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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4. 묵상글 ( 연중 제4주간 수요일. - 신앙이란 뛰어넘는 것 .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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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4. 연중 제4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2.04 03:24
- 신앙이란 뛰어넘는 것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오늘 주님의 고향 사람들이 주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 못마땅한 심사가 잘 드러나는 표현이 ‘저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이 표현보다 그들의 심사를 더 잘 드러내는 우리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분’도 ‘저 사람’도 아닌 ‘저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심사를 실감 나게 드러내는 번역을 제가 한다면
‘저자가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라고 번역함이 좋을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라면 주님을 절대 그렇게 지칭하거나 번역하지 않지요.
그런데 그들은 왜 그렇게 지칭하고 무엇이 그렇게 못마땅한가요?
자기들이 지닐 수 없는 지혜를 주님께서 지니고 있고,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주님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고향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잘못을 보겠습니다.
우선 그들은 인간적으로 자기들은 그대로인 데 반해
주님께서 일취월장(日就月將)하신 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했기 때문에
겸손하게 자기들의 어리석음과 부족을 인정하지 못했고,
교만하게 주님의 지혜로움과 능력을 부정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적인 잘못이라면 신앙적인 잘못도 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만 봤기에 영적인 눈으로 보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의 지혜와 능력이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뛰어넘는 것임을 봤다면
그것이 하느님께 온 것임을 알아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겁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이란 뛰어넘는 것 곧 초월입니다.
이 세상과 인간적 차원을 뛰어넘어야만
하느님 나라의 그 영적 차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주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우리 동네나 누구의 친척 같은 것을 고집하면
개천에서 용 날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없으며 용은 결코 개천에서 날 수 없겠지요.
같은 식으로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수는 없고
자기 동네에 오셔도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겁니다.
같은 식으로 나와 오래 함께 있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을 것이고,
나와 늘 함께 있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도 같이 계심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나만 있는 것이고 나만 있어야 합니까?
그에게 하느님은 안 계시고 하느님이 함께 계실 수는 없는 것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나와 늘 함께 있는 사람은 나의 사람이지
하느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고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고,
고향 사람들에게는 고향 사람일 뿐이고 예언자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부터 나의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
곧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 보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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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4. 연중 제4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공동체적 샬롬(평화) - 주님의 평화 안에서 하나 되어 누리는 은총의 일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샬롬은 기쁨과 안녕의 영원한 안식일, 곧 주님의 평화 안에서 누리는 성스러운 안식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안식일과 희년 경제
공동체적 샬롬(평화)
2026년 2월 3일 화요일
랜디 우들리 목사(Rev. Dr. Randy Woodley)는 하느님의 샬롬의 비전을 설명하며, 이는 고대 히브리 전통에서 전해 내려오는 공동체적 평화와 모든 피조물이 함께 번영하는 보편적 비전이라고 말합니다:
샬롬은 공동체적이며, 온전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은총입니다. 개인적이거나 부분적인 샬롬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온 공동체가 샬롬을 누려야만 누구도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샬롬은 다수가 평화를 누리는 동안 소수가 고통받는 것도 아니며, 소수가 평화를 누리는 동안 다수가 고통받는 것도 아닙니다. 샬롬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어야 하며, 그러므로 샬롬은 모두의 과제입니다. 샬롬은 모든 이를 위한 선을 이루는 변화로 이어집니다.
샬롬은 유토피아적 종착지가 아니라 끊임없는 여정입니다. 우리는 샬롬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샬롬을 이루는 과업에 나서야 합니다. 곧, 신자들은 샬롬을 살아내고 실천하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이러한 능동적이고 꾸준한 노력은 개인적 관계에서부터 사회적·구조적 변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1]
우들리 박사는 안식일과 희년을 하느님의 샬롬을 지탱하는 실천으로 설명합니다:
희년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었습니다. 안식일, 특히 희년은 주변부에 있는 이들에게 새로운 출발을 허락하는 기다리던 은총의 기회였습니다. "주님의 은혜로운 해"는 억눌린 이들이 새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때였습니다. 역설적으로, 희년은 가난한 이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었지만, 부유하고 번영한 이들에게는 불편한 소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희년은 억눌린 이들에게는 복음이었지만, 억압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소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 루카 복음 1장 51–53절에서 노래하며 그 의미를 깊이 이해하셨습니다. 마리아와 예수 시대의 사람들은 희년이 지닌 급진적 의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 이러한 급진적인 사회적 조치가 필요했을까요? 이사야서 61장은 그 답을 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정의를 사랑하시며" "탈취와 불의를 미워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61,8).
