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어머니 생각
신사임당(申師任堂)
천 리 먼 고향 만 겹 산봉오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 오래도록 꿈속에 있네
한송정 가에는 외로운 달이 뜨고
경포대 앞에 한바탕 스치는 바람
바닷가 모래밭의 갈매기는 모였다가 흩어지고
파도치는 바닷가 고깃배는 분주히 오가지
어느 때나 임영로 다시 밟아
비단 색동옷 입고 부모님 곁에서 바느질해 볼까
思親(사친)
千里家山萬疊峰(천리가산만첩봉) 歸心長在夢魂中(귀심장재몽혼중)
寒松亭畔孤輪月(한송정반고륜월) 鏡浦臺前一陣風(경포대전일진풍)
沙上白鷗恒聚散(사상백구항취산) 波頭漁艇每西東(파두어정매서동)
何時重踏臨瀛路(하시중답임영로) 綵服班衣膝下縫(채복반의슬하봉)
[어휘풀이]
-寒松亭(한송정) : 강원도 강릉시 성내동에 있는 정자
-聚散(취산) : 모였다가 흩어짐
-臨瀛(임영) : 바닷가에 임한 곳. 강릉, 고려 때 함경남도와 강릉을 합쳐 임애명주(臨海溟洲)라 하였다.
-綵服班衣(채복반의) : 비단 색동옷. 綵(채) : 비단
[역사이야기]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 1504년 12월 5일 ~ 1551년 6월 20일)는 조선 시대 중기의 문인이자 유학자, 화가, 작가, 시인이다. 조선시대 중기의 성리학자 겸 정치인 율곡 이이, 화가 이매창의 어머니다.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본명은 신인선(申仁善)이라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사임당은 그의 당호(堂號)이다.
개요
외할아버지 이사온과, 기묘사화로 관직을 단념하고 향리에 은거한 아버지 신명화로부터 성리학을 교육받았으며, 아버지가 아들없이 죽자 경기도 파주의 시댁과 강원도 강릉의 친정집을 오가며 친정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어린 자녀들을 두고 일찍 병사하였지만 아들 이이는 대학자이자 정치인으로, 딸 이매창과 아들 이우 등은 문인 화가로 명성을 날렸다. 동시대의 여성인 문정왕후, 정난정, 황진이 등과 비교된다.
그림, 서예, 시 재주가 탁월하였고, 성리학적 소양도 있었으며, 십자수와 옷감 제작에도 능했다. 성리학적 지식과 도학, 문장, 고전, 역사 지식 등에 해박하였다. 태교에서부터 정성을 기울여 아들 주나라 주 문왕을 얻은 현숙한 부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의미에서 사임(師任)으로 아호를 정하였다. 후대에서 여성임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별채를 의미하는 당(堂)을 붙여 부르기 시작하였다. 별호는 인임당(姻姙堂) 또는 임사제(姙師齊)이다.
2007년 한국 여성계의 반대와 집단 반발에도 불구하고 정부에 의해 50000원 지폐의 주인공으로 전격 도안되었다.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은 그의 9촌 조카였고, 대한민국의 정치인 해공 신익희는 14대 방손이 된다.
생애
강릉 오죽헌
강원도 강릉부 죽헌리 북평촌(北坪村) 태생으로 외가이자 그의 생가 오죽헌은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1] 사임당의 형제에는 아들은 하나도 없고 딸만 다섯이었는데, 사임당은 그 중에서 둘째 딸이었다. 아버지는 신명화(申命和)라는 이름의 선비였고, 어머니는 용인 이씨 집안의 선비인 이사온의 딸이었다. 스스로 사임당(師任堂)이라는 호를 지었는데, 주나라의 기틀을 닦은 문왕[2]의 어머니 태임(太任)에서 따왔다고 전한다.
그의 조상은 고려의 개국공신이자 왕건 대신 전사한 신숭겸의 먼 후손으로, 고조부는 문희공(文僖公) 신개였다. 고조부 신개는 세종대왕 시절 예문관 대제학, 대사헌, 도총제 등등을 지냈고, 나중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까지 오른 인물이다. 할아버지 신숙권은 영월군수를 지냈다.[3] 그러나 친정아버지 신명화는 진사에 그쳤다. 아버지 신명화는 몇 차례 과거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다가, 1516년(중종 11년) 한양에서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 41세였다.[4] 당시 조광조가 등용되어 급진적 개혁 정치를 실시하면서 신명화와 그의 사촌동생 신명인 등도 이들 신진 사류와 상당한 교류를 하였고, 동생 신명인은 그 중요한 멤버가 되었다. 1519년(중종 4년) 기묘사화가 일어났던 그날 신명인은 대전 뜰에 엎드려 울부짖으며 중종에게 간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때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도 친구 유생들 틈에 같이 있다가 붙잡혀 나흘 동안이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 뒤 신명화는 관직을 단념하고 처가가 있는 강릉으로 내려와 이사온 내외를 모셨다.
사임당은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뛰어났고, 다른 자매들보다도 일찍 글을 깨우쳤다고 한다. 아버지 신명화는 딸들에게도 성리학과 글씨,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쳤다. 딸들 중에서도 그의 재능을 높이 본 아버지 신명화는 특히 그를 각별히 아꼈다.
친정어머니 이씨는 죽은 부모에게 효행을 다하고 죽은 남편에게 정절을 지켰다 하여, 1528년(중종 23년) 나라로부터 열녀로 표창을 받았다.[5] 따라서 고향인 강릉에는 그 공적을 기리는 기념각이 세워지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5]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사대부가의 여성들 역시 재혼이 되거나 불륜행각을 벌이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일찍 과부가 되어 홀로 5녀를 키운 어머니 이씨에 대한 존경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또, 그가 일찍 죽은 뒤에도 오래 살아 외손자인 율곡 이이의 지지자이자 방황하는 외손자를 다잡아주기도 했다.
출처 : 한시와 함께하는 우리나라 역사 『노을빛 치마에 쓴 시』
지은이 : 고승주. 펴낸 곳 : 도서출판 책과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