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제(聖誕祭)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으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늘한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 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 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山茱萸)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血液)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시집 『성탄제』, 1969)
[작품해설]
김종길 시의 뿌리를 이루는 것은 유가적(儒家的) 전통이다. 그의 시의 특성인 절제된 감정과 시어, 명징한 이미지와 고전적 품격 등은 모두 유가적 덕목을 이루는 요소들이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가 보여 주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도 결국 그의 이런 근본에서 자라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서른 살의 나이에 이른 화자는 ‘눈’을 매개로 하여, 어린 시절 병든 자신을 위해 눈 속을 헤쳐 산수유 열매를 따오시던 아버지를 회상한다. 따라서 그 아버지는 부모의 은덕을 효로 보답해야 한다는 효제(孝悌)의 원리를 절로 떠오르게 하는 아버지이며, 화자는 그런 아버지로 표상되는 애정 넘치는 생활상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열 개의 연이 시간적 추이 과정에 따라 전개되고 있으며, 1~5연의 유년시절의 체험과 6~10연의 어른이 된 화자의 체험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면서도 4연과 6연은 그 시간적 전개에서 제외되어 있따. 이는 ‘산수유 열매’와 ‘눈’을 대비시텨 시각적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써 어린 시절의 가장 인상적인 모습을 부각시키려는 시인의 고도의 시적 장치로 볼 수 있다.
어린 시절의 화자는 열병을 앓고 있었으며,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 붉은 산수요 열매’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통해 병을 치유할 수 있었다. 어른으로서의 화자는 이제 어린 시절에 앓던 대신에 지금은 그리움이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구조적으로 열병과 그리움이 대칭적 관계를 갖는다. 또한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은 ‘엄부자모(嚴父慈母)’로 대변되는 유교적 전통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한편, 차가운 옷자락만큼 아버지의 사랑이 깊고 뜨거움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전반부의 시적 공간은 시골이며, 후반부의 공간은 도시이다. 시골의 방에는 ‘바알간 숯불’이 피어 있고, 밖에선 ‘눈’이 내리고 있다. 도시에도 역시 ‘눈’이 내리고 있지만, 방이 제시되지 않는 대산 ‘내 혈액’이라느 독특한 공간이 나타난다. ‘내 혈액’과 ‘숯불’은 동일한 붉은빛으로 소로 상관관계를가지며 시의 갚이를 더해 줌은 물론, 이러한 공간 구조는 ‘산수유 붉은 열매’에 의해 내적 동일성ㅇ르 얻게 된다.
이 시의 시간은 전⸱후반부 모두 ‘성탄제 가까운 밤’이다. 성탄제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리는 축제이지만, 여기에서는 화자와 아버지의 새로운 만남을 촉진시키고 조명하는 기능을 지닌다. 그로므로 성탄제는 서구의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축제로서의 의미가 아닌, 한국의 전통적 ⸱ 복고적 정서로 전이되어 인간의 보편적인 사랑의 정점을 보여 주는 한편, 그 분위기에 싸여 가족간의 사랑을 한 차원 상승시켜 준다. 그러므로 부자자효(父慈子孝)의 윤리관으로 대표되는 관습적인 차원을 뛰어넘어 한 차원 더 깊어진 애정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눈’은 고요한 회상의 분위기와 함께 춥고 쓸쓸한 겨울 장면을 조성하는 기능을 갖는다. 또한 그 눈을 헤치고 아버지가 따오신 ‘산수유 열매’가 화자의 혈액 속에 녹아 흐른다는 것은 육친간의 순수하고도 근원적인 사랑이 늘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산수유 붉은 알알’은 화자의 내부에 생명의 원소처럼 살아 있는 사랑의 상징이 됨으로써 거룩한 ‘성탄제’의 본질적 의미를 환기시켜 준다.
[작가소개]
김종길(金宗吉)
1926년 경상북도 안동 출생
혜화전문학교 국문과, 고려대학교 영문과 및 동국대학교 대학원 졸업
194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문(門)」이 입선
1955년 『현대문학』에서 시 「성탄제」를 발표하며 등단
1965년 시론집 『시론』을 발간
고려대학교 영문과 교수 역임
시집 : 『성탄제』(1969), 『하회(河回)에서』(1977), 『황사현상』(1986), 『달맞이꽃』(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