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묵채국(한만수)
2022년도 한 달을 남긴 11월인데도 초가을 날씨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제 산속에서 농사를 짓는
농가를 찾아갔었는데 쑥이며 미나리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서리가 내리지 않아 고춧대며 호박잎도
줄기가 싱싱합니다. 1970년대 초만 해도 11월 최저 기온은 0도 이하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기온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쉽게 알아보는 방법은 농산물 재배 지역의 분포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전 국민이 즐겨 먹는 사과는 낮과 밤의 기온 차이가 큰 지역에서 재배가 가능합니다.예전에는 대구
지방에서나 재배 가능했으나 지금은 충주를 지나 강원도 철원까지 올라갔습니다. 전라도 지방에서
는 비닐하우스이기는 하지만 바나나를 비롯하여 열대과일을 재배하는 농가들이 늘어 갑니다.
남방식물인 대나무는 제가 사는 충북 지역에서는 1970년대만 해도 굵은 것이 엄지와 검지로 쥘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얼마 전에 친구 집에 가서 보니까 한 손으로 쥐기 힘들 정도로 굵게 자라고 있
었습니다.
예전에는 겨울밤은 길고 적당한 소일거리가 없으니까 친구들 집에 모여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
았습니다. 이런저런 잡담을 하다 배가 출출해지면 고구마를 깎아 먹거나, 돈을 추렴해서 국수를 사
다 끓여 먹기도 했습니다. 가끔은 화투를 쳐서 딴 사람에게 뜯은 고리로 찐빵이나 과자를 사 먹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만 해도 어느 동네를 가거나 가을 농사가 끝나면 화투로 밤을 새우는 노름꾼들이 많았습니
다. 어른들 노름은 초저녁부터 돈을 걸고 화투를 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담배 따먹기나, 술내기로
시작을 해서 밤이 이슥해지면 본격적으로 돈이 오가는 노름판으로 변합니다. 노름꾼들은 돈을 잃게
되면 내년 봄까지 먹을 양식부터 팔아 치우기 시작합니다. 노름 밑천을 만들 욕심으로 양식을 팔아
치우는데 아내는 팔짱 끼고 구경만 하고 있을리 없습니다.
가족의 생계가 걸린 양식을 지키겠다는 아내의 필사적인 방어와, 오늘 저녁에는 반드시 본전을 찾
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 젖어 있는 남편과의 싸우는 소리는 집 밖으로 새어 나갑니다. 밥그릇이며
냄비 따위가 마당에 나뒹굴고, 장롱 유리가 깨지고 천장에 구멍이 나기 일쑤입니다. 결국은 눈두덩
에 시퍼렇게 멍이 들고, 입술이 퉁퉁 부어오른 아내는 아이들을 껴안고 얼음장 같은 정지바닥에 퍼
질러 앉아서 서럽디 서럽게 통곡하는 것으로 부부싸움은 막이 내립니다.
동네에 겨울이면 도토리묵채국 장사를 하는 묵집이 있었습니다. 부부 내외가 가으내 산에서 주워
온 도토리를 직접 갈아서 묵채국을 만들어 파는 집이었습니다. 도토리묵채국은 대접에 묵채를 썰
어 놓고, 김장김치와 지고추며 고춧가루를 참기름으로 비벼낸 고명을 얹고 뜨거운 물을 부어 만듭
니다.
고등학생들이 먹기에 가격도 비싸지 않고 외상도 잘 줍니다. 딸이 동급생이었는데도 저희들에게 소
주나 막걸리도 팔았습니다. 가끔은 동급생인 딸내미가 묵쟁반을 들고 오기도 합니다. 산골소녀답지
않게 예쁘장하고 말수가 적은 새침데기라 인기가 많았습니다. 어떻게 말 한번 걸어 볼까 하는 요행
심에 일부러 도토리묵채국을 먹으러 가기도 했습니다.
나이 예순이 지나고 동문 체육 대회 때 묵집 딸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가수 최백호가 부른 ‘낭만을
위하여’라는 노래 가사 중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라는 부분이 저절로 생각
이 나더군요.
