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15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보나벤투라 성인은 1217년
무렵 이탈리아의 중부 지방 바뇨레조에서 태어났다.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의 수도자가 된 그는 파리에서 공부한 뒤 파리 대학교 교수로 학문
연구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작은 형제회의 총장으로 선출된 보나벤투라는 자신의 수도회 설립자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전기를 완성하였으며,
철학과 신학 분야의 권위 있는 저서도 많이 남겼다. 1274년 무렵 선종한 그를 1482년 식스토 4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1588년 식스토
5세 교황은 중세의 뛰어난 철학자이자 사상가로 존경받고 있던 보나벤투라 주교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마태오 11,25-27)
"I
give praise to you, Father, Lord of heaven and earth, for although you have hidden these
things from the wise and the
learned you have revealed them to the
childlike.
말씀의 초대
탈출기는 모세의
부르심을 전한다. 미디안 땅으로 도망하여 양을 치던 모세는, 불이 붙어 있으나 타서 없어지지 않는 떨기나무에서 하느님을 뵙는다. 이제 모세는
자신의 힘이 아니라 그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게 될 것이다(제1독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지혜와 슬기로 하느님을 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아니라 철부지 같은 이들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하느님을 찬미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어제 독서에서
모세는 좌절과 실패를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동포를 위한 열정과 정의감은 있었으나 아직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은 채 나섰기 때문에, 모세는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판관으로 세우기라도 했소?” 하고 말하면서 거칠게 반항하는 사람에게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어제의 장면은 모세가
파라오를 피하여 미디안으로 도망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모세는 자신에게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음을 절감합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라는 모세의 반문은
경험에서 나온 깨달음을 보여 줍니다. 이제 그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압니다. 그래서 그러한 깨달음이 전화위복이 되어 그가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가 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는 것은 모세가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오늘 호렙 산(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난
모세는 이집트를 탈출한 다음 호렙 산에서 하느님을 예배할 것입니다(탈출 19장 이하 참조).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예배하게 되는 것, 이것이
이집트 탈출로 시작된 해방의 완성입니다. 파라오의 권력을,
또는 모세의 능력을 숭배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구원을 엎드려 경배하는 것, 이것이 이스라엘이 해방된 백성임을 보여 주는 표지가
됩니다. 오늘 복음의 표현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자기의 지혜나 슬기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당신을 신뢰하는 철부지 같은 이들에게 당신을 알게
하십니다. 예수님 말씀을
통하여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결코 똑똑하거나 영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만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더욱이 어리석고 우둔하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철부지 아이처럼 살아가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저는 지금 강화에
있습니다. 사실 지난 월요일부터 백령도에 가기로 했는데 태풍의 영향으로 백령도로 들어가는 배가 결항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바로 강화입니다. 그리고 삼 일 동안 자전거를 타면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지요.
자전거를 타다가
문득 성인이 되어서 자전거를 처음 탈 때가 생각납니다. 자전거 샵에서 클릿(Cleat) 페달을 이용하는 것이 편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이
페달은 미끄럼 방지 클릿이 붙은 전용 신발을 신고 신발을 페달에 고정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힘 전달 과정에서 손실 없이
효과적으로 페달을 밟고, 끌어 올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분명히 자전거 탈 때 큰 도움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선택했는데, 자전거 신발이
페달에 고정되어 있다 보니 조금 당황스러운 일이 생기더군요. 교통신호를 보고서 횡단보도 앞에 섰는데 문제는 페달에 고정된 신발이 빠지지 않아서
제 의도에 상관없이 그대로 옆으로 ‘쿵’ 하고 쓰러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몇
차례 있고 나서 자전거 샵에 가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시는 말씀이 처음에는 원래 그렇다고, 넘어지는 법을 배워야 자전거를 잘 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어떤 것을 배울 때, 넘어지는 것이 제일 먼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갓난아기가 걸음을 걸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걸음마를 시작할 때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무엇일까요? 넘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2,000번을 넘어져야 비로소 걸을 수 있다고 말이지요.
