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 스님의 주련] 53. 합천 해인사 일주문
자성 되찾아 놓으려는 반야의 가르침
‘금강경함허설의’에 실린 표현
보시는 애증·집착·분별 없는 것
열반 이르고자하면 자성 찾아야
합천 해인사 일주문 / 해강 김규진(海岡 金奎鎭 1864~1933).
歷千劫而不古 亘萬歲而長今
역천겁이불고 긍만세이장금
(영겁의 시간이 흘렀어도 옛날이 아니요./ 만세의 앞날이 오더라도 늘 지금이다.)
이 주련은 ‘금강경’을 해설한 ‘금강경함허설의(金剛經涵虛說誼)’에 나오는 표현이다. ‘금강경’ 제4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에는 ‘참다운 보시는 집착이 없다.’라는 요지의 가르침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또 수보리야, 보살은 반드시 어떤 것에도 머물지 말고 보시해야 하나니, 이를테면 사물에 머물지 말고 보시할 것이며, 소리와 향기와 맛과 감촉과 그 외의 온갖 것에 머물지 말고 보시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반드시 이처럼 보시하여 형상에 머물지 말라.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형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상상할 수 없느니라.”
보시하였다고 하는 상(相)에 머물지 않을 때 그 복덕이 가히 상상할 수 없다는 가르침이다. 가장 이상적인 보시를 삼륜청정(三輪淸淨)이라고 한다. 보시를 베푸는 자, 보시를 받는 자, 그리고 보시물 이 세 가지를 삼륜이라고 하며 이 세 가지가 모두 청정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참다운 보시는 삼륜에 대하여 애증이나 집착 그리고 분별이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가르침을 부처님께서 중생에게 주고자 하는가? 누구라도 피안에 이르고자 한다면, 주는 자와 받는 자 그리고 보시물이 공(空)한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함이다.
‘반야심경’에 빗대어 살펴보자.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이라고 했다. ‘모든 법의 실상을 증득하면 이것이 곧 진공의 실상이다. 그러기에 실상의 체(體)는 생멸이 없으며 이미 생멸이 없다고 하였는데 어찌 깨끗하고 더러움이 있으며 늘어나고 줄어듦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여기에서 실상의 체는 과연 무엇을 말함일까? 이를 제대로 알아차려야 주련의 내용을 이해할 수가 있다.
반야(般若)는 중생이 가지고 있는 본원(本圓)의 자성(自性)을 찾아줘 우리를 피안으로 이끌고자 한다. 자성은 크나큰 허공과 같다고 비유한다. 자성은 형상으로 이루어진 물건이 아니므로 나고 죽음이 없고, 더럽고 깨끗함도 없으며,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아니한다. 무엇 때문에도 좇아 온 바가 없기에 생(生)과 멸(滅)이 없고, 구(垢)와 정(淨)이 없으며, 증(增)도 없고, 감(減)도 없다. 이러한 자성을 되찾아 놓으려는 것이 반야의 가르침이다.
역천겁이(歷千劫而)에서 이(而)라는 표현은 문장의 흐름에 따라 그 쓰임이 다양하지만 여기서는 문구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역천겁(歷千劫)은 천겁(千劫)이 세월이 지났더라도, 이러한 표현이다. 천겁은 헤아릴 수 없는 영겁(永劫)의 세월을 말한다. 역(歷)은 이미 지나간 과거사(過去事)의 일들이다. 고(古) 앞에 불(不)이 있기에 옛날이 아니라는 표현이다.
긍만세(亘萬歲)에서 긍(亘)은 앞서 나온 역(歷)이라는 글자와 대비가 되는 문구로 널리 뻗음을 말하기에 미래를 나타낸다. 이어서 만세(萬世)는 오랜 세월을 말한다. 그러므로 긍만세는 비록 앞으로 만년의 세월이 온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표현이다. 장금(長今)에서 장(長)은 길다, 오래도록, 이러한 뜻이며 금(今)은 이제, 지금이라는 뜻이기에 장금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온다고 하더라도 바로 지금 이 자리라는 의미다.
이 주련은 조선 말 수행하셨던 함허기화(涵虛己和 1376~1431) 스님이 ‘한 물건이 여기에 있어 고금(古今)을 꿰뚫어서 있기에 늘 지금, 이 순간’이라고 탁월한 안목으로 가르침을 주셨기에 법보도량(法寶道場) 해인사(海印寺)의 일주문 주련으로 어울린다. 참고로 함허 스님을 함허득통(涵虛得通) 선사라고도 한다.
다시 ‘반야심경’을 보자. ‘자성을 모르면 전도몽상(顚倒夢想)에 빠진다’라는 구절이 주련의 내용을 더 분명하게 밝힌다. 그대가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자성을 찾아야 하는 법이다. 삼세 제불도 이 마음이라고 하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정각을 얻었으니 이 마음은 생멸이 없고 동요(動搖)가 없기에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