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페르시안 융단같은 것
서머싯 몸이 1915년에 발표한 자전적 소설 <인간의 굴레>는 일상적인 어느 날의 아침으로 시작한다.
‘잿빛 아침이 밝았다.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고 쌀쌀한 기운이 도는 것이 아무래도 눈이 내릴 것 같았다. 유모는 아이가 자는 방으로 들어와 커튼을 열어젖힌다.’
유모는 어린 필립을 깨워 그의 어머니에게 간다. 아이를 사산한 어머니는 아직까지 잠에 취한 필립을 마지막으로 꼬옥 안아주고 얼마 안 있어 세상을 떠난다. 어린 필립은 목사인 큰아버지 집으로 보내진다. 학교에서 필립은 다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된다.
큰아버지는 학교를 졸업한 그에게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기를 권유하지만 성직에 몸담기를 원치 않는 필립은 독일로 유학을 떠나고, 귀국 후에는 공인회계사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모두의 반대를 뿌리치고 파리로 그림 유학을 떠난다. 그곳에서 많은 예술가 지망생들을 만나며 보헤미안처럼 살아가던 필립은 어느 날 예술가 지망생인 크론쇼에게 묻는다. 인생이 무엇이냐고. 그러자 크론쇼는 그에게 대답 대신 페르시아 양탄자를 선물한다.
아주 나중에야 필립은 페르시아 양탄자의 의미를 헤아린다. 인생이란 페르시안 융단 같은 것으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심미감을 만족시키기 위해 양탄자의 무늬를 짜올린 직조공처럼 사람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 태어나 성장하여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먹고 살기 위해 일하다 죽는 무늬….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영국으로 돌아와 의학 공부를 시작한 필립은 카페의 웨이트리스 밀드레드에게 넋을 빼앗긴다. 사악하고 천박하며 종잡을 수 없는 그녀를 사랑하게 된 필립. 사랑이란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그녀에게 돈과 마음, 정성을 모두 바치지만 밀드레드는 그를 이용만 하며 차갑게 떠났다 돌아왔다를 반복하면서 그의 주변을 맴돈다. 그녀와 완전히 끝내지 못한 채 끌려다니느라 필립의 영혼은 피폐해진다. 게다가 그녀와의 사랑을 위해 돈을 너무 많이 써버려 경제적인 위기에 빠져 이렇게 한탄한다.
“돈은 제6감과 같은 것으로, 그것이 없으면 다른 감각을 완전히 애용할 수 없구나.”
밀드레드에 대한 집착으로 필립은 사려 깊은 소설가이며 이혼녀인 노라의 사랑도 저버리는데, 밀드레드에게 배신당한 후 노라에게 위로받고 싶어 찾아가지만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와 약혼한 후였다.
그때부터 삶의 밑바닥을 경험하는 필립. 돈이 없어 학업을 중단하고, 빵조차 먹지 못했으며, 하숙비가 없어 거리를 전전한다. 그러나 이런 그를 받아준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그가 실습하던 병원에 입원해 있던 애설리와 그의 가족들이었다.
백부로부터 약간의 유산이 돌아오고, 필립은 중단했던 학업을 마친다. 그리고 시골 병원으로 첫 근무를 나갔을 때 그의 의술과 품성을 높이 산 노의사가 동업을 제안한다. 풋내기 의사로서는 솔깃한 제안이었으나 필립은 정중히 거절한다. 세상 이곳저곳을 실컷 여행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후, 필립은 알게 된다. 애설리의 장녀인 샐리가 오래전부터 자신을 좋아해왔다는 것을, 농장의 호젓한 달빛 아래 필립과 샐리는 사랑을 나누고, 필립은 샐리와의 결혼을 꿈꾼다. 필립은 그 동안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무늬를 짜고 싶어 안달했지만 결국 깨닫는다. 생의 가장 아름다운 무늬는 태어나서 일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죽어가는, 평범한 인생의 무늬라는 사실을, 그리고 ‘스페인이 무엇이며 코르도바, 돌레도, 레온 따위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에게 미얀마의 불탑이며 남태평양의 초호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메리카는 다름 아닌 이것에 있다’고 하며 시골 병원 의사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곳에 아내와 함께 내려가겠노라고.
필립이 살아왔던 생의 순간순간에는 그를 옭아매는 굴레가 있었다. 불구가 그것이었고, 종교가 그것이었고, 예술에 대한 꿈이 그것이었고, 사랑에 대한 지독한 집착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필립은 삶을 힘들게 했던 불구도 받아들였다. 그것이 없었다면 아름다움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도 없었을 것이다. 필립은 또, 그에게 고통을 가져다 준 친구의 배신도, 사랑도 횡포도 모두 용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청혼한다. “나와 결혼해주겠어. 샐리?”
굴레에 얽매이지 않은 삶이 있을까. 필립에게도 굴레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 모두는 굴레, 생의 족쇄를 가지고 살아간다. 훨훨 날개를 퍼덕여 푸른 창공을 자유롭게 날아가고 싶지만 나를 묶는 족쇄들이 있다. 자유의지가 꿈이라면 내 발목을 묶는 굴레는 현실이다. 하지만 강석경의 <세상의 별은 다 라사에 뜬다>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족쇄가 있기에 나 비상할 수 있고
슬픔이 있기에 나 고양될 수 있고
패배가 있기에 나 달릴 수 있고
눈물이 있기에 나 여행할 수 있으며……
어느 날, 오래 품은 꿈이 실현되어 정말 푸른 하늘을 날 때가 됐을 때. 그때에는 족쇄로 묶었던 시절이 있었으므로 자유를 절감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더 높이, 더 멀리, 더 자유롭게 날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굴레가 없다면 비상도 없다. 슬픈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그 후에 오는 기쁨이 더 크고, 패배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승리하기 위해 더 달리게 되고, 눈물의 세월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과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그러므로 굴레의 슬픔, 패배와 눈물은 곧 인생 수업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