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월 31일
가수 ‘서태지와 아이들’ 은퇴
서태지와 아이들’ 은퇴 기자회견 모습.
댄스음악 열풍을 몰고 와 국내 가요계에
한 획을 그었던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
이 1996년 1월 31일 서울 명륜동 성균
관대학교 내 유림회관 대강당에서 공식
기자회견을 갖고 은퇴했다.
2백여명의 보도진이 지켜본 가운데 이루
어진 이 회견에서 그룹 리더인 서태지는
“오늘을 기해 지난 4년간의 가요계 생활
을 마감하고 대한민국의 평범한 청년으로
돌아가고자 한다”고 밝혔다.
서태지, 양현석, 이주노 등 그룹 멤버들은
기자들에게 배부된 성명서에서 전격 은퇴
에 임하는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고 거듭
팬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은 세 사람의 멤버가 미리
준비된 회견문을 돌아가며 읽는 형식으로
진행됐으며 기자들의 질문은 일체 받지
않은 채 15분 만에 끝났다.
이들의 직접적인 은퇴 이유는 ‘창조의 고
통’이 가장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요계의 신화로 불리운 ‘서태지와 아이들’
의 은퇴는 가요계의 커다란 충격이었으며
사회적으로도 이슈가 됐다.
▶ 2012년한국서 선교 활동…
빈센트 조지프 호프먼 별세
▶2011년축구선수 박지성 국가대표 은퇴
▶2009년애국지사 박종철 선생 별세
▶2001년로커비 사건 피고인 중 2명 중
1명에게 유죄 판결
▶1997년한보그룹 정태수 회장 구속
구속영장이 발부된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이
서울 구치소로 향하는 승용차에 타려고 하고 있다.
▶1995년세계무역기구 창립총회
1995년 12월 스위스 제네바 WTO본부에서 열린
1차회의가 끝나고 포즈를 취한 7명의 의원들.
▶1992년한국-키르키스스탄, 국교 수립
▶1992년한국-몰도바, 국교 수립
▶1986년레바논 주재 한국대사관
도재승 2등서기관 겸 영사, 무장괴한에 피랍
▶1980년해군, 거북선을 원형복원(전장 113척,
폭 34척, 높이 21척)하여 남해안서 진수식
현재 전국적으로 여러척이 거북선이 복원되어 전시되고 있지만, 실물에 가장 가깝게 복원된 거북선은 해군사관학교 선착장에 전시되어 있는 거북선이다. 이 거북선은 임진왜란때 크게 활약한 초기 거북선인 창제귀선을 복원한 것은 아니고, 정조대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에 그림으로 묘사된 것을 기본으로 하여 여러 문헌들을 참조하고 학계전문가들의 고증을 거쳐서 1980년데 처음 복원되었으며, 이후 1999년에 재건조되었다. 전체길이는 34.2m, 선체길이 25.5m, 선체폭 10.3m, 선체높이 6.4m로 기존읜 판옥선과 비슷한 규모의 함선이다. 물에 잠기는 깊이인 흘수는1.4m, 배수량은150톤이다. 거북선에는 16개의 노로 추진력을 얻으며 최대 속력은 6노트라고 하며, 함포 14문이 장착된다. 거북선에는 선장 1인, 화포수 10인, 포수 25인을 비롯하여 총 161명이 탑승한다고 문헌상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판옥선과 비슷한 규모라고 한다.
▶1971년 동·서 베를린, 19년 만에 전화개통
1971년 1월 31일 동·서베를린 사이에 전화통신망이 19년 만에 개통됐다. 동독이 동·서베를린 사이의 전화선을 단절한 것은 1952년 5월 27일이었다. 그 당시 동베를린 당국은 냉전무드속에 전화시설의 긴급수리와 기술적인 단점을 표면적인 이유를 내세워 동·서 베를린간의 4천회선에 달하는 전화선을 단절했었다. 그 후 서베를린 시민들은 서독을 통해 동베를린과 통신 교환을 해왔다.
동독과의 관계정상화를 모색해 온 서독은 브란트정권 탄생이래 어떤 기본협정체결에 앞서 문화-과학 및 교육을 포함한 통신, 교통분야의 상호협력을 중시 여겼고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서독은 전화, 텔렉스회선을 증설할 것을 제안해왔었다. 그 결과 동독측은 전화 및 텔렉스회선 증가에 동의하여 양측은 이번 조처에 완전합의했다. 전화선 이용자들은 자동전화가 아닌 교환전화를 통해 통화했다.
▶1969년천안에서 열차충돌사건 발생(41명 사망)
▶1969년위장간첩 이수근,
베트남 탄손누트공항에서 체포
▶1968년나우르, 호주로부터 독립
▶1968년월맹-베트콩의 구정 공세 시작
▶1967년서독-루마이아 국교 수립(동방정책 시작)
▶1967년중국의 반소 데모대, 소련 대사관에 난입
▶1962년미주기구 외상회의에서 쿠바제명을 가결
▶1959년기시 일본 수상, 재일교포 북송에 지원 표명
▶1958년미국 인공위성 제1호 익스플로러 발사 성공
‘익스플로러 1호’ 발사 장면.
1958년 1월 31일 오후 10시48분, 미국이 케이프 커내버럴 기지로부터 인공위성을 탑재한 주피터-C 개량형 4단 로케트를 발사, 위성을 궤도에 올려놓은 데 성공했다. 이것이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 `익스플로러1호(Explorer 1)`였다.
