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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33장 15절 ~ 22절
O 내가 그 날들, 그리고 그 때에 의로운 가지를 다윗에게 자라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심판과 의를 실행하리라. 15)
In those days, and at the time, will I cause the Branch of righteousness to grow up unto David; and he shall execute judgment and righteousness in the land. 15)
다윗에게 자란 의로운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실행하신 심판과 의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과 의가 되시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심판을 예수 그리스도로 실행하심은 하나님의 심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심판이 일어남의 의미는 곧 심판의 공의를 의미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구속되었고, 그 구속은 복음의 기회를 의미하며,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땅끝까지 전파되어야 하나님의 공의의 마지막 심판이 비로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날들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은 안전하게 거하리라. 이것이 그 이름이니 성읍은 '주 우리의 의' 라 불리리라. 16)
In those days shall Judah be saved, and Jerusalem shall dwell safely: and this is the name wherewith she shall be called, The LORD our righteousness. 16)
예루살렘의 의미가 곧 의의 성읍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유다가 구원을 받고, 예루살렘이 안전하게 거하며, 예루살렘이 주 우리의 의라 불리운 역사가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위 말씀은 앞으로 일어날 일로 느껴집니다.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져 주의 심판의 공의에 대한 조건이 만족이 되면 마지막의 심판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에 순종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과 같은 일이고, 불순종하여 세상과 타협하고 자기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진짜 파국인 지옥이 눈앞에 현실로 나타나는 때가 되는 것입니다.
이 왕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런 후에야 끝이 오리라.
마태복음 24장 14절
복음을 전할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과 의의 실행이기 때문입니다. 의의 심판을 위하여 공의로운 기회가 먼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일루미나티는 모르지만 북한이 예상하지 못한 때에 열리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루미나티 분석을 통해서 예측을 하는 것보다 저는 말씀을 묵상함으로 예측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롭다고 생각됩니다.
O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스라엘 집의 보좌에 앉을 사람이 다윗에게는 한 사람도 부족하지 아니할 것이요, 17)
For thus saith the LORD; David shall never want a man to sit upon the throne of the house of Israel; 17)
또 내 앞에 번제를 드리고 음식제사에 불붙이고 계속해서 희생제를 행할 사람이 레위 제사장들에게 한 사람도 부족하지 아니하리라. 18)
Neither shall the priests the Levites want a man before me to offer burnt offerings, and to kindle meat offerings, and to do sacrifice continually. 18)
한 사람도 부족하지 않음은 곧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완전성의 대상은 주의 공의입니다. 지옥에 가는 사람도 공의에 합당하게 지옥에 갈 것이고, 이스라엘집 보좌에 앉을 한 사람도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주께드리는 형식의 희생제에도 레위 제사장들의 숫자가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O 주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말씀하시니라. 19)
And the word of the LORD came unto Jeremiah, saying, 19)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만일 너희가 나의 낮의 언약과 나의 밤의 언약을 깰 수 있다면 또 그들의 계절에 낮과 밤이 없게 된다면 20)
Thus saith the LORD; If ye can break my covenant of the day, and my covenant of the night, and that there should not be day and night in their season; 20)
낮의 언약과 밤의 언약은 하나님이 만드신 물리 법칙이라고 보입니다. 중력같은 우주의 법칙이 낮과 밤의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이 넓은 우주에 중력의 법칙은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 법칙을 만드신 분이 이 우주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때에는 또한 나의 종 다윗과 맺은 나의 언약도 깨어질 수 있어서 그에게 그의 보좌에서 다스릴 한 아들도 없을 것이며, 나의 사역자들이 레위인 제사장들과 세운 언약도 깨어질 수 있으리라. 21)
Then may also my covenant be broken with David my servant, that he should not have a son to reign upon his throne; and with the Levites the priests, my ministers. 21)
우주를 만드신 분의 언약이 깨어진다는 것은 우주가 소멸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온 우주에 적용되는 물리 법칙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언약이란 쌍방이란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일방적인 언약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가 언약의 대상자임을 안다면 언약의 대상자로서의 조건을 갖추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믿음이고, 더 자세히 말하면 살아있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우주의 법칙처럼 깨어질 수 없는 언약의 대상은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살아있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언약의 대상이 아닌 것뿐이며 하나님이 언약이 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의 군상을 헤아릴 수 없고 바다의 모래도 측량할 수 없듯이, 내가 나의 종 다윗의 씨와 나를 섬기는 레위인들도 그처럼 번성케 하리라. 22)
As the host of heaven cannot be numbered, neither the sand of the sea measured: so will I multiply the seed of David my servant, and the Levites tha minister unto me. 22)
cannot be numbered를 헤아릴 수 없고 라고 번역하고, neither the sand of the sea measured를 바다의 모래를 측량할수 없다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이는 헤아릴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보존학회 이송오목사의 번역에는 고민하지 않고 그냥 번역한 곳이 보이기도 합니다.
