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제가 군대생활을 했던 경기도 포천 이동면을 조회하다 어느분의 블로그를 알게되었고
나이는 저보다 5살위지만 성장배경과 어린시절의 기억들이 공감되는바가 많아 올려 봅니다
제가 5군단 예하 8사단에 있었는데 그분은 5군단 본부에 복무하셨습니다
필자는 정광헌님으로 현재 동부LED대표이사이며 서울 청운초등학교 경복중고, 서울대출신입니다
글중에 미루꾸라는 말이 나오는데 저희도 어릴때 미루꾸라고 불렀던 밀크캬라멜의 일본식 발음입니다
사랑은 창밖에 빗물같아요
경기도 금촌에서 서울로 이사하던 장면을 지난 2월14일에 그려 이 블로그에 올렸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그 이야기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단기 4289(서기1956년) 서울 종로구 누상동의 초가집 단칸방으로 이사를 하였는 데, 부친(39세), 모친(36세)과 형(5세)과 나(4세), 그리고 누이동생(1세) 모두 다섯 식구였습니다.
경기도 금촌에서 경찰공무원으로 일하시면서 양계장을 집 안마당에 만들었을 정도로 여유(?)있고
안정된 생활을 하다가, 1956년6월11일에 돌연 사직하고 무직 상태에서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서울 단칸방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암담셨을까 생각해봅니다.
더욱 그 사직의 사유가 업무상의 과실이 아니라 부친의 개인적 로맨스(모친이 볼 때는 불륜) 때문 이었으니, 이 일로 인한 부모님간의 불화가알마나 컸을지 상상이 됩니다.
부친은 청념결백하고 부지런하고 유능한 경찰공무원이셨 다고 하는데, 1997년 80세에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다가 여러 수첩 여기저기에 ''선공후사(先公後私)''라는 문구를 수차례 기록해놓은 것도 아마 젊으셨을 때 직업의 영향이었을 것입니다.
황해도 금천군 구이면 미당리 435번지의 산골에서 가난한 선비의 장남으로 태어나, 가난을 극복하는 길은 도시로 가출밖에 없다는 생각에 18세 되던 해 어느 날 고향을 몰래 떠나 평양으로 가서 운좋게(?) 일본인 상점에 취직을 하여 사회 생활을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이 후 5년후 모친과 결혼 하였고 그리고 몇 년 후 만주로 이주하셨다고 합니다. 1945년 해방이 되어 귀향후, 남한으로 넘어와 1946년 경찰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그 때부터 6.25에 종군, 공비토벌 등 험한 생활을 하신후 금촌 파출소에 1953년에 배치되어 생활이 안정되어 가던 시기였던 1956년에 일어난 사고였습니다.
이사온지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저녁, 부모님간의 심한 부부싸움이 있었는데 네 살, 다섯 살의 저희 형제는 그 사유를 가늠할 수도 없는 가운데 그냥 한 구석에 앉아 다소 겁에 질려있었을 것 같습니다.
부부싸움의 열기가 한창 고조되었을 때, 근처에 사시는 막내 이모께서 들르셨는데 말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그냥 우리들과 함께 말없이 앉아 계시다가 얼마 후 살짝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얼마간 더 계속되던 부부싸움은 부친께서 방문을 걷어차고 나가시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모든 것을 체념하신 듯, ''얘들아 자자''라고 하시면서 방 한켠에 있는 이불 장에서 이불을 꺼내 펼치시는데 무언가
방에 굴러떨어지는 것이 있어서 살펴보니 그것은
''미루꾸''였습니다.
형과 나는 ''어! 미루꾸다!!!''라고 외쳤습니다.
입에 들어가 사르르 녹으면서 단물을 내는 것이 엿과는 비교도 안되게 맛있는 이 것들이 왜 이불에서 떨어졌을까 신기하게 생각하는 우리에게 모친께서 ''아마 이모가 넣어두고 간 모양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ㆍ
미루꾸 (Milk) 하나씩을 입에 물고 형과 나는 행복한(?) 표정으로 ''이모, 고마와요''하며 잠이 들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아마 그날 한 잠도 못주무셨겠지요.
