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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수필집담회(隨筆集談會) 토론 결과 알립니다.
1. 때 : 3월 13일(화) 오후 3시부터 5시 반까지
2. 곳 : 대구수필문예대학 강의실
3. 걸음 하신 분 : 수필집담회 회원 선생님(21명)
4. 토론 주제 : 수필비평론《나는 어떻게 비평을 하는가》
5. 주제 발표하신 패널 : 이운경 평론가
․ (전) 경일대학교, (현) 영남대학교 글쓰기 외래 교수
․ 수필집 《변방에 피는 꽃》 외 3종
․ 평론집 《비평으로 보는 수필》 외 1종
※ 박방희 문인협회 회장님께서 인사 겸 격려차 방문 예정이었습니다만, 다른 일정으로 황인동 수석부회장님이 참석하여 인사와 덕담을 나누었습니다.
‣ 수필비평론이란 주제가 회원들에게 좀 무겁고 낯설기도 할 것 같아 토론이 될까 걱정되었습니다. 그러나 난상토론이라 할 만큼 열기가 뜨거웠고, 시간 종료 후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겨서도 많은 의견 교환이 있었습니다.
‣ 패널의 주제 발표는 공지된 자료와 함께 별도 PDF 영상자료로 진행했습니다. 토론은 회원님들 공부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미리 패널에게 보낸 질문을 중심으로 질문과 패널의 답변이 있었고, 그 외에도 회원 상호 간 여러 질문과 답변으로 의견 교환이 활발했습니다.
‣ 비평 용어가 어렵고 이해가 잘 안 되어 질문을 주저하는 분위기도 있었습니다만 토론에 열중했습니다. 비평이론을 몰라도 글은 쓸 수가 있으나, 비평이론에 대한 식견을 가지면 독서와 창작에 더 도움이 된다는 인식을 공유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 이번 수필비평론에 대한 공부가 여러 수필가 선생님들께서도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져봅니다.
《사전 질문 중심 토론 내용》
질문 1) 수필비평 이론으로 수잔 손택의 글을 인용하여 ‘예술은 형식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수필에 적용하면 ‘수필도 형식을 갖추어야 수필이 된다.’가 됩니다. 수필에서 문학성을 따지기보다는 형식을 찾아라고 읽어집니다. 맞습니까?
답변) 수전 손택 (1933~ 2004) 에세이작가, 소설가, 예술평론가,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1966년에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과 세계에 대해 가하는 복수다.’라는 도발적 문제 제기를 담은 평론집 《해석에 반대한다》를 내놓아 주목을 끌었다. 서구미학의 전통을 이루던 내용과 형식의 구별,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별을 재기발랄하게 비판해 논란을 불러오기도 했다. 극작가, 영화감독, 연극연출가, 문화비평가, 사회운동가 등으로 새로운 문화의 스타일과 감수성의 도래를 예고했다.
예술작품은 현실 세계에 대해. 그리고 우리의 지식, 경험, 가치관에 대해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나 예술작품 고유의 특징은 개념적 지식을 창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에 완전히 사로잡히거나 매혹된 상태에서 우리가 어떤 흥분, 참여, 판단에 연루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있다. 예술은 유혹이지 강간이 아니다. (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문학은 형식이다. 형식 없이 어떤 감정이나 영혼도 담을 수 없다. (여기서 감정이나 영혼은 인간의 은유다) 창작은 자신의 고유형식을 찾아가는 행위다. ‘영혼’을 어떤 프레임에 앉힐 것인가, 라는 명제가 문학의 형식이다. 문학은, 인간은 끊임없이 형식을 만드는 존재이다. 어떤 대상과 만나는 순간 자기만의 스타일로 대상을 바라보고 해석한다. 그래서 형식과 영혼은 대치하고 싸운다.
예를 들면 시는 어조, 리듬, 시각, 이미지 등 여러 요소들이 어우러져 형식을 이룬다. 즉 문학이란 주체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를 어떻게 맺느냐 라는 질문 안에서 작가만의 개성적 형식을 창안한다. 그래서 형식은 지극히 개별적이다. (수전 손택은 형식보다 보다 포괄적 개념인 스타일로 표현했다. 스타일은 총체성이다. 작가의 의식과 무의식, 이성과 감각, 경험, 지식 등이 자연스럽고 조화로운 가운데 발현하는 것이다)
요컨대 수필의 문학성과 수필의 형식은 개념상으로 유사어로 볼 수 있다. 게시판에 올린 모든 글을 수필로 보지 않듯이, 수필의 형식은 곧 수필의 문학성이다.
