 때부터 명절은 즐거운 날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음식이 풍성했다는 것입니다. 방앗간에서 떡을 뽑아오면 이웃에 조금씩이라도 나누어 돌리던 생각이 납니다. 어느 집을 가더라도 풍성한 음식을 뿌리치지 못해서 저녁이면 속이 더부룩해졌던 날이 많았습니다.
음식을 함께 먹고 나누는 것은 어느 문화권에서든 공동체와 계약, 그리고 삶의 방식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람으로서 가장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숨쉬는 것 다음으로 먹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해야 하는 것이기에 먹는 일에 큰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예로부터 계약을 맺은 후에는 함께 먹음으로써 그 계약을 성실하게 지키겠다는 다짐을 하는 징표로 삼았습니다. 또한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통과의례를 행할 때에는 언제나 음식을 나누거나 잔치를 하였습니다.
개신교에서 거룩한 예식으로는 세례와 주의만찬이 있는데, 주의만찬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그 의미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것이며,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이 믿는 일에 하나임을 확인하는 예식입니다. 따라서 특별히 교회에서 행하는 주의만찬 뿐만이 아니라 어디에서 먹든지 무엇을 먹든지 예수님의 희생과 모든 생명의 희생을 기억하라는 의미가 주의만찬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이 이 땅에 빵으로 오신 예수님의 삶을 따른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주일에 공동식사 뿐만이 아니라 뒤풀이를 통하여 삶과 정을 나누는 데 익숙해 져 있습니다. 단순히 먹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식을 준비하거나 설거지를 하는 데에도 서로가 도우며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의미에서 좋은 전통이고 삶입니다. 어린이 청소년들부터 나이 많으신 장로님들까지, 여자나 남자나 주방에서 일하는 모습을 볼 때에 진정한 공동체의 단면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스님들이 식사하는 것을 ‘발우공양’이라고 합니다. 발우는 ‘양에 알맞은 그릇’이라는 의미인데, 스님들이 사용하는 식기입니다. 그 발우공양의 정신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나누어 먹는 평등공양, 자기의 발우를 깨끗하게 보관하고 사용하는 청결공양, 고귀한 음식을 낭비하지 않는 절약공양, 공동체의 단결과 화합을 이루는 공동공양입니다. 또한 공양은 밥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람들의 삶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시간에 하루의 일과나 개인 신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대중공사’ 시간이 있습니다.
발우공양 때 읊는 오관계라는 게송이 있는데, 밥에 대한 경외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손에 손이 많이 가고 힘에 힘도 퍽은 들어도, 곱게도 지고 지며 바로도 되고 되어온 이 밥을 우리 지은 노릇으론 이에 구태여 받을 수 있사오리까. 거듭 잘못이 없게스리 걸챔부지의 마음을 막고 오직 깨나는 약으로 우리 맡은 것을 맞추기까지 이바지어 삼가 들렵니다.”<유영모 역> 사람들의 힘과 정성으로 올려진 밥을 받기에 우리의 삶이 부족하지만, 온갖 욕심을 버리고 그 밥을 약으로 받들어서 진리를 행하기 위해 음식을 먹겠다는 다짐이 들어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일미칠근(一米七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쌀 한 톨에는 농부의 땀방울이 일곱 근이나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모든 생명을 연장하고 키우기 위한 음식이 요즘에는 너무나 경시되고 있습니다. 대지의 기운을 쥐어짜서 대량으로 생산한 먹거리를 독점하거나 몸에 해로운 약품을 첨가하여 이윤만 많이 남기려하는 일들이 자주 들립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많이 먹어서 탈이 나고, 어떤 사람은 먹지 못해서 병에 걸립니다. 이 모두는 밥을 통하여 다른 사람, 다른 생명, 자연과 하나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거나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음식으로 서로를 비난하거나 정죄하는 상황에서 주어진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거룩한 음식규정이 철저하다는 것은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당시 로마에서 유통되는 모든 고기들이 신전에서 제물로 사용되었던 것이기 때문에 우상의 제물이라고 하여 이것을 억을 수 있느냐 먹지 말아야 하느냐를 놓고 논쟁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고린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러한 거리낌은 오늘 우리 주변에서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제사상을 차리지 않거나 그 음식을 먹지 않거나 아예 그 자리에 참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요즘에는 웰빙 바람을 타고 먹거리에 대한 태도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무공해냐 무농약이냐 유기농이냐, 방부제가 첨가되었느냐, 토종이냐 아니냐, 재배한 것이냐 야생의 것이냐, 몸에 좋으냐 나쁘냐, 더 나아가 채식만 해야 하느냐, 육식을 어느 정도 하는 것이 좋은가 등이 음식에 대한 중요한 화두로 등장하였습니다. 건강 즉 몸의 평화를 위하여 많은 노력과 돈을 들입니다. 가끔 아이들이 사탕이나 과자나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으면 기겁을 하는 부모도 있습니다.
