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도에 청태장사하는 김영운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청태를 한배 싣고 충청도 홍천이라는 곳에 장사를 갔다.
배를 항구에 대고 장사를 하려는데 관리가 나와 "과섭이다"하고 배를 압류해 버렸다.
그때 과섭이라는 것은 지금의 징발과 같은것으로 관리들이 급한일이 있을때 아무배나 붙잡고 타고가는 것을 말한다. 한번 과섭당한 배는 관리가 관섭을 풀어 줄때까지 배에서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과섭을 풀거나 그렇지 않으면 바람이 불거나 생활 필수품이 떨어져도 항구에 배를 접안하지 못하였다.
과섭은 당한 김영운은 객지라 아는 사람도 없고 아직 장사르 하지 않아 돈도 없으니 뇌물을 줄 수도 없는 딱한 형편 이었다. 궁하면 통한다 하였던가! 이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옛날에 고금도로 귀향 왔던 이도재 대감이 지금은 전라감사가 되어 전주에 있다는 것이 생각난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김영운은 뱃사람 하나를 불러 전주 감영으로 보냈다.
헌누더기 옷을 걸친 뱃사람이 감사를 뵙기 위해 선화당에 들어 갈려고 하니 문지기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 실랑이가 벌어졌다.
마침 그때 감사가 아침 산보를 하다가 이 관경을 보고 이상이 생각하여 그 자를 부러 들이라고 하였다. 감사 앞에 불려온자는 수건을 벗고 "대감님, 그동안 만수무강 하셨습니까?"
하면서 넙죽 큰 절을 하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대감이 고개를 들라 하여 자세히 보니 자기가 갑신정변때 개화당에 관련되어 고금도 대평리에서 8년동안 귀향살이 할 때 심부름을 해주었던 장서방이 아닌가.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론 놀랍기도 하여 자기 부인을 부르면서 고금도 장서방이 왔으니 어서 나오라고 했다. 고금도 장서방 소리에 뛰어나온 부인은 손을 잡고 대평리 사람들의 안부를 묻는 것이었다.
"그래 개똥이네 집도 잘 있고, 마당수네 집도 잘 있으냐?" 하면서 "밥을 차려 오너라", "술상을 가져오너라" 대접이 융숭한 것이다. 밥을 먹고 난 장서방은 감사께 자초지종을 고했다. 사연을 들은 감사는 즉시 하인을 시켜 그 관리를 잡아 오게 하여 벌을 내린후에 "앞으론 고금도 배는 과섭을 잡지 말라"는 영지를 써주었다.
이 일은 있은 후 고금도 배는 과섭을 당하지 않았는데 그 후 완도의 다른 배들도 관리들이 "거, 어디 배요"하면 " 고금도 배요"하여 과섭을 면했다는 전설적인 사실이 있다.
::::: 배진사의 천량복채 :::::
지금으로부터 약 2백년전에 배진사라는 사람이 농상리에 살고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영부리에서 태어났는데 머리가 명철하고 학문을 즐겼다. 성장하면서 뜻을 높이 세우고 공부를 하다 과거를 보기 위해서울로 올라갔다.
그런데 괴이하게도 서울의 어느 거리에서 유명한 점장이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점장이는 배청년을 붙잡고 기어이 점을 치라는 것이었다. 배청년이 말을 듣기 않자 점장이는 막무가내로 점을 치라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복채가 얼마냐고 했더니 자그마치 천량이라고 한다. 엄청난 복채를 놀라 거절하였더니 더욱 성화를 부린다. 사연인즉 당신데게는 지금 횡재운이 닥쳤는데 만약 그 기회를 놓치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니 천량복채를 아까와 말고 보고 가라는 것이다. 이말에 귀가 솔깃해진 배청년은 천량복채를 내고 잘 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점괘를 뽑아보니 서쪽에서 사람이 와서 집을 사라고 할 터이니 돈은 주라는데로 주고 사되 그집 부엌문 앞을 파 보면 해골이 나올것이니 정중하게 이장을 하라고 써져 있었다. 배청년은 즉시 귀향하였더니 서쪽인 농상리에 사는 어느 사람이 와서 집을 사라고 한다. 그는 점괘대로 값을 묻지 않고 그 집을 빚을 내가면서 사들였다.