부친은 80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이 로맨스(?)에 대한 책임감에서 벗어나실 수 없었으며, 그렇다고 우리 가정도 포기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어머님은 이 집에서 1958년 초에 막내 아들을 출산하시고, 이 사남매의 어린 손에 붙들려 자신의 운명을 걸고 헌신하셨습니다. 그리고 2017년에 98세에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부기 : 이모님도 2021년 91세로 영면하셨습니다)
65여년이 지난 오늘 어머님의 절망과 마음의 고통을 새삼 느껴보며 아래 그림 한장을 그렸습니다.
위 서촌 지도상에 1번 표시한곳이 단칸방 초가집이 있던 곳이며, 지금은 연립주택이 빼빽이 들어차 찾기가어려운데 아마도 위 사진의 좌측 첫째 붉은 건물 다음의 흰색건물 자리로 추정된다.
[출처] 210424 서울 단칸방 이불꾸러미에서 떨어진 이모의 ''미루꾸(Milk)''|작성자 돌스폰지
첫댓글 정수님~
밀크 캬라멜을 말 하는 거군요
정말 맛이 있지요
예전엔 많이 사 먹었는데
요즘은 안 사먹는 답니다
아버지의 약점이 있지만
그 시절엔 다들 눈감아 주고 하였는데
어머님은 그게 용서가 안 되었나 봅니다
잘 읽고 갑니다
반갑습니다. 그시대의 아버지들은 저런일들이 거의 있으셨을겁니다. 제아버지도 어머니와 부부싸움을 하면 문을 걷어차고 나가시곤 했지요. 미루쿠라 불리던 밀크캬라멜 저도 다섯살 무렵 처음 맛보았는데 참 달콤했습니다
어머나!
4살때 의 기억을 어쩜 그리 생생하게
한편의 드라마 같았던 삶
이야기 현실감 있게
작품으로 완성시키셨네요.
밀크 카라멜 생각나네요
어쩜 그림 솜씨도 대단하십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분의 블로그에 가면 어린시 절의 글들이 참 많고 손수 만화로 삽화를 그려넣었는데 서울의 옛풍경들이 많이 나옵니다. 즐거운 일요일 오후 되시기 바랍니다
기정수님 산만 잘 타시는 줄 알았는데 그림도 잘 그리십니다.
미루끄에 입에 침이 돌며 선공후사라는 귀한 단어를 보면
공무원의 훌륭한 마음자세를 보며갑니다
감사합니다. 이글은 위에 출처를 자세히 설명했고 퍼온글입니다 ^^ 어린시절 공통된 추억이 있어 복사해서 올렸습니다.
미루꾸사탕 참말로 맛있엇지요
요즘도 그사탕이 롯데에서 나오더라구요
반갑습니다. 어린시절 미루꾸는 비싸서 자주 먹을수 없었지만 참 달콤했습니다 요즘은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기묘한 인연이군요
저의 아버님 고향이던 황해도 평산군과 금천군은
바로 옆에 붙어있는 고장 들입니다
저의 아버님도 만주에 아주 오래 사셨구요
이후 월남해서 경기도청에서 근무하셨지요
글쓴이가 살았다는 누상동은
제가 중고등학교 시절 살았던
통인동 바로 옆 인왕산 아래 동네입니다
제 바로 아래 여동생이
청운국민학교를 졸업했지요
박정희 대통령의 작은 딸과 동기입니다
저도 5군단 산하 수기사에서 근무했지요
이동근처 국망봉 아래에 부대가 있었습니다
수기사 기갑여단.
