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어떤 순간은 깊고 섬세한 균열 같아서,
제때 안 자고 깨어 있다가 방심하면 발을 헛디뎌 그 틈으로 쑥 낙하하는 게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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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며칠 잠을 줄여서. 하필 새벽이라서. 누군가에게 호의를 받은 적이 드물어서.
만인에게 친절해도 자신에게까지는 그 수고도 아까워하던 서재희가
새벽의 변덕에 잠시 곁을 내주는 것뿐이라고.
두려움은 한겨울 찬바람처럼 스며들었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 내게는 영원한 순간이 될까봐.
다음에 또 그런 나를 마주하면, 그 때는 멀리 도망가.
내 불행에 가까이 오지마.
유은우 홀로 있던 세계의 가장자리에 서재희가 발을 디딘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나의 세계가 기울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문득문득 그에게로 미끄러지는 거라고.
남이 하니까 나도 하고. 내가 하니까 남도 하고.
그렇게 모두가 죄로 손 잡고 벌을 미루니까 끝에 누군가가 희생당하는 거예요.
언제든지 버리기 쉽도록 인권도 없는 사람이 생긴다고요.
선배, 이상은 애초에 도달할 수 없는 빛 같은 거예요.
손을 뻗어도 만질 수 없고 아무리 달려도 닿을 수 없는.
하지만 빛을 향해서 걸을 수는 있죠.
-혼자서?
혼자라도.
삶에 짙은 순간들이 있다.
잔잔히 흐르던 물살이 막다른 길을 만나 거세게 굽이치듯이,
크게 베어 물었던 빵에서 생각지도 못한 크림이 와르르 무너지듯이,
영원할 거라 믿었던 고향 집이 순식간에 무너지듯이,
내 손으로 어찌할 수 없이 전신으로 닥쳐오는 그런 순간들이 있다.
내게 짙은 순간은 항상 힘들었는데.
-그럼 네가 생각하는 사랑은 뭔데?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는 것.
자신에게 불리한 걸 알면서도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는 것.
본인이 원해서 온갖 핑계를 대며 비이성적 판단을 합리화하는 거요.
가령 전투를 나갔다가 사해에 두 사람이 낙오되었는데,
한 사람이 자신의 마지막 보호칩을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주는.
그러니까...
...지금 선배가 내린 그 비효율적인 선택처럼.
유은우가 서재희의 삶으로 쏟아졌다.
찬란하여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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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반드시 지나갈 것이다.
흔적이야 남겠지만 금방 쓸려 나갈 것이다.
나의 나날들은 흐려 언제나 비가 오니까.
대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정당하다고.
나는 언제나 대의 편이었어.
넌 내게 소수였지. 내 전부 같은 소수였어.
널 버리고 이념을 택한 것이 정말 옳았는지는, 지금 이 순간까지 모르겠어.
우리가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해.
내가 서재희였다면 널 구할 수 있었을까.
이상을 좇는 동시에 널 안을 수 있었을까.
매일 밤마다 상상해.
"이제 그만둘 거야?"
앞뒤 다 잘라먹은 질문도 서재희는 즉각 알아들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계속할 거야."
"그러다 죽으면? 다른 애들처럼."
"그럼 내가 걸어가던 방향으로 쓰러져 죽겠지."
정윤환에게 사랑이란, 거리마다 넘쳐 하수구로 흘러가는 유행가.
현실에선 유치하기 짝이 없는 대사를 잘도 날리는 드라마.
기념일을 외치며 좌판에 널린 싸구려 초콜릿.
가내소나 한다는 그 진부한 사랑 때문에, 내 결정이 이렇게 흔들릴 리가 없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어야만 한다. 반드시.
그런데도 내가 다 내려놓고 너한테 이렇게 빌고 있잖아.
내게 가장 불리한 방식으로 네게 고백하고 있어.
아무런 계산 없이.
너한테만은 솔직하고 싶어서.
-상황이 빤해. 대장 이기는 싸움만 하는 거 알지?
옳다고 생각하면 지는 싸움이라도 해야지.
그리움은 파도와 같아서 주기적으로 밀려왔다가 또 금세 쓸려 나갔다.
안타까워 젖은 마음이 햇볕에 바짝 마르기도 전에 먹먹히 다시 밀려오고,
또 쓸려 나가기를 반복했다.
그러니 마음 한쪽 구석, 눈물샘이 가까운 곳은 마를 새가 없었다.
어떻게 단 세 사람으로 세상이 뒤집어질 수 있겠니?
혁명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을 각오로 힘을 모아야 성공할 수 있어.
만일 예언이 말하는 그 세 사람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해도,
수많은 사람들의 대표가 될 뿐이지, 결코 그들이 특별한 건 아니야.
난 절대 너 형이라고 안 불러.
넌 내 마지막 남은 어린 시절이니까.
내가 행복했던 시절 네게 반말했으니 그거 하나라도 움켜잡고 싶어서.
네게 형이라고 부르는 순간 관계가 재정립되어 버릴까 봐.
넌 나한테 그런 존재야.
아아, 이 빌어먹을 사랑 같으니라고.
기꺼이 파멸의 길을 자처하는 이 완벽하게 깍아지른 절벽이라니.
사람을 한계까지 몰아넣는 이 강렬한 감정이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는 데 반박할 여지는 없었다.
우리는 압도적으로 이기거나, 지더라도 근소한 차이일 것이며,
어떤 식으로든 역사에 정의의 고유명사로 기록될테니 살아도 죽어도 명예로울 것을 약속드립니다.
수없이 널 피해 궤도를 돌고 싶었어.
그래서 널 외면하고. 때로는 짓밟고.
너로 이루어진 문장이 무너져 내 삶의 모든 페이지가 의미를 잃고.
널 삼키고 만들어진 가지가 마디마디 꺽여 내 잎이 마르고.
그리하여 널 잃은 것뿐이지만, 곧 내 전부가 훼손되고 말아.
출처: 낙원의 이론, 정선우
문제 시 수정
첫댓글 낙론 뽕찬다 재탕해야겠다
하 십알 정윤환.... 나도 재탕갈겨야지
헐 넘좋다 읽어봐야지
후 낙론 재탕할 시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