바울은 먹고 마시는 일을 하느님 나라와 연결시킵니다. 단순히 먹고 마시는 것보다는 그 속에 성령 안에서 실현되는 정의와 사랑과 기쁨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먹고 마시는 일 때문에 분열이 일어난 로마 교회를 향한 바울의 외침입니다. 밥상을 나누는 사람들,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한 공동체 안에서 중요한 것이 정의와 사랑과 기쁨입니다.
밥을 나누는 행위를 사회적으로 해석하면 정의의 실천을 의미합니다. 밥의 독점과 무기화가 아니라 그 속에 살림과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마가복음 6장에는 두 개의 잔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헤롯의 생일잔치이고, 또 하나는 빈들에서 일어난 예수님을 따르는 오천 명 무리들의 잔치입니다. 헤롯 안티파스의 생일잔치에서는 세례 요한을 죽이기 위한 음모와 죽임이 있었으며, 생명의 잉태와 생명의 창조를 축하하던 생일잔치는 ‘의롭고 거룩한’ 예언자를 참수(斬首)하는 죽임으로 치닫습니다. 음식이 담겨 있어야 할 그릇에는 생명의 빵이 아닌 사람의 머리가 음식처럼 담겨 있었습니다.
반대로 빈들에 모인 무리들의 잔치는 나눔과 살림의 기적이 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역은 다른 사람들과 음식을 나눔으로써 생명을 나누는 살림의 운동입니다. 나의 밥을 위하여 일하는 것은 단순한 물질적인 활동이지만, 남의 밥을 위해 일하는 것은 거룩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내어줌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를 이루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함께 먹는 무리들은 함께 먹음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새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는 이렇게 말씀과 밥의 공동체 곧 주의만찬의 공동체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밥을 나누는 행위는 평화의 나눔입니다. “만일 당신이 음식 때문에 당신의 형제를 괴롭힌다면, 당신은 더 이상 사랑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그 사람을 위해서 죽은 바로 그 사람을 망하게 하지 말라.”(15절) 먹는 문제로 서로 남을 비방하거나 걸림돌이나 장애물이 된다면 사랑이 없으며, 이는 공동체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먹는 사람은 먹지 않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정죄하지 마시오. 왜냐하면 하느님이 그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3절) 먹는 일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서 서로를 업신여기거나 정죄하지 않을 때 공동체의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화를 위한 일과, 서로를 세우는 일을 따라갑시다.”(19절) 서로를 부추기고 격려하고 힘이 되어 줌으로써 그리스도의 평화를 공동체 안에서 실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밥을 나누는 일이 기쁨을 더욱 크게 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음식 때문에 망치지 맙시다.”(20절) 밥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삶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고, 자신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하느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밥을 함께 나누는 것처럼 우리의 삶을 나눔으로써 슬픔을 기쁨으로 승화시키고, 기쁨을 더욱 크게 만드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공동체에서 밥을 나누는 행위를 말하는 잔치는 서로에게 기쁨을 주고 신뢰를 쌓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시는 일로 대표되는 우리의 삶의 한 부분과 하느님 나라의 연관성을 생각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성령이 인도하시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그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의 목적이며, 먹고 마시는 일을 통해서 상징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삶이 먹고 마시는 일처럼 되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먹고 마시는 행위가 중요하게 떠오르는 명절이나 잔치에서 하느님 나라를 생각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먹고 마실 때마다 하느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와 기쁨을 생각할 것입니다.
