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여년동안 거동이 불편한 취약계층 노인들에게 이발 자원봉사활동을 전개하는 이주연이발사 이발료 인상이 “미안하다”는 이발사
필자가 다니는 이발소에 “7월1일부터 (1,000원을 인상해) 7,000원을 받습니다.”라는 안내판이 놓였습니다. 손님들이 그곳으로 눈길을 돌리자 이발사 한정규 옹(79)이 눈치를 채고는 먼저 “미안합니다.”라며 말문을 열었고, 옆의 손님이 “뭐가요?”라고 되받습니다.
그는 “너무 많이(17% 가량) 올렸다.”며 사과하듯 눈을 아래로 뜨며 말했습니다. 그의 표정은 보는 이들이 미안할 만큼 진지합니다. 한 손님이 그를 위로할 요량으로 음식 소주 등 30%씩 오른 것들이 많다고 하는데도 그는 “역병(코로나)이 돌 때도 버티고 버텼는데 더 이상 견딜 재간이 없네요.”라고 말했다.
“전기요금, 가스요금, 심지어는 비누, 화장품, 화장지 값도 다 올랐다.”고 덧붙입니다. 옆도 돌아보지 않은 채 가위질을 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정치를 했기에 서민들 생활을 이렇게 팍팍하게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며 “문xx, 개ㅇㅇ” 등 전 정권을 향해 육두문자를 좌르르 쏟아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이번 요금 인상은 “인상이 아니라 20여 년 전 요금으로 환원”입니다. 그는 IMF의 파고가 밀려왔을 때, 어느 가장이 눈물을 흘리며 회사를 떠나는 모습을 TV에서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실직 가장의 괴로움을,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통해서, 잘 알기에 같이 아파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 뒤 단골손님이 풀죽은 모습으로 이발하러 왔을 때 1,000원을 할인했습니다. 그가 실직자인지는 묻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별 도움이 안 될 것을 알면서도 “모두가 함께 살자”는 메시지로 받아들이길 원했습니다. 그날 저녁 오랜 시간 생각 끝에 모든 손님에게 1,000원을 인하하기로 결정했고, 20년 넘게 6,000원으로 이발료를 고정했습니다.
그는 줄어든 소득을 벌충하느라 혼자서 이발소를 운영하며 허드레로 들어가는 비용을 없앴고, 일하는 시간은 평균 30분쯤 늘렸습니다. 또 한 사람당 이발 시간을 크게 줄였고, 머리는 스스로 감도록 했습니다. 마을 고객들은 모두가 그의 협력자들입니다. 빗자루로 머리칼도 쓸어 담고, 세탁기에 수건을 넣어 돌리기도 합니다. 사랑방처럼 정치평론, 경제동향, 남북관계, 선거총평 등 주제에는 제한이 없고, 수시로 토론도 벌어집니다.
일에 몰두하다 점심때를 놓칠 때도 종종 있습니다. 짧은 시간에 컵 라면으로 때우거나, 우유 한 잔으로 넘기기도 합니다. 배달음식을 권하지만 절대사절입니다. 언제든 손님이 오면 무조건 가위를 듭니다. ‘손님 우선’이 몸에 배었습니다. 최근에는 본인 얼굴을 면도하다가 실수로 인중 부근을 베었습니다. “손이 떨렸나 보다”며 대수롭잖다는 듯 웃습니다. 커다란 반창고를 붙이고서도 이발을 계속합니다.
그는 강화도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6·25를 몸으로 겪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직후 어머니를 여의었고, 새어머니를 얻은 아버지를 따라 홍천으로 이사했습니다. 열 살 소년은 생계를 위해 계모의 눈치를 살폈고, 철조망 너머로 군인들에게 찰떡을 팔았고, 사격장에서는 탄피를 주웠고, 부대 훈련장까지 따라가 몰래 먹을 것과 담배를 바꿔 시장에 내다 팔아 이익을 챙겼습니다. 그 무렵 이발소에 사동으로 들어가 심부름을 하면서 어깨너머로 배운 이발이 평생 직업이 되었습니다.
그는 상이용사입니다. 베트남전에 백마 부대 요원으로 파견되어 캄란과 나트랑에서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현지 십자성부대에서 이발 특기병을 모집할 때 자원했고, 근무하던 중 열대병에 감염되어 폐가 망가졌습니다. 필리핀 미 육군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후유증으로 죽을 고비도 넘겼습니다. 결국 부대에 복귀하지 못하고 의병제대를 했습니다.
TV에서 민노총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는 뉴스에 혀를 찹니다. “파업을 해야 할 만큼 절실한가.”라며 “더 어려운 근로자들도 많다.”고 혼잣말을 합니다. 묵묵히 가위질을 하는 모습이 그가 지나온 인고의 세월과 겹쳐집니다. “살아나 감사합니다. 무슨 바람이 더 있나요. 다만 먼저 간 동기들이 흘린 피로 일궈내고 지켜온 대한민국의 경제와 안보가 더 단단해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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