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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와 “자유”
-『실천이성비판』-
칸트와 계몽시대
인간이 무리지어 살기 시작한 이래로 줄곧 “규범”은 존재해 왔다. 그런데 인류 역사에서, 특히 서양의 역사에서 “도덕”과 관련된 중요한 전환점은 “그리스도교”의 등장이다. 예수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2000년 전, 유명한 “산상수훈”이라고 불리는 설교를 한다. 그 설교는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가? 예수의 설교는 우리가 도덕적이어야 하는 이유를 천국의 보상과 지옥의 형벌로 설명한다.
예컨대 원수를 사랑하고,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른 자를 용서하는 것 등의 도덕적 행위를 해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천국의 보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고, 형제를 저주하고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부도덕한 행위를 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그럴 경우 지옥의 형벌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로부터 1800년 동안, 많은 화가와 소설가들은 지옥이라는 영원한 형벌과 천국이라는 영원한 축복을 묘사하며 대중에게 도덕적으로 살아야 함을 가르쳤다.
그리고 계몽주의 시대가 최고조에 이른 18세기부터는 사람들과 공동체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이 중세에 비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제는 도덕성에 대한 새로운 설명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교리에만 입각한 설명은 더 이상 사람들에게 커다란 설득력을 갖지 못 하는 시대가 되었다. 계몽시대는 “이성의 시대”이며, “인간”이 주도하는 시대이다. 인간이 권위를 가져야 하는 시대에서는 절대자인 “신”에 의존하지 않는 도덕성에 대한 설명이 요구된다. 천국과 지옥을 끌어들이지 않고 인간 이성에만 기대어 도덕성을 설명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이러한 역할을 감당해 낸 계몽시대의 철학자가 바로 칸트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서양의 근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하나 발발한다. 다름 아닌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이다. 프랑스 대혁명은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근대 시민 사회의 출발이 된 사건이었다. 감히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절대주의의 황제를 시민들이 무너뜨린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내세운 것은 “자유”, “평등”, “박애”였다. 그 중에서 우리는 “자유”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세기 “계몽주의”의 중심이 되는 가치 중 하나가 바로 자유였고, 근대를 이끄는 계몽 사상가이자 도덕철학자인 칸트에게는 도덕철학의 토대이자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유를 찾는다. 그는 먼저 세계, 우주, 자연에서 자유를 찾아 나섰지만, 어디서도 자유는 보이지 않고 오직 “뉴튼의 법칙”만 보였다. 뉴튼의 자연관에 의하면 일체의 것은 자연법칙으로 꽉 차 있으며,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엮어져 있어 필연적이다. 그런데 “자유”는 필연적이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자유는 할 수도 있고, 또 하지 않을 수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칸트가 알고 있는 세계, 우주, 자연 속에서는, 모든 것이 인과관계로 묶여져 있기 때문에 자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칸트는 “자유”를 자연법칙이 지배하는 세계가 아닌, 도덕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찾기 시작한다.
“자유”와 “도덕법칙”
칸트의 도덕철학은 이처럼 우리 인간에게 “사실”로서 주어져 있는 “도덕법칙”을 출발점으로 해서 전개되고 있다. 칸트에 의하면, 도덕법칙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필연적으로 주어져 있다. 그리고 칸트에게 있어서 도덕법칙은 행해야 하는, 해내야 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해야 한다”(當爲, Sollen)라는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명령의 형식으로 주어져 있다. 칸트에 있어서 도덕법칙은 엄숙하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덕법칙은 무조건적인 “정언명령”의 형식으로 주어져 있다. 예를 들어 “노년에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젊어서 근면하게 살아라.”와 같은 조건적 명령은 올바르고 중요한 도덕적 가르침일 수 있지만, 노년의 행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이 가르침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또 도덕법칙이 “정직하거나, 부모를 공경하라.”와 같은 선택적인 명령으로 주어진다면, 그 명령 중 하나는 따르지 않아도 무방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조건적 명령이나 선택적 명령은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질 수 없다. 이렇게 선택적인 명령이나 조건적인 명령은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질 수 없고, 오직 정언명령만이 보편성과 필연성을 갖기 때문에, 칸트는 도덕법칙이 정언명령으로 주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칸트는 “너의 행위의 준칙이 네 의지를 통해서 보편적 자연법칙이 될 수 있는 것처럼 행위하라.”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칸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간단하다. 어떤 행위가 도덕적인가 아닌가의 기준은, 그 행위의 기준이 언제 어디에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즉 내가 지금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의 판단 기준은, 내가 다른 사람이 같은 상황에서 그 행위를 하는 것을 옳다고 판단할 수 있다면 그 행위는 보편적인 도덕적 법칙에 따른 것이고, 따라서 옳은 행위이다.
그런데 이처럼 인간에게 엄숙하게 주어져 있는 도덕법칙이 무의미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것을 “해낼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해야 한다”는 것은, 그것을 “할 수 있다”(Können)는 것을 전제한다. 그리고 이 “할 수 있다”는 것의 다른 말은 결국 “자유”(自由, Freiheit)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할 수”도 있지만, “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덕법칙은 자유를 전제해야 한다. 자유가 전제되어 있지 않으면 도덕법칙은 무의미하다. 달리 말해 우리가 자유롭지 않다면 도덕법칙은 무의미하게 된다.
칸트에 의하면, “자유”는 “도덕법칙”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칸트에 의하면, “자유”는 도덕법칙의 “존재근거”이다. 그리고 “도덕법칙”은 자유의 “인식근거”이다. 다시 말해서 도덕법칙은, 우리에게 자유가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차리도록 해 주는 그 인식근거가 된다. 그리고 자유는 도대체 도덕법칙이 존재할 수 있게 해 주는 그 존재근거가 된다.
결국 칸트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계(現象界) 속에서는 자유를 얻어낼 수가 없다고, 경험 속에서는 자유를 얻어낼 수가 없다고 말한다. 즉 자유를 “생각할 수”는 있지만 “증명해 낼 수”는 없다는 난관에 부딪힌다. 하지만 칸트에 있어서 자유는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이념이다. 그리하여 칸트는 다만 우리의 이성이 생각할 수 있는 영역인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의 세계” 또는 “예지계”(睿智界)에만 머물러 있던 자유를 “현상계”로 옮겨 놓는다. 다시 말해 자유를 “요청”(要請, Postulat)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흔히 “자유”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내 마음대로라는 것은 나의 주관적인 규칙들을 의미한다. 하지만 칸트가 이야기하는 “자유”는 그렇지 않다. 칸트에게 있어서 자유는 주관적인 규칙이 아닌, 보편적이고 필연적이고 객관적인 법칙,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하나의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게끔 하는, 도덕법칙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쉽게 사용하는 “자유”라는 말에는 엄격한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우리는 도덕법칙을 지키면서 내 안에 “자유”가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지켜내기 힘든 도덕법칙 속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소중한 자유를 알 수 있다.
마지막까지 도덕고하 자유를 포기할 수 없었고, 포기하지 않았던 칸트의 철학을 통해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자유인가? 도덕인가? 아니면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치는 계몽사상과 계몽사상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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