신앙의 삼 단계
로마서 13:1-8 / 김태복 목사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은 크게 둘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변화 받지 못한 교인과 변화 받은 교인입니다. 농부들은 봄이 오면 씨앗을 뿌립니다. 씨앗은 그냥 두면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무슨 씨든지 땅에 묻어야 껍데기는 썩어 없어지고 그 속에 있는 생명체인 배아(胚芽)라는 곳에서 싹이 나오고 줄기가 생기고 어느 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변화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인들이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는 것으로는 변화가 안 일어납니다. 씨앗 그대로 있는 것과 같습니다.
씨앗이 변화되려면 땅 속에 들어가 껍데기가 썩어 없어져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여 거기에서 겉사람이 깨어지고 우리 속에 있는 생명체인 영에서 부활의 싹이 날 때만이 그 때부터 변화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동안 우리 교인들은 모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자아라는 겉사람을 못박아 버리십시오. 그러면 그 때부터 우리 영의 변화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변화의 싹은 계속 자라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면, 변화 받은 교인들을 셋으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신앙성장의 삼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를 들으시면서 여러분은 어느 종류의 교인에 속해 있는가? 어느 신앙단계에 이르고 있는가를 스스로 분석하시고 한 단계 더 높은 신앙에 이르시기를 바랍니다.
1. 믿음이 연약한 자, 연약한 단계에 있는 자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중생은 받았으나 아직도 어린 아이 신앙을 벗어나지 못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 때는 마음은 원이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자기는 흘리지 않고 먹고 싶은데 먹다보면 국물이 흘려 옷이 더러워지고, 밤에 오줌을 싸고 싶지 않은데 자고 나면 이부자리에 지도를 그려놓고 있습니다. 자기는 잘 달리고 싶은데 넘어져서 무릎에 피가 나고, 자기는 용감하게 일어나고 싶은데 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교인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교회와 세상에 양다리를 걸치고 삽니다. 교회 나올 때는 교인 같은데 세상에 나가면 교인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로 구분이 안 되는 삶을 삽니다. 먹을 것 다 먹고, 거짓말이나 부정한 일들도 버리지 못 하고 있습니다. 교회 나와서는 회개하고 결심을 하지만,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넘어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어느 분은 너무나 죄의식에 싸여서 교회를 떠나기도 하지만, 어느 분은 양다리 걸치며 계속 살다보니 어느 날부터 아예 위선적인 삶을 삽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에 나오는 로마교회는 지엽적인 문제로 많은 논쟁을 벌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로마제국 판도 안에서는 시장에서 파는 고기들이 대부분 우상에게 먼저 제물로 드렸던 것이므로, 어느 분은 이를 꺼림칙하게 여기어서 아예 채식만 하는데, 어느 교인들은 어쩔 수 없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이 많았고, 또한 날짜에 대한 시비도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토요일로 지키고 기독교인들은 주일을 지킴으로 누가 옳으냐의 시비로 교회가 시험의 기운이 가득 차게 되었던 것입니다
더 나가서는 소위 신앙적으로 살려고 힘쓰는 자들이, 양다리 걸친 약한 교인들을 사정없이 공격하는 일들로 인해 상처를 받는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도 그런 일이 많습니다. 우리가 우상숭배나 음란한 짓, 부정을 저지르는 것은 분명한 죄임으로 더 이상 논의할 일이 못되나, 한국교회만 유독 가지고 큰 문제는 술 담배 문제로, 교인들 중에 이 문제로 고민하는 분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아무리 끊으려고 해도 인이 박혀서 결심대로 끊어지지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신학적인 문제입니다. 성경에 분명히 금지하는 말씀이 분명치 않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은 있으나 한 두 잔을 금하는 말씀은 없고, 더 나가서는 담배를 언급한 곳이 전혀 없습니다. 특히 술 담배를 취하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의 문제는 교회를 다니면서 술 담배를 먹는 자는 마치 중죄인인 것처럼 취급하는 것입니다.
