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년, 임시정부 100년] "태화관 어떤 곳인지 안다" 21명, "독립선언서 쓴 최남선 안다" 11명
여기서 독립 선언식 - 3·1운동 독립 선언식이 열렸던 서울 종로 태화관 자리에 들어선 태화빌딩. 건물 정문 앞에 표지석이 있다. /이태경 기자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쯤. 서울 종로 인사동의 요릿집 태화관(泰和館)에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29명이 모였다. 이들은 만해 한용운의 선창으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 뒤 민족 대표들은 출동한 일경(日警)에 체포됐다.
그로부터 100년. 지난 26일 옛 태화관 터에 들어선 태화빌딩 앞에서 시민 100명에게 3·1 독립선언식과 관련된 4가지 질문을 던졌다.
우선 '100년 전 이 장소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있느냐'라는 질문에 '독립 선언식'이라고 정확히 답변한 응답자는 26명에 불과했다. 74명이 '모른다'고 답했다. '독립 선언식이 열린 이곳의 옛 명칭을 아느냐'는 두 번째 질문에 '태화관'이라고 답한 사람은 21명.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태화관에서 민족 대표들의 독립 선언식이 열렸다면 탑골공원은 학생·시민들이 만세 시위를 벌이기 시작한 곳"이라며 "이 때문에 서울 종로는 3·1운동의 역사적 시발점"이라고 했다.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기억하는 이름을 꼽아달라'는 질문엔 65명이 1명도 답변하지 못했다. 1명 이상 호명한 응답자들은 손병희(19명), 한용운(15명), 오세창(3명), 이갑성(2명) 백용성·길선주(각각 1명)로 답변했다. 오답 중에는 김구 임정 주석(6명)이 많았고 유관순 열사(2명), 안중근 의사와 서재필 박사(각각 1명)도 있었다. '기미 독립선언서의 초안 작성자'를 묻는 마지막 질문에 '최남선'이라고 답변한 사람은 전체 응답자 100명 중 11명이었다.
4가지 질문을 모두 정확하게 맞힌 응답자는 100명 가운데 9명. 연령별로는 50대(5명), 60대(1명), 70대(3명)가 많았다. 응답자 가운데 손병희 선생과 같은 집안이라고 밝힌 손병흥(75)씨는 "100년 전 조상들은 핍박 속에서도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애썼는데, 오늘날 우리는 3·1운동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첫댓글 태화관은 사업 바꿔서 복지사업하고 있고 현재 수서에 센터가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