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버즈
/김인숙
현관문을 열었다. 커다란 택배 상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의 제자 이름이 눈 안으로 들어왔다. 초임지에서 만나 '법 없어도 사는 애제자'라고 남편은 귀가 닳도록 자랑했다. 옥수수가 담긴 상자는 내가 들기에는 엄청 버거웠다. 얼추 반 접은 되는 것 같았다
남편의 첫 발령지는 문경에서도 더 산골짜기인 당포초등학교였다.
하늘 아래 첫 동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보이는 것이라고는 하늘과 땅. 밭뙈기 몇 평으로 온 가족이 연명하는 첩첩산중에 발을 디덨다. 주민들은 가난을 대물림하기 싫어 자식만은 서울로 보내야 한다는 꿈을 안고 땀범벅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선생님요, 우리 아이 말 안 들으면 두들겨 패도 원망 안 합니더. 사는 길은 공부밖에 없심더." 학부모들과 첫 담화의 한마디였다.
자신도 가난에 찌들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9남매 중 여섯 번째로 태어나 내 밥그릇 찾기조차 힘들었던 그 시절.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나시고, 홀로 남으신 어머니는 구멍가게 하나로 버티기엔 허리가 휘청거렸다. 등록금을 납부하지 않아 교무실 앞에서 꾸중 듣던 일, 구겨진 자존심이 미울 만큼 현실이 싫었던 그때. 버스비 몇 푼을 벌려고 연탄을 배달했던 학창 시절이 있었다. 가난이 뿌린 아리고 저린 고초를 잘 알기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아이들만은 이 궁필에서 벗어나게 해야 돼.' 끓는 젊음의 피가 심장을 두드렸다. 배움에서 길을 찾자고ᆢ.
이런 제자가 또 있을까?
가르친지 50여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한결같이 선물을 보낸다. 제자는 평창에서 농사도 지으면서 펜션 사업을 한다. 작년에 한갑을 지났는데 청년 못지않게 열정이 뜨겁다. 몇 년 전에 시댁 친지들이랑 그 펜션에서 하루를 묵고 도랑물에서 미꾸라지도 잡은 기억이 있다 옥수수 껍질을 벗겼다. 노란 속살을 드러내기 부끄러웠나? 한 겹.또 한 겹. 여섯 겹을 벗기니 탱글탱글한 알몸이 쪼르르 나란히 섰다. 알알이 익은 열매 하나하나에서 제자의 땀방울이 스며 있었다. 알곡을 만드는 광합성 에너지가 신비롭다. 노래가 절로 홀러나왔다.
"우리 아기 불~고 노는 하모니카는 옥수수를 가지고서 만들었어요." 빙긋이 미소가 따라왔다. 가마솥 폭염과 코로나19의 철통같은 방역 후유증으로 이웃 간의 거리 두기는 짙어져 가는데ᆢ . 사제지간의 끈끈한 인연은 이어오기 힘든 세월이 되었다. 무엇이 이 관계의 끈을 맺고 있는지? 그것도 반세기가 지나기까지. 우린 피를 나눈 혈연도 아니요. 생명을 던졌던 전우도 아닌, 잠시 스쳐 지나간 '관계의 연'이 여기까지 왔을까? 그는 해마다 선물을 보낸다. 고구마, 감자, 옥수수, 땅콩 .. 또 어털 땐 패션 1호 같은 멋진 남방을 서너 벌씩 보내는 뜨거운 가슴은 어디서 오는걸까?
궁금증이 풀리지 않아 그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옥수수 잘 받았어요. 어째 한결같은 정성을 보내시나요?
"부끄럽심더. 우리 선생님 별명이 뭔지 아니껴? '미스터 버즈(buzz)'라고 했니더. 저는 몹시 소심했어요. 선생님을 만나고부터 자신감을 얻었다 아닙니까? 전 못 잊심더."
버즈란 '윙윙' 또는 '와글와글' 소리 내며 토의에 참여하는 소집단 학습이다. 칠판만 바라보는 일제 학습에서 원탁으로 앉아 문제를 탐색. 해결 하는 문제 해결 학습이 흥미진진했단다. 문제를 생활에서 찾는 경험 중심 학습이 솔깃했다는 이야기. '우리 고장 당포가 왜 이렇게 발전이 늦은 가?의 문제를 가지고 토의를 했을 때 학생들의 상상력은 무궁무진했단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문제점을 향토 안으로 삼아 지역 발전을 교재로 이끌어 왔다는 경이로움. 말을 더듬던 아이들이 변호사가 되고 꼴 먹이 던 아이들이 사업가가 되었다고. 동창회 때는 꼭 선생님을 모신다는 얘기까지.
'선생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데 '욱'하는 성질을 어찌 이겨냈을까? 청춘을 반납하고 목청이 터져라 가르쳤던 땀방울이 '관계의 접착제(?)' 였단 말인가? '땀'은 정직했다. 긴 세월이 흘러도, 가르치지 않아도, '정情'이라는 끈으로 우릴 하나로 엮고 있었다. '땀은 주인을 배반하지 않아.'
큰 솥에 물을 넉넉히 붓고, 소금과 당원으로 간을 맞춘 후 옥수수를 가득 삶았다. 구수한 냄새가 창살을 넘어 아파트 베란다까지 빠져나갔다. 탁구를 치러 가는 남편의 가방에 옥수수를 잔뜩 넣고, 친구들끼리 나눠 먹으라고 일렀다. 눈썹까지 희끗해진 시간의 무게에도 신명은 여전했다. 입꼬리가 귀밑까지 걸렸다.
다시 경비실을 노크했다. 경비 아저씨가 코를 벌름거리며 입을 쩝쩝 다셨다 "흠, 흠, 무슨 냄새죠? 뭐가 이리 구수해요?'' ''제자가 준 옥수수 삶는 냄새죠." '제자'라는 말에 강한 악센트를 넣는 내 의도를 알았는지 조금 놀라는 듯한 표정을 읽었다. 따끈하고 쫀득쫀득한 옥수수를 경비 아저찌께 전했다 "와아~ 끝내줘요잉~ 간이 딱 맞아요" 경비 아저씨는 다른 초소에 있는 경비원을 불러오디니 옥수수 하나씩을 나누어주면서 먹어보라고 권했다 창살 너머로 흠쳐보는 내 눈길이 왜 이리도 짜릿할까? 아저씨들 세 분이 옥수수 하모니카를 불기 시작했다
구경만 하던 매미가 목청이 터져라 울어댔다 왜 너희들끼리만 먹냐고? "매에~에에엥 매에에~잉--" 여름 한나절 타는 태양이 관객이 되고, 피어오른 뭉게구름을 배경으로 옥수수 하모니카 합주단이 발대식을 했다. 우리 아파트 11동 5초소에 '즉석 심포니'가 열렸다.
김인숙
한국산문문학상수상 수필동인지 r목성들의 글자리. 참여 isk-0917@hanmail.net
아들, 며느리, 손녀와 고향에 갈 예정이다. '체험학습의 장'으로 마련된 친정이 촌캉스를 선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