즉 영어 킹제임스를 그대로 번역한다면 하늘의 군상을 셀수 없고, 바다의 모래를 측량할 수 없다. 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셀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자 누구인지가 글에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셀수 없는 자는 말씀의 본질로 보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부분을 조심스럽게 드러내었어야 합니다. 그래서 흠정역에서는 그런 부분을 고민하고 정의하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사람이 하늘의 군대를 셀 수 없으며 바다의 모래도 측량할 수 없음같이 내가 내 종 다윗의 씨와 나를 섬기는 레위 사람들을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라.
KJV 흠정역 예레미야 33장 22절
흠정역을 번역한 사람은 고민을 하고 의역으로 사람이라는 단어를 추가하였습니다. 애매한 것을 명료하게 만드는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실수 없는 것은 없고, 측량할 수 없는 것이 없는 것이 당연하므로 의역이지만 사람의 생각이 들어간 의역이 아닌 것입니다.
하늘의 만상은 셀 수 없으며 바다의 모래는 측량할 수 없나니 내가 그와 같이 내 종 다윗의 자손과 나를 섬기는 레위인을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라.
개역개정 예레미야 33장 22절
그러나 말씀보존학회는 개역개정을 불완전한 성경이라 말하면서 같은 애매함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오히려 개역개정은 사람이 셀수 없다는 어감이 들도록 기록되었습니다. 말씀보존학회의 "없듯이, 내가" 라는 번역은 개역개정에서는 안느껴지는 하나님께서 셀수 없음의 느낌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말씀하시기를 "이제 하늘을 쳐다보고 별들을 셀 수 있다면 그 별들을 세어 보아라." 또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의 씨가 이와 같으리라." 하시더라.
And he brought him forth abroad, and said, Look now toward heaven, and tell the stars, if thou be able to number them: and he said unto him, So shall thy seed be.
한글 킹제임스 / KJV 창세기 15장 5절
별들의 숫자는 아브라함에게 셀 수 없는 숫자이고, 그의 자손의 숫자도 아브라함에게 셀 수 없는 숫자입니다.
다시 말씀의 뜻으로 돌아가서 보면 언약의 결과로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이 축복을 받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이는 언약으로 이것을 의심하면 안됩니다. 즉 우리의 안전과 평안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일루미나티의 비밀 상징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주의 언약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O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이는 그가 한 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 쪽을 존중하고 다른 쪽을 업신여기기 때문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느니라.
마태복음 6장 24절
일루미나티의 정보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당신은 주의 언약을 업신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존 번연의 소설 천로역정에는 줄에 묶여있는 사자 사이로 지나는 길이 나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의 모습이 이렇다고 보입니다. 묶여 있는 사자는 실제로 아무 해를 입히지 못하지만 두려워서 넘어지면 사자에게 잡히게 됩니다. 백신과 짐승의 표도 이러한 과정으로 우리에게 나타났고, 나타날 예정입니다. 백신 위협은 줄에 묶인 사자처럼 매우 위협적이었지만 실제로 백신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지는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두려워 백신에 타협한 사람들이 반대편 사자에게 물린 것처럼 그들의 신체에 위해를 입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보면서 제약사와 정부뒤에 있는 일루미나티들은 줄에 묶인 사자들과 같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 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일루미나티들은 겁을 주지만 해를 입히지 못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일루미나티를 분석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재앙이 허락되는 우리의 죄악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실제로 재앙을 불러오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일루미나티가 숫자로 영화에 어떤 사인을 주었다고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으며, 몽키폭스와 같이 예고를 해도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는지 내가 보여 주리라. 죽인 후에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를 가진 그분을 두려워하라. 정녕,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분을 두려워하라.