어느 여집사님은 남편이 모처럼 교회를 나오는데 출석한지 얼마 안 되는 때부터 술 담배를 끊으라고 윽박질러댐으로 나중에는 견디다 못해 교회까지 그만 두게 합니다. 구원 문제에 비하면 술 담배 문제는 만 분지 일도 안 되는 것인데, 그 문제로 교회를 떠나게 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각자 신앙의 양심에 맡길 수밖에 없고 또 요즈음은 술 담배가 건강에 얼마나 해롭다는 것을 매스컴이 계속 강조하고 있음으로 스스로 끊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분명히 명심할 것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하면서 계속 교회와 세상에 양다리 걸치며 살아서는 안 되는 사실입니다. 믿음이 자라야 합니다. 가정에서 어느 아이가 자라지 않고 계속 어린 아이로 남아 있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픕니까? 하나님도 어느 성도가 믿음이 자라지 못한 채 항상 넘어지는 상태에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우실까요? 믿음이 자라려면 십자가에서 자아가 계속 못 박혀야 합니다.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그러면 계속 부활의 능력을 통해서 믿음이 자랄 것이며, 그와 동시에 자연적으로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1998년 '그 해의 교육자'로 뽑힌, 코페이빌레 대학장인 맥파랜드 박사는 졸업식에서 자기의 제자 낸시 홀링 스워드의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낸시와 오빠 둘은 어려서 부모가 죽음으로 난데없이 고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삼촌 벤이 그 아이들을 양자 양녀로 맞아들이려고 하는데 법원에서 입양을 허락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삼촌이 알코올 중독자라는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삼촌 벤은 판사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맹세하기를 "판사님께 두 가지 약속을 하겠습니다. 첫째, 오늘부터 술을 끓겠습니다. 둘째, 이 아들 셋과 내 아이 셋을 위하여 날마다 저녁에 기도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판사는 이 술주정꾼의 첫 번째 약속은 믿지 않았으나 두 번째 약속은 특이하기 때문에 우선 30일 동안 시험 기간으로 아이들을 맡기기로 했습니다.
과연, 벤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고통과 싸우며 술을 끓고 저녁마다 아이들을 모아 기도하며 공장에도 결근하지 않고 시간 외 근무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벤은 자기 아이 셋과, 양자 양녀 셋을 모두 대학까지 졸업시킬 정도로 장한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삼촌 벤은 아이들에게 늘 말하기를 "이 아버지를 보았지? 하나님이 도와 주시면 누구나 새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 그리고 한 사람이 거듭나면 많은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동안 삼촌 벤은 얼마나 자기와의 싸움에서 고통을 받았을까요? 아마 술이 먹고 싶어 견딜 수 없을 때마다 하나님이 앞에 엎드리어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고 울면서 자기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구함으로 이런 변화의 역사를 만났을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이여, 아직도 변화 받지 못한 분들은 이번 사순절 기간동안 주안에서 변화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변화는 받았지만 아직도 어린아이의 연약한 믿음을 가진 분들은 하나님께 간절히 구함으로 믿음이 한 단계 더 성장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믿음이 강한 자, 강한 단계가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자라면 청소년이 됩니다. 청소년 때는 대단히 강해집니다. 하루 다르게 성장하면서 힘과 능력이 넘쳐납니다. 고등학교 정도 되면 아버지와 씨름해도 아버지가 질 정도로 강해집니다. 더 나가서는 과거에는 남이 나를 도와주었지만, 청소년이 되니까 부모를 돕고 이웃을 돕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믿음이 자라니까 점점 강한 신자, 여러 가지 은사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어린 신앙일 때는 자기 자신을 이기지 못하여 밤낮 넘어지는 신자였습니다. 신년 초부터 결심하는 것이 많았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기로 하고 새벽기도를 시작했지만 한 달도 못되어 잠을 이기지 못 함으로 실패하고 혈기와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고 단단히 결심했지만 어느 날 보니 여전한 것을 보면서 '나 같은 것은 아무리 애써도 소용이 없어'라는 자포자기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서 하나님께 나아가 능력을 구하십시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다시 일어나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그러면 놀랍지요. 아이들이 넘어지고 깨어지는 속에서 점점 강하게 되고 어느 날부터 어린 아이의 상태를 벗어나는 것처럼, 넘어지고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나갈 때에 어느 날부터 믿음의 능력이 임하니까, 자기를 이길 수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혈기와 욕심도 절제할 수 있고 나쁜 습관도 끊을 수 있고, 기도와 충성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단계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 장로님들이나 안수집사님들, 권사님들 중에 홍익교회를 처음 나온 분들이 3분지 2가 됩니다.
