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에 타지만, 타서 없어지지 않는 떨기
탈출 3,1-12; 마태 11,25-27 /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2023.7.19.; 이기우 신부
미디안 땅에서 양 떼를 치는 양치기로 살아온 지 사십 년째 되던 어느 날, 나이가 여든 살이 된 모세는 호렙 산 어귀에서 신비스런 체험을 하였습니다. 산불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떨기가 불에 타는 모습을 보았고, 떨기가 불에 타는데도 없어지지 않는 모양을 본 것입니다. 모세가 소명을 받게 된 계기가 되어 준 표지가 이 불떨기였습니다. 자연 속에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현상인데, 저는 이 ‘불에 타지만 타서 없어지지는 않는 떨기’라는 이 표지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로 사십 년이나 살면서, 모세가 자신의 소명과 관련하여 기도하다가 떠올린 묵상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자신이 떠나온 이집트 땅에서 목격하고 체험했던 히브리인들에 대한 묵상이 있음직합니다. 본성을 초월한 초자연적 신앙을 발견하고 나서 느낀 그 어떤 체험이 있었던 것이지요.
사실 그의 동족인 히브리인들은 이집트인들이 이룩한 선진 문명을 부러워하기는 했어도 동화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문명의 본질이 우상 숭배임을 알아볼 만큼 야곱 이래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하느님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잘못도 없이 노예가 되어 가혹한 강제노역을 당하기는 했지만 이집트인들에게 복수를 하려거나 스스로 힘을 길러 탈출하려는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하느님께 부르짖기만 했습니다. 이것이 불타는 떨기 혹은 불에 타지만 타서 없어지지는 않는 떨기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부러움과 분노의 불에 타기는 하지만 신앙이 사라지지는 않는, 이 불떨기의 표징으로 모세에게 하느님께서 나타나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해방의 사명은 예수님에게서 본격적으로 계승되었습니다. 열두 제자에게도 같은 사명을 주시고 파견하신 예수님께서 귀환 보고를 듣고는 매우 만족하시며 찬미 기도를 하느님께 바치셨습니다. 강자들의 억압에 분노하시고 약자들이 울부짖는 소리에 민감하신 하느님께서 약자들을 해방시키라는 파스카의 소명을 모세에게 주신 역사를 기억하신 예수님께서, 이를 보편화시키시고자 당신 자신도 행하고 계셨던 같은 소명을 제자들에게도 나누어주시어 파견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철부지처럼 하느님의 자비로운 눈길을 감사히 여기는 약자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어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돌아온 가난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이것만 해도 감사해 마지않을 일인데 이뿐 아니라 열두 제자들이 나중에 일흔 두 제자가 되어 파견될 예순 명의 제자 후보들까지도 모아왔기에 예수님께서는 모처럼 감사의 기도에 이어 찬미의 기도까지 바치실 수 있으셨습니다.
여기서 당시 이스라엘의 강자들, 즉 자칭 지혜롭다는 자들과 스스로 슬기롭다고 자처하던 자들이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에 눈과 귀와 마음을 닫아버린 일은 대수롭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불타는 떨기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에 담긴 하느님의 뜻, 하늘과 땅에 가득차야 할 그 고귀한 뜻을 전해 받을 자격조차 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이러한 성취는 기준이자 목표가 됩니다.
그러한 영향이 이 땅에서 벌어졌던 피어린 백년 박해 속에서도 나타났었다고 저는 봅니다. 바로 박해시대 교우촌 현상입니다. 한민족 역사 오천 년 동안 지배권력에 맞선 반란은 여럿 있었습니다. 고려 시대에 망이·망소이의 난(1176~1177), 조선 시대에 홍경래의 날(1811~1812), 동학농민혁명(1894) 등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통치 이데올로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독자적 세계관을 지녔으면서도 무기를 들지 않았던 조선 천주교 신자들의 ‘반란’은 달랐습니다. 평화적인 저항을 했다는 점에서 달랐고, 무려 백년간이나 박해에 굴복하지 않고 끈질기게 자신들의 신념을 비폭력으로 관철했다는 점에서 달랐습니다. 만민평등과 남녀동등 같은 사회적 평등의 가치와, 신앙과 양심의 자유 같은 인격적 가치 등이 당시 천주교 신자들의 대표적인 신념이었습니다.
하지만 국법으로 천주교를 금지한 조선 왕조의 폭력적인 박해의 손길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최경환과 이성례가 충청도 청양에서 살다가 박해를 피하고자 이주했던 경기도 과천 수리산 뒤뜸이 마을 교우촌에는 모두 마흔 명의 신자들이 한날 한시에 체포되었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당시였습니다. 그들이 40일 이상의 참혹한 고문 속에 태형 340대와 곤장 110대를 맞으면서 고작 네 명만 치명했을 뿐 나머지 서른여섯 명은 모조리 배교했습니다. 이 배교자들이 신앙을 버린 것이 아니라 고문에 못 이겨 입술로만 배교한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믿음과 고초를 알았던 교우촌 신자들도 배교자라고 배척하지 않고 다시 받아들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입술배교자’들은 용감하게 치명하지 못하고 입술로라도 배교한 죄를 보속하느라 체포되기 전보다 더 열심히 기도하며 계명을 지켰습니다. 모조리 치명했다면 한국천주교회의 명맥이 끊어져 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이들 배교자들이 평생 지속되는 순교의 삶을 살겠다는 각오로 순교자들 못지않게 더욱 열성적으로 신앙을 지키며 자손들에게 전수해 주었기에 오늘날 한국천주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 ‘입술배교자’ 중의 한 사람이 신유박해 때 배교하고 경상도 상주로 유배간 최해두입니다. 그는 자신보다 먼저 체포된 부친(최창은)과 삼촌(최창주), 장인(윤현) 등은 모두 치명했음에도 자신만 배교한 것을 가슴을 치며 뉘우치며 ‘자책(自責)’이라는 참회록을 남겼습니다. ‘두루 심란 답답하여, 두 어 줄 글을 기록하노니, 슬프고 슬프도다’로 시작하는 최해두의 「자책」은 배교로 인한 유배생활을 통해 자신의 과오를 정개하고 평생 지속되는 순교적 삶으로 바꾸고자 했던 회심자의 통렬한 회개의 심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 신앙 선조들이 박해시기에 보여준 이런 모습의 증거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고 힘을 주시지 않고서야 사람의 본성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불에 타지만 타서 사라지지는 않는 떨기와도 같은, 하느님의 현존 표지인 것이지요. 이제는 우리가 모세처럼 그 ‘불떨기 표지’ 속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알아보는 눈과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