나중에 포천 하심곡으로 이동했지요
8사단 10연대와 자리를 맞바꾸었습니다
미루꾸는 지금도 인터넷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일본 모리나가 제과의 대표상품 중 하나입니다
포장도 옛날 것과 똑같습니다
한참 산행을 다니던 시절
미루꾸를 넣고 다녔습니다
사탕보다 잘 녹고 바로바로 흡수가 되지요
잘 보고 갑니다
반갑습니다 이분의 이력을 보고 청솔선배님과 닮은 점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수이수만과 국민학교부터 대학까지 동창이더군요. 등산다닐때 보니 미루꾸를 가지고 다니던 사람이 많았습니다. 당떨어진 사람들에게 효과가 클것 같았습니다. 이분의 블로그를 보면 어린시절 이야기가 많습니다
@기정수 그렇군요
이수만이 저랑 대학동기입니다
복학할 때 바로 제 앞에서 등록했지요
우리 때 경복출신들 많았습니다
3년만에 만나서 무지 반가웠습니다
3학년 때 함께 기숙사생활을 했었고
이런저런 인연으로 잘 알지요
산울림 김창완도 동기입니다
참 넓고도 좁은게 세상입니다
혹시 제가 알지도 모르겠습니다
단과대학이 같을지도 모르겠네요
이수만 얘기하는 걸 보니...
정광헌이란 이름은 기억에는 없습니다
@청솔 이수만이도 같은 반이었다. 학기 초에 수만이 할머니께서 커다란 주전자를 반에 갖고 오셨다. 그날 수업이 끝나자 선생님께서 수만이와 그날 당번인 나를 부르셨다. 선생님은 그 주전자를 가리키시면서, “주전자는 우리 반 전원이 사용하는 것이니 주전자에 쓰인 ‘2학년 9반 이수만’이라는 글자 중 ‘이수만’을 지워야 한다.”라고 하시며 수만이와 내가 함께 철봉대 모래밭에 가서 그것을 지우라고 하셨다. 오랜 시간 걸려 그것을 지웠던 기억이 난다. 수만이와는 이후 같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까지 같은 곳에서 공부했다.
[출처] 210731 서울 청운국민학교 입학과 귀한 만남들|작성자 돌스폰지에서퍼왔습니다
@기정수 그렇군요.
이수만이 요즘 좀 시끄럽지요
제가 다닌 대학에 음악하던 친구들이
좀 있었습니다
수만이랑 창완이도 있었구
샌드페블즈도 저희 때 만들었지요
그 때가 1기입니다
창완이는 중앙 나왔구
기차통학을 같이했던 술친구입니다
이후 대학가요제때 대상 탔을 때가
제가 복학했던 77년도입니다
우리 몇 해 후배들 ^^*
저의 부친은 1918년 말띠셨는데
경찰도 그렇고 참전도 그렇고
비슷한 추억이 겹치네요.
하지만 저는 미군들의 초콜렛 이며 콜라를 얻어먹으며 자랐는데요.
반갑습니다. 아버님께서 정광헌님의 아버님과 이력이 많이 일치하시나 봅니다. 제아버님은 1927년 생으로 주인공의 아버지보다는 아래세대이지만 6.25 참전후 중학교 선생을 잠시하시다 사업을 하셨습니다. 모두들 어려운 시절에 고생을 많이 하신 분들입니다
미루꾸 캬라멜 같이 생긴
과자 어릴적에 먹어본 기억이
나는 군요 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작은종이로 포장된 미루꾸 정말맛있었습니다. 즐거운 하루되시기 바랍니다!
국민학교때 소풍이나 가야 미루꾸 얻어 먹었지요 세상에나 맛있는 미루꾸! 엄마가 나무도시락에 김밥하고 쌓주었던 잊지못할 메뉴였었고 다들 어려웠던 시절 이었지요
반갑습니다 미루꾸는 특별한 날에나 먹을수 있는 고급간식이었습니다. 얇은 나무로 싸졌던 김밥도 생각납니다
기정수님~
초등학교때 미루꾸 카라멜 먹고 싶어
전방 하는 친구 책 보따리 많이도 들고
집에까지 들어 주고 할때마다 한개씩
받아먹고 했네요.
그 친구 후회하면서 죄 받았다고 울면서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는데 아이둘 나두고
하늘 나라에 갔네요.
그래서 7년전 삶에 방에 글도 올렸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일들이 스처 가네요.
반갑습니다. 미루꾸가 먹고 싶어 점방하는 친구의 책보따리도 들어주셨군요. 마음 착한 친구분도 일찍 하늘나라에 가셔서 미루꾸를 보면 옛생각이 많이 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