수필의 ‘자유로운 형식’에 대한 견해 : 수필에서 말한 자유로운 형식이란 기존의 소설이나 시, 희극과는 다른 형식의 창안을 지칭하는 말이다. 1911년 게오르그 루카치는 〈영혼과 형식〉이라는 글에서 새로운 에세이 형식을 주장한다. 작품 저 깊숙한 곳, 작품 밖을 드나들면서 자외선처럼 작품을 비추는 ‘자유로운 형식의 에세이’를 주장한다(루카치가 말한 자외선이란 의미와 이미지 밖의 요소들을 찾아내어 조명하는 것을 일컫는다). 시와 소설의 형식과 다른 상대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질문 2) ‘감성보다 이성, 세부보다 구조에 강하다.’ 이 말은 이성(논리적으로)으로 수필의 구조를 밝힌다는 뜻으로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수필의 구조는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답변) 일반적으로 현대의 글쓰기는 ‘시작(서론) – 가운데(본론)- 끝(결론)’이라는 구조를 가진다. 혹은 ‘기- 승- 전- 결’의 서사구조를 가진 수필작품도 많다(정성화 수필). 산문의 본질을 생각해보면 작가가 어떤 대상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풀어쓴 글이다. 개성을 살리기 위해 구조를 변형하는 것이 작가의 스타일이고 작품의 특징이다. 분명한 것은 한 편의 글이 끝나기 전에 주제(메시지)를 담아내야 한다. 메시지가 분명하지 않은 글은 마무리가 덜 되거나 설익은 글이다.
질문 3) 작품을 정독하고 수맥(소재, 주제, 언술의 특징, 세계관 인간관 등)을 찾아야 한다. 라고 했습니다. 이 주장은 신비평 이론과 무척 닮아 보이는데 맞습니까?
답변) 문학비평이론을 살펴보면 ① 형식주의비평(신비평) ②구조주의 비평(언어체계에만 집중) ③마르크스주의 비평 ④문학사회학 비평 ⑤ 정신분석학 비평 등이 있다.
신비평이론은 문학 외적 요소보다 작품 자체의 형식적 요건을 분석 평가하는 방법이다. 문학 텍스트를 언어로 이루어진 통일된 유기체로 바라보고, 문학의 자율성을 중시한다. 특히 영미 신비평은 작가와 작품을 분리하여 ‘의도의 오류’라는 이론을 창안한다. 작품의 형식적 요소인 문체, 스타일, 양식, 운율 같은 언어와 수사학에 집중한다(작품 자세히 읽기). 그러나 형식 우위의 관점은 작품이 가지는 역사적 사회적 의미(컨텍스트)를 배제하고, 감정이나 정서에 냉담하다.
비평은 작품 자세히 읽기에서 출발한다. 한 작품씩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가만의 소재와 주제(가치관, 세계관)이 드러난다.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무언가를 찾아내려면 작품 내의 다양한 요소들을 분석해야 한다. (신비평이론) 그 다음 해석과 평가로 넘어간다. 나는 한 가지 이론을 적용하기보다 작품에 따라 다양한 포즈와 태도로 접근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기본은 작품에 대한 이해와 분석이므로 신비평이론을 중심에 두고 작품에 접근한다.
질문 4) 독자반응비평을 감상주의 비평으로 말했습니다. 맞습니까? 일반적으로 독자반응비평은 독자수용비평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독자의 감상주의 비평으로 연결하는 것은 잘못이 아닐까요?
답변) 문학이론의 틀 안에서 보자면 독자반응비평이란 말의 독자란 문학을 전공한 전문 비평가를 지칭하는 말이다. 일반 독자와는 구별하여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 일반 독자로 오인한다. 신비평에서 비평가의 목소리가 배제되니까 이런 이론이 나온 것이다. 번역상 독자반응비평, 독자감상비평으로 포괄적으로 쓰인다.
수필 평단에 나오는 독자반응비평을 살펴보면 거의 감상문 수준이다. 문학 이론에 대한 토대가 없거나 잘못 이해하고(포괄적 공부가 부족해서) 이론의 단면을 가져와 작품에 끼워 맞춘다. 그리고 논리가 빈약하다. 작품 내용만 뒤따르는 비평생산을 우려하는 이유가 수필의 진화를 가로막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질문 5) 수필의 장르적 특징으로 작가와 작품(체험이므로)을 분리할 수 없다. 그렇다면 형식을 따지는 것은 모순이 아닐까요? 왜냐면 예술론에서 형식론은 예술작품이 작품 바깥의 어떤 것과도 연결이 되어 있지 않고 오직 작품 자체의 구조와 형식만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답변) 수필 작품에서 반드시 작가의 체험만 들어가지 않는다. 작가의 상상이 얼마든지 작동한다(허구와 상상의 개념을 명확히 분리해서 이해해야 한다). 인간의 기억은 정확하지도 않고, 설사 기억이 정확하더라도 그대로 언어화되지 않는다. 기억은 언어화하는 순간 변질한다.