하느님의 뜻과 우주적 섭리는 누구도 부당하게 고통받지 않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불의한 제도를 만들어내기에, 샬롬적 사회 질서는 인간의 불순종을 보완하는 은총의 안전망이 되어야 합니다. 샬롬의 질서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이도 희망 없이 오랫동안 억압받아서는 안 되며, 어떤 가정도 대대로 빈곤 속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어떤 땅도 고갈되어 쓸모없게 되어서는 안 되며, 어떤 짐승도 오래 굶주려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샬롬의 위반이 오랫동안 방치된다면, 창조 안에 세워진 상호성의 질서가 깨지게 됩니다.
희년은 하느님의 정의가 모든 이에게 실현되도록 보장하는 은총의 제도였습니다. 이는 하느님 백성이 정의를 올바르게 실천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안전망이었습니다. 올바른 관점에서 보면, 안식일과 안식년, 그리고 희년은 모두 참된 "주님의 날"을 준비하는 예행연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해 안에서, 그분께서 최종적인 "계획"을 제시하신 "주님의 날"은 곧 매일의 삶 속에서 샬롬을 살아내는 것이었습니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주일을 고요한 축제로 살아내신 부모님 밑에서 자라난 은총을 받았습니다. 집을 떠난 뒤에도 그 주일의 전통을 간직했고, 제 자녀들과 함께 우리만의 방식으로 안식일을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레니타 J. 윔스(Renita J. Weems)가 자신의 묵상(her meditation)에서 쓴 것처럼, 세상의 질서로부터 자유로운 하루가 얼마나 필요한지 깨달았습니다. 저는 안식일의 기쁨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들로 둘러싸여 있지만, 안식일이 참된 기쁨이었던 가정에서 자라난 것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Constance F.
References
[1] Randy S. Woodley, Shalom and the Community of Creation: An Indigenous Vision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2012), 21–22,
[2] Woodley, Shalom, 30–31.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Wei Feng, untitled (detail), 2025,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들판에 서서 두 팔을 자유롭게 펼친 이 사람처럼, 우리는 경제 정의를 지지할 때 솟아오르는 참된 자유를 체험합니다. 더 이상 끝없는 빚의 굴레와 억압적인 채무 관계에 매여 있지 않고,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 안에서 해방된 삶을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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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장애, 특히 우리의 편견과 배타성을 뚫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을까요?
그분 삶의 배경은 그들과 비슷했고, 그분은 다른 이들처럼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저 사람은 목수 아닌가?" 그러나 그분은 마을이 정해준 역할에 머물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마을은 대단히 보수적인 곳일 수 있습니다. "보수적"이라는 말은 본래 좋은 의미를 지닙다. 보존한다는 것은 지킨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러나 무엇을 보존하려는가에 따라 그것은 선이 될 수도있고, 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기만에 빠지기 쉬우므로, 좋은 말로 나쁜 것을 포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대한 나자렛 사람들의 반응은 좁은 마을 정신을 드러냅니다.
작은 공동체일수록 그 정신은 더 강하게 작용합니다. 누군가는 "시골 마을의 매력 뒤에는 치명적인 배타성이 숨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나자렛이 바로 그런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여전히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만 보았습니다. 그분이 성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기억 속에는 젊은 시절의 실수와 배경만 남아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저 사람이 뭔데?"라는 시기와 원시적인 부족 정신이 작동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파괴하거나 최소한 신뢰를 떨어뜨리려는 태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좁은 마을 정신'에서 안전할까요?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사회 전체가,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이런 정신에 갇힐 수 있습니다. 어떤 언론이나 정치인들의 말 속에서도, 세계적 차원에서도 우리는 '좁은 마을 정신'의 부정적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무서운 사실은 이 정신이 실제로 효과를 낸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런 좁은 마을 정신이 예수님의 손을 묶어버렸습니다. "그곳에서는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다."고 마르코 복음 저자는 전합니다. (마르 6,5). 우리가 기적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은 무시무시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병자들의 치유이고 다른 하나는 죄인들에 대한 용서입니다. 물론 어쩌면 이 둘은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병이 들면 그것이 그가 저지른 죄나 조상의 죄 때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치유와 용서는 둘 다 용서라는 큰 틀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치유해 주실 때 먼저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 마르 2,5; 루카 5,20) 하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기적을 막는다는 것은 그분의 한없는 자비의 용서를 거부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분의 하해 같은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지요.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우리는 용기를 내어 매 순간 우리에게 용서와 치유의 손길을 펼쳐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분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오도록 우리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이 마음의 문을 열면 우리가 지금까지 외적으로만, 혹은 형태(form)로만 보았던 것들의 내면 깊숙한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re-spect). 아마도 우리 삶의 완성은 이런 내면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는 데서 오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수 혹은 목수의 아들로만 묶어두려 했습니다. 내면의 깊은 의미를 보고 싶어 하지도 않았고, 일상의 성사성을 보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다른 복음에서는 "그분은 그들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가셨다”(루카 4,30)고 전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목수로 머물지 않고,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사명을 수행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기존 틀에 가두려 했던 것은 우리가 남몰래 가지고 있는 편견과 배타성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런 삶의 자세는 신앙 성숙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런 편견과 배타성을 남몰래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잠언의 10장 9절의 말씀("흠 없이 걷는 이는 안전하게 걸어가지만, 비뚤어진 길을 가는 자는 드러나기 마련이다.")과 예수님의 말씀(마태 10,26; 마르 4,22: 루카 12,2)"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처럼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런 편견과 배타성이 우리에게 미치는 가장 큰 악영향은 무한한 사랑의 하느님을 우리의 그 편견과 배타성을 지지해 주는 옹졸한 하느님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 가짜 하느님 안에 우리의 편견과 배타성을 숨기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무서운 일인 것입니다.
