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4월20일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장애인의 날)]
제1독서
<그는 민족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9,1-20
복음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52-59
◈ [수도회] 우리 삶의 원천이자 정점, 성체성사
2018년 나해 4월20일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요한 6,52-59
우리 삶의 원천이자 정점, 성체성사
벌써 오래전의 일이네요. 지금은 이렇게 강철체력을 자랑하고 있지만,
젊은 시절, 한때 몸 상태가 너무 않좋아,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짧은 거리인데도, 걷다가 나무 붙들고 쉬다가, 그렇게
걸어다녔습니다.
그런 저를 가엾이 여긴 한 고마운 분이 깊은 산중에서 직접 캔거라며,
드시면 힘이 날거라며, 그 귀한 산삼 두 뿌리를 주셨습니다. 귀한
것이니만큼 먹는 방법도 소상히 가르쳐주고 가셨습니다.
그분 가르침에 따라, 산삼을 생수에 담그고, 부드러운 솔로 살살
씻었습니다. 물론 하루 전날부터 술이나 커피 등 자극성있는 음식도
삼가했습니다. 이윽고 물기가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공복 상태에서,
최대한 꼭꼭 천천히 씹어 먹었습니다.
결과는?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진품이어서 그랬는지, 그분의
정성이 통했는지, 아니면 제 몸의 체질과 맞아서 그랬는지,
거짓말처럼 원기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언제 그랬냐는듯이 훌훌
털고 아이들이 뛰놀고 있는 운동장으로 축구하러 나갔습니다.
지금도 황공하게도 산삼 씹어먹던 그 순간이 기억납니다. 정말이지
귀하게 대했습니다. 이 산삼이 나를 살릴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갖고
먹었습니다. 천천히 오래도록 음미하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먹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산삼보다 몇십 배 몇백 배 더 귀하고 효과있는 영약인
주님의 살과 피, 성체를 우리는 매일 미사 중에 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토록 귀중하고 효력있는 영약, 산삼보다 훨씬 더 큰
에너지와 활력을 주는 성체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미사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지상 최고의 영약인 성체를
보다 정성껏 모셔야겠습니다. 이 성체가 나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생명과 구원으로 건너오게 만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영해야겠습니다. 영성체 순간은 자비하신 하느님과 부당한 죄인인
내가 합일하는 은총과 기적의 순간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안에 교회의 영적 전 재산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선교 활동 전체의 원천이요 정점입니다.”
(제2차바티칸공의회 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삶과 사도적 활동의 원천이자 정점으로서
우리가 매일 기념하고 경배하는 성찬례 안에서 가장 특별한 방식으로
그분을 만나고 관상하십시오.”(요한 바오로 2세 교황, 2001년
봉헌생활의 날 강론)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건너가지 않는 성찬례를 그 자체로
불완전한 것입니다.”(베네딕토 16세 교황,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부모들이 자식을 자기 피붙이라 하듯
2018년 나해 4월20일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부모들이 자식을 자기 피붙이라 하듯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요한 6,53~55)”
예수님의 살과 피는 참 양식 음료이므로 먹고 마셔야 영생 한답니다.
특히 어머니들이 자식들을 자기 피붙이 살덩어리로 보듯 그런 겁니다.
하늘가족 기르시려는 예수님의 진지한 이 사랑 모두에게 알려야겠어요.
그러나 시들어 나약한 내 신앙심부터 다시 일깨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해서 유아 때 또는 후에 영세 받고 쉬셨던 분들을 위한 특별한 소식!
‘인터넷교리’는 영세준비반과 재교육 반으로 나누어 별도 진행된답니다.
특히 재교육 반은 수강날수 제한 없고 조용히 혼자서 진행 가능합니다.
예수님 통해 전달된 이렇듯 애처롭고 엄청난 하느님사랑 널리 알립시다.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서울] 부활 제3주간 금요일
2018년 나해 4월20일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장애인의 날)]
요한 6,52-59
이번 피정의 주제는 ‘미사 통상문에 사용된 신약성경 본문의 해설 및
묵상’이었습니다. 교회의 문헌들은 전례, 특히 성찬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전례는 모든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거기에서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전례헌장 10항)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인 성찬의 희생제사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신적 희생제물을 하느님께 바치며, 자기 자신을 그 제물과
함께 봉헌한다.(교회헌장 11항)
성찬례는 모든 사제 생활의 중심이며 근원이다.(사제 생활 교형 14항)”
매일 미사를 봉헌하면서도 그 중요성을 잊을 때가 많았습니다. 잘
준비되지 않은 강론 때문에, 습관적으로 드리는 미사 때문에 우리는
미사의 의미와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번
피정에서 들은 강의를 잠시 나누고 싶습니다.
