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는 연극을 보다 - Woyzeck by 사다리움직임연구소 (1)
읽고 해석하기 2008/01/27 08:44
Sadari Movement Laboratory라는 이름을 마임 Festival 홈페이지에서 보고 예매를 할까 말까 고민할 때까지만 해도 그들이 한국에서 왔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동양인 남자의 잘 단련된 팔근육이 등장하는 사진을 보면서도 태국이나 뭐 그런 곳에서 온 극단이려니 했다. 그런데 Sadari Sadari 사다리... 너무 입에 잘 붙지 않는가 말이다. 그렇다, 그들은 KOREA에서 날아온 극단이었다.
Woyzeck은 기구한 운명을 살다간 독일 남성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위키를 검색해보니 굉장히 중요한 연극이고 여러 가지 버전으로 반복해서 지금까지도 상연되고 있다고 한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줄거리는 단순하고 진부하다. 평범한 노동계급의 남자 Woyzeck은 전쟁에 병사로 참여하고, 의학 실험의 피실험자도 되고 하면서 정신줄을 살짝 놓기 시작한다. 와중에 같이 사는 여자 Marie는 바람직한 남성성의 화신 Sergeat-Major (얘는 이름부터 Major다)와 바람을 피우기 시작한다. Woyzeck은 진짜로 맛이 가면서 Sergeat-Major한테 덤볐다가 개박살나고 Marie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결국 죽인다. 실제 인물은 재판을 받고 공개 처형되었다고 한다.
1830년대에 쓰인 희곡이고 그나마 작가는 완성도 못 한 채로 죽었단다. 진부해서 지루해지기까지 할 법한 줄거리인데 대체 어떤 매력으로 21세기를 훌쩍 넘긴 지금까지 수많은 버전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일까. 원래 희곡이 어떤지 몰라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은 답하기 어렵다. 사다리의 공연은, 원래 희곡을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오리지널과는 엄청나게 다를 것이라고 추측한다. 일단 말이 거의 없고, 대사는 내용을 전달하기보다는 음향효과로 사용하는 이 현대적인 연극이 1800년대 초반 작가가 머릿 속에 그렸던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보이첵을 두고 실험하는 Doctor. 의사 역을 한 아저씨 대사빨 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 주제와 줄거리 핵심은 이 사다리의 버전에도 그대로 담겨 있을 거라고 볼 수 있을터이다. 이 연극 (정확히는 희곡)은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연극 초반 전쟁이 끝날 무렵의 scene에서 보이첵이 내뱉는 대사 "They do not care poor people like us." (정확한 대사는 조금 다를 수도 있는데 대충 이런 거였다)가 이 연극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 소개하고 있다. 세상살이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몰락해가는 노동계급 남성의 이야기인 것이다. 사다리의 버전에서는 이를 좀더 일반적인 관점을 강조하면서, 시스템이 인간을 파괴하는 과정으로 보면서 이야기를 전개하기는 하는데 기본적으로는 밑바닥 인생이라는 면이 매우 중요하게 자리한다. 또한 이 이야기는 사랑과 질투, 이것이 불러오는 파멸을 다룬다. 아주 보편적인 두 가지 주제가 유기적으로 엮여 있는 것이다. 원래 희곡을 한 번 읽어보면 좋을 것 같은데, 아마도 워낙 잘 써서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싶을 때 굳이 다른 희곡을 쓸 필요를 못 느낄 정도로 썼을 것 같다. 뻔한 내용을 제대로 써놓으면 고전이 되지 않나.
죽이는 연극을 보다 - Woyzeck by 사다리움직임연구소 (2)
읽고 해석하기 2008/01/27 20:59
갑자기 인터넷이 끊기는 바람에 포스트 2탄을 다시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흘러버렸다. 삘 받은 거 다 휘발돼버려서 신나게 못 쓰지 않을까 걱정. 어찌됐든, Woyzeck 계속 간다.
이전 포스트에 원래 이야기의 매력이 뭐였을까를 열심히 추측해봤다. 그런데 이 사다리의 버전에서는 그나마 단순했던 이야기 구조가 워낙 단순해져서, 그야말로 뼈대만 남겨놓고 그 위에 완전 자기들 방식으로 살을 새로 입힌 터라 원래 이야기의 매력에 이 작품의 장점이 의존하고 있는 부분은 더 작을 거라고 생각한다. 설마 원래 희곡에서도 의자로 온갖 짓거리를 해대는 장면들을 묘사한 건 아니겠지 -.-;;
의자에 갇혀 해부당하는 보이젝. 실험실의 코러스. (모든 사진은 London International Mime Festival 홈페이지에서 퍼옴)
이 연극에서 가장 눈을 잡아 끄는 부분은 역시 "의자"이다. 의자 외에는 거의 어떤 소품도 등장하지 않는다. 의상마저 단순하기 그지 없어서 다들 사진에 등장하는 짙은 회색의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나오며 남녀 구분조차 없다. 그들은 무인격의 회색 시스템의 일부일 따름이다. 조금씩 예외가 있긴 한데 Marie가 원피스를 입고 나온다든지, Sergeant-Major의 붉은빛 가죽 조끼, Caption의 두둑한 뱃살에 간신히 걸쳐 있는 조끼 같은 것이 그 예외에 해당한다. 그 외에도 장면에 따라 실험용 가운 -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는데 마치 도살자의 옷처럼 보인다 - 장갑, 가운 정도를 그 유니폼 위에 걸치고 나오기도 한다.
의자 역시 똑같이 생긴, 어릴 적 "국민"학교 시절에 사용하던 걸상같이 생긴 놈들이다. 이처럼 극도로 단순화된 시각적인 장치만 갖고, 이 연극은 어마어마한 비주얼을 만들어낸다. 공연 내내 정신을 홀딱 빼놓을만한 비주얼을 말이다. (의자 활용에 대한 연출가 임도완 씨의 발언이다. "‘의자’는 서울예대 수업과 자크 르꼭에 다닐 당시 수업에서 했던 이미지들을 떠올리면서 이용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떻게 보면 의자는 권력을 상징하잖아요? 보이첵은 권력에 의해 무너져 내려가는 사람이고. 그래서 의자를 배우들에게 던져주고 만들어 보자고 한 거죠." 2007년 10월, 한국연극, 인터뷰 전문)
의자는 다른 어떤 소도구도 없는 이 연극에서 무대 배경이고 소품이고 또 다른 배우(들)이며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는 무대효과를 대신한다. 무엇보다 대사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는 이 연극에서 대사를 대신해 이야기를 표현하는 언어이다.
의자를 활용하는 이 연극의 방식을 지켜보면 예술가들이 왜 예술가인지 느껴진다. 의자로 별 짓을 다 하는구나... 의자로 할 수 있는 일의 끝이 뭘까... 참 열심히 고민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시도는 아주 성공적이다. 재미있고 멋있고 아름답고 숙연하고 슬프고 섹시하고 참담하고 숨막히고... 그 모든 상황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의자는 굉장히 효과적인 언어로 쓰인다.
기억에 남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흠... 일단 Sergeant-Major가 바에서 술 마시며 기분 내는데 Woyzeck이 덤비는 장면이 생각난다. 여기서 의자는 맥주잔 대신이다. 의자를 다들 치켜들고 때때로 서로에게 던지며 기분을 내는데 정말 흥겨워보인다. 그러다가 토하는 Sergeat-Major에게는 순식간에 그를 받쳐주는 의자나 탁자 같은 것이 되고, 덤벼들었다가 개박살난 Woyzeck의 목을 조르며 Sergeant-Major의 압도적인 모습을 과시하기도 한다.
혹은 Woyzeck이 처음 환상을 보기 시작한 무덤의 장면을 생각해보자. 코러스는 의자와 함께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조금씩 기우는데 그와 함께 무대 자체가 기울기 시작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도 보이고 망자들의 행진같기도 하고 살짝 맛이 가기 시작한 Woyzeck의 비틀린 시야일 수도 있고. 하여간 그런 식으로 공간으로 비틀어 보일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런 장면을 보고 있으면 나까지도 살짝 맛이 가는 것 같다.
Woyzeck을 옥죄는 시스템/현실을 보여주는 장치로서 의자를 목에 걸고 다니는 장면 같은 건 이 연극에서 의자의 가장 기본적인 쓰임새이다. 현실의 억압을 상징하는 장치로서의 의자. 이 극에서 사용하는 의자는 등받이 부분이 덜렁 사각형 프레임으로 되어 있다. 이 부분이 수인의 칼과 같이 쓰인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 같이 의자는 코러스와 더불어 기묘한 Kiosk, 혹은 그 안에서 죽음을 파는 상인 그 자체로 변신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배우들이 어떻게 차곡차곡 쌓여 있는지 보는 동안 너무 궁금했다.)
키오스크, 혹은 죽음을 파는 상인. 코러스가 돋보이는 장면 중 하나였다. 사진에서 가장 아래 오른쪽에 보이는 여자분 목소리가 엄청 좋았는데.