이렇게 잘 넘어지는
것이 자신이 원하는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는 시작점인 것입니다. 그런데 넘어지는 것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즉, 실패나 절망의 순간을
두려워하면서 항상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원하고 있는 우리입니다. 하지만 넘어지지 않는다면, 좋을 일을 통한 기쁨 역시 제대로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그 감사 기도의 내용은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철부지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주님을 만나서 하느님의 일을 이제 막 시작한 제자들입니다. 정말로 부족함 그
자체였지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처럼 많이 배운 것도 아니었고,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가난한 어부 출신이 대부분이었고,
성격도 그리 좋았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부족한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처음부터
하느님의 일을 잘 했을까요? 아닙니다. 계속해서 그들은 넘어졌고 그래서 커다란 절망 속에 빠질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넘어짐의 시간들을
통해 더욱 더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하느님의 선하신 일이 제자들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각자를 통해 주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많은 고통과 시련의 시간을 통해 우리를 넘어지게 하시고, 이를 통해
하느님의 일을 더욱 더 잘 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순간에도 절망하거나 좌절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지금의 이 힘든 시간이
나를 주님께로 향하게 하는 가장 소중한 시간도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최선만 있는
건 아니야. 최선이 안 되면 차선이 있고, 차선이 안 되면 차차선도 있는 법이거든. 그래서 끝까지 가 봐야 하는 게
인생이야(김혜남).
엄마와
아들
왕비 병이 심각한
엄마가 음식을 차려놓고 아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었습니다. 엄마가 묻습니다.
“아들아! 엄마는
얼굴도 예쁜데 요리도 잘해 그렇지? 그러면 이런 엄마를 사자성어로 말하면 무어라고 할 수 있을까?”
엄마는
‘금상첨화’라는 사자성어를 기대했지요, 하지만 아들의 대답은 ‘자화자찬’이라는 것입니다. 엄마는 아니라고 말하면서 다른 대답을 찾아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과대망상?’하고 아들이 묻습니다. 엄마는 친절하게 힌트를 주겠다면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4글자이고,
‘금’으로 시작하는 사자성어야.”
이에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들은 대답합니다.
“금시초문”
엄마가 듣고 싶은
대답을 하지 못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역시 주님께서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닌 엉뚱한 말만 계속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이 가득한 우리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는데, 정작 우리들은 나만을 생각하는 욕심과 이기심으로 그 기대에 어긋난
모습을 보일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말과 행동을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늘사랑으로
밀어주려는 사람은
-이기정신부-
똑똑한 사람이다.
물방울 소리 들리는 사람이라고 한 적도 있어요. 어때서 똑똑하다는 건지 애매하기만 한데 아마 백과사전 같은 분이라는? 학점위주 일등 우세 잘남
돈 잘 버는 실력가 뭐 다 그런 걸 말할 겁니다.
부모는 자녀가
똑똑하길 기대해 뼈를 깎아서라도 뒤를 밀며 사랑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시며 까지 하늘사랑으로 밀어주려는 사람은, 마음 비워 넓고
소박하고 어린 마음 지닌 큰 사람들일 거라고 믿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오 11,25)”
-조재형신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불경에서도 수미산은
겨자씨 안에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부처님도
겨자씨 이야기를 하십니다.
책을 이만권이나
읽어서 별명이 이만권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수미산이 겨자씨
안에 있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스님께 찾아갔다고 합니다.
‘해와 달이 머무는
수미산이 어찌 저렇게 작은 겨자씨 안에 있습니까?’
스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당신은 별명이
이만권인데 어찌 작은 당신의 머리 안에 책이 이만권이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만권인 사람은
스님의 말씀을 듣고 겨자씨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반도체 산업이
발전해서 겨자씨 보다 작은 공간에 전 세계의 모든 책을 저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상상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경제학자,
수학자,
과학자들은 머리로
해결하려고 하니 신앙의 신비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가슴으로,
믿음으로,
사랑으로 바라보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도,
그분이 십자가를
지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모든 분자와
원자들은 우주와 지구의 시작 이후 소멸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단지 형태가 변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우리의 영혼이 영원한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제 오늘
모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모세는 구약성서에서
가장 위대한 예언자 중에 한명입니다.
히브리인들이 박해를
받는 상황에서 태어났고,
이집트의 왕궁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생애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피해
다녔고,
광야에서
40년간
살았습니다.
광야에서 지내면서
모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이집트의 왕
파라오와 맞섰으며,
10가지 재앙을 보여
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많았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광야에서 40년간
살았으며,
하느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십계명은 지금도
모든 신앙인들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지혜와 능력보다는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결단할 수 있고 결단할 수 있다면 이에 따른 고난을 사랑하며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환경을
탓하고 자신의 인간 조건을 탓하기에는 모세는 너무나 좋은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능력과 재능을 보기 전에 먼저 우리의 믿음을 원하십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님을
믿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몸으로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이슬람 신자들은
하루에 5번씩 메카를 향해서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가 신앙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그렇게 사셨습니다.
저의 부모님도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런 믿음을 보고
자란 자녀들은 신앙이 삶의 중심이 됩니다.
두 번째는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성모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믿음의 응답을 잘 합니다.