우리도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장애를 뚫고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우리를 미성숙한 상태에 머물게 하려는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인식하면서 말이지요....
우리는 성령의 은총 안에서 성장해야 하며, 단순한 전통이나 습관에 머물지 않고, 복음의 자유와 사랑을 실천하는 성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하고, 그분과 함께 세상의 편견과 배타성을 뚫고 나아갈 힘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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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4.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나와 고향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놀라워했습니다.’(마르 6,2) 그러나 그분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르 6,3).
그들은 왜, 놀라워하면서도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겼을까요?
사실, 그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마르 6,2) 하면서, “그분의 지혜와 기적의 힘”에는 놀라워했지만, 실상 그 지혜와 힘이 어디에서 온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자신들의 ‘무지’, 곧 그분의 지혜와 힘의 원천을 알지 못하는 자신들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은 까닭이었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그분에 대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앎’을 내려놓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마르 6,3)하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고집할 뿐입니다. 곧 자신들의 선입관과 고정관념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들이 안다.’고 여기는 자기 생각이 완고함과 불신을 불러오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생각을 믿고 섬기고 따른 우상숭배에 빠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곧 ‘믿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의 그분의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비록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러한 분이 아니라 할지라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리지외의 데레사 성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저는 가장 낯선 생각들도 받아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앎’에 대한 완고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오히려 ‘자신이 알지 못한 낯선 앎’에 개방되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그것은 모르는 것에 대한 믿음이요 받아들임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과 같고, ‘완고함’은 불신의 씨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4)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 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못하는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저는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주님!
존경을 겸손의 표지로, 믿음을 응답의 표지로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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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4.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엄마와 아빠가 부부싸움을 하면 아이들이 힘들기 마련입니다. 가정이 화목하지 못한 집에서 자란 아이들의 심성과 성격이 좋지 않은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도 있습니다. 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큰 뜻을 이루려는 사람은 먼저 가족과 자신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1592년 일본은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이야기하면서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명나라를 정복하려고 하니 조선은 길을 열어달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이었습니다. 이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성경에도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느님의 뜻을 어겼습니다. 그 바람에 이스라엘에는 흑사병이 돌아서 많은 사람이 죽어야 했습니다. 다윗이 회개하였을 때, 하느님은 이스라엘에서 흑사병을 거두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표징을 믿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보았던 예수님의 겉모습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는 많은 표징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본당 공동체에서도 그런 모습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가 갈등이 있으면 본당 공동체의 활력이 없어집니다. 많은 교우가 다른 성당으로 가기도 합니다. 성직자와 교우가 갈등이 있으면 본당 공동체가 분열되기도 합니다. 성직자가 본당을 떠나기도 하고, 많은 교우가 성당을 떠나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서간을 통해서 분열과 갈등이 있는 공동체를 엄하게 꾸짖기도 하고, 다시 화목하게 될 수 있도록 위로와 격려를 하기도 합니다.
‘원님 덕에 나팔 분다.’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지도자의 혜안과 결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를 만들었습니다. 당시에 차도 별로 없었는데 대통령은 50년을 바라보며 고속도로를 만들었습니다. 그 고속도로를 통해서 물류가 발전하였고, 일일생활권이 되었습니다. 경제 발전 5개년의 큰 꿈은 이 고속도로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수출 100억 불의 꿈도 이 고속도로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외환위기’를 ‘금 모으기 운동’과 같은 단합으로 극복하였습니다. 대한민국에 디지털 고속도로인 광케이블을 깔았습니다. 그 고속도로 위에 대한민국은 인터넷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그 고속도로 위에 대한민국은 빛의 혁명을 이루었고, 계엄이라는 큰 산을 넘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이재명 대통령은 인공지능의 고속도로를 만들겠다고 합니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은 대한민국에 인공지능 고속도로에 필요한 ‘GPU’를 26만 장 제공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일은 성경에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랐던 ‘노아’는 구원의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구원의 방주가 있어서 홍수의 심판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랐습니다. 정든 고향을 기꺼이 떠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까지도 제물로 바치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굳건한 믿음은 우리 신앙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집트 땅에서 힘들게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건널 수 있었던 고속도로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 회개한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초대교회의 신학과 교리를 정립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열쇠를 맡겨 주셨습니다.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라는 속담의 주인공이 되면 안 되겠습니다.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원님 덕에 나팔 분다.’라는 속담의 주인공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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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4.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호젓한 들길을 걸어가다가 무성한 잡초 속에 피어있는 예쁜 보라색 도라지꽃 한 송이를 만났을 때, 많은 사람은 외칩니다.