마임 페스티발이니 이거 마임 아니었나? 왜 대사가 등장하나 처음엔 좀 의아하기도 했다. 배우들은 많지는 않지만 한국어 대사를 한다. 가끔씩 토종 한국발음으로 영어 대사도 날려준다. (처음엔 너무 낯간지러웠다) 그런데 어차피 대사 자체가 거의 없고, 대사도 내용을 전달하기보다는 분위기를 북돋우는 음향효과처럼 사용하기 때문에 다른 극에 비해서 못 알아듣는 것이 큰 문제가 안 될 것 같긴 했다. 그러니까 작년 에딘버러 페스티발에서도 큰 상 타고 객석 점유율 1위, 외국인 관객들 반응도 엄청 좋고 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대사를 알아들으면 5배쯤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딱 미친 과학자처럼 생긴 Doctor가 Woyzeck두고 실험하는 장면. 옆에서 도살자같은 복장을 한 코러스가 이 미친 과학자의 이상한 대사를 막 따라한다. "Medical revolution~!"이라든가 길거리에 오줌을 눈 Woyzeck을 두며 말세라고 한탄을 한다든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뭐 그런 웃기는 대사들이 있고 코러스는 역시나 이상한 새된 목소리로 이걸 막 따라하면서 울림을 만들어낸다. 엄청 감탄하면서 본 장면(들이 워낙 많긴 하지만) 중 하나였다. 다른 관객들도 재미있어하는 걸로 봐서 대충 무슨 분위기인지 파악한 것 같긴 한데, 한국어의 뜻을 알아들으면 그 절묘함이 배가 된다.
죽음을 예비하는 Woyzeck
이 연극을 보면서 새로 발견한 것 중 하나가 조명의 힘이다. 위의 장면은 Woyzeck이 죽겠다고 기도를 하던가, Marie를 죽이겠다고 결심하던가 뭐 그러는 장면이다. 무대 가운데 약간 비스듬하게 한 줄로 의자를 좌악 늘여놓고 그 끝에 Woyzeck이 얼굴도 가물가물하게 앉아 있다. 이 장면은 대사도 거의 없고 그나마 있는 대사도 뭔 소린지 알아먹기 힘들다. 이 장면은 오로지 조명, 조명으로 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간에 만들어내는 엄청난 깊이감, 그 끝의 작디 작은 인간, 천상으로 조용히 외롭게 올라가고 있는 듯이 보이다가 다시 지상으로 내려오기까지. 그 모든 이야기를 조명으로 한다.
쓰다보니 말은 참 많긴 한데 연극을 전체적으로 보는 리뷰와는 굉장히 거리가 멀어졌다. 핵심은, 진짜 "죽이는" 연극이라는 거다. 아울러 이 연극은 극단의 연극이라는 느낌이 굉장히 강하다. 연기 잘하는 몇몇 배우들이 모였다거나 연출을 잘 했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물론 연출 최고, 연기도 잘 했지만) 이 "극단"의 것이라는 느낌이다. 연극을 본 경험은 별로 없지만 그 몇 안 되는 작품들 중에 이처럼 극단 고유의 색깔을 강하게 내는 작품은 처음이었다.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다른 작품들도 멋질 거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한국에 가면 이 극단을 예의 주시하면서 공연보러 가야겠다.
덧붙임: 저녁을 먹고 7시 45분 공연을 보러 Purcell Room에 들어가려는데 한국어로 뭐라고 휙휙 갈겨쓴 종이가방이 보였다. "공연 전단지니 가져가지 마세요" 이런 내용의. 훗~ 웃고 지나치려는데 그 옆에 낯익은 한국 여자가 보인다. "혹시 Marie역 했던 분 아니세요?" 호들갑을 떨며 다가가는 나에게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해주는 배우. 우헤헤. Woyzeck 역 맡았던 배우도 있었던 거 같은데 이 언니(?)랑 얘기하느라 다음 공연 시간에 쫓기느라 제대로 못 봤다. 내가 완전 쥑인다, 너무 재밌게 봤다고 하니까 에딘버러에서 반응이 좋아서 이번에 다시 초청받은 거라고 한다. 지금은 이렇게 담담(!)하게 이야기하시지만 작년 같은 경우 얼마나 얼떨떨했을까. 엄청 고생도 많이 하던 분들일텐데 (처음에 연극 만들 때는 리뷰조차도 없었다고 한다) 이젠 국제적으로 노는 분들이 되었다. 아쉽게 인사를 하고 다음 공연에 들어갔는데, 후회했다. 껌딱지처럼 붙어서 뒷풀이 자리에라도 따라갈걸... 다음 공연은 별로 재미도 없었는데. 쩝.
죽이는 연극을 보다 - Woyzeck by 사다리움직임연구소 (2)
읽고 해석하기 2008/01/27 20:59
갑자기 인터넷이 끊기는 바람에 포스트 2탄을 다시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흘러버렸다. 삘 받은 거 다 휘발돼버려서 신나게 못 쓰지 않을까 걱정. 어찌됐든, Woyzeck 계속 간다.
이전 포스트에 원래 이야기의 매력이 뭐였을까를 열심히 추측해봤다. 그런데 이 사다리의 버전에서는 그나마 단순했던 이야기 구조가 워낙 단순해져서, 그야말로 뼈대만 남겨놓고 그 위에 완전 자기들 방식으로 살을 새로 입힌 터라 원래 이야기의 매력에 이 작품의 장점이 의존하고 있는 부분은 더 작을 거라고 생각한다. 설마 원래 희곡에서도 의자로 온갖 짓거리를 해대는 장면들을 묘사한 건 아니겠지 -.-;;
의자에 갇혀 해부당하는 보이젝. 실험실의 코러스. (모든 사진은 London International Mime Festival 홈페이지에서 퍼옴)
이 연극에서 가장 눈을 잡아 끄는 부분은 역시 "의자"이다. 의자 외에는 거의 어떤 소품도 등장하지 않는다. 의상마저 단순하기 그지 없어서 다들 사진에 등장하는 짙은 회색의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나오며 남녀 구분조차 없다. 그들은 무인격의 회색 시스템의 일부일 따름이다. 조금씩 예외가 있긴 한데 Marie가 원피스를 입고 나온다든지, Sergeant-Major의 붉은빛 가죽 조끼, Caption의 두둑한 뱃살에 간신히 걸쳐 있는 조끼 같은 것이 그 예외에 해당한다. 그 외에도 장면에 따라 실험용 가운 -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는데 마치 도살자의 옷처럼 보인다 - 장갑, 가운 정도를 그 유니폼 위에 걸치고 나오기도 한다.
의자 역시 똑같이 생긴, 어릴 적 "국민"학교 시절에 사용하던 걸상같이 생긴 놈들이다. 이처럼 극도로 단순화된 시각적인 장치만 갖고, 이 연극은 어마어마한 비주얼을 만들어낸다. 공연 내내 정신을 홀딱 빼놓을만한 비주얼을 말이다. (의자 활용에 대한 연출가 임도완 씨의 발언이다. "‘의자’는 서울예대 수업과 자크 르꼭에 다닐 당시 수업에서 했던 이미지들을 떠올리면서 이용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떻게 보면 의자는 권력을 상징하잖아요? 보이첵은 권력에 의해 무너져 내려가는 사람이고. 그래서 의자를 배우들에게 던져주고 만들어 보자고 한 거죠." 2007년 10월, 한국연극, 인터뷰 전문)
의자는 다른 어떤 소도구도 없는 이 연극에서 무대 배경이고 소품이고 또 다른 배우(들)이며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는 무대효과를 대신한다. 무엇보다 대사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는 이 연극에서 대사를 대신해 이야기를 표현하는 언어이다.
의자를 활용하는 이 연극의 방식을 지켜보면 예술가들이 왜 예술가인지 느껴진다. 의자로 별 짓을 다 하는구나... 의자로 할 수 있는 일의 끝이 뭘까... 참 열심히 고민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시도는 아주 성공적이다. 재미있고 멋있고 아름답고 숙연하고 슬프고 섹시하고 참담하고 숨막히고... 그 모든 상황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의자는 굉장히 효과적인 언어로 쓰인다.
기억에 남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흠... 일단 Sergeant-Major가 바에서 술 마시며 기분 내는데 Woyzeck이 덤비는 장면이 생각난다. 여기서 의자는 맥주잔 대신이다. 의자를 다들 치켜들고 때때로 서로에게 던지며 기분을 내는데 정말 흥겨워보인다. 그러다가 토하는 Sergeat-Major에게는 순식간에 그를 받쳐주는 의자나 탁자 같은 것이 되고, 덤벼들었다가 개박살난 Woyzeck의 목을 조르며 Sergeant-Major의 압도적인 모습을 과시하기도 한다.
혹은 Woyzeck이 처음 환상을 보기 시작한 무덤의 장면을 생각해보자. 코러스는 의자와 함께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조금씩 기우는데 그와 함께 무대 자체가 기울기 시작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도 보이고 망자들의 행진같기도 하고 살짝 맛이 가기 시작한 Woyzeck의 비틀린 시야일 수도 있고. 하여간 그런 식으로 공간으로 비틀어 보일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런 장면을 보고 있으면 나까지도 살짝 맛이 가는 것 같다.
Woyzeck을 옥죄는 시스템/현실을 보여주는 장치로서 의자를 목에 걸고 다니는 장면 같은 건 이 연극에서 의자의 가장 기본적인 쓰임새이다. 현실의 억압을 상징하는 장치로서의 의자. 이 극에서 사용하는 의자는 등받이 부분이 덜렁 사각형 프레임으로 되어 있다. 이 부분이 수인의 칼과 같이 쓰인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 같이 의자는 코러스와 더불어 기묘한 Kiosk, 혹은 그 안에서 죽음을 파는 상인 그 자체로 변신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배우들이 어떻게 차곡차곡 쌓여 있는지 보는 동안 너무 궁금했다.)