재물의 봉헌은
축복으로 되돌아온다는 믿음의 확신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몸으로
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온 마음으로
응답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주님과의
끊임없는 만남
-이수철신부-
오늘은
'만남'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진정
살아있는 만남의 결핍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과의
만남, 이웃과의 만남, 자연과의 만남등 무수한 만남으로 이루어져 있는 우리의 삶인데,
이런
풍요로운 만남이 사라져 가는 시대입니다.
디지털
시대, 갈수록 편리해 지는 통신 매체로 인해 살아있는 만남은 점차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좋은 가치들을 많이 잃어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서로간의
대화는 물론 하느님과의 대화인 기도도 날로 빈약해져 갑니다.
말그대로
풍요속의 빈곤한 내적 삶입니다.
통신매체의
분별있는 사용이, 절제가 참으로 절실한 시대입니다.
참으로
활발한 '소통의 시대'같은 데 역설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불통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입니다.
정말
'불(不)의 시대', 즉 불통, 불신, 불평, 불만, 불화의 시대같습니다.
소통의
욕구는 만남의 욕구요 우리 모두의 근원적 욕구입니다.
정말
만남의 신비, 만남의 선물, 만남의 은총입니다.
살아오면서
길이 남아있는 좋은 만남의 추억은 얼마나 되는지요?
모든
문제는 살아있는 좋은 만남의 부재, 체험의 부재에서 기인합니다.
만남은
많은데 피상적 만남이요 진정한 만남은 절대 부족합니다.
좋고도
아름다운 살아있는 만남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좋은
만남의 기쁨이요 축복입니다.
좋은
만남의 추억은 내적부요의 샘이요 내적변화의 지름길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살기위해
주님과 만나야 합니다.
주님과
만나야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끝없는 영적 배고픔과 목마름도 주님을 만나야 해결됩니다.
이런
주님과의 만남은 참 나의 만남으로 직결됩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한 치유와 위로, 기쁨과 평화, 참 나의 발견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도 '주님과 만남'입니다.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주님의 천사를 통해 주님을 만납니다.
우리
삶의 자리 역시 깨어 살면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만나는 불타는 떨기나무의 거룩한 땅이 될 수 있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하고 주님께서 부르시자 모세는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수련기를
마쳐가면서 때가 되자 모세를 부르시는 주님이십니다.
새삼
만남도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아무리
만남을 갈구한다 해도 때가 되어 주님이 찾아오시지 않으면 만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의 간절한 만남의 욕구를 전제로
합니다.
모세
역시 미디안 땅 광야에서 양떼를 치는 고독한 삶을 통해 주님을 찾는 마음 참 간절했을 것입니다.
주님과
모세의 만남이 참 좋은 묵상자료입니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
결코
감상적 하느님 체험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역사적 사명을 부여 받은 모세는 하느님께 아룁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만남으로 자신의 무능과 부족을 발견한, 참 나를 발견한 겸손한 모세입니다.
진정
주님을 만났는가의 분별의 잣대는 겸손입니다.
하느님을
만날 때 진정 자기를 아는 겸손입니다.
정말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하느님에
대한 정의는 이 말씀 하나뿐입니다.
이
말씀보다 더 좋은 말씀은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 하느님이십니다.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신 이런 주님과의 만남보다 더 중요한 만남은 없습니다.
만남을
통한 추억이요 변화입니다.
오랫동안
주님을 믿어오면서도 변화하지 않았다면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반증입니다.
정말
주님을 만나면 변화합니다.
변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살아계신 주님과 만남의 결정적 체험이 모세를 평생 살게 한 내적 힘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만일
모세가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모세는 평생 장인 이트로의 양떼만 치다 인생 마쳤을 것이며,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못할 것입니다.
참
주님과 만남의 은총이 놀랍고 신비롭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하늘 아버지의 만남이 참 아름답습니다.
그대로
아버지를 안전에 두고 찬양과 감사의 고백을 바치는 예수님이십니다.
공관복음에
유일하게 나오는 예수님의 찬양과 감사의 고백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참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이런
아버지와의 만남이 예수님에게도 내적 힘의 원천이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져 철부지 같은 우리들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살아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운명을 바꿉니다.
이런
만남들은 좋은 추억이 되고 우리를 내적으로 치유하고 변화시겨 행복한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우리의
모든 만남은 주님과의 만남으로 연결됩니다.
오늘
말씀에서처럼 주님과의 비상한 만남만 있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의 주님과 평범한 만남도 무수합니다.
영혼이
깨어 있을 때
좋은
이웃을 통해, 아름다운 자연을 통해서 우리는 진선미眞善美 사랑의 하느님을 만납니다.