수필론에서 본다면 수필작품 속 소재는 작가의 체험이라고 독자들이 그렇게 믿는다. 이유는 수필이라는 장르적 개념을 그렇다고 학교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같은 소재로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하면 독자들은 허구라고 믿는다.
그러나 허구를 허용하는 소설에도 작가의 체험이 어떤 식으로든 투영되기 마련이다. 자전적 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발표되는 작품 예를 들면 대구의 소설가 엄창석의 《빨간 염소들의 거리》는 중앙중학교 미술반 시절 청소년기의 방황과 진통을 그린 작가의 체험이 대구의 지명과 함께 담겨있다. 이런 경우 작가의 체험이 깊게 투영된다. 마찬가지로 문학에서 장르란 세계의 혼란스러움을 정리하려는 인간의 의식적 몸짓이다. 만약 우리가 문학에서 형식 구분을 해놓지 않았다면 작가든 독자든 매우 혼란스러울 것이다.
문학이론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 보다 유연하게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술론도 마찬가지다. 예술에 대한 개념도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특히 현대예술은 장르 간 융합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사이버 영상 예술, 설치예술, 퍼포먼스 등 예술의 범위나 개념이 확장되고 있다. 작품 자체의 구조와 형식만을 주장하는 예술론은 고전주의 예술론이다. 지금은 이보다 훨씬 넓게 다양하게 예술이 확장되고 있지 않은가.
질문 6) 작가를 조명한다. 오늘의 예술론에서 가장 많이 거론하는 것이 ‘작가는 죽었다.’입니다. 작가의 조명은 지난 시대의 평이 아닐까요?
답변) 롤랑 바르트가 선언한 “작가는 죽었다”라는 말은 상징적 전언이다. 그의 저서 《저자의 죽음 The Death of the Author》(1968)은 문화 권력이 생산자(작가)에서 작품(텍스트)으로, 독자에게 이동한 것을 상징하는 말이다. 문학이론이 ‘생산미학 → 해석미학 → 수용미학’으로 변천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이런 변화의 배후에는 ① 문학 자체의 패러다임이 변화, ②매체 환경의 변화가 깔려 있다. (아힘 가이젠한스뤼케, 《문학이론 입문》)
저자는 텍스트에서 해독되어야 하는 의미의 근원이었다. 이전의 비평이 하는 일은 작품 저변에서 저자를 발견하는 일이었다. 롤랑 바르트의 이런 선언은 새로운 비평의 장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텍스트는 창조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텍스트의 인용들로 만들어진 조직체이다.” 오늘날 텍스트는 모든 문화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대화 패러디 논쟁의 상호관계 속에서 글쓰기가 이루어진다. 이 다양성의 중심이 이제는 저자가 아니라 독자라는 것이다.
문학 장르 가운데 저자가 가장 선명하게 부각되는 장르가 수필이다. 물론 비평은 작품에 조명을 비춘다. 그러나 작품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작품 뒤의 그림자(작가)를 상상하게 된다. “작품의 내용에 시비를 거는 순간 비평은 위험해진다”라는 나의 주장도 수필작품과 수필가를 동일체로 보는 수필계의 관행을 염두에 둔 말이다. 비평문에서 나는 수필가에 대한 평가를 하기보다 작품이 가지는 의미에 무게를 둔다. 작품의 특징이나 어떤 지점이 문학적인지, 이 작품이 수필의 확장에 얼마나 기여하는지 등을 살핀다.
질문 7) 수필비평의 빈곤을 토로 했습니다. 이 말은 여러 사람이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답변) 첫째, 수필이론의 빈곤이다. 수필론도 문학이라는 보편적 틀 안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둘째, 제대로 공부를 한 수필비평가가 드물다. 수필비평가를 기르고 배출하는 역할을 수필가협회나 수필잡지들이 해야한다.
셋째, 다양한 수필담론을 생산하는 이런 자리가 앞으로 많아져야 한다. 북적거리고 논쟁하고 소란스러운 가운데 무언가 나온다.