키오스크, 혹은 죽음을 파는 상인. 코러스가 돋보이는 장면 중 하나였다. 사진에서 가장 아래 오른쪽에 보이는 여자분 목소리가 엄청 좋았는데.
마임 페스티발이니 이거 마임 아니었나? 왜 대사가 등장하나 처음엔 좀 의아하기도 했다. 배우들은 많지는 않지만 한국어 대사를 한다. 가끔씩 토종 한국발음으로 영어 대사도 날려준다. (처음엔 너무 낯간지러웠다) 그런데 어차피 대사 자체가 거의 없고, 대사도 내용을 전달하기보다는 분위기를 북돋우는 음향효과처럼 사용하기 때문에 다른 극에 비해서 못 알아듣는 것이 큰 문제가 안 될 것 같긴 했다. 그러니까 작년 에딘버러 페스티발에서도 큰 상 타고 객석 점유율 1위, 외국인 관객들 반응도 엄청 좋고 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대사를 알아들으면 5배쯤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딱 미친 과학자처럼 생긴 Doctor가 Woyzeck두고 실험하는 장면. 옆에서 도살자같은 복장을 한 코러스가 이 미친 과학자의 이상한 대사를 막 따라한다. "Medical revolution~!"이라든가 길거리에 오줌을 눈 Woyzeck을 두며 말세라고 한탄을 한다든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뭐 그런 웃기는 대사들이 있고 코러스는 역시나 이상한 새된 목소리로 이걸 막 따라하면서 울림을 만들어낸다. 엄청 감탄하면서 본 장면(들이 워낙 많긴 하지만) 중 하나였다. 다른 관객들도 재미있어하는 걸로 봐서 대충 무슨 분위기인지 파악한 것 같긴 한데, 한국어의 뜻을 알아들으면 그 절묘함이 배가 된다.
죽음을 예비하는 Woyzeck
이 연극을 보면서 새로 발견한 것 중 하나가 조명의 힘이다. 위의 장면은 Woyzeck이 죽겠다고 기도를 하던가, Marie를 죽이겠다고 결심하던가 뭐 그러는 장면이다. 무대 가운데 약간 비스듬하게 한 줄로 의자를 좌악 늘여놓고 그 끝에 Woyzeck이 얼굴도 가물가물하게 앉아 있다. 이 장면은 대사도 거의 없고 그나마 있는 대사도 뭔 소린지 알아먹기 힘들다. 이 장면은 오로지 조명, 조명으로 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간에 만들어내는 엄청난 깊이감, 그 끝의 작디 작은 인간, 천상으로 조용히 외롭게 올라가고 있는 듯이 보이다가 다시 지상으로 내려오기까지. 그 모든 이야기를 조명으로 한다.
쓰다보니 말은 참 많긴 한데 연극을 전체적으로 보는 리뷰와는 굉장히 거리가 멀어졌다. 핵심은, 진짜 "죽이는" 연극이라는 거다. 아울러 이 연극은 극단의 연극이라는 느낌이 굉장히 강하다. 연기 잘하는 몇몇 배우들이 모였다거나 연출을 잘 했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물론 연출 최고, 연기도 잘 했지만) 이 "극단"의 것이라는 느낌이다. 연극을 본 경험은 별로 없지만 그 몇 안 되는 작품들 중에 이처럼 극단 고유의 색깔을 강하게 내는 작품은 처음이었다.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다른 작품들도 멋질 거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한국에 가면 이 극단을 예의 주시하면서 공연보러 가야겠다.
덧붙임: 저녁을 먹고 7시 45분 공연을 보러 Purcell Room에 들어가려는데 한국어로 뭐라고 휙휙 갈겨쓴 종이가방이 보였다. "공연 전단지니 가져가지 마세요" 이런 내용의. 훗~ 웃고 지나치려는데 그 옆에 낯익은 한국 여자가 보인다. "혹시 Marie역 했던 분 아니세요?" 호들갑을 떨며 다가가는 나에게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해주는 배우. 우헤헤. Woyzeck 역 맡았던 배우도 있었던 거 같은데 이 언니(?)랑 얘기하느라 다음 공연 시간에 쫓기느라 제대로 못 봤다. 내가 완전 쥑인다, 너무 재밌게 봤다고 하니까 에딘버러에서 반응이 좋아서 이번에 다시 초청받은 거라고 한다. 지금은 이렇게 담담(!)하게 이야기하시지만 작년 같은 경우 얼마나 얼떨떨했을까. 엄청 고생도 많이 하던 분들일텐데 (처음에 연극 만들 때는 리뷰조차도 없었다고 한다) 이젠 국제적으로 노는 분들이 되었다. 아쉽게 인사를 하고 다음 공연에 들어갔는데, 후회했다. 껌딱지처럼 붙어서 뒷풀이 자리에라도 따라갈걸... 다음 공연은 별로 재미도 없었는데. 쩝.
머리칼이 불 붙은 듯 연주해
글: 엘리자베스 길버트
번역: 쥐가죽은밤
출처: 월간 <GQ>(2002년 5월호 미국판)
아래 글은 다음 카페 “Tom Waits Story”에 올라온 톰 웨이츠의 <GQ> 인터뷰 기사 전문입니다. 보기 좋게 문단을 나누었고, 맞춤법이나 오자 정도만 손을 보았습니다. 톰을 이해하는 데 더없이 훌륭한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글을 싣는 데 허락해주신 신애리 님과 쥐가죽은밤 님께 감사~!
본 글은 <GQ>(2002년 5월호 미국판)에 실린 기사를 저희 카페 쥐가죽은밤 님이 번역하여 올려주신 글을 보기 쉽게 한번에 취합한 글입니다.(쥔장 맘대루…용서해줄꺼지?) 따라서, 본 글을 무단으로 퍼가는 것은 삼가해주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저는 이글을 읽은 후 바다에서 큰 고래를 잡은 기분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몇 일 밤낮을(확인된바 없지만 심증으로) 애써 주신 쥐가죽은밤 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소년은 전혀 정상적인 아이가 아니었다. 작고, 말랐고, 창백하고, 볼품없이 서 있었고, 무릎이 안 좋았으며, 마른버짐이 피었고, 콧물을 질질 흘리고, 머리칼도 무지막지하게 곱슬거리는……. 소년은 책을 너무 많이 읽었고, 카니발, 묻힌 보물, 마리아치 음악에 심취해 있었다.
소년은 긴장되면 유대교 랍비들처럼 앞뒤로 몸을 흔드는 버릇이 있는데, 문제는 자주 긴장하곤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뭔가 앓고 나서는 (아마 자폐증 같은) 거의 미칠 지경으로 '소리'에 시달렸다. 소년은 '반 고흐'가 색을 보는 방식으로 (과장되고, 꾸미고, 흔들리고, 무섭게) '소리'를 들었다. 주변엔 온통 소년의 머리칼을 올올이 서게 하는 소리뿐이었고, 남이 듣지도 못하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소년의 귀에는 침대방 밑을 지나는 차 소리가 기차 소리보다도 더 크게 들렸다. 머리맡에서 팔을 마구 흔들라치면, 소년은 낚시줄이 튕기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만약, 손을 침대보 위에서 움직이면, 사포를 문지를 때보다 더 거친 소리가 들렸다. 소음에 아픈 머리를 맑게 하려고 "샤카본(shack-a-bone), 샤카본, 샤카본, 샤카본…"같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아무 의미 없는 말들을 크게 되뇌었다. 다시 똑바로 생각할 수 있을 때까지.
소년이 11살이었을 때, 아버지는 가족을 버리고 도망갔다. (아버지는 스페인어 선생님이었다. 소년의 머리를 깎게 하려고 샌 디에고를 벗어나 멕시코 국경너머로 차를 몰고가곤 했다) 이후로 소년의 주변엔 더 이상 아버지는 없었다. 그 결과 소년은 '아버지들'에게 집착(fixated)하게 된다. 소년이 친구 집에 놀러라도 가면, 친구들과 놀지는 않고 친구의 아버지들과 어울렸다. 다른 아이들이 밖에 나가 땡볕 아래 공을 찰 때, 소년은 어두컴컴한 서재에 틀어박혀 누군가의 아버지랑 온종일을 보냈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레코드를 틀어놓고, 가정보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소년은 자신이 훨씬 나이든 남자처럼, 아마 아버지인 것처럼 행세했다. 선술집에 불쑥 찾아가서는, 목청을 가다듬고 앞으로 슬쩍 기대며, "밥 아자씨, 아줌마랑은 얼마나 같이 살았죠?" 소년은 어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했고, 그러지 못해 많이 아파했다. 소년은 면도를 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11살 때, 할아버지의 중절모를 꺼내쓰고선 지팡이 짚고 걷는 상상을 했고, 나이든 사람들이나 좋아하는 그런 음악을 좋아했다. 가슴팍에 회색털이 난, 이미 인생 종친, 그런 늙다리 음악말이다. 죽은(dead) 음악, 아부지(dad) 음악.