그리고는 부엌문 앞을 파 보았다. 그랬더니 정말 해골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정중히 이장을 해 주었더니 그 후 하는 일마다 잘되어 천석들이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배진사는 다시 서울에 올라가서 진사에도 급제하였다. 고금에는 천석부자가 배진사 외에도 청학리에 이첨사, 회룡리의 이동지가 있었는데 오랫동안 부귀를 누리고 자손도 번성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 해남도 노적 :::::
충무공 수군8,000명을 이끌고 고금도에 설진하였는데 아군의 세력에 비해 왜군의 세가 너무 당당하였다. 이를 격파하려면 기발한 전략이 나와야 하기에 고심하다 마침 진 앞에 있는 해남도라는 섬을 이용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 섬의 둘레에 마름을 덮어 볏더미를 쌓은 것처럼 위장하고, 허수아비를 만들어 섬주의에 세워 등불을 켜고 이들이 노적을 지키고 있는 군사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조개껍질을 태워 석회를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바닷물에 띄워 군사들의 쌀을 씻는 뜨물이 내려간 것처럼 하여 멀리 나로도 근해까지 흘러 내리도록 했다. 그러므로 적군은 고금도 에 있는 군사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감히 접근을 못하였다.
그래서 적군은 그 노적을 불태우고 허수아비로 만든 군사들을 죽이려고 멀리서 조총과 활을 날렸다. 그러나 꼼짝도 아니하고 이튿날 아침 화살을 회수하면 몇십 아름씩 나왔다고 하니 날이 갈수록 적세를 약화시킨 충무공은 고금진에서 필승의 결의를 더욱 굳게 다짐할 수가 있었다.
바로 해남도 건너에는 옥녀봉이라는 산봉우리가 있는데 이 옥녀봉은 흡사 옥녀가 고금진에 있는 충무공에게 술잔을 들고 진상한 것처럼 보인다고 하며 충무공이 노량에서순국한 후 고금진에 운구하였을 때 옥녀가 통곡하며 기절한 화신의 봉우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 범 바위골 :::::
봉암산 정상에 큰 구멍이 뚫린 바위가 있다.
군외면 영풍리에서 바라보면 구멍이 훤히 보이며, 장항리에서 보아도 구멍이 훤히 보인다. 그런데 옛날에는 그 산정 주위의 나무가 자라서 바위 구멍이 막히면 고금면 처녀들이 바람나고, 나무를 베어 내어 영풍리에서 구멍이 보이면 영풍리 처녀들이 바람 났었다. 그래서 영풍리 주민들이 밤에 배로 건너 가 몰래 산정에 구멍을 돌로 막아 버렸다.
그후 고금면 처녀들이 바람이 많이 난 것이다. 그 연유를 뒤늦게 알게 뒤 늦게 알게 된 고금면 사람들이 올라가 막은 돌을 다시 치워 버렸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양 부락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국 두 부락에서 구멍이 보이는 부위에 나무를 심자는 합의를 하여 나무를 심었다. 그후 어느 쪽에서도 보이지 않자 처녀들이 바람나지 않았다고 한다.
::::: 염시등과 홀아비 :::::
이곳에 염시등이 한곳 있었는데 당시 천일염을 생산하는 장가 못간 노총각이 염시동에 공을 들여 처녀를 만나 백년해로를 하게 되었다 하여 장가 못간 노총각, 노처녀는 염시등에 나가 공을 드리면 배필을 구할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첫댓글 울 집안도 11대전 고금도로 유배온 집안인데...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