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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8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
마르코 12,28ㄱㄷ-34
참사랑의 원리
영원한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저는 사랑만이 영원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가장 큰 행복은 무엇일까요? 저는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이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사랑이 비극으로 끝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스스로 사랑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데서 기인합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마가렛 미첼의 1936년 소설을 바탕으로 한 1939년 미국의 서사적 역사 로맨스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남부의 미인 스칼렛 오하라의 삶과 남북 전쟁 중과 이후의 격동적인 사랑의 삶을 중심으로 합니다.
스칼렛은 아일랜드 이민자 농장 소유주의 딸입니다.
그녀는 강인하고 계산적이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은 가져야만 식성이 풀립니다.
그녀는 고상하고 지적인 이웃 애슐리 윌크스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녀는 애슐리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그는 그녀를 거부하고 그의 사촌 멜라니 해밀턴과 결혼할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사업가 레트 버틀러가 그 대화를 우연히 듣다가 스칼렛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지만, 스칼렛은 레트를 기분 나쁘게 생각합니다.
상심한 스칼렛은 멜라니의 오빠 찰스의 청혼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레트는 남북 전쟁에 참여해 사망합니다.
스칼렛은 그리 슬프지 않았지만, 슬픈 척을 해야 했습니다.
스칼렛은 끊임없이 멜라니의 남편 애슐리가 전쟁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구애해 봅니다.
그러나 애슐리에겐 멜라니뿐입니다.
멜라니는 사촌 스칼렛의 마음을 알지만, 타고난 침착함으로 스칼렛과 잘 지냅니다.
스칼렛은 이제 망해버린 집안을 다시 살려야 합니다.
그래서 목재상을 하는 부유한 프랭크 케네디와 혼인을 합니다.
이것 역시 사랑이 없는 결혼이었고 남편도 사고로 사망합니다.
이때 스칼렛은 남편의 죽음보다는 애슐리의 부상에 더 마음 아파합니다.
스칼렛의 결단력과 힘을 좋아한 버틀러는 드디어 세 번째 남편이 됩니다.
그리고 버틀러 덕분으로 보니라는 귀여운 딸도 낳습니다.
하지만 스칼렛은 여전히 애슐리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버틀러는 잠자리도 거부하는 스칼렛 대신 딸을 보며 위안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보니도 말을 타다 목숨을 잃습니다.
그런데 멜라니가 병으로 죽어가자 스칼렛은 멜라니도 자신에게 큰 존재였음을 깨닫습니다.
또 멜라니의 죽음을 슬퍼하며 여전히 자신에게는 관심 없는 애슐리를 봅니다.
그녀는 자신이 결국 애슐리를 차지할 줄 알았지만, 결국 사랑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해준 사람은 버틀러뿐이었음을 깨닫고 그를 붙들려 하지만, 버틀러는 마지막 희망이었던 보니도 없는 그 집에 살지 않겠다며 스칼렛을 떠납니다.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사랑이 바람과 함께 사라진 것입니다.
사랑을 자신의 힘만으로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에서 이런 모든 비극이 시작됩니다.
내가 하는 사랑은 소유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삼위일체여야 합니다.
사랑의 행위는 분명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행위가 나를 기쁘게 하는 행위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상대를 자기 행복을 위해 이용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나의 본성은 뱀이기 때문입니다.
모기는 존재 자체가 본성적으로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스칼렛에게 뱀은 애슐리에게 집착하도록 하였습니다.
남는 것은 뱀과 공허뿐입니다.
사랑은 삼위일체여야 합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신 이유는 삼위일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으셔서 인간을 사랑할 수 있으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 자신을 위해 사랑하셔야 했을 텐데 그러면 사랑이 이기주의가 됩니다.
사랑은 삼위일체입니다.
그래야 자아의 본성적인 소유의 사랑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사랑할 때 나를 사랑해주신 분을 기쁘게 해드린다는 마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진짜 사랑입니다.
그렇게 해야 나를 기쁘게 하는 이기적인 거짓 사랑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왜 성체를 영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됩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사랑해야 하는 계명은 어느 종교에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계명과 함께 생명을 주시며 우리를 사랑한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여 생명이 담긴 양식을 줍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먼저 우리를 사랑해주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첫째 계명입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한 행동을 합니다.
이것이 다른 종교와의 차이입니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나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으신 하느님을 먼저 사랑합시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할 때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사랑합시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뿐입니다.