"밥 아자씨, 저 관악연주 부분 어때요?" 일 없는 오후, 소년은 음악을 들으며 누군가의 아버지에게 물었다. "저 정도 연주하는 사람 요즘 드물어. 그렇죠, 아자씨?" 이것이, 소년이 초등학교 6학년 다닐 때의 일이다. 그렇다. 톰은 "항상" 뭔가가 달랐다.
난 캘리포니아에서 제일 오래된 여관인 '워슈 하우스(the Washoe House)'의 입구에서 톰 웨이츠를 기다린다. '워슈 하우스'는, 건너편에 포도밭이 있고, 옆에 목장이 있는 그런 푸르름 한가운데 있는데, 몰래 칩거중인 톰이 살고 있는 그 시골마을의 부근이다. 여기서 만나기로한 건 톰의 결정이었다. 톰이 왜 여길 좋아하는지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삐뚜루한 나무 바닥, 바에 놓인 낡은 피아노, 천장에 핀으로 꽂힌 색 바랜 종이돈, 진짜 장난 아닌 사랑을 막 끝낸 것 같이 지쳐보이는 웨이트리스들… 이곳의 모든 것들이 다 "진짜"스럽다.
톰을 기다리는 중, 걸인 한 명이 다가오는데, 몸은 칼처럼 말랐고, 피부는 거칠었으며, 옷은 단촐하고 낡았다. 눈은 너무 창백해서 장님인듯 하다. 그는 손수레를 끌고 다니는데, 그 손수레는 풍선, 깃털이랑 '세상이 곧 종말하리라'는 글이 적힌 판으로 꾸며져 있다.
이 걸인은 이번 늦봄에 있을 것이라는 종말 계시 때문에 뉴멕시코주의 로즈웰(Rosewell)로 향하는 중이란다. 그에게 이름을 묻는다. 이름이 세례명 로제로(Roger)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신다한다.
"몇 년 동안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는데, 그때 나를 '베드로'라 부르셨다. 처음엔 잘못 부르신 줄 알았는데, 잠시 후 그게 내 진짜 이름임을 깨달았다."
'로제로-베드로'는 나에게 이 지구가 몇 달 안에 멸망할 것이라 알려줬다. "대혼란이 시작되었다. 광기와 죽음이 도처에 있고, 모두가 불타서 재가 된다." 지나가는 차를 가리키더니 "저치들은 지금 편안한 삶을 즐기고 있지만 좀 있어보라구"라고 속삭였다.
딱 알맞게 톰 웨이츠가 어슬렁대며 나타났다. 그는 칼처럼 말랐고, 피부는 거칠었으며, 옷은 단촐하고 낡은….
나는 소개했다. "톰 웨이츠가, '로제로-베드로'를 만나다."
둘은 서로 악수했다. 일견 둘은 닮은 듯하다.
처음 탁보면 누가 톰인지 (원문에는 '톰'이라고 하지 않고 'the eccentric musical genius'라고 표현했습니다-옮긴이주) 아마 잘 모를 것이다. 다른 점도 분명 있긴 하다. '로제로-베드로'가 더 미친 듯한 눈을 가졌다면, 톰은 더 미친 목소리(crazier voice)를 가졌다는 점. 톰은 금새 '로제로-베드로'와 친해져서는,
"저기… 당신이 고속도로 한가운데를 걸어가는 걸 얼마 전에 봤어요"라고 말한다.
'로제로-베드로'는 "하나님이 교통정리를 해줘서 치어 죽지 않았지"라고 답한다.
"믿어주죠. 당신 손수레 맘에 들어요. 거기에 쓰인 글자들에 대해 설명해 줄래요?"
"이제 그만 말하지"라며 로제로-베드로는 무례하진 않지만 확고하게 말한다.
로제로-베드로는 일어서선, 이별 기념으로 우리에게 성경책을 한권 주고는, 손수레를 끌고, 우주의 최후를 맞으러 동쪽으로 향한다. 톰은 그가 가는 걸 보더니, 일전에도 계시문을 든 한 방랑자가 같은 길을 걸어가더라고 내게 말한다.
"그 사람은 나한테 당나귀를 팔려 그러더라구요. 그것도 임신한 당나귀를…. 집에 가서는 가족들에게 키워볼까 물었더니, 너무 힘들다고 안 된다더군요."
톰 웨이츠는 지난 30년 동안, 이 나라에서 그 어느 누구와도 다른 식으로 음악적 경력을 쌓아왔다. 혜성처럼 나타난 스타가 아니라, 그저 때론 거칠고, 때론 부드럽고, 때론 우울하게, 완전 제멋대로 피아노 두드리며 바에서 노래 부르는, 중절모에 7달러짜리 옷을 걸친, 세상 등지고 사는 그런 방랑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가, 지금도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이다. 톰은 비록 음악적으로는 끊임없이 변신을 꾀했지만 (첫번째 앨범 <Closing Time> 이후로 구슬픈 블루스, 졸리는 재즈, 불길한 독일 오페라, 취해 미쳐 날뛰는 듯한 카니발 맘보 등을 불러왔다), 그의 이미지만큼은 절대 변하지 않았다.
톰은 세상을 완전히 등지고 산 건 아니었지만 모습을 잘 드러내지도 않았다. 콘서트 열고, TV 쇼에서 노래 부르고, 간혹 죽여주는(brilliant, scene-stealing) 성격파 배우로 영화에나 출연하는 정도랄까(<the Cotton Club><Dracula><Short Cuts> 등등). 여전히 톰은 대중에 노출되는 걸 꺼린다. 오늘 인터뷰도 딱 '오늘'이라고 못박았는데, 새 앨범 나와서 선전 좀 해야되겠기에 시간이 없단다. 사실, 두장의 새 앨범이 최근에 나왔다 (<Alice>와 <Blood Money>가 그 타이틀인데, 이 글 뒷부분에서 이 앨범의 뛰어난 복잡성과 침침한 아름다움(dark beauty)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것이니 꼭 기억해 두시라).
톰 웨이츠는 인터뷰하기에 쉽지 않기로 소문났다. 기자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거니와 삼천포로 새는 톰의 답변 때문에 종종 죽어버리고 싶단다(예를 들어, 왜 새 앨범 내는 데 6년씩이나 걸렸냐고 물으면, 얼굴표정 하나 안 바꾸고 "차가 막혔거든요"라고 한다). 톰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꾸며대는 걸로도 악명 높다. 물론 악의 있는 거짓말은 전혀 아니지만. 톰은 수년 동안 자신에 대해 기사 나가는 걸 장난 아니게 꾸며댔다. 예를 들어, "울 아버지는 칼 던지는 사람"이었다든지, "울 어머니는 그네 타는 곡예사여서, 우리 집안은 광대 집안"이었다든지 하는 식으로.
톰은 또, 생김새로 봐서나 목소리로 봐서나, '팔릴 만한' 가수도 아니다. 톰은 데뷔한 지 십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긁어대는 목소리(gravelly voiced)"로 평론가들의 평을 받아왔다. 톰은 이런 식으로 언급되는데 조금 지쳤고, 뭔가 다른 식으로 표현되어지는 걸 좋아한다. 한 번은 어린 소녀에게서 팬레터를 받았는데, 그 아이는 톰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폭죽'과 '광대'가 같이 떠오른다고 적었다. 톰은 답장에다, "그래, 바로 그거야! 내 노래 들어줘서 고마워"라고 적었다.
톰은 우울한 멜로디를 작곡하는 데엔 동물적인 감각이 있다. 그의 아내는, 톰의 노래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고 하는데, '죽음의 신(grim reapers)'과 '곡하는 이(grand weepers)'로 나눌 수 있단다. 후자는 슬픔의 가장 심연을 건드리는 노래들이다 (딱히 꼽자면 ‘Christmas Card from a Hooker in Minneapolis’ 같은). 로드 스튜어트가 그의 노래 ‘Downtown Train’으로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하기도 했지만, 정작 톰은 대중적으로 히트시킨 노래가 없다. 하긴 톰의 노래들이 공중파를 탈 만큼 대중적이진 않으니까. (한번 볼까. "빌 아저씨는 유서 같은 거 안 남겨/ 뇌종양이 달걀만큼 큰데도 말야/ 아저씨에겐 푸에르토 리코 여자가 애인으로 있는데/ 글쎄, 그 아줌마 다리가 의족이래" 같은 가사. 너무 터무니없지 않은가)
이런 어두운 면과 별난 면 때문에 슈퍼스타는 못되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리진 않아왔다. 30년 동안 톰의 주변에서는 수많은 '팔리는' 스타가수들이 반짝 떴다 사라져갔지만, 톰은 어둑하게 불빛 비치는 그만의 무대 한편에서, 때론 피아노에, 때론 기타를 들고, 때론 수자폰(sousaphone, 관악기의 한 종류-옮긴이주)을, 소 방울을, 커다란 드럼통을 놓고 앉아, 소수의 광팬들을 위해 멋진 노래를 불러왔다.
팝음악에 있어, 한 역할과 차지한 그의 독특한 위치에 대해 톰은 단지 이렇게 말한다.
"음악 일하는 거랑 서커스랑은 비슷한 면이 있어요. 해보면 알게 되는 게, 음악일 하는 사람 중에 어떤 이들은 닭대가리 물어뜯는 것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도 있어요(무슨 뜻???). 물론 공중곡예사도 있구요. 막간 여흥에 대한 호기심도 있고. 각자가 갖고 들어온 것을 가지고 일을 하게 되죠. 음, 아마 내가 다리 없이 음악계에 들어왔더라면, 손으로 걸어 들어와서 기타연주나 했겠죠. 즉, 음악계에서 상상력과 일을 결부시키려 노력하는 그게 바로 나에요."