But I will forewarn you whom ye shall fear: Fear him, which after he hath killed hath power to cast into hell; yea, I say unto you, Fear him.
누가복음 12장 5절
위 말씀을 보시면 죽인 후에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를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라라고 누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죽이는 것도 하나님의 권세이고, 지옥에 던져 넣는 것도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우리를 죽이는 권세도 일루미나티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재앙이 허락되는 것은 우리의 죄를 통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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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재앙을 불러오는 두려워해야 하는 일은 이것입니다. 사탄은 사람에게 재앙이 허락되도록 죄의 쇼를 펼치는 것입니다.
위 기사를 보면 미국 영국 독일 대사관이 참여하였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미국 영국 독일의 상황이 어떤가요? 그들은 이미 재앙에 들어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빠져있지만 프랑스는 무장 폭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로 재앙을 불러오는 것이지 일루미나티의 권세로 재앙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재앙은 이웃의 죄로 모두 함께 재앙을 겪는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사회의 더럽고 가증한 모습의 일들이 일어나면 재앙을 두려워하십시요. 제발 일루미나티의 비밀계획따위에 촉각을 두지 마시고 말입니다. 그리고 일루미나티를 분석하여 예측함으로 재앙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의 죄가 재앙을 불러온다면 재앙을 막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웃의 죄로 재앙이 온다면, 이웃의 회개로 재앙이 막아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담대히 일어서는 것입니다.
일루미나티를 신봉하는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한국교회의 문제들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부족한 점이 있으나 위의 사진처럼 인내와 회개의 순종을 하는 동안 일루미나티를 연구하는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러나 회개의 권세는 오직 내안에서 끝납니다. 그 자신안의 권세를 실행한 사람이 다윗이고, 옥합을 깬 한 여인인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본인안의 권세를 실행한 것입니다. 당신도 한국교회를 비판하기보다 자신안의 순종의 권세를 이들 처럼 실행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한국교회의 문제와 동성애에 타협한 이단들에 대해서 문제점을 찾아낼 수는 있지만 결국 회개의 능력은 각자의 회개에서 시작하여 끝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 이하도 없고 그 이상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앙이 오면 담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재앙은 나쁜 것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사기극은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재앙을 통하여 사람들의 본질의 모습이 우리에게 드러났고, 우리 자신의 모습도 드러났습니다. 말씀을 제대로 전한다고 하던 사람들도 백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백신을 맞았습니다.
적어도 정택주 목사라는 사람은 기도로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신에 대해서 알려주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기도를 소홀히 하였다고 보여집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우매하고 사이버틱하며 정신병자나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아야 합니다. 다윗이 그랬고 옥합을 깬 여인이 그랬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받아들여지고 인정받는다는 것은 사기이거나 위선입니다.
백신이라는 재앙중에서 우리는 사람들의 본 모습과 내 자신의 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정택주라는 사람을 백신이 아니고서는 그가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란 것을 알기 어렵습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난 재앙들은 모두 이런 모습일 것입니다. 재앙중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겠다는 주의 약속입니다. 끝나지 않을 것같은 코로나와 백신사기극이 허무하게 끝났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더 긴기간의 재앙에서도 좋은 경험이 될 것입니다.
전에도 글을 작성하였지만 악과의 타협은 악이 되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세상적인 대안은 우리의 세상적인 악이 되는 것이며, 우리의 올바른 선택은 세상을 충돌하는 선택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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