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장문(德水張門) 계곡(谿谷) 장유(張維)
장유(張維.1587.선조 20∼1638.인조 16)
조선 중기 명신.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덕수(德水). 판서 운익(雲翼)의 아들. 1609년(광해군 1) 문과에 급제, 인조반정으로 전적(典籍)ㆍ예조ㆍ이조의 낭관을 지내고, 정사공신(靖社功臣)이 되었으며, 이괄(李适)의 난에 왕을 모신 공으로 신풍군(新豊君)으로 피봉 되었다.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에 또 왕을 모시고 강화(江華)에 갔다 와서 이조판서ㆍ대제학이 되고, 1836년 병자호란에 다시 남한산성으로 왕을 모시고, 돌아와 우의정이 되었으며, 그의 딸이 효종의 비(妃)가 되었다. 학문을 사랑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천문ㆍ지리ㆍ의술ㆍ병서(兵書)에까지 능통하였다. - 이홍직 : <국사대사전>(백만사.1975)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ㆍ묵소(默所), 시호는 문충(文忠). 장례원사의 자중(自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목천 현감 일(逸)이고, 아버지는 판서 운익(雲翼)이며, 어머니는 판윤 박숭원(朴崇元)의 딸이다.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사위로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05년(선조 39)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 호당(湖堂 : 독서당의 다른 이름)에 들어갔다. 이듬해 겸설서를 거쳐 검열·주서 등을 지냈다.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해 파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해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녹훈되고 봉교를 거쳐 전적과 예조·이조의 낭관을 지내고, 그 뒤 대사간·대사성·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공주로 호종한 공으로 이듬해 신풍군(新豊君)에 책봉되어 이조참판·부제학·대사헌 등을 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왕을 호종하였다.
그 뒤 대제학으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임했고, 1629년 나만갑(羅萬甲)을 신구(伸救 : 억울하다고 여긴 죄를 바로잡아 구제함)하다가 나주목사로 좌천되었다. 다음 해 대사헌·좌부빈객(左副賓客)·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1631년 원종추숭론(元宗追崇論)이 대두하자 반대하고 전례문답(典禮問答) 8조를 지어 왕에게 바쳤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공조판서로 최명길(崔鳴吉)과 더불어 강화론을 주장하였다. 이듬해 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부음(訃音)으로 18차례나 사직소를 올려 끝내 사퇴했고, 장례 후 과로로 병사하였다.
일찍이 양명학(陽明學)에 접한 그는 당시 주자학(朱子學)의 편협한 학문 풍토를 비판해, 학문에 실심(實心)이 없이 명분에만 빠지면 허학(虛學)이 되고 만다 하였다. 또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 마음을 바로 알고 행동을 통해 진실을 인식하려 했던 양명학적 사고방식을 가졌다.
이식(李植)은 그의 학설이 주자(朱子)와 반대된 것이 많다 하여 육왕학파(陸王學派)로 지적했으나, 송시열(宋時烈)은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의리가 정자(程子)와 주자를 주로 했으므로 그와 더불어 비교할만한 이가 없다.”고 칭송하였다. 천문ㆍ지리ㆍ의술ㆍ병서 등 각종 학문에 능통했고, 서화와 특히 문장에 뛰어나 이정구(李廷龜)·신흠(申欽)·이식 등과 더불어 조선 문학의 사대가(四大家)라는 칭호를 받았다. 많은 저서가 있다고 하나 대부분 없어졌다.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장유 선생 묘 및 신도비】
시흥시 향토유적 제2호. 소재지 :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 산 1-5. 봉분 앞에는 묘비와 혼유석ㆍ상석ㆍ향로석이 놓여있고, 좌우에 문인석 두 쌍과 망주석이 배치되어 있다.
신도비는 묘역에서 서쪽으로 약 70미터 떨어져 있다. 신도비는 2.5m×4.2m, 높이 1.3m 규모의 귀부(龜趺) 위에 세워져 있는데, 비신(碑身)의 규모는 높이 2.65m, 폭 1.3m, 두께 32cm이며, 비개(碑蓋)는 옥개(屋蓋) 위에 용(龍)이 조각되어 있다.
이 신도비는 현존 우리나라 신도비 중 그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묘소에는 현종 어제(御製)의 표액(表額)과 그의 아들 선징의 음기(陰記)로 된 표석 및 정두경(鄭斗卿)이 찬한 지석이 있다.
선생의 사망 39년 만인 숙종 2년(1676) 10월에 세운 이 신도비의 비문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글씨는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이 썼으며, 전자(篆字)는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가 썼다. 묘역 주변에는 선생의 부친 장운익(張雲翼, 1561~1599 이조판서) 신도비를 비롯하여 아들 장선징(張善澂: 1614~1678), 손 장훤(천안군수), 증손 장진환(張震煥: 1646~1722) 등의 묘가 있다.
묘역에서 동쪽으로 약 500m 지점에는 효종비 인선왕후가 부친(장유)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는 법연사지가 있고, 현재의 법연사는 1989년에 건립하였는데 묘역에서 북쪽으로 약 1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법연사 아래에는 선생의 종택(宗宅, 조남동 21)이 있다.
【저서】<계곡만필(谿谷漫筆)> <계곡집(谿谷集)> <음부경주해(陰符經注解)>
[출처] 덕수장문(德水張門) 계곡(谿谷) 장유(張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