그의 목소리는 평범한 노동자(workingman)의 목소리가 아니라, 평범한 서커스광(circus freak, 노동자와 같이 소외된 밑바닥 인생이지만, 서커스광은 보다 더 소외된 '이상한 사람들'을 말하는 듯. 톰의 노래 분위기랑 우리 카페 분위기랑도 딱 어울리는, 잘 잡아낸 단어 아닌가요? 이참에 카페 이름을 '톰 아저씨 공중곡예단'으로 바꾸는 것은???-옮긴이주)의 목소리에 더 가깝다. 톰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실 되고 웅장한 목소리는 서커스광의 목소리를 진정으로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나라에 노동자만큼이나 서커스광이 많았더라면, 톰 웨이츠는 브루스 스프링스틴에 맞먹게 유명해졌을 것이다.
톰 웨이츠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다. 나에게 바싹 다가와선 "수컷 거미가 말이죠. 거미줄을 친 다음에 한쪽 가로 가서는 한 다리를 들어 줄을 퉁하고 튕기는 거예요. 그게 만들어내는 화음이요? 암컷 꼬시는 거죠, 뭐. 그 화음이 궁금하단 말야…"라고 말한다.
톰은 이 이야기를 조그만 노트에 적어가지고선 갖고 다닌다. 그 노트는, 도로방향이나, 미완성의 노래, 어린 아들과 같이 즐기던 게임 등으로 채워져 있다. 톰의 글씨체는, 큼직하게 막 갈겨쓴 대문자가 장난 아니게 삐뚤빼뚤거린다. 분명 장애인이 입으로 썼다고 해도 믿을 그런….
톰은 마치 잊혀진 기억을 훑듯이 그 노트를 훑는다. 이 틈에 톰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볼 기회가 왔는데, 쉰 넘은 남자치고 좋아 보였다. 거의 10년 가까이 술도, 담배도 끊었다는데, 그 효과가 보일정도로. 턱에 살집도 없고, 눈도 맑고. 이마엔 포크로 파놓은듯 가지런하게 네 개의 주름이 깊게 패여 있다. 무대나 영화에서 보다 (잘생겼다고 할 만치) 훨씬 나아보였다.
솔직히 무대나 스크린에서의 톰은 종종 (내 우상에게 이런 표현을 써서 미안하지만) 황당하게 얼굴을 찡그리거나, 어정쩡하게 서 있거나, 약장수 따라다니는 좀 덩치 큰 원숭이 같이 팔을 마구 흔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 어두컴컴한 레스토랑 안에서는, 딱 잡힌 모습으로, 그저 점잖게 앉아 있다. 헬스 클럽에서 러닝머신 타고 뛰는 모습이 연상될 정도로.
근데, 톰은 뭘 입고 뛸까?
"아, 여기 또 재미있는 게 있네요. '하인즈(Heinz) 57'."
톰은 식탁에서 '하인즈 57' 병을 집어 들더니 얘기를 시작한다.
"1938년에서 1945년 사이에 하인즈는 독일에서만 수프를 판매했죠. '알파벳 수프'라는 건데, ABCD… 모양의 알파벳 글자들 외에 '스바스티카(swastika, 나치의 심볼 마크. 미국애들 이거 보면 경기 일으킵니다-옮긴이주)'도 집어넣었더래요, 글쎄."
"에이, 농담이죠?"
병을 내려놓더니 "차라리 '파스티카(pastika)'라고 이름 지었어야 했는데…"라고 한다.
대단한 얘기지 않은가. 세련된 얘기는 아니지만서도, 뭐, 그게 문제가 아니다. 톰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중요하지. 또, 톰이 해준 '돼지' 얘기가 있는데, 현대과학으로 인간 유전자와 돼지를 접붙이는 것에 걱정이 된단다. 그게 동물의 내부 장기를 인간 몸에 안전하게 이식하기위한 실험이라 하더라도, 톰은 도덕적인 측면에서 끔찍하단다. 또 돼지의 모습에 불안하기도 하고. 톰은 심각하게,
"사진으로 그 돼지들을 봤는데, 이거 완전 프랑켄슈타인 아저씨더라구요. 똑 닮았어요."
톰의 아내 이야기를 해보자. 톰에게 돼지 인간 사진을 보여준 건 그의 아내이다. 그녀는 매일 네 종류의 지방신문을 읽는데, 거기 나오는 '이상한 이야기'는 무조건 오려 모은다. 아마 그 '스바스티카 국수 수프' 이야기도 그녀가 찾아낸 것일 게다. '수컷 거미' 이야기 역시도.
그녀, 캐슬린 브레넌(Kathleen Brennan)은 어떤 사람일까? 정확히는 알기 어려운데, 그녀야말로 '톰 웨이츠 신화' 중에서 가장 신비한 인물이다. 미디어의 보도는, "귀를 긁는 목소리를 지닌 가수의 아내이자 오랜 파트너"와 같이, 항상 똑같은 식으로 그녀를 표현한다. 잘 보면 1985년 이후 톰의 모든 앨범에서 그녀의 이름이 등장하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All songs written by Tom Waits and Kathleen Brennan"으로. 이렇게 그녀는 도처에 존재하는데,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녀는 은밀하고 희귀하게 느껴진다. 인터뷰도 절대 삼가하고. 단, 톰의 여신(muse)으로, 톰의 파트너로, 톰의 세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톰의 '가장 중심'에 존재할 뿐이다. 가끔씩, 톰은 공연 도중 거의 혼잣말로 중얼중얼 "이 노래를 아내 캐슬린에게,"라며, ‘Jersey Girl’을 부르곤 한다.
난 그의 아내를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톰이 전해준 얘기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다. 다시 말해, 내가 아는 '그녀'는 '톰의 말'에 의해 제멋대로 만들어진 '그녀'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톰에 대해, 톰의 노래 외에 가장 잘 아는 존재이기도하다.
톰은 아내를, 자기 인생이나 음악에 있어서 "빛나는 존재"라고 부른다. 또, "진달래, 난초, 떡갈나무"라고도 부른다. 아내를 "유도라 웰티(Eudora Welty,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한 미국 여류작가-옮긴이주)와 조앤 제트(Joan Jett) 사이에 놓인 길"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또 "아내에겐 4B가 있는데, Beauty, Brightness, Bravery, Brains가 그것이죠,"라고도 하고, 아내가 진정 창조적인 힘이라고 강조한다. 그의 '독단적인' 편협함에 딴지 거는 야성적인 영향력이라고도 하고, 또 톰의 모든 노래에 불손함을 뒤섞어놓는다고도 한다.
"아내는 말이죠, '하이러니머스 보쉬(Hieronymus Bosch, 르네상스 시대의 네덜란드 화가-옮긴이주)'처럼 꿈을 꿔요. 아내가 말하기 시작하면, 내가 줄줄줄 받아적죠."
"아내는, 내가 말하는 것의 '행간'에다가 얘기를 해요."
톰은 아내가 자신의 시각을 매우 크게 확장시켰다고, 그래서 아내를 만나기 이전에 그가 썼던 노래들은 들어주기 힘들 정도라고 말했다.
"아내가 날 구원했죠. 아내에 관한 게 아니라면 지금 당장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노래할 수도 있어요. 뭐 노래는 안 하고 요리를 할 수도 있구요."
"아내는 우리 가족에서 해오라기이고, 난 그저 잡종이에요."
“아내와는 새해 전날 밤 만났죠." 톰은 아내에 대해 얘기하길 좋아한다. 얘기하며 행복해하는 걸 잘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마구 까밝히진 않는데, 그건 물론 아내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려는 심산이다. (이것이 바로 아내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톰이 '전형적인 웨이츠식 어불성설'로 얼버무리곤했던 이유다. 그래, 톰은 아내가 부시 파일로트(bush pilot, 경비행기로 산악지역 같은 곳을 나는 비행사-옮긴이주)라고, 혹은 구멍가게 점원이라고, 아니면, 마이애미에서 여관을 운영한다고. (그것도 아니면 이렇게 말하겠지. 톰이 한때 써먹은 건데, 그가 아내와 사랑에 빠지게 된 건 순전히, 이제껏 만난 여자 중에, "아내가 뜨개바늘로 입술을 뚫어끼운 채 커피를 홀짝인" 첫번째 여자이기 때문이라고…) 톰은 아내의 이름을 입안에서 오물오물대기를 좋아하는데, 그래선지 아내에 대해 얘기 하고 싶어 안달인 건 여전하다.
둘은 80년대에 할리우드에서 만났다. 그때 톰은 코폴라 감독의 <One from the Heart>의 음악을 담당하고 있었고, 캐슬린 브레넌은 대본을 담당하고 있었다. 둘이 첨 만난 건 새해 전날 밤 누군가의 집에서 열린 송년파티에서 인데, 온통 취하고, 뺑글뺑글 돌고, 시간이 뒤죽박죽인 그런 광란의 파티였다. 그들이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 둘은 종종 차를 타고서 LA 근교를 몇 시간이나 마구 달리고는 했는데, 그녀는 고의로 톰이 방향을 잃게 만들었다. 그저 장난치는 정도로 생각하고. 그녀는 톰에게 왼쪽으로, 여기서 오른쪽으로, 다시 왼쪽으로, 이젠 고속도로를 타고, 애덤스 대로를 지나서, 빈민촌을 지나치고, 더한 빈민촌을, 그담에 다시 왼쪽으로, 하는 식으로….