얼마전
써놓은 '모두가 하느님 체험이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모두가/하느님
체험이자 기도이다
보는
것도/듣는 것도
입는
것도/먹는 것도/말하는 것도
냄새맡는
것도/감촉하는 것도
모두가/하느님
체험이다.
하여/삶은
끊임없는 기도가 된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요,
우리의
모든 체험은 궁극엔 하느님 체험이되고 하여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기도가 됩니다.
이런
모든 하느님 체험에는 주님의 직접적 체험이 바탕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미사와 성무일도 전례의 '하느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바로
하루의 시작에 앞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살아계신 주님을 새롭게 만남으로
복된
새날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주님과의
끊임없는 만남만이 살 길입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2).
아멘.
잔머리
굴리지 마라
-반영억신부-
국가정보원이
이탈리아 해킹업체인 '해킹팀'에서 해킹프로그램을 구매한 가운데, 국정원 측이 실제 목표물(real target)의 PC나 스마트폰을 해킹하기
위해 일명 '스미싱' 방법 등을 쓴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컴퓨터 인터넷, 스마트폰을 통한 가상공간에서의 부작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지극히 사적인
정보가 노출되어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국가는 물론 남의 개인 정보를 훔치고, 사기 치며, 익명을 이용하여 어이없는 글을 올리고 비난하며,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들이 늘어갑니다. 이런 사람은 컴퓨터나 현대의 기기를 사용할 줄 아는 것이 병입니다.
차라리 모르기나 하면 남에게 피해는 주지 않으련만…. 아는 것을 좋은데 사용하여 힘이 될 수 있고 능력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노자는 “알면서도 모르는 게 으뜸이요, 모르면서 아는 게 병통”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당시에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는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소위 잘나고 똑똑한 내로라하는 사람에게는 쉽게 받아들여
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최고였기 때문에 주님의 가르침이 들어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철부지들에게는
받아들여졌습니다. 그야말로 촌놈들, 상것들, 별 볼일 없는 못난이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단순함이 있었고 부족하다고
인정하는 겸손이 있었기에 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실 그것이 세상의 희망입니다.
잘난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남을 등쳐먹으려 애를 쓰고, 자녀를 뒷돈으로 좋은 학교에 입학을 시키고, 병역의무를 빠져 나가고,
배신자로 낙인찍어 심판을 하며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 서로를 헐뜯고 깎아 내리지만 때 묻지 않은 철부지들은 새로운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야말로 잔머리를 굴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단순한 사람을 미덥게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이 결코 병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을 가리키며 친숙해 지는
것, 그리고 감정을 이해하며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결국 알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또한 남녀가 결혼을 통해 가장 깊이 만나는
것을 ‘안다’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당신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고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마태11,27). 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그 아버지에 관해서 아들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고 그분이 알려준 아버지를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을 알리기 위해서 그분을
알아야 하는데 그 첫 자세가 “어린이와 같이”(마르10,15)단순한 마음으로 온전히 의지하며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단순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뜻을 더욱 잘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전할 수 있는 은혜가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 (탈출 3,12)
-오상선신부-
사제는
기도와 축복을 하기 전에 항상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인사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게 되든 때론
자신없고 두렵기도 하다면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만
가진다면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보나벤투라
성인의 이름은 "좋은
일이(Bona) 있을지어다(ventura)"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좋은
일이 생길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자, 오늘도
주님께서는 나를
이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좋은
사람도 만나고 때론
걸꺼러운 사람도 만날 겁니다. 비교적
쉬운 일도 있겠지만 도무지
자신이 안 서는 일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겁니다. "걱정말고
가거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모세에게
하셨듯이 나에게도
그렇게 약속해 주시니 오늘도
화이팅입니다.
-한상우신부-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름답습니다.
생명의
기쁨은 삶의
신비입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 불필요한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먼저 모든
사랑은 사랑받고
있음에서 시작됩니다.
철부지를
통해 섣부른
판단을 멈추게
됩니다.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자비와 은총을 간절히
바라는 신앙의
철부지들입니다.
불안한
우리들을 끝까지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는
분이 계시기에
우리는 행복합니다.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 하느님과
맺는 우리의 친밀한
관계입니다.
철부지는
혼자가
아님을 잘
압니다.
더이상
복잡하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철부지의 단순한
믿음이 하느님
신비로 들어가게
됩니다.
순수한
사랑은 모든 것을
풀어가는 철부지들의
열쇠입니다.
우리의 참된
모습은 하느님을
닮은 사랑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맺고있는 관계를
반성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직 하느님 사랑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우리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모든 것이
신비로운 사랑의 철부지가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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