“와! 도라지다. 도라지 뿌리가 기관지에 엄청 좋다던데. 새콤달콤한 양념해서 무쳐 먹으면
정말 맛 있는데...”
그러나 영적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은 전혀 다르게 생각합니다.
작고 어여쁜 꽃 한 송이에 담겨있는 창조주 하느님의 손길을 떠올리며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함께 뿌려진 수많은 씨앗은 세상도 보지 못했을 텐데, 저렇게 청초하게 피어나기까지 치러야 했던
꽃 나름의 노고와 발버둥 쳤던 세월을 헤아립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너무나 왜곡되고 흐려져 있었다는 것을 반성합니다.
어쩔 수 없이 지니고 살아가는 한계와 결핍으로 인해 발생한 지난 시절의 상처와 아픔에만 연연합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비하하며 좌절과 실패의 흔적들만 뚫어지게 바라봅니다.
비록 죄투성이고 상처 투성이인 인생을 살아왔지만, 그래도 내 안에 주님께서 현존하시고, 그분의 영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인도하심을 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내가 얼마나 가치있고 존귀한 존재인지를 아예 생각조차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많은 사람이 보고 있지만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인식하고 판단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 그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은 아예 보지 못합니다.
바라봄의 폭이 좁고 제한적이다 보니, 왜곡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고, 하느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30년 세월을 동고동락했던 나자렛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도 제한적인 시선으로 그분을 바라봤습니다.
보이는 것만으로 주님을 판단한 것입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마르 6,3)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돌아보니 저 역시 얼마나 왜곡되고 제한적인 시선으로 나와 이웃을, 세상과 하느님을 바라봤었는지,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특히 나만의 잣대와 경험치로 하느님과 세상을 바라봤으니, 그간의 영성 생활이 얼마나 어색하고 위험한 것이었는지...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시야가 괜찮은지 진지하게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나는 눈에 보이는 것 그 너머의 것을 내다보고 있는지?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신원과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지?
그분을 그저 내 건강과 성공, 안락한 생활을 위한 안전장치로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느님 아닌 하느님을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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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4. 연중 제4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생활묵상 : 예고 없는 작별, 이 묵상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누구나 언젠가는 지구별을 떠나 멀고 먼 하늘나라를 가게 됩니다. 어제 부고 하나를 레지오 톡을 통해 받았습니다. 저는 특별한 몇 분을 제외하고는 본당에 계신 자매님과 형제님들 중에 세례명을 모르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반대로 저는 제 이름과 세례명을 모르는 분이 없을 정도로 만약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로 다들 잘 알고 계십니다. 영세를 받기 전부터 교리를 한 달 정도 받을 때에도 이미 스타 아닌 스타였으니 말입니다. 예비자인데도 그랬습니다. 부고를 받았는데 어떤 분인지 잘 몰라 연령회 봉사하시는 자매님 한 분께 전화로 여쭤봤습니다. 인상착의를 말씀해 주셨는데 머리가 백발이신 것만 말씀하셨습니다. 짐작이 가는 자매님이었지만 그래도 정정하신 분이라 설마했는데 저는 오늘 개인적인 일로 혹시 빈소에 못 갈 경우가 생길 수도 있어서 밤 11시쯤에 혼자 갔는데 병원 입구에 사진을 보니 설마했는데 예상했던 분이어서 너무 놀라웠습니다. 교적을 옮긴 후에도 간간이 본당을 갔기 때문에 뵐 수 있었습니다. 항상 저를 보면 밝게 인사를 해 주시고 또 근 13년을 뵈면서 평일 미사는 거의 빠지지 않고 오실 정도로 신심이 아주 좋았던 분이십니다.
연세를 보니 일흔 여덟이셨습니다. 헤어스타일이 아주 흰 백발이셨고 파마 머리였습니다. 피부가 참 고우셨고 탄력이 연세에 비해 좋으셨습니다. 백발이어도 염색을 한 것보다도 더 곱게 보이는 그런 얼굴이셨습니다. 허리도 아주 꼿꼿하고 또 건강해보이셨는데 이렇게 갑자기 작별을 할 거라고는 상상을 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잘 모르는 자매님이었다면 어쩌면 시간도 너무 늦고 해서 그냥 목요일 오전에 장례미사 때만 참석하려고 했습니다. 근데 평소 잘 아는 자매님이라 늦었지만 오늘 어떻게 개인적인 일이 어떻게 될지 몰라 혼자 짧은 연도만 바치며 자매님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고 왔습니다. 귀가하면서 묵상을 한 게 있습니다. 14년 성당에서 생활하면서 연도는 거의 빠지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장례미사는 조금 빠졌기는 합니다.