"결국엔 인디안 마을까지 갔었죠. 우리가 거기까지 갔었다는 걸 아무도 믿어주지 않더군요.
코르덴 바지만 입고 있어도 총 맞아죽는 그런 곳이거든요. 뭐가 우릴 보호해줬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바란 바는 다 돌아다녔죠. 그리곤 술에 진탕 취했구요. 하나님은 술 취한 사람하고, 바보하고, 어린아이는 지켜주시거든요. 또, 개도 말이죠. 아, 그땐 정말 즐거웠었는데"라고 톰이 말한다.
둘은 왓츠(Watts)의 맨체스터 대로에 있는, '영원히 그대 거야 Wedding Chapel'에서 식을 올렸다.
"결혼식을 밤 12시에 결정하고, 새벽 1시에 뚝딱 해치웠었죠. 우리 그런 식으로 살아요."
서로에 대해 뭘 알기나했을까? 두 달만에? 세 달인가? 주례볼 사람을 불러야만 했는데, 도널드 W. 워싱턴 목사님이 오셨더랬다.
"식 올리는데 70달러 한다는데, 가진거라곤 아내가 50달러, 내가 20달러뿐이었어요. 아내는 그게 나쁜 징조라고 했구요. '아, 비참해. 우리 이런 식으로 살까봐 걱정돼'라더군요. 그래서 내가 그랬죠. '당신 그러지마. 내 나중에 많이 벌어줄게요. 아, 많이 벌어준다니까 그러네….'"
결혼 하고보니 둘 다 알거지인 걸 알았고, 그래서 변변한 신혼여행이랄 것도 없었다. 톰은 당시에 이미 잘나가고 있었지만, 몇몇 젊은 가수들이 그러하듯, 계약문제, 금전문제에는 꽝이었다. 그래서 쪼들렸을 게다. 또, 매니저와의 불화도 있었으니. 법적으로 골치 썩는 문제? 모든 게 그랬다. 프로듀서란 작자도 톰의 어두컬컬한 목소리 뒤에 유치스럽게 우아한 현악연주를 깔자고 우기질 않나. 누가 제멋대로 톰 보고 이래라저래라 하는거냐구?
바로 이때, 톰의 새 각시는 남편에게 음악계를 한 방 먹이라고 용기를 북돋았다. 까짓 한 바탕 해버려요, 라고 말하며. 솔직히 저런 놈들 필요없잖아요? 라고도 하며. 혼자서도 충분히 음악 할 수 있어요. 작곡, 편곡 모두 다요. 실패하면 어떡하냐구요? 아, 당신 맘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는데, 실패가 대수예요? 그 둘은 정말이지, 뭐든지 간에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그녀가 톰에게 한 이 말처럼.
"당신이 집안에 뭘 가지고 오든, 저 그걸로 먹고살 수 있어요. 너구리나 주머니쥐를 잡아온다해도, 걱정마시라니깐요."
이러한, 아내의 노력의 결과가 바로 <Swordfishtrombones> 앨범이다. 이 앨범은 웅장하고, 관악기가 쫙 깔리고, 블루지하면서, 가스펠적이고, 어두운 느낌으로,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은, 가수로서의 독립에 대한 출사표 같은 그런 앨범이다. 이전 작품들과는 확실히 다른 그런 작품! 굵은 선 하나가 톰 웨이츠의 음악 한가운데 주욱 그어져서, 톰의 음악 인생을 확실하게 두 개로 나누었다. '캐슬린 브레넌 이전'과 '캐슬린 브레넌 이후'로 말이다. 톰은 아직도 여전히 아내에게 감탄한다.
"예! 제 아내 정말 '여장부'죠!"
그들은 시골에 산다. 오래된 집에. 이웃도 있는데, 개중에는 차에 밟혀죽은 동물들에 니스칠을 해서 미술작품이라고 만드는 남자도 있다. 또 '제7 안식일교' 신도들과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도 전도하러 자주 방문하는데, 톰은 항상 그들을 들어오라고 해서 커피도 대접하고 그들의 전도도 정중하게 들어준다. 착하고 외로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에서. 톰은 최근에서야 그네들 역시 자기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톰은 4도어 캐딜락 60년형(Cadillac Coup DeVille)을 몬다. 필요 이상으로 크긴 한데, 그냥 타고 다닌다. 기름 정말 많이 먹고, 냄새 더럽고, 라디오도 안 나오지만 말이다. 하지만, 쓰레기 처리장 갈 때처럼, 당일치기로 어디 갔다오는 덴 최고다. 쓰레기 처리장, 구호물품소, 벼룩시장, 고물상이 그가 주로 가는 곳이다. 톰은 쓰레기 더미 깊숙이서, 울리면 소리 나는 물건을 찾아, 고쳐서 악기로 쓰는 걸 좋아한다.
"난 쓰레기 자체가 음악이 되는 그 느낌을 상상하는 게 좋아요. 당신이 커다란 드럼통의 뚜껑이라고 상상해봐요. 그게 당신 일생이죠. 뚜껑으로 역할하고, 뚜껑으로 사는 것.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당신을 발견해서 이렇게 말하죠. '이봐, 친구. 친구 몸에 구멍 뚫고, 줄 끼워서, 내 스튜디오 천장에다 매다는 거야. 그런 다음 땡하고 치는 거지. 이제 친구는 음악 사업에 뛰어든 거야, 하하!' 라구요."
가끔, 톰은 그저 문짝만 찾으러 갈 때도 있다. 톰은 문짝을 좋아한다. 그게 톰의 가장 큰 취미다. 톰은 항상 문짝 여럿을 들고 집에 들어온다. 빅토리아 식 문짝, 헛간 문짝, 프랑스 식 문짝…. 아내는 "이미 집에 문짝이 달려 있잖아요"라고 항의할 게고, 톰은 "하지만 여기 달린 유리가 너무 예쁘잖아, 여보"라며 살랑댈 것이다. 톰의 가족은 개를 한 마리 키운다. 톰은 동물에게 특별한 공감대를 느끼고, 둘 사이에 많은 공통점이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신경과민' 같은 것.
"알아들을 수 없는 것에 대고 짖는다든지, 자기 영역을 표시한다든지 하는 그런 거요. 나도 그렇거든요. 삼일 정도 어디 다녀오면, 맨 먼저하는 게 집 주위를 한바퀴 휭 돌아 나 자신을 재확인하는 것이죠. 온 군데를 돌며, 만져도 보고, 발로 차보기도 하고, 앉아보기도 하죠. 내가 돌아왔다는 걸 집안 모든 것들이 알 수 있게."
톰은 거의 항상 그래왔듯이, 종일 집에 있다. 다른 아빠들과는 달리, 낮일이 없기 때문에. 그 때문에 아이들 학교에서 견학이나 소풍갈 때 운전해 줄 학부모로 항상 톰을 찾는다.
"견학 가는데 지쳤어요. 차가 크니까 항상 9명을 맡아요."
얼마 전에, 톰은 음악 하는 사람들이 운영하는 조그마한 기타 공장으로 견학을 갔다. "그래서, 누군가 절 알아봐주길 기다렸거든요. 예, 누군가 다가와서는 '톰 웨이츠 맞죠?'라고 하기를요. 근데, 두 시간이나 있었는데, 아무도 날… 아무도요. 슬슬 오줌도 좀 마렵더라구요. 그것도 참고, 일부러 (눈에 잘 띄려고) 기타 케이스 위에 올라섰죠. 그렇게 한참 기다렸는데도, 아무도 날 아는 체 않더군요. 그냥 차로 돌아왔어요. 쫌 낙심했어요. 제 말은, 그러니까… 음악 쪽은 제 분야잖아요. 그래서 누군가 인사하거나 살짝 윙크해주길 바랬는데…."
톰은 잠시 커피를 저었다.
"그 일주일 뒤에 다른 견학을 갔어요. 재활용에 관한 견학을요. 예, 쓰레기더미를 막 뒤지고 있는데, 남자 여섯이 내 차를 둘러싸더니, ‘이봐, 톰 웨이츠가 왔어!’"
톰은 마치 자기 인생에 있어서 흔해빠진 얘기라는듯, 절레절레 어깨를 으쓱한다.
"쓰레기 처리장에 가면 모두가 날 알아봐요."
아마 아티스트로서 톰 웨이츠의 가장 특출난 점은, 바로 예술 생활을 우아하고, 위트 넘치게 가정생활과 연결하는 방법일 것이다. 바로 그 '방법'은,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천재들의 일하는 방식과는 영 딴판이다. 예를 들어, 그네들의 대인관계는 엄청날 것이라거나, 영감을 떠올리기 위해선 삶(특히 여자의 경우엔 더하지)을 허비해야만 한다거나, 새로운 걸 만드는 데 고통스런 파괴가 수반될 것이라는 그런 생각 말이다. 하지만 톰 웨이츠는 그러지 않는다. 톰에게 있어서, 창조하는 일과 창조 이전의 일(가정생활-옮긴이주)은 어렵게 선택해야하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톰의 집에서는 그 모든 일이 모두 한꺼번에 북적북적대는데, 부엌에도 넘쳐흐르고, 사무실도 마찬가지고, 개가 사육되는 곳에서도 그렇고, 아이들이 자라는 곳도 역시 그렇고, 곡이 쓰이고, 전도자들에게 커피를 따라주는 곳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들이 저마다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아이들은 창조하는 데 있어 절대 방해꾼이 아니라, 영감을 주는 존재이다. 톰은 딸아이가 작곡하는 데 도움 준 일을 기억한다.