저는 그 분들이 처음 교회 나올 때 모습을 환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세상의 것들을 끊지 못할 정도로 어린 아이 같은 연약한 믿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능력이 강하게 임하니까 어린 아이의 상태에서 벗어나 오늘 같은 강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강한 자들은 거기에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청소년들이 자기는 이제 키도 다 컸고 힘도 있으니까 어른이 다 되었다고 자만하는 것은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더 성장해야 합니다. 더 어른스러워야 합니다.
식물이 싹이 자라고 잎이 무성해지면 얼마나 강해 보입니까? 그렇다고 그 나무가 다 성장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 다음 단계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 신자들이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으면 무화과나무처럼 책망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단계 더 성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강한 자들이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명심할 것입니다. 연약한 믿음의 소유자들을 바라보고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잘못하면 바리새인같이 율법주의적인 신앙의 소유자가 되기가 쉽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내 신앙이 중요한 것같이 남의 신앙도 귀한 줄 알고 함부로 남을 비판하거나 판단함으로 남의 신앙에 상처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가령, 어느 집에 초대를 받고 가서 음식을 먹는데 알고 보니 어제 저녁에 제사를 지낸 음식입니다. 부인은 교회 집사님이지만, 시댁은 믿지 않음으로 할 수 없이 제사를 지냈던 것입니다. 그 때 "나는 제사 음식을 안 먹어요. 성경에서 금하거든요."라고 말하면 얼마나 무안하겠습니까?
왜냐하면 성경에 뚜렷이 명시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자기 믿음의 양심에 따라 결정할 일이지, 남이 이래라 저래라 판단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철저히 성경의 말씀에 따라 믿음의 순결성을 지키어야 하는 반면, 크게 중요하지 않고 또 아무리 토론해도 결론이 나오지 않는 문제로 서로 다투고 심한 경우에는 파가 생겨짐으로 교회를 갈라지게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랑의 계명을 어기는 더 큰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로 교회 안에서 이 사람은 이것이 옳다 하고 저 사람은 저것이 옳다 하는 경우에는 서로 다투지 말고 서로 믿음의 양심에 따라 결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주장입니다. 가령 제사 음식이 믿음의 양심에 꺼리거든 먹지 말라. 그러나 양심에 꺼리지 않거든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믿음의 양심의 것을 다른 성도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어느 분은 봉헌할 때에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어느 분은 이름을 밝히는 것은 자기의 신앙고백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 때는 각자 신앙의 양심에 따라 행할 수밖에 더 없습니다. 문제는 자기가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남의 태도를 비판하는 자세는 옳지 않은 것입니다. 특별히 믿음이 약한 사람일수록 우리는 비판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연약한 자를 지나치게 비판함으로 그 사람이 실족하게 된다면 그 죄는 큰 것입니다. 왜냐하면 3절 하반절에 보니까 하나님을 저를 자기의 자녀로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10절에 보면 하나님이 받으신 자를 우리가 비판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은 심판을 받을 일이요, 심판의 권한은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정죄성 비판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역을 범하는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남을 비판한다는 것은 곧 교만의 자세입니다. 교만은 성장의 큰 저해요소가 됩니다. 비판은 세 명을 죽게 한다고 합니다. 먼저 자신이 죽게 하며, 둘째는 상대방을 죽이게 하며, 세 번째는 듣는 자를 죽게 한다고 했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정신과 의사인 깁손 박사와 휜크 박사는 다음과 같은 발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과거 2년 동안의 모든 기록을 조사해서 긴장과 불안에 싸여 애를 쓰는 사람들에게 어떤 공통적인 요소나 특징이 있는가 조사한 결과 그런 증상을 가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다른 사람들의 결점을 찾아내려는 태도, 즉 남을 비판하는 정신이나 태도가 강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서는 그 발견을 적용하여 즉시 시험에 들어갔습니다.