원래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연도와 장례미사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제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가능하면 빠지지 않으려고 신영세자 때부터 마음먹었거던요. 잘 아는 분이든지 아니면 모르는 분이든지 그건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개신교 때는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저는 개신교 땐 이런 게 조금 두려웠습니다. 근데 천주교에 와서는 이상하게도 신기하게도 전혀 두렵지 않았습니다. 입관도 많이 지켜봤습니다. 아직도 많은 분들은 이걸 생각보다 꺼리는 분도 많이 계십니다. 실제 염습을 할 때도 젊다 보니 도와드린 경우도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분들을 하느님 나라로 가시는 걸 봤습니다. 화장장까지도 많이 가서 마지막까지 함께하고 어떤 경우는 장지까지도 함께했습니다.
많은 분들을 보내드리면서 항상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위령성월 때에만 주로 죽음을 많이 묵상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물론 그때도 많이 묵상해야 하겠지만 죽음이라는 건 언제 어떻게 닥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죽음을 머리에 염두를 두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연도를 마치고 나서면서 아드님으로 보이시는 분께 여쭤봤습니다. 지금 잠시 본당을 나오지는 않지만 간혹 뵙는데 생각의외로 이렇게 가실 줄은 몰랐다고 하니 아마도 편의상 말씀을 하시는데 지병이 있었다고 하셨지만 최근까지 그렇게 보인 적은 없어 보였는데 조금은 믿기지 않았습니다.
지난 가을엔 성당 근처에서 마주쳤을 때 언제 다시 올거냐고 하셔서 제가 앞으로 14개월만 지나면 갈 거라고 했는데 그땐 자주 뵐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 생각으로는 최소한 10년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계속 뵐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건강해보였는데 이렇게 작별을 할지는 전혀 예상을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성당에 와서 많은 죽음을 보아왔지만 오늘은 특별한 묵상을 한 게 있습니다. 이처럼 전혀 예상하지 않은 이별을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외 다른 종교에서는 특별히 죽음에 대해 남은 가족이나 아니면 살아 있는 사람과 고인과의 어떤 관계에서 장례에서 간혹 언급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잘 하지 않는데 고별식을 할 때 약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바로 고인과 고인 가족이라든지 아니면 고인을 잘 아는 사람들이 있다면 평소에 고인과 안 좋은 일이 있었다든지 하면 이때 서로 용서를 청하는 것 말입니다.
오늘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많은 사람들과 친하든 친하지 않든 많은 교류를 하거나 친분을 쌓기도 합니다. 그냥 인사만 하는 사이일 수도 있고 어떤 경우는 서로 마음을 틀 수 있는 그런 관계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사이에 두고 서먹서먹하며 지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떤 경우는 많은 세월을 함께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는 불과 스쳐지나가는 시간이라고 표현할 만큼 짧은 시간을 함께할 때도 있습니다.
불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정도의 인연은 몇 천 갑절뿐만 아니라 억겁의 세월을 함께한 인연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물론 불교의 표현이지만 그 표현을 떠나 우리는 그와 맺었던 인연이야 어찌됐든 지금 현세에서 헤어졌다고 영영 헤어지는 게 아니고 다시 언젠간 또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 만났을 때 친한 사이이면 모르는데 만약 평소에 서로 서먹서먹한 관계였다면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만났을 때 어떤 느낌이 들까요? 아직 가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지만 모르긴 몰라도 아주 반갑게 인사를 하지는 않을 겁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게 이상할 겁니다.
이 상황을 유심히 한번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상황이 하늘나라에서 연출이 된다면 그게 과연 하늘나라라고 하는 천국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건 천국이 아닐 것입니다. 천국은 그런 감정이 존재할 수조차도 없는 곳이 천국이 되어야 하는 게 정상일 겁니다. 그럼 어떤 결론이 나는가요? 우리는 죽어서 하느님 나라를 간다고 많이들 생각을 합니다. 틀린 표현은 아닙니다. 하지만 조금 수정보완해서 인식해야 할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조금 전 설명처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천국의 삶을 살지 못하면 결코 죽어서 하느님 나라를 설령 간다고 해도 그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지상낙원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죽어서 하늘나라를 잘 가려면 바로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늘나라를 만끽해야 다음에 우리의 영혼이 하늘나라에 가더라도 천국에 잘 안착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잘 안착하는 건 한 인간의 생명이 어머니 태안에 잘 착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착상이 잘 됐을 때 그게 한 생명으로 탄생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갈 때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착상조차도 못하면 우리의 영혼인 새 생명이 하느님 나라에서 그만 유산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 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분명해집니다. 이 세상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하느님 나라에서 새 생명으로 거듭나느냐 아니면 유산되느냐 하는 갈림길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유산이라는 표현은 조금 극적인 표현이지만 우리는 냉정하게 이런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서 잘 적응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영혼은 천국에 가도 그에게는 천국이 아닌 것입니다.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모순 같지 않습니까?