"정말 정말 추운 날 LA로 버스를 타고 가는데, 한 성전환자가 배가 훤히 다 드러나는 짧은 탱크톱과 아주 짧은 치마를 입고 길모퉁이에 서있는 걸 봤어요. 화장은 떡칠을 해가지구요. 그 남자, 아니 여자, 아무튼 그 사람은 혼자서 춤을 추고 있었는데, 딸아이가 그걸 보더니, '저렇게 추운데서 음악도 없이 춤추는 건 정말 어려울거야'라고 하더군요."
톰은 딸의 섬세한 관찰력을 ‘Hold on’이란 곡에 담았다. <Mule Variations> 앨범의 대표곡이면서, 그래미상에도 노미네이트된, 말할 수없을 정도로 아픈 희망에 대한 노래.
"아이들은 어쨌거나, 최고의 노래를 만들어내죠."
톰은 말한다.
"어른보다 더 나아요. 아이들은 항상 노래를 부른 다음에 그냥 팽개쳐버려요. 종이접기나, 종이비행기처럼요. 잃어버린다 해도 상관도 안 해요. 또 만들면 되니까요."
이러한 열린 마음은 모든 아티스트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즉, 어떤 영감이 떠오를 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것. 그리고 그 영감이 사라질 때 놔줄 수 있는 것. 톰은 "어떤 노래가 정말로 쓰이길 원한다면, 그 노래는 내 머리에 딱 달라붙을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남의 노래 속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경험적으로 "어떤 노래들은 녹음되길 원치 않는 것들도 있어요. 그런 노래들과 씨름할 순 없죠. 만약 싸우고 들면 더 싫어"한다. 그 노래들을 잡아내는 건 "새를 잡는 거"랑 같단다. 운 좋게도 다른 곡들은 "땅에서 감자 캐내듯" 쉽게 들어 오기도하고, 또 어떤 것들은 "낡은 탁자 밑에 눌러 붙은 껌"처럼 쩌억- 달라붙기도 하고. 비협조적으로 까부는 노래들은 "미끼로 써서 다른 노래를 잡는"데 쓰기도 한다. 물론, 최고의 노래들은 "빨대를 통해 빨려드는 꿈처럼" 쑤욱 들어온다는데, 그 순간 그냥 감사해하는 것 밖에 달리 도리가 없단다.
새 장난감을 든 똑똑한 아이처럼, 톰은 항상 노래와 놀고(play)싶어 한다. 노래가 어떤 것이 될 수 있을까 궁금해하면서. 톰은 스튜디오나 그 외의 장소에서, '진짜' 어른은 절대로 모르는 방법으로, 영원히 노래와 함께 놀 것이다. 노래를 갈기갈기 찢기도 하고, 뒤집어보기도 하며, 진흙 깊숙이 집어넣어보기도 하고, 자전거로 깔아뭉개보기도 하는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소리를 더 두텁게, 더 거칠게, 더 깊게, 다르게 만들 것이다.
"난, 펄프(pulp)랑, 살갗이랑, 씨앗이랑, 내 음악이 좋아요."
톰은 항상 새로운 듣는 방법이나 연주하는 방법을 찾아내려 노력한다.
"네 머리칼이 불에 타고 있는 것처럼 연주해"라고 스튜디오 안의 다른 연주자들에게 말하곤 한다.
"바 미츠바(Bar Mitzvah, 유태인 소년이 열 세살되면 치르는 성인식인데, 우리 돌잔치처럼 난리납니다. 모든 선물 다 사주고. 즐거운 날 맞아 기쁜 아이처럼 "신나서 미쳐버리듯이" 정도의 뜻-옮긴이주)의 꼬마애처럼 연주하라구."
마치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완공되었을 때보다 공사 중일 때의 건축물이 더 아름답다고 말한 것처럼, 톰 웨이츠는 노래의 날뼈대를 음미하는 걸 좋아한다. 이 점은 그가 교향악단이 연주 전에 가지는 연습(교향악단이 연주들어가기 전, 연주자 제각각 소리내며 조율할 때-옮긴이주)에서, 가장 죽이는 소리를 찾아내는 이유이기도하다.
"연주하는 이들조차 자신들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 모르는 그런 순간이 있어요." 톰이 열을 내며 말한다. "어떤 이는 팀파니의 울림판을 조이고, 어떤이는 오랫동안 연주 못했던 부분을 후다닥 연주해보고, 또 어떤 사람은 도레미파를 연주하기도 하고, 또 누구는 틀렸던 부분을 다시 연습하기도 하구요. 그건 마치 기록사진 같아요. 누가 쳐다보는지도 모른 채, 모두가 뭔가를 하고 있는. 헌데 청중 역시 악단에겐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고 그저 얘기나 하고 있죠. 사실 그게 '음악'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나는 말이죠. 막상 불이 꺼지고 연주가 시작되면, 점점 실망을 하게 돼요. 금방까지 들었던 그 어떤 소리도 살아나질 않거든요."
톰은, 익숙한 상투적인 반복을 혐오한다. 피아노 치는 걸 얼마동안 관뒀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손가락들이 늙은 개 마냥 항상 같은 곳으로 되돌아와서란다. 톰은 확성기에 대고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한 번은 삐걱대는 문을 주악기로 사용해서 녹음한 적도 있다. 새 앨범 <블러드 머니>에서는 실제로 칼리오페(calliope, 증기 또는 압축공기로 연주되는 오르간-옮긴이주)란 악기를 사용해서 녹음을 했다. 칼리오페는 몸집이 커다랗고, 소리가 걸쭉하고, 겁대가리 없는 압축공기 오르간인데, 회전목마 탈 때 나오는 연주가 바로 그것이다.
"칼리오페 연주하는 거 정말 대단한 경험이었어요." 톰은 말한다. "옛날 속담에, '칼리오페 타는 녀석에겐 절대 딸 주지마라'고. 왜냐면, 그 사람들 반 미치광이거든요. 그게 말이죠. 칼리오페 소리가 폭발적으로 크거든요. 백파이프 저리 가라로 말예요. 옛날에는, 마을에 서커스단이 도착하면 그거 알리려고 칼리오페를 연주했대요. 거짓말 좀 보태서 십 리 밖에서도 들리니까요. 십 리 밖에서도 들리는 '뭔가'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게 지금 바로 옆에 있다고, 그것도 스튜디오 안에… 피아노 치는 것처럼 연주해대는데, 얼굴 벌개질 걸요. 머리칼은 쭈삣쭈삣 서고, 온몸은 땀범벅이 되어가지고서는 말이죠. 비명 질러봐도 아무도 못 들어요. 아마 제 일생에서 가장 내장 뒤틀린 음악적 경험일 거예요. 끝나고 나면, 병원에 가봐야 할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요. '의사 선생님, 검진 좀 해보실래요. 칼리오페로 몇 곡 연주했거든요. 심장이 제대로 뛰고 있나 알아봐주세요.'"
톰은 하루 종일 스튜디오에 있으면서, "무릎이 온통 다까지고, 바지는 흠뻑 젖고, 머리칼은 한쪽으로 떡져서는, 하루 종일 참호 속에 숨어 있던 것 같은 그런 날"을 좋아한다.
"난 편한 게 음악하는 데 좋다고 안 봐요. 보이지도 않는 것하고 쌈박질해서 주먹 다까지는 그런 게 좋은 거지. 난, 하루 종일 고생해서 녹음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누가 '아니 당신 손 왜 그래요?'라고 하는 걸 좋아해요. 근데, 자신은 모르는 그런 거 있잖아요. 그런 곳에 있으면, 발목 부러져도 춤출 수 있다니까요."
이건 작업이 잘된 날의 얘기다. 안 풀리는 날은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톰은 아마도 그럴 때면,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손으로 목 뒤를 문지르고,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좁은 원을 그리며 걸을 것이다. 톰과 아내 사이에는 이런 때 통하는 암호가 있는데, 상대방에게, "박사님, 우리 플라밍고(붉은 학-옮긴이주)가 아파요"라고 한다. 어떻게 아픈 플라밍고를 치료할 것인가? 왜 플라밍고의 날개털이 빠지는가? 왜 플라밍고의 눈에서 눈물이 나는가? 왜 플라밍고가 축 늘어지는가? 대체 이따위 것을 누가 알겠는가? 이상하고 붉은색 도는 지랄 맞은 새에 대해 말이다. 음악도 이상하긴 매마찬가지지 않은가? 아내가 색다른 아이디어를 가지고 나타날 때는 참 어려운 순간들인데, 가령 "우리가 중국에 있다손치고 밴조를 연주해보면 어떨까?" 같은 아이디어가 그렇다(중국에서 밴조를?). 혹은 발리 섬의 민속춤 음악을 들어보라고 들고 온다든지, 스미소니언 흑인 민속박물관에서 나온 흑인 외침 소리 레코딩을 들고 온다든지 할 때도 그렇고. 그것도 아니면, 아내는 톰의 손에서 플라밍고를 잠시 넘겨받아서, 산책도 시키고, 밥도 먹일 게다.