1957년 소련이 세계최초로 발사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1호(Sputnik 1) 발사에 자극을 받아 84일 만에 발사된 익스플로러1호는 미국의 제트연구소가 개발해 육군탄도 미사일국이 제작했다. 타원궤도로 지구를 약1백15분마다 한 바퀴씩 도는 이 위성에는 반 알렌교수가 고안한 우주선 탐지장치가 실렸다.
미국은 당초 1957년 12월6일 방가드 로켓으로 시험발사를 시도했지만 발사대로부터 약간 떠올라 있어 폭발한 경험이 있어 이번에는 육군 중거리 탄도미사일인 주피터-C를 급조하고 탄도부분에 위성용 기기를 탑재, 겨우 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익스플로러 1호`는 길이 203cm, 지름 15cm로 비교적 큰 편이었지만 탑재기기의 무게가 8.2kg에 불과해 아직은 소련에 뒤져 있었다.
▶1956년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 피살
▶1954년오산시에서 대열차사고 140명 사상
▶1953년프린세스 빅토리아호 아일랜드해에서 침몰
▶1951년유엔총회,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
▶1950년트루먼, 수소폭탄제조 지령
▶1947년미국 프로 야구선수 라이언 출생
▶1943년독일군, 스탈린그라드 전투 항복
▶1940년육군통제령 및 해군통제령 공포
▶1938년프랑코, 스페인국민정부 조직
▶1937년대구비행장 설치
▶1935년일본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 출생
▶1934년미국 달러화 41% 평가절하
▶1933년영국의 소설가 골즈워디 사망 - 1932년 노벨문학상 수상
▶1929년레마르크 소설 `서부전선 이상없다` 출판
레마르크의 소설을 영화화 한
`서부전선 이상없다`의 포스터.
▶1911년대한천일은행(현 상업은행),
조선상업은행으로 개칭
▶1905년일본총독부, 한국에서 업무 개시
▶1905년일본 제일은행에 국고취급 및 화폐정리 사업일체를 위임
▶1902년미국 흑인 작가 휴스 출생
▶1881년미국 고생물학자 쿠슈먼 출생
▶1854년불가리아 독재 정치가 스탐볼로프 출생
▶1797년오스트리아 작곡가 슈베르트 출생
슈베르트 [Schubert, Franz (Peter), 1797.1.31~1828.11.19]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독일어:Franz Peter Schubert, 1797년1월 31일 ~ 1828년11월 19일)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요제프 하이든처럼 16살에도 소년 합창단에서 노래를 부른 음악가이다.
가난과 타고난 병약함 등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600여 편의 가곡, 8편의 교향곡(미완성 교향곡 포함), 소나타, 오페라 등을 작곡했으며, 가곡의 왕이라고 불린다.
1815년 18세 때에 그의 재능을 아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수백 곡의 가곡을 썼으며, 괴테의 시에 곡을 붙인 《마왕》, 《휴식 없는 사랑》, 《들장미》 등의 명작도 이 해에 작곡되었다. 그가 지은 가곡 중 일부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책으로 편집되었다.1819년 라이바하 사범학교의 교사가 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친의 학교에 머물러 있으면서 많은 작품을 작곡하였다. 가곡 <유랑인>이나 <제5교향곡> 등이 이때의 작품이다. 그의 친구 쇼바는 그의 재능을 사랑하여 슈베르트를 자기집에 살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방랑생활이 시작된다. 이 무렵 당시 최고의 성악가이자, 25세 연상의 친구였던 포그루에 의하여 슈베르트의 가곡이 많이 불려진 결과 점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818년에는 가곡 《죽음과 소녀》, 《송어》를 작곡하였으며 에스테르하지 공작 집안의 두 딸의 가정교사가 되어 한여름을 첼리즈에서 보냈다. 1823년에는 《유랑인의 환상곡》, 《로자문데》 등을 발표했고 그 해 여름, 친구의 집에서 읽은 뮐러의 시에 감동하여 《아름다운 물방앗간 집 처녀》를 작곡하였다. 1827년 30세가 되자 자신의 인생이 겨울을 맞았음을 아는 듯 《겨울 나그네》를 작곡하였고, 이듬해인 1828년11월 19일장티푸스로 빈에서 죽었다. 베토벤의 사후 약 1년 만이었다. 당시 그는 둘째 형의 보살핌을 받았으나, 기억력마저도 나빠질정도로 건강이 매우 나빠져 있는 상태였다. 그의 정신적 스승은 베토벤으로, 1827년 3월 26일 베토벤이 죽자 그의 장례에 참여하였으며, 죽은후에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베토벤의 유해와 함께 빈의 중앙 묘지에 나란히 묻혔다. 별세한 해에 만들어진 최후의 가곡 14곡을 모은 것이 《백조의 노래》이다.
슈베르트는 그 짧은 일생에 수많은 가곡과 기악곡, 교향곡 등을 작곡하였으나,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한 것은 가곡이다. 650곡에 이르는 가곡들이 모두 훌륭하다는 평을 듣지만, 특히 《겨울 여행》이나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소녀》, 《백조의 노래》 등이 특히 뛰어난 작품이며, 자유로운 표현력을 지니는 멜로디의 아름다움, 그리고 화성의 미묘한 변화 등 낭만주의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교향곡에서는 제8번의 《미완성》이 특히 유명하나, 제9 교향곡의 아름다움도 잊어서는 안된다. 피아노곡에서는 《방랑자 환상곡》, 《악흥(樂興)의 한 때》 등이 알려져 있고, 실내악곡에도 《죽음과 소녀》나 《송어》 등 걸작이 많다.
https://youtu.be/oKy4c0CvdQw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