나는 그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 생명에 참여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의 목적이 저절로 이기적으로 되기 때문에 모기처럼 됩니다. 사랑만이 영원합니다.
내가 그 사랑이 되는 길은 사랑을 사랑하는 길뿐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8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
마르코 12,28ㄱㄷ-34
하느님과의 첫사랑!
사랑에 관해서 하느님은 참으로 요구가 많으시고, 절대 양보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십니다.
인생 모든 것을 걸고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존 포웰 신부님께서는 당신이 체험한 하느님과의 첫사랑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분의 손길이 내게 와 닿았다.”
신부님은 그 특별한 체험 이후 자신의 삶이 180도 달라지게 되었답니다.
“완전히 새롭게 아름다운 세계가 시야에 들어왔고, 이렇게 새로운 눈을 뜨고 보니 그 전에 중요하게 여겨지던 모든 것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강렬한 하느님 사랑의 손길을 체험한 그 이후, 더 이상 하느님을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랑과의 접촉 이후 더 이상 이웃을 미워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감미로운 체험 이후 봉헌 생활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 두 가지를 소개하고 계십니다.
그 둘은 구약 모든 율법의 종합이요 요약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 두 가지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평생 노력해야 할 과제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하느님 사랑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바탕으로 제대로 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을 제대로 만나게 될 때 우리는 놀라운 신비체험을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경쟁의식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끝도 없는 성공을 위한 갈망, 나자신에 대한 과도한 기대, 이웃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접하게 될 때 우리 마음 안에 길고도 혹독했던 겨울이 지나갈 것입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따뜻하고 화사한 봄날이 찾아들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 살게 될 때 새 안경을 처음 쓰는 기분일 것입니다.
그간 보이지 않았던 하느님 자비의 흔적을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간 전혀 감을 잡지 못했던 하느님 사랑의 얼굴을 바로 눈앞에서 뵙듯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의 손길이 우리 삶을 훑고 지나가는 순간, 우리는 새사람이 될 것입니다.
어제의 나를 훌훌 털어버리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순간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매 순간 흠뻑 받고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은총이 오늘 우리에게 펼쳐지기를 기대하며, 이 하루를 기쁘게 살아내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9주간 목요일>
(2023. 6. 8. 목)(마르 12,28ㄱㄷ-34)
<가장 큰 계명>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이 말씀은, 신앙생활의 ‘근본정신’은 사랑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라는 말씀은, 우리를 만드시고, 사랑하시고, 보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신 하느님 한 분뿐이라는 뜻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내주시면서 너를 사랑하신다.
그러니 너도 너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랑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기도 하지만,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섬기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바오로 사도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설명합니다(로마 13,10).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은 ‘신앙생활의 완성’이라는 뜻입니다.
또 ‘신앙생활의 완성’이라는 말은 ‘구원의 완성’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알려 주려고 오셨습니다(요한 17,23).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고, 믿고, 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할 때 신앙생활이 완성되고, 우리의 구원이 완성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1-3).”
이 말은, ‘사랑이 없으면’ 믿음은 믿음이 아니고,
기적은 기적이 아니고, 희생도 희생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위선이고 가짜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 소용이 없다, 라는 말은,
사랑 없이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겉으로만 믿고 희생하는 위선과 교만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11).”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19-20).”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 안에서 완성됩니다.>
“그러자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 12,32-33)”
여기서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라는 말은, ‘하느님만’ 믿고, 섬기고, 사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늘에도 땅에도 이른바 신들이 있다 하지만
― 과연 신도 많고 주님도 많습니다만 ―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5-6).”
우상을 숭배하고 미신을 믿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고, 하느님만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 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바치는 것보다 사랑이 먼저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바치려면 ‘사랑으로’ 바쳐야 한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사랑 없이 바치는 것은 바치는 것이 아니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카인과 아벨의 제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창세 4,3-4ㄱ).”
아벨은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즉 ‘가장 좋은 것’을 바쳤는데, 그것은 ‘사랑으로’, 또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쳤음을 뜻합니다.
카인은 가장 좋은 것이 아니라 그냥 소출 가운데 일부를, 사랑도, 감사하는 마음도 없이, 형식적으로, 또 억지로 바쳤을 것입니다.
바치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마음으로 어떻게 바치는가? 그 마음이 중요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