불안과 초조, 긴장 등의 문제를 가진 환자들 100명을 선정하고 그들에게 이 조사와 연구의 결과를 말해주고 이제부터 여기 있는 동안 일체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자세를 버리고 오히려 칭찬하는 자세를 가지도록 지시했습니다. 환자들은 지시에 따라 행동하였습니다. 일정의 기간이 지난 후, 그 증상을 앓던 환자들을 조사해 보니 100명중 70명의 상태가 놀랍도록 좋아졌고 나머지 사람들 가운데 20명은 의사의 지시대로 행하지 않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남의 결점이나 잘못에 관심을 두고 생각하고 비난하고 비판하는 자세는 심적인 불안, 고통을 가져올 뿐 아니라, 심한 경우에는 자신이 정신병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비판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으리라"하신 주님의 말씀은 의학적으로 규명된 진리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우리의 비판으로 실족한다면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뿐 아니라 교만의 자세로 신앙성장에 큰 저해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번 금요일 남녀선교회연합회 주최로 삼일절 등반대회를 갑니다. 등산을 할 때 가장 잘못된 태도는 자꾸 뒤를 돌아보면서 늦게 올라오는 사람, 자주 쉬는 사람을 은근히 깔보고 자기는 꽤나 등산을 잘하는 것처럼 교만한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등산을 잘 하려면 남이야 앞서 가든, 뒤를 처지든, 오직 정상을 바라보면서 내 페이스대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여러분은 믿음으로 한 단계 성장되기를 원하십니까? 비판하는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오직 우리 앞서 가시는 주님만 바라보고 그만 따라가며 닮으려는 겸손의 자세를 가지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믿음이 성숙한 자, 덕을 나타내는 단계입니다.
청소년은 힘이 있고 능력은 있지만 아직도 미숙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책망한 무화과처럼 잎만 무성하지, 열매가 없다는 점입니다. 신앙의 단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은사가 강할지라도 그것이 신앙의 성숙한 단계는 아닙니다. 고전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9절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삶은 사람들에게 화평을 가져다 주고 그들을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화평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로마서에서는 그러한 삶을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롬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롬15: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덕을 세우는 일입니까? 먼저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는 삶이요, 그 다음은 이웃을 위하는 삶입니다. 바울은 고전10:23-24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상제물을 먹어야 되느냐 마느냐와 안식일에 대한 논쟁에서 믿음이 강한 자가 약한 자의 믿음의 행위를 비판하지 말고 각자 신앙의 양심을 따라 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위대한 점은 믿음의 양심도 좋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덕을 세우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우상제물을 먹는 것이나 술 담배 먹는 것이나 내 신앙양심에 전혀 거리낌이 없지만, 그러나 만약에 내가 우상제물을 먹는 것이나 술 담배를 먹는 것 때문에 초신자나 어떤 신자가 보고 믿음의 상처를 받거나 낙심하여 교회를 떠나는 일이 생긴다면 이는 덕이 안될 뿐 아니라, 마18:6에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에 그 목을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고 한 것을 보아 오히려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전8:14에서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화평과 덕이 있는 삶인 것입니다. 모든 신앙생활을 자기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 다른 사람 중심으로 하는 것이 덕 있는 삶이요, 믿음이 성
숙한 삶인 것입니다. 가정에서 어른이란 누구입니까? 어린 아이들의 연약과 허물을 씻어주고 감싸주며 그 연약과 허물의 짐을 대신 지는 자인 것입니다. 롬15:1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랄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숙한 믿음은 사랑의 열매, 덕과 화평의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 하나만 있으면 모든 것을 이루는 것입니다. 기독교 TV에서 보니까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어느 노인 부부가 까페에 들어가서 비스켓과 커피를 먹는데 보니까, 할아버지가 먼저 비스켓을 먹고 틀니를 빼서 할머니를 준 다음, 커피를 마십니다. 할머니는 틀니를 끼고 비스켓을 먹더니 다시 틀니를 빼서 할아버지에게 준 다음 커피를 마시더랍니다. 노인들이 돈이 없으니까 한 사람만 틀니를 하고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들으면 약간 비위가 상하는 이야기지만, 그 노인들에게는 조금도 불편한 모습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의 삶입니다. 사랑만 있으면 그런 불편도 오히려 덮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은 말 잘하는 인물이 아니라 큰 가슴을 가진 인물입니다. 큰 가슴을 가진 인물은 어떤 자입니까? 십자가의 마음, 연약한 자의 허물을 덮어주고 감싸주며 그것을 대신 지는 희생적인 인물입니다. 그런 인물이 많은 교회는 복 있는 교회입니다.