사제는 미사를 시작하면서 십자 성호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라고 신자들을 초대합니다. 그러면 신자들은 ‘아멘’이라는
말로 응답합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미사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십자 성호를 긋는 것은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통해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 사랑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 마태 28, 16-20)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예수님의 탄생으로 시작되었고, 임마누엘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릴 때 마다 함께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미사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시편 23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나 비록 죽음의 골짜기를 갈지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사제는 이렇게 인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이는 바오로
사도가 공동체에 보낸 편지에서 늘 사용하던 인사말이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2코린 13,13) 바오로 사도가 원하는
것은 재물, 명예가 아니었습니다. 은총과 평화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은총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친교는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성령께서는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게 해 주셨고,
성령께서는 우리가 서로 소통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사제는 이렇게도 인사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이는
롯기 2,4절과 판관기 6, 12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축원하는 것이기도 하며, 하느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확신이기도 합니다. 수난하고 죽으신 주님께서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의
핵심입니다. 제자들이 두려움과 걱정을 떨쳐버리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겠다.”는 주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우들은 사제의 인사에 이렇게 응답합니다.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
예전에는 “또한 사제와 함께” 였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았을 때 받았던
그 직무의 영이 함께 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세속화된 세상에서
사제들이 자신들이 받았던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미사 통상문에서 바뀐 내용입니다. 이는
교회를 위해서, 사제를 위해서 참으로 잘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당신의 영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2디모 4, 22)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주님이 주어입니다. 또 이렇게
기도합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여러분의
영과 함께하기를 빕니다.”(갈라 6,18) 시편 50장에도 우리는 이런
기도를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 세상이 혼탁한 이 시기에
교우들로부터 ‘당신의 영과 함께’라는 기도를 듣는다면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사울에게 새로운 사명을 알려주십니다. 사울은 이제
회심하여, 교회의 커다란 기둥이 됩니다. 우리의 상식과 생각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방법입니다. ‘왜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을 복음의
사도로 만드셨는지?’를 묻는 것은 지나친 태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뜻을 온전하게 따르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입니다.
그릇이 그릇을 만든 사람에게 나는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묻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를 위해서
내어 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이 전 존재를 기꺼이
내어주시는 예수님께 ‘왜 그렇게 하시는지 묻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오늘 사람들은 서로 다투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온전하게 모든 것을 내어 주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고
다투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들도 주님의 뜻을 따라서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재능을 기꺼이 이웃들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행복의 시작이고, 영원한 생명의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천상의 빵을 올바로 모셔야 한다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4월20일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요한 6,52-59)
천상의 빵을 올바로 모셔야 한다.
음식을 먹으면 그만큼 몸에 영양을 보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음식에 얼마만큼의 사랑과 정성이 들어갔느냐가 맛의 좋고 그렇지
않음을 판가름하게 됩니다. 그래서 맛보다는 영양을 중시하며
잡곡밥이나 현미를 먹기도 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오히려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음은 그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 해도
사랑과 정성이 빠지거나 걱정을 안고 있으면 맛을 잃고 맙니다.
사랑과 정성이 담겨야 음식입니다.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음식이
아니라 사료입니다. 사료는 짐승이 먹는 것입니다.
기도는 맛있는 음식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통해서 영양을 보충하듯
기도를 통해 영적 양식을 보충해야 합니다. 아무리 맛있고 풍성한
음식이 준비되어있다고 해도 그 음식을 먹지 않으면 영양이 보충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성장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마음’이 먼저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도 안에서 맛있는 음식이 된 사람은
예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맛있는
음식으로 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살과 피를 음식으로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음식을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심으로써 인격적인 결속을
이룬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살은 생명을 주는 행위이고,
피는 희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고자 영혼의 힘이
되는 양식을 기꺼이 내어 주시고 또한 우리의 허물과 잘못에 대해서
대신 희생을 바치신 분입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는 살게 되고 또
살찌게 됩니다. 영혼이 살찐 이들, 즉 사랑이 풍부한 이들이 비로소
다른 이들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하셨는데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추구하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나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고, 그분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나도 따라 걷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상의 빵을
올바로 받아 모실 필요가 있습니다.
미사 안에서 주어지는 천상의 양식인 성체를 제대로 모셔야 합니다.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은 말합니다. “우리가 영성체에 임할 때
모두 같은 주 예수님을 모십니다. 그러나 다 같은 은총을 받고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차이는 준비된 마음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영성체에 임하는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
더 많은 유사성이 있을수록 영성체의 결실도 더 좋은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도 말합니다. “미사성제에 참례하러가기 위하여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를 천사가 세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와 영원에서 큰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그러므로 너무
바쁘다는 말을 하지 말고 하루 일과 중에 미사참례를 첫 자리에 놓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사는 지상의 천국입니다.”“미사는
종합영양제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기타] 두 가지 침묵 : 오늘의 능력말씀
2018년 나해 4월20일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두 가지 침묵
오늘은 “두 가지 침묵”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이사야 53장 7절 말씀에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침묵이 있습니다.
하나는 무한 책임지는 침묵이 있고,
하나는 무한 회피하는 침묵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침묵은 어떻습니까?