천국에 갔는데 천국이 아니니 말입니다. 다시 한 번 더 결론을 내립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을 맛 본 사람만이 천국에 쉽게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냥 죽는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곳이 천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에 대한 해답은 이미 제가 쓴 이 묵상글에서 힌트가 다 녹아 있습니다. 저도 이 묵상이 정말 맞을지 그게 참 궁금합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그 이유는 복음과 성경에서 이미 이걸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표현을 달리 했을 뿐이지 원리는 바로 이런 원리입니다. 이 원리를 적용하면 평소 잘 와 닿지 않는 말씀도 잘 이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이 잘 와 닿지 않는 이유가 바로 천국나라의 법은 이 세상 법으로는 설명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반복되는 말씀이지만 하늘나라 시민이 되려면 그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도록 요건이 잘 갖추어졌을 때 비로소 천국 시민권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 시민권은 천국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고 이미 이 세상에서 획득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 이 세상을 그냥 허투루 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천국을 그리 만만하게 보면 안 될 것입니다. 그냥 대충 대충 살아서는 절대 안 될 것입니다. 더 하고 싶은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도 너무 길어서 여기서 이만 마무리하겠습니다. 언제가 또 다른 글에서 언급하겠습니다.
제 묵상글을 보시는 분들은 항상 긴 글일 거라고 예상하고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지루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글은 길긴 긴데 다 읽고 보면 단일한 주제로만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결론이 명쾌하게 하나로 돼 가슴에 진하게 다가가 잘 스며들 수 있는 장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긴 글을 읽어내는 인내가 필요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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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생활묵상 : 예고 없는 작별 묵상글 핵심은 바로 이겁니다. < 07:10 추가 >
잠시 잠이 깨 잠이 들지 않아 폰을 보니 다른 카페로 쪽지 하나가 와 있습니다. 이 묵상글을 몇 번 읽어 봤는데 결론이 뭔지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맨마지막에 전체 묵상글의 핵심을 두세 줄로 요약해서 표현해드려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답글로 정리를 해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공동체에서 만나는 사람도 언제 어떻게 이별을 할지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형제자매로 만나지만 그와의 관계가 만약 좋지 않은 관계 다시 말해 서먹서먹한 관계라면 단순히 표현해서 이해를 돕기 위해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관계로 만약 누군가와 헤어졌다면 현세에서 말입니다. 다음에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만나게 됐을 때 그때도 역시 그런 관계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서도 만약 그런 사이라면 그게 어떻게 천국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천국이라는 곳은 사랑이 넘쳐나야 하는 곳인데 말입니다. 이율배반적인 것입니다. 결국은 그곳이 설령 천국이라고 해도 그런 상황에서는 천국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 현세에서도 누군가와 어떤 관계를 맺더라도 이게 말처럼은 쉽지는 않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가능하면 좋은 관계로 유지돼야 나중에 천국에서 만나더라도 그곳이 진정한 천국이 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게 죽어서 가는 천국이 이미 이 땅에서도 이루어진 사람만이 그게 가능하다는 논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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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Re:생활묵상 : 묵상글을 만약 결론만 적으면 안 되는 이유 < 07:15 추가 >
만약 이처럼 어떤 결론 형식으로 묵상을 표현한다면 전혀 와 닿지 않을 겁니다. 이게 피부로 전달하기 위해서 서론과 본론이 좀 긴 것입니다. 결국은 서론과 본론이 유기적으로 긴밀하게 연결이 돼 있어야지 최종 묵상글이 가슴으로 전달될 수 있을 겁니다. 달리 표현하면 서론과 본론은 마치 군불을 때는 것처럼 구들을 달구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천천히 달구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들이 천천히 식게 되겠죠. 결국은 묵상의 여운이 오래가게 되는 이치가 될 것입니다. 그냥 만약 바로 휘발되게 되면 그건 어쩌면 시간 낭비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콩시루에 물이 다 빠져도 콩나물이 자라기는 자라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왕이면 효율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차도 이왕이면 연비가 좋은 차가 똑같은 조건에서는 더 선호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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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묵상 : 소설 같은 이야기이지만.......