미얀마에서 선교활동했던 아도니람 저드슨 목사는 예수님을 전한다는 이유만으로 17개월 간 투옥되었습니다. 그것도 발목에 무거운 쇠고랑을 차고 습기 많은 토굴에 갇혀 살았습니다. 그가 석방된 후 그는 다시 전도를 시작했는데 불교도 중 많은 개종자를 얻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된 것은 저드슨 선교사의 설교 때문이 아니라 발목에 새겨진 쇠고랑 자국 때문이었습니다. 진리가 아니면 그런 희생을 나타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백 마디의 말보다 예수님과 인간들을 위한 희생의 '흔적'이 강한 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만 생각하면 가슴이 뭉쿨합니까? 그의 오묘하고 깊은 말씀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같이 더럽고 추한 인간들을 위해서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당하시면서 끝까지 참고 견디신 그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믿음이 연약한 자, 믿음이 강한 자, 믿음이 성숙한 자 중에 여러분은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여러분 중에 아직도 변화 받지 못한 분들은 이번 사순절 기간동안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변화 받으십시오. 변화 받았으나 아직도 어린 아이 상태에 있는 분은 더 성장하여 강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십시오. 믿음이 강한 자는 교만하지 말고 더욱 더 앞서가시는 주님을 겸손히 따라가며 닮아 가심으로 모두가 화평과 덕을 나타내는 성숙한 믿음의 소유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관심을 따르라
로마서 14:1-8 / 황광민 목사
어떤 집에 강도가 들었습니다. "손들엇!" 강도는 집주인에게 손을 들라고 하면서 총을 겨누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왼손만 들었습니다. 강도는 오른손도 들라고 소리쳤습니다. 주인은 찌푸리면서 말했습니다."오른팔은 신경통 때문에 들 수 없습니다." 그러자 강도는 부드러운 말투로 이야기를 건넸습니다. "신경통이요? 사실은 나도 신경통이 있는데... 얼마나 아프십니까?"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신경통 이야기로 화제의 꽃을 피웠습니다. 강도는 자기가 강도인 것도 잊어버리고 주인도 상대방이 강도인 것도 잊어버리고 신경통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 헨리(O. Henry)의 단편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서로 아픔을 나눌 때 강도와 주인이 친구가 되었습니다. 서로 나눌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함께 하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아픔도 함께 하면 큰 위로가 됩니다. "고통은 함께 나누면 절반이 되고 기쁨은 함께 나누면 두 배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함께 나누는 것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동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통을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요즘은 뜻이 다소 변질되었습니다. 동정의 대상이 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고통을 함께 느끼고 더불어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백성들을 동정하셨습니다. 죄인들과 창녀들, 목자 없는 양떼들을 보시며 동정하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아파하셨고 함께 슬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음만 회복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말은 없을 것입니다.
'공감'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상담학에서 많이 쓰는 말입니다. 어떤 분은 이 말을 전도에 응용하였습니다. 전도할 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우선 공감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 믿는 사람 사기꾼들만 많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말을 잘한다"는 사람이 있으면 그렇다고 인정해 주라는 것입니다. 아니라고 해야 소용이 없지요, 우선은 그 말을 인정해주고 "그래도 예수 믿어야 구원받습니다."라고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도의 문이 열립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좋은 것은 뜻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뜻이 같은 사람들은 쉽게 하나가 됩니다. 노는 것 좋아하는 사람들은 노는 것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입니다. 운동 좋아하는 사람들은 운동 좋아하는 사람들과 잘 어울립니다. 관심이 같으면 곧 친구가 됩니다. 부부도 관심이 같으면 잘 지냅니다. 뜻이 같은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이란 하나님의 뜻과 관심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의 관심사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달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은 봉독한 본문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관심을 따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관심은 포용입니다.
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아멘. 하나님은 서로 비판하지 말고 포용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조건 없이 백성들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비판하지 않으시고 있는 그대로 용납하셨습니다. 찬송가에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부족하니까, 걱정되니까 있는 그대로 용납해 달라는 기도의 찬송입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주께로 돌아오는 자는 조금도 비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초대교회 교인들도 비판을 많이 했습니다. 당시에는 고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짐승을 잡을 때 우상의 제단에 바치고 잡았습니다. 시중에 나도는 고기가 거의 우상의 제물인 셈입니다. 그래서 고기를 사먹을 수도 없고 안 사먹을 수도 없는 것이 성도들의 고민이었습니다. 또 개중에는 우상에게 제사를 드린 짐승의 고기가 싸구려로 유통되었다고 합니다. 일반인들은 그런 것을 사먹지 않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반가운 것입니다. 이런 문제로 성도들 사이에 비판이 생겼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으로 먹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이 없다는 믿음으로 고기는 고기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상의 제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주신 식물이라고 생각하고 먹었습니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우상의 제물이기 때문에 고기를 먹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없다는 믿음에서 였습니다.