나와 상관없는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 어떻게 합니까?
침묵하지 않지요. 더 크게 책임을 묻지 않습니까?
하지만, 나의 잘못에 대해서는 어떻게합니까?
무한 회피하는 침묵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고 싶은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든 사람의 죄와 허물을 위해서
무한 책임지는 침묵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이제 자신의 허물을 책임회피하기 위해
침묵하지 말고 이웃의 죄를 예수님의 사랑으로
침묵해줄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수원] 표징은, 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 살게 하는 힘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4월20일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요한 6,52-59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표징은, 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 살게 하는 힘
시골 작은 마을 외딴집에 어머니와 딸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밤손님이라도 들어올까 봐 해만 지면 문고리를 이중 삼중 잠그는 게
일이었습니다. 딸은 촌구석에 풍경화처럼 묻혀 살고 있는 자신이
너무 싫었습니다. 도시가 그립고 라디오를 들으며 상상해 온 화려한
세상에 나가 살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새벽, 딸은 가슴 속의 그
허황된 꿈들을 좇아 어머니 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가 잠든 사이
몰래 집을 나온 것입니다.
‘엄마, 못난 딸 없는 셈 치세요.’
딸은 쪽지 하나 달랑 남기고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갔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녀가 꿈꾸던 것처럼 아름답기만 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 딸은 더 이상 갈 데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진 뒤에야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딸은 좁은 방에 웅크린 채 엄마의 사진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날이
잦아졌습니다.
“엄마...”
그렇게 10년이 흘러 어느새 어른이 된 딸은 병든 마음과 누추한 몸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에 도착한 것은 늦은 밤...
창틈에선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습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문을
두드렸지만 방안에는 아무런 기척도 나지 않았습니다. 순간 불길한
생각이 들어 문고리를 잡아당긴 딸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상하다. 단 한 번도 밤에 문 잠기는 걸 잊은 적이 없었는데...”
어머니는 깡마른 몸을 차가운 바닥에 눕히고 가련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습니다. 딸은 엄마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은 채 흐느꼈습니다.
“엄마, 흑흑...”
딸의 흐느낌에 잠을 깬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딸의 그 지친 어깨를
감싸 안았습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한참을 울고 난 딸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엄마, 그런데 오늘은 왜 문을 안 잠갔어? 누가 오면 어쩌려고.”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오늘뿐이 아니란다. 혹시 네가 밤중에 왔다가 그냥 갈까 봐 10년
동안 한 번도 문을 잠그지 못했어.”
천천히 방을 둘러보던 딸은 다시 한 번 깜짝 놀랐습니다.
어머니가 하루같이 딸을 기다리던 방안엔 라디오도 책들도 모두
10년 전 그대로였습니다. 모녀는 그날 밤 10년 전으로 돌아가 방문을
꽁꽁 걸어 잠근 채 편안하게 잠이 들었습니다.
[TV동화 행복한 세상 1, 잠기지 않는 문]
나의 어머니와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니면 나의 자녀와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세상 어디를 돌아다니며 찾아봐도 어머니만큼 나를 안아줄 따뜻한
집은 없습니다. 또한 어머니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녀를 위해서라면
문을 절대 걸어 잠그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 마음 안엔 항상
자녀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 또한 어머니의 그 사랑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이 바로 표징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 사랑의 표징들을
받아들인 자녀는 멀리 떠나도 어머니를 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그 표징들을 통해 당신의 존재를 자녀의 가슴으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을 나간 딸도 결국 어머니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머니의 가슴엔 딸이 살고, 딸의
가슴엔 어머니가 삽니다. 그 이유는 둘 사이에 오고간 사랑의 표징들
덕분인 것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다.”
이 신비는 바로 성령님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성령님을 받으신
그리스도는 그 안에 아버지를 품고 당신을 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라 하십니다. 그러나 돌아가실 때 성령을 아버지께 보내시며
그분의 손에 당신의 영을 맡깁니다. 그렇게 서로의 품 안에 살게 되는
신비가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삼위일체 신비인 것입니다.
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의 표징이 곧 성령이신 것처럼,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둘 사이를 오고가는 사랑이 곧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마치 노아의 홍수 때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이렇듯 표징은 그 사람이 내 안에, 또 내가 그
사람 안에 머무르게 하는 중재자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성령으로 축성된 그리스도의 성체도 그분의 사랑의 표징이기에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유일한 구원의 길이시기에 그분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그분의 성체와
성혈을 모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징이 곧 당신의 살과 피인 것입니다. 그것을
영함으로써 그 분이 내 안에 사시지만, 나 또한 그분 안에 살게
되어서 죽음의 힘도 나를 해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딸이 표징을 통하여 어머니의 사랑을 믿게 되는 것처럼, 우리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인 성체와 성혈을 믿어야합니다.
그 믿음이 있다면 우리도 그리스도의 품에 들어 죽음도 이기지 못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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