톰에게 물었다, 집에 있으면 톰과 아내 중 누가 더 곡을 많이 쓰냐고? 톰은 그걸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어떨 땐 오십대 오십이고, 어떨 땐 구십대 십인. 톰이 혼자 다할 때도 있고, 아내가 다할 때도 있고.
"내가 씻으면, 아내는 씻은 걸 말리죠."
"내가 못을 잡고 있으면, 아내는 망치로 두드리구요."
"내가 캐내면, 아내가 요리를 하지요."
"내가 집에 플라밍고를 대려오면, 아내가 그놈의 목을 비틀어버리는 거죠."
끝에, 톰은 이런 식으로 결론 내린다.
"이건 두 사람이서 몇 년 동안 같은 10달러 짜리 종이돈을 서로에게 왔다리갔다리 빌려대는 거랑 같아요. 그러고 나서, 쓸 수조차 없을 때엔, 그냥 악보에 대충 옮기고, 끝내는 거죠, 뭐."
자, 이제 두 장의 새 앨범 이야기로 넘어가서, 제목은 <앨리스(alice)>와 <블러드 머니(blood money)>로, 톰이 최근 연극연출가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 <black rider> 앨범 역시, 그가 연출한 동명의 연극을 위한 앨범-옮긴이주)'이 연출하는 연극을 위해 썼던 곡들이다. <앨리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꿈같고, 잊을 수 없는 러브송이 담겨 있는데, 빅토리아 시대(1837-1901. 너무나 보수적이고 엄격했던,-옮긴이주)의 한 중년 목사가 죽여주는 9살짜리 소녀와 미치도록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다. 그 소녀 이름이 바로 앨리스이고, 목사의 이름은 '찰스 닷슨(Charles Dodgson) 목사님'인데, 그의 필명인 '루이스 캐롤(Lewis Carroll)'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찰스 닷슨의 글 분위기는 초현실적이고, "어린이만을 위한 게 아닌" 어린이 얘기를 주로 썼다. <앨리스> 앨범에서, 톰은 마치 고뇌하는 자장가를 부르듯이 그의 목소리를 다룬다. 죽은 누군가를 위한 자장가, 영원히 떠난 누군가를 위한 자장가, 혹은 너무 일찍 커버린 누군가를 위한 그런 자장가를 부르듯이….
<블러드 머니> 앨범은 완전히 다른 분위기다. 이건 독일 극작가인 '게오르그 뷔흐너(Georg Buchner)'의 미완성 대작 <보이젝(woyzeck)>을 바탕으로 했다. <보이젝>은, 애인을 공원에서 죽여버리는 한 질투심 많은 군인에 대한 이야기다. 톰은 원래 앨범 제목을 <보이젝>이라고 할까했는데, 이런 제길, 누가 <보이젝>이란 제목을 단 앨범을 살까나 싶었단다. 이 앨범은 하나같이, 격정적인 애증에 대한 풍부하고, 복잡하며, 신비하고, 침침한 곡들로 되어있다. 사운드는 너무 세련되지도 그렇다고 구질거리지도 않지만, 거의 육체적으로 불편할 만큼 불협화음이다. 곡들은, '고통은 세상의 강(misery is the river of the world)', '지옥에나 가라지(everything goes to hell)'같은 신랄한 제목을 단, 지저분한 장송곡 소품들이다.
이 두 장을 동시에 발매하자는 안티 레코드사의 결정은 탁월한 선택이다. 왜냐하면, 톰의 작품들 속에서는 수십 년 동안이나 상충되어온 두 가지 상반된 음악적 성격이 있는데, <앨리스>와 <블러드 머니>의 대비가 그 두 가지 성격을 아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는, 톰에겐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본능적인 멜로디 감각이 있는데, 톰보다 더 애끓는 발라드를 쓸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는 점. 또 다른 성격은, 이런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낸 다음, 푸줏간 주인처럼 그 선율을 툭툭 쪼개어, 괴상한 모습의 전혀 새로운 짐승으로 재조합한 뒤, 그냥 썩어버리게 햇볕에다 놔두는, 별난 작업을 한편으로 해왔다는 점이다.
마치, 발라드풍의 사랑노래만 쓰는데 집착하면, 빌리 조엘이라도 되어버릴까 걱정하듯이. 그러면서도 톰은 너무나 유미적이어서, 존 케이지(John Cage)처럼 총명하게 순수한 실험적인 음악은 또 못 만든다. 그래서, 톰은 이 두 가지 면을 왔다리갔다리 하는데, 때론 한 앨범에서, 어떨 땐 한 노래에서, 또 어떨 땐 한 소절에서 보여주기도 한다. (일전에 톰은 이런 정신분열증세를, 술 취하는 순서에 대한 몇 개의 노래로 설명한 적이 있는데, 처음엔 나이스한 척하다가, 잠시 후 벽을 쳐서 구멍을 뚫어버리고, 술 깨고 나서는 모두에게 꽃을 돌리면서 사과하고, 마지막으로 차를 몰고 그 집 수영장에 뛰어드는 것이다.)
톰은 이렇게 음악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노력해왔는데, '톰'과 '소리'는 항상 찰떡궁합이긴했지만, 그 관계가 절대 쉬운 관계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말하자면 '톰'과 '소리'는,
깨진 도자기 조각들 같은, 둘로 갈라진 입술 같은, 깨자마자 사라지는 잠 같은 관계랄까. 톰의 유년시절로 돌아가서, 그가 소리에 시달릴 때, 실제로 그런 혼란스러움 때문에 많이 아팠다. 톰은 그런 소음을 벌레처럼만 여겼다고 기억한다. 벽이란 벽은 다 뚫고 지나가는 벌레. 갈라진 틈 밑이라면 어디나 기어다니는 벌레. 방이란 방은 다 드나드는 벌레. 절대로 불가능한 건데 절대적으로 고요하게 만들어버리는 그런 벌레처럼. 톰은, 그런 과민반응 때문에, 거기에 그의 타고난 어두운 성격을 더해서, 그저 쉽게 미쳐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는 대신, 자신과 소리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기 시작했는데,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타협'은 '협조' 비스무리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이번에 나온 두 장의 새 앨범으로, '결혼'이 되기에 이른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 <앨리스>와 <블러드 머니>는, 그 모든 게 제각각이면서도 짬뽕되어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톰의 모든 것이다. 모든 아름다움과 사악함. 모든 그의 재능과 모든 그의 불협화음. 그가 존경하는 모든 것과 파괴시켜버리려 하는 모든 것. 이 모든 것이 아름답고, 이 모든 것이 황홀하다.
너무나도 아름답게 황홀스러워서, 사실 이 앨범을 듣다보면 누군가가 당신의 눈을 가린 것처럼, 최면을 건 것처럼, 뽕을 한 대 놓은 것처럼 느껴질 게다. 혹은 시간을 거꾸로 돌려, 당신을 전생의 회전목마로 데리고 가서, 먼지 켜켜이 쌓인 당신의 오래된 공포와 잃어버린 사랑의 목각 동물인형을 만지도록 할 것이고, 그것도 그저 손으로만 느끼게 할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아마, 단지 나한테만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겠지.
끝으로, 이 여관의 식당은 사람들이 다 빠졌다가, 다시 찼다가, 다시 빠지기를 몇 번 반복했다. 몇 시간 동안이나 앉아서 이야길 했으니. 불빛도 바뀌고 또 바뀌고. 그러던 지금, 톰이 기지개를 켜더니 내게 잘 아는 친구가 됐다며 같이 쓰레기 처리장엘 가자고 꼬신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아요"
쓰레기 처리장! 톰 웨이츠랑 같이! 둘이서 철판 위를 뛰어다니고, 화학품 통을 붙잡고 노래 불러 댈 생각으로 내 마음은 떨린다. 이런, 갑자기 느낀 건데, 이제껏 톰 웨이츠랑 같이 쓰레기장 가는 것보다 내가 더 원하던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그런데, 톰이 시계를 보더니 고개를 가로젓는다. 결국 오늘은 안 되겠군. 사실 몇 시간 전까지 집에 들어갔어야만 했단다. 마누라가 아무래도 찾을 거 같단다. 어쨌든, 비행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를 떠나려면 지금 일어나야하나?
"15분 정도 시간이 있거든요!"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말한다.
"진짜 진짜 빨랑 다녀오면 안 될까요?"
톰이 심각하게 날 쳐다본다. 따라서 내 마음도 가라앉는다. 답은 뻔하니까.
"15분으론 공정치 못해."
톰은 자신이 모든 공정함의 위에 있는 예의 바른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듯 말했다.
"달랑 15분은 쓰레기장에 대한 모독이라구요."
덧: 추천곡
'죽음의 신(grim reapers)' - 톰의 노래 중 좀더 '어둑어둑'한 몇 자락.
Wrong Side of the Road from <Blue Valentine (1978)>
Singapore from <Rain Dogs (1985)>
What's he building from <Mule Variations (1999)>
* '곡하는 이(grand weepers)' - 톰의 노래 중 좀더 '블루지'한 몇 자락.
Invitation to the Blues from <Blue Valentine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