넷째,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학자들을 수필계로 끌어들이는 노력을 해야한다. 원고료의 현실화. 강의개설 등.
《여타 의견과 토론》-여러 의견 중 요지만 정리
1. 비평이 수필을 이끌어 나가지 못하는 것 같다(주례사비평 등의 이유로). 또한, 좋은 작품이 없어 비평이 없는 것도 같다. →패널 답) 아니다. 좋은 작품이 많다. 창작이 먼저고 비평은 그 후다. 평가에 대한 반발이 비평을 움츠리게 하는 원인도 된다.
2. 소설이나 시와 달리 수필은 작가와 작품을 구분하여 보아야 한다(개인의 체험이 바탕인 수필의 경우 작가의 인격을 해할 우려 등의 이유로)→ 회원 의견) 이것은 비평가의 비평태도에 따른 문제라고 본다. 과대 과소평가도 더 문제임. →패널 답) 작가와 작품을 구분한다. 참 조심스럽다.
3. 우리 수필과 에세이는 다르다는 의견 제시가 있었고, 차이에 대한 다른 의견도 제시되었음. 수필에 에세이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하는 것이 옳고, 둘 간의 간극을 좁혀져야 한다는 데 공감(수필은 더 무거워지고, 에세이는 더 가벼워질 필요가 있음). 일본에는 우리의 수필과 같은 장르가 없다는 의견이 있었고, 이에 다른 회원의 반론이 있었음. 일본에도 우리처럼 수필과 에세이를 놓고 비슷한 논의가 있다는 것으로 인식.
4. 비평이론이 어렵다. 비평을 위한 작품을 쓰는 건지, 작품을 위한 비평을 하는지 의문도 간다. 수필의 울타리를 너무 좁게 만들려 한다. 수필의 영역 확장이 필요하다. 잡문도 과감히 수용하고 우리에게 맞는 글, 다양성의 글쓰기로 넓혀야 한다. 비평에 맞추다 보니 글의 폭이 좁아진다는 의견이 제시되었고 여기에 공감하는 의견도 제시됨.
5. 수필에 가족 이야기를 주로 다루는 데 대해 비판적인 말을 듣는다. 가족을 이야기하되 다른 이야기에 포함하여 녹여내면 될 것으로 생각한다.
6. 비평은 수필작품집에 대한 비평과 개별 작품 비평이 있는데 비평하기가 어떤지? →패널 답) 개별 작품 한편의 비평은 어렵다. 작품집 단위의 비평을 해야 작품이 지향하는 세계관이나 가치관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작품집 비평은 퍼즐을 맞추는 일이다. 제대로 된 평은 작품집으로 해야 한다.
7. .(찻집 담론 중) 독자반응비평에서 독자란 문학을 전공한 전문 비평가를 지칭한다고 질문서에 답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텍스트를 대하는 일반 독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닌지? →패널 답) 전문 비평가를 지칭하는 것이 맞습니다. 많은 사람이 일반 독자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8..(찻집 담론 중) 우리 수필의 뿌리를 말하면서 왜 서양의 에세이를 거론하느냐. 서양의 에세이와 우리 수필은 탄생과 내용이 엄연히 다르므로, 에세이에서 뿌리를 찾는 것은 잘못이다. 대신에 우리의 고전수필에서 찾아야 한다. 고전에서 진서(眞書)라는 말은 경서에 관한 글을 일컫고, 그 외의 글은 모두 잡문(雜文)으로 취급했다. 그렇다면 우리 수필의 뿌리를 연구하는 데는 잡문을 다루어야 한다는 데 의견이 오갔다.
수필 장르는 시와 소설의 중간이지만, 소설에 더 가깝다. 왜냐면 문학을 운문과 산문으로 나눌 때 산문에는 수필과 소설이기 있다. 시보다 소설적 구조에 가깝다. 신비평 이론으로 비평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면 신비평은 시 비평에 적합한 이론이고, 서사구조 및 현실 반영이 중심인 소설의 비평에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수필 비평에도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이 있었다.
※ 세 번째 수필집담회는 4월 10일(화) 오후 3시에 엽니다. 초청 패널은 허상문 영남대 교수(영문학, 문학평론가)입니다. 발표 주제는 별도 알려드리겠습니다.
첫댓글 이런 좋은 모임이 있었네요.
축하할 일입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하 수필분과장님 수고가 많습니다다. 앞으로 계속될 집담회가 기대됩니다.
토론 중 오간 의견들을 다 정리하지 못해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