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8일 나해 주님 만찬 성 목요일 (루카 4,16-21)
복음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16-21
그때에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누가 말씀으로 목욕한 사람인가?
오늘은 사제들의 생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찬례를 위해 사제직을 제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성찬례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예식으로 표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발을 씻어주는 행위는 분명 사랑의 행위로써 구원과 직결됩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않고 온전한 어른으로 자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며 하느님 자녀가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부모가 주는 양식으로 부모처럼 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님, 제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는 목욕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너희는 깨끗하다.”
그리고 “너희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시며 유다만이 목욕을 하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목욕을 하지 않은 채 성체를 영하는 것은 구원의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체를 영하기 전에 하는 목욕은 무엇일까요? 성찬의 전례 전에 말씀의 전례가 있습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요한 15,3) 유다는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아 성체를 영해도 구원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먼저 깨끗해지는 것이 무엇인지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보면 말씀으로 깨끗해진 이는 예수님께서 발을 씻어줌이 아니면 구원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하기도 어렵지만, 받기도 어렵습니다. 사랑받으면 고마워해야 하고 또 사랑해야 하는 의무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사랑받기 더 어려운 이유는 내가 사랑받지 못한 처지를 하느님과 이웃을 원망하며 즐기고 있었는데 그 즐거움을 빼앗긴다는 데 있습니다. 지옥도 분명 하느님을 원망하며 이겨 먹는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천국에도 십자가의 고통이 존재하는 것과 같습니다.
케이티 파이퍼(Katie Piper)는 영국의 장래가 촉망되는 아나운서였습니다.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을 시샘한 한 스토커에 의해 그녀는 얼굴에 염산 테러를 당합니다. 심하게 일그러진 그녀는 자기 얼굴을 보며 살 의욕을 잃습니다. 부모와 함께 지내며 자살 생각까지 합니다.
그러나 부모는 그녀가 세상에 나가도록 종용했습니다. 그렇게 자신 안에 갇히는 게 지옥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으려면 먼저 부모처럼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 자체로 지옥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일입니다.
그녀는 용기 있게 세상 밖으로 나갔고 그 용기에 감탄한 사람과 혼인하고 아이까지 낳았습니다. 또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고쳐주는 재단을 설립하기도 합니다.
빛을 피하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어둠밖에 없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거부하면 어떤 존재가 될까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사랑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지옥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사랑받아봐도 소용없습니다. 이것을 위해 말씀으로 깨달아 목욕한 상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니아 연대기』, 『순전한 그리스도교』로 유명한 C. S. 루이스는 사랑을 피할 곳은 지옥뿐임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안전한 투자는 어디에도 없다.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쉽게 상처받는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사랑해 보라. 그러면 분명 당신의 마음은 괴로움으로 찢어질 것이다.
마음을 다치고 싶지 않다면 그 어떤 사람에게도, 심지어 그 어떤 동물에게도 마음을 주지 마라. 이런저런 취미와 사소한 사치들로 당신의 마음을 꽁꽁 감싸라. 이기심이라는 관 또는 장식함 속에 당신의 마음을 집어넣고 단단히 걸어 잠가라.
그러나 당신의 마음은 안전하고 깜깜하고 움직임도 없고 바람도 없는 그 장식함 속에서 변할 것이다. 그것이 다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깨뜨리거나 꿰뚫거나 또 바로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비극 또는 적어도 비극을 맞이할 위험을 피하기 위한 대안은 이런 지옥살이뿐이다. 천국을 제외하고, 당신이 사랑에 따르는 모든 위험과 동요로부터 완벽하게 안전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지옥이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발을 씻어주려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체성사도 되고 세례성사는 물론이요, 고해성사도 됩니다. 이것을 거부하면 갈 곳이 지옥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말씀으로 목욕을 한 사람입니다.
먼저 말씀으로 목욕하지 않으면 성사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여 성사를 영하지 않거나 성사를 영해도 유다처럼 소용없게 됩니다. 먼저 말씀으로 왜 성사가 아니면 지옥인지 깨닫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