하루는 친구네 집 구석방에서 화투판이 벌어졌습니다. 돈을 딴 사람이 ‘도토리묵채국’을 사는 조건
이었습니다. 방바닥 가운데 담요가 깔리고 본격적으로 판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노름에 재미를 붙일 수가 없었습니다. 돈을 따면 흥분이 되고, 돈을
잃으면 서운해해야 하는데 별다른 자극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쩌다 판에 끼어들어서 돈을 따게
돼도 신나지 않고, 잃으면 잃었나 보다 체념하고 뒤로 물러서는 성격입니다. 그 대신 고리는 정확
하게 봅니다. 이를테면 친구들 사이에 전문 고리꾼인 셈입니다.
처음에는 다섯 명이 시작한 판이 밤 10시를 넘기고 3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한 친구 아버지는 소
장수였고, 또 한 친구는 중국집, 또 다른 친구 어머니는 장날마다 국수를 팔았습니다. 이를테면 평
소에 용돈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친구들만 남은 셈입니다.
그날 저녁은 국수집 아들이 돈을 모두 땄습니다. 그 친구를 따라서 묵집으로 가서 도토리묵채국을
맛있게 먹는 것으로 즐거운 하루를 보냈습니다. 이튿날 중국집 아들이 복수전이 벌어졌습니다.
중국집 아들은 3명 중 화투 실력이 가장 뛰어나다고 친구들이 인정을 해 주는 레벨이었으니 복수
전은 당연했습니다. 당연히 복수전은 중국집 아들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났고, 휘파람을 부는
그를 따라서 묵집으로 향했습니다.
중국집 아들의 실력이 월등하니까 한동안은 화투치기를 안 했습니다. 겨울방학이 시작될 무렵 국
수집 아들이 도전을 했습니다.
친구네 집에서 낮부터 화투를 칠 수가 없으니까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는 움푹 파인
구덩이에 들어앉아서 패를 돌리기 시작했고, 국수집 아들은 무슨 기술을 배웠는지 파죽지세로 백전
백승의 깃발을 꽂았습니다. 중국집 아들은 몇 번이나 집과 구덩이를 오간 끝에 겨울방학 시작 전에
내지 못한 수업료와 육성회비 3만 원 돈을 탈탈 털렸습니다.
이윽고, 중국집 아들이 구덩이를 벗어나서 잔솔 사이에 쪼그려 앉아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화투 지존이었었다는 자존심에 잃은 돈을 돌려달라는 말은 못 하고 눈물로 호소를 하는 상황이 벌
어진 것입니다.
고리를 보고 있던 저는 고리로 뜯은 3천 원 돈을 중국집 아들 주머니에 쑤셔 넣었습니다. 덧붙여서
국수집 아들에게 수업료라고 하니까 2만 원 정도는 돌려줘라, 친구 사이에 너무한 것 아니냐고 설
득을 했습니다. 국수집 아들은 3천 원을 개평으로 내밀며 더 이상은 못 주겠다고 버텼습니다.
겨울이라 낮은 짧습니다. 어서 묵집에 가서 도토리묵채국을 먹어야 하는데, 중국집 아들은 겨울바람
속에서 울고 있지, 국수집 아들은 딴 돈을 돌려주지 못하겠다고 버티고 있지, 소장수 아들은 나도 8
천 원 돈을 잃었는데 개평이 5백 원이 뭐냐고 인상을 쓰느라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은 날이 캄캄해지고 찬바람이 얼굴을 후려갈길 무렵에야 중국집 아들에게 1만 원을 돌려주는 것으
로 산을 내려갔습니다.
그다음부터 서로 화투치지 말자고 약속한 것도 아닌데 더 이상은 판을 벌이지 않았습니다.다른 동네
친구들은 여전히 밤이면 화투장을 돌려도 제 친구들은 밤이 깊어 입이 궁금해지면 생고구마를 깎아
먹거나, 국수를 사다가 배가 터지게 먹는 것으로 달랬습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저는 지금도 그날 있
었던 화투판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당사자들은 그랬을 리가 없다고 고개를 잘래잘래 흔
든다는 점입니다.
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
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
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