어제 저녁 산책을 하면서 문득 우낀 묵상을 해봤습니다. 최근 올린 글이나 예전에 제가 약간 언급을 한 글을 보신 분이 계신다면 제 짝사랑 이야기를 말합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어제는 순간 이런 질문을 누가 마치 하는 것 같았습니다. 베드로,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 만약에 그럴 리야 없지만 혹여라도 안나가 좋지 않은 병이 걸려서 누군가 돌봐줄 사람도 없고 해서 고민을 하다가 어느 날 베드로 생각이 난 거야. 예전에 날 그렇게 좋아했고 죽을 만큼 사랑한다고 했는데 혹시 지금도 그럴까 하며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며 연락을 해 지금도 날 사랑하느냐 하며 만약 그렇다면 너무 늦었지만 받아 줄 수 있겠느냐고 한다면 베드로 어떻게 할 거야?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럴 리야 없겠지만 누나가 그렇게 했다면 이젠 세월이 흘렀고 옛날 그때처럼 그 마음이 식은 건 사실이고 또 상황이 그때랑 지금이랑은 다르기 때문에 고민은 하겠지만 아마 모르긴 몰라도 나는 바보 같은 결정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도 안 되는 우끼는 소설입니다. 받아줄 수도 있을 겁니다. 비유는 적절하지 않지만 느낌은 이런 느낌일 수 있습니다. 예전에 드라마 같은 데에서 보면 남편이 조강지처를 두고 바람을 폈다가 병이 들어서 바람피었을 때 여자가 버리니 할 수 없이 조강지처한테 다시 찾아오는 모습 말입니다. 이때 잘은 모르지만 받아주는 여자가 있고 받아주시 않는 여자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주 오래됐던 드라마 같은 데서 보긴 했는데 어떻게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긴 합니다. 마치 이런 건 아닌데 느낌은 이런 느낌과 조금은 비슷한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제 성격이라면 아마도 받아줄 것 같습니다. 아직도 그런 옛날 그 감정 그게 그대로 있다면 그건 약간 비정상이겠죠. 아무리 뜨겁게 사랑을 했다고 해도 시간이라는 게 지나면 그건 식게 마련입니다. 이젠 그때 그런 마음은 이미 그때 진을 다 뺏기 때문에 그런 감정은 분명 없어서 어떤 미련도 없다고 하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면 왜 그럴까요?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결정이지만 말입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저는 다르게 생각하는 게 있습니다. 물론 옛날에 내가 내 목숨을 줘도 아깝지 않을 것 같은 마음으로 사랑을 했고 지금은 그런 감정이 없지만 그래도 한때는 그렇게 사랑했던 여자였기에 만약에 지금은 안 그렇다고 해도 그때 그 마음이 진실로 진실했다면 지금 그 사정이 어떠하든 어려운 결정이겠지만 받아들여야 그래야 그때 내 마음이 거짓이아니였다는 게 증명이 될 것 같기도 해서 꼭 그래서만이 아니라도 사랑이라는 건 사랑해서도 사랑하겠지만 야속하긴 할 수도 있고 밉기도 할 수도 있고 여러 감정이 섞여 있어도 어쩌면 그것마저도 초월해 사랑을 한다면 아마도 그런 사랑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그런 사랑은 목숨을 바쳐 누군가를 위해 살신성인으로 희생하는 사랑 못지 않은 위대한 사랑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렇다면 단지 연민으로 그런 걸 받아줄 수 있을까? 아무리 연민이 있다고 그게 가능할까? 그럼 과연 어떤 힘으로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요? 물론 소설 같은 이야기이지만요. 만약 제가 그런 결정을 하게 된다면 그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평소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는 입으로만 하고 실천을 하지 못했던 부족한 인간이라 하느님 말씀을 제대로 잘 실천은 하지 못하고 살았던 사람이지만 제 벗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그런 사랑만큼은 실천해 그간 그토록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이웃사랑을 이런 기회를 통해서 속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묵상을 해봤습니다.