그런데 두 그룹 사이에는 갈등이 생겼습니다. 두 그룹이 모두 믿음으로 시작하였으나 생각은 달랐습니다. 먹을 수 있다는 사람은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믿음이 약하다고 비판했습니다. 또한 먹지 않는 사람들은 먹는 사람들을 향해 불신앙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두 그룹은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그 논쟁은 끝없는 비난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서로 용납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어떻게 용납합니까? 용납의 기준은 하나님의 용납입니다. 하나님은 믿기만 하면 자녀로 용납하십니다. 믿지 않는 사람까지 용납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믿기만 하면 아무 것도 따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용납하십니다. 바울은 이를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널리 포용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널리 포용해야 합니다. 우리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비판하지 말고 널리 포용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관심을 세우는 것입니다.
4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아멘. 최종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우리는 모든 판단을 주께 맡기고 하나님의 관심대로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일이 주제넘은 행동인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께 불경스러운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세우는 일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끌어내리는 일에 애쓰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세우시고자 하나 우리가 끌어내리려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구원받는데 걸림돌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특히 무엇이나 먹을 수 있다는 믿음 좋은 사람들이 조심해야 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자신들의 믿음의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여 상처를 입히면 이는 큰 죄악입니다. 예수님은 "소자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고 하셨습니다(마태18:6).
술, 담배를 잘하면서 믿음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음식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것이나 간섭하시는 째째한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기들은 대단한 하나님을 믿고 우리는 째째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 옛날 우상의 제물이 된 고기를 먹으면서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던 사람들과 같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믿음 좋다는 생각으로 믿음 연약한 자들에게 상처를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술, 담배 하는 것을 보면 믿음 약한 사람들은 상처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세우려고 애쓰시는 사람들을 쓰러뜨리게 됩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부지불식간에 소자를 실족시켜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일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 세우는 일에 힘쓰십시다. 말 한마디를 조심하십시다. 행동 하나하나가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모릅니다. 나의 말 한마디가 구원의 길을 막을 수 있습니다. 나의 행동 하나가 천국 문을 막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우려고 하시는데 우리는 허물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조심하십시다. 오직 세우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의 관심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7-8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런즉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아멘.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에 주일에 관한 논쟁도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주일은 특별한 날이므로 다른 날과 달리 특별하게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주일날과 다른 날도 똑같이 중요하므로 모든 날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고기를 먹어야 하느냐, 먹지 말아야 하느냐의 논쟁과 같은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제3의 대답을 하였습니다.
주일은 거룩한 날이므로 다른 날과 달리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생각도 옳습니다. 또 다른 날들도 주일과 같이 거룩한 날이므로 모든 날을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도 옳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중심이요 기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는 기본만 되어 있으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어떤 동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동네에 유명한 소몰이 영감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영감님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소문이 나자 동네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그 영감님은 성격이 괴팍하여 소를 몰 때면 동네가 시끄럽도록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욕을 퍼붓고 채찍을 휘두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으니 동네 사람들이 모두 신기해하였습니다.
다음 날이었습니다. 영감님이 소를 몰려고 나와보니 동네 사람이 모두 나왔습니다. 소몰이 영감이 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영감님은 눈치챘습니다. 영감님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품위 있게 소를 몰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전의 포악한 모습들이 나타나지 않도록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소들에게 점잖게,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자, 일어나거라, 이제 가자." 그러나 소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직까지 큰 소리로 욕을 퍼붓고 회초리를 휘두르며 다루던 소들인지라 부드러운 말을 듣고 일어날 리가 없었습니다. 영감님은 긴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로 했는데 다시 소리를 지를 수 없었습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다시 한번 불러보았습니다. "자, 가자, 일어나거라" 그러나 소들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영감님은 다급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 사정을 살펴주십시오." 그때 영감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기도하는 중에 지혜를 얻었습니다. 그는 갑자기 회초리를 휘둘러 "탁"소리를 내고 큰 소리로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소들이 기겁을 하고 일어섰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동네 사람들은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참았던 영감님이 승리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면 복을 받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