물론 소설 같은 우낀 이야기이지만 말입니다. 이게 소설 같은 우낀 이야기이긴 한데 그래도 정말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다면 정말 멋진 사랑 아니 위대한 사랑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우낀 이야기이긴 한데 이것도 잘 한번 묵상을 해보면 진짜 위대한 사랑은 단순히 이성간의 좋아하는 그런 사랑은 가짜 사랑이라는 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진짜 사랑은 이런 사랑이 진짜 하느님이 원하시는 사랑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 슬픈 사랑인데도 한편 멋진 사랑인 것 같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점심시간이군요. 맛있게 점심 드시고 오늘도 행복한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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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공유할 묵상글(강론글)로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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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4. 연중 제4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6,1-6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오늘의 제1독서에서 다윗 왕은 자기 휘하의 장수 요압을 시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다니며 인구를 조사하도록 합니다. 왕으로써 자기 나라에 백성이 얼마나 있는지 그 ‘숫자’를 알고자 한 것입니다. 이런 ‘인구조사’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널리 행해지는 당연한 ‘행정절차’로 여겨지지요. 그런데 다윗은 그로 인해 하느님의 진노를 사게 되어 엄한 벌을 받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숫자로 대상을 파악하는 것은 세상의 방식이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숫자를 바탕으로 자기 능력을 파악하려 드는 시도의 밑바탕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능력에만 기대지 않겠다는, 이제는 그분 뜻에 무조건 끌려 다니지 않겠다는 의중이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하느님의 권능이 아니라 ‘백 삼십만’이라는 병력의 숫자가 곧 이스라엘의 힘을 상징하게 되었고, 전쟁을 벌일지 말지는 하느님의 의중과 뜻을 헤아리며 따르는 게 아니라 적군과 아군의 숫자를 헤아리며 그 유불리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인 왕이 결정하게 되었지요. 그런 결정이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든 겁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며 그분 뜻을 따르려고 하지 않고, 숫자를 기준으로 하는 계산과 예상을 바탕으로 살면, 우리 삶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현존과 권능이 머무를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섭리를 보고 경탄할 일도, 그분의 신비를 깨닫고 감동할 일도 없이, 늘 내가 예상할 수 있는 좁은 범위 안에서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무미건조한 삶을 살게 되지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자렛 고을 사람들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조건으로만 예수님을 바라보았고, 과거의 기억들로만 그분을 판단했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께서 심오한 지혜와 놀라운 능력을 갖춘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었음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출신이나 배경이 별 볼일 없었다는 이유로, 그분의 과거를 자신들이 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무시하고 폄훼하며, 그분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려고도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게 전부라 여기고, 자기가 보고 싶은대로만 보려고 하는 편협하고 편향적인 모습입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주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들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나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나의 부족함에서마저 ‘선’을 이루시는 그분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모든 주도권을 넘겨드리고 철저히 그분을 따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과 그분 뜻에 나를 활짝 열어야 주님께서 나의 믿음을 통해 당신이 원하시는 모든 걸 하실 수 있는 가능성을 활짝 여십니다. 그렇게 내가 주님과 함께 걷는 길에서 마주하는 모든 일이 기적이 되고 은총이 되지요. 주님께서 나자렛 고을에서 많은 기적을 일으키실 수 없었던 건 그분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분께 대한 나자렛 고을 사람들의 믿음이 부족해서였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굳게 믿고 그분께 내 모든 걸 맡겨 드려야겠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통해 놀라운 일을 이루시도록 그분께 철저히 순명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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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4.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왜,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을까?』
1)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직업’과 ‘집안’만 보았고,
그래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안 믿었습니다.
우리는 나자렛 사람들의 잘못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께서는 왜, 예수님을 가장 낮은 곳으로 보내셨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셨다면, 그리고 예수님의 직업이 목수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직업이었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는 처음부터 달랐을 것입니다.>
다음 말씀은, 예수님이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이유를 잘 나타냅니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천사가 목자들에게 한 말에 연결됩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1-12).”
주님의 힘은 왜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날까? 그리고 왜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가 메시아의 표징일까? 인간의 상식과는 크게 다르기 때문에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1코린 1,27ㄴ-28).”
2) 가지고 있던 권력과 재산과 지위와 신분 등을 모두 잃고,
인간 세상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깨닫고, 그때서야 비로소 하느님을 찾게 되고, 신앙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고백하는 글을 남긴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꼭 그런 경험을 해야만 그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기도와 묵상 중에 그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고, 그 깨달음을 통해서 더 깊은 신앙의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어떻든 그 깨달음은, “예수님은 아무것도 아닌 나를 구원하려고 나에게 오셨다.” 라는 깨달음과 믿음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이유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과 재산만 생각하면서,
또 인간 세상에서의 자신의 높은 지위와 신분 등만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가 왜 ‘메시아의 표징’이 되는지, 또 메시아께서 왜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나셔서 가난한 목수가 되셨는지, 그 이유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예수님을 안 믿을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다음 말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5-27).” 아마도 나자렛 사람들은, “메시아는 로마 황제보다 훨씬 더 강력한 통치자” 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뿐만 아니라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의 생각이 그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 황제보다 더 강한 통치자의 모습 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 예수님을, 또 낮은 곳에서 사람들을 섬기는 일만 하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4) 메시아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은 모두 ‘사랑’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사랑으로 알아보는 사람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믿게 됩니다.
사랑을 사랑으로 알아보는 방법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이기심과 탐욕만 가득하고 사랑이 없는 사람은, 사랑을 보아도 사랑으로 알아보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합니다.
아마도 나자렛 사람들에게 가장 부족했던 것은 사랑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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