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17일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나에게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마태오
12,1-8)
I
desire mercy,
not sacrifice,
말씀의 초대
파라오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내보내려 하지 않는다. 아홉 가지 재앙을 겪고도 파라오가 고집을 꺾지 않으므로, 하느님께서는 모든 맏아들을 죽게 하시는 마지막 재앙으로
이집트를 치신다. 그러나 어린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인들의 집은 그 재앙을 겪지 않는다. 파스카 어린양은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표지가
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계명에 대하여 가르치신다. 율법의 규정을 어겼다고 다른 사람을 단죄할 것이 아니라, 계명이지만 우리 인간의
이정표 역할을 하는 율법의 참된 정신을 살아야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멍에는 유다교에서 가르침, 특히 하느님의 계명에 담겨
있는 가르침을 나타내는 표상입니다. 소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방향을 잡아 주는 역할을 멍에가 하기 때문이지요. 현대적인 의미에서 말씀드린다면,
운전할 때의 차선이나 전철이 주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레일을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고생스럽게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그 예가 나옵니다. 안식일에는 추수를 하면
안 되는데, 밀밭을 지나가다 밀 이삭을 뜯어 먹는 행위가 추수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추수를 금하는 계명의 의미나 목적과는 거리가 먼
주장이지요. 이런 규정들이 사람들을 얽어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들이 이천 년 전 유다인들에게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요.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금요일에 단식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목요일에 남은
음식을 모조리 버렸다고 가정해 봅시다. 집 안에 어떠한 음식도 없었기 때문에 단식이라는 규정은 잘 지킬 수 있었는지 몰라도, 단식의 의미는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멍에, 곧
예수님의 가르침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도록 우리를 훈계합니다. 자동차가 차선을 벗어나거나 전철이 레일을
벗어나면 결코 제대로 달릴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잘 맞는 편한 멍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일러 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오늘도 기쁘게 살아가기를 기원합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정말로 뜻밖에 학생회장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요. 왜냐하면 저는 그 당시에 남들 앞에 서면 말을 조금 심하게
더듬었거든요. 그러다보니 남들 앞에 서는 것 자체가 저한테는 커다란 고통이었습니다. 말을 더듬는 모습이 결코 좋게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큰 긴장과 함께 울렁증 그리고 심한 떨림이 동반되었습니다. 이런 제가 학생들을 대표하는 학생회장에 턱 하고 당선되었으니 어떠했을까요? 1년의
시간이 정말로 힘들었습니다. 엄청나게 떨기만 하는 초라한 제 모습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떠올리면 그 자체로 악몽이었고 끔찍하기만
했습니다.
이제 4학년을
마치고 저희 교구의 사정상 대학원을 수원신학교에서 다녀야만 했지요. 그리고 대학원 2학년 때에 논문 자료를 찾기 위해서 서울신학교 도서관을
찾아갔다가 우연히 후배신학생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후배들은 제가 말을 더듬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울렁증이
심해서 얼굴이 벌겋게 변하면서 벌벌 떨었던 사실도 몰랐습니다. 그저 기억하는 것은 제가 학생회장이었다는 사실 하나만 기억하고 있더군요. 그때
저의 단점들이 남의 관심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저 충실히 지금을 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 저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미사를 하고, 또 강의를 합니다. 그때처럼 떨지는 않지만, 여전히 약간의 말더듬은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제가 말을 더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제가 진심으로 다가가고 성실하게 준비를 한다면, 그
자체로 만족하고 박수를 쳐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행동 과학자 폴
돌런은 “행복은 막연히 추구하는 대상이 아니라, 행동의 변화로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크게 공감을 하게 되는 말입니다. 저는 말을
더듬지 않는다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지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변화를 통해서 행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제자들이 안식일 법을 어겼다면서 항의를 합니다. 그들은 율법이라는 과거의 유산을 통해서만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과 함께 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별로 중요하다고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행복은 막연히
추구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폴 돌런의 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 당장 실천하는 주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내
행동의 변화들을 통해서 참 행복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일도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 알의 과일, 한 송이 꽃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 나무 열매조차 금방 맺히지 않는데, 하물며 인생의 열매를 노력도 하지
않고 조급하게 기다리는 것은 잘못이다(에픽테토스).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
몇 달 전에 신문
기사를 통해 한 보디빌더에 대한 내용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을 그대로 옮겨 봅니다.
58세의 나이에
보디빌딩을 전문적으로 시작한 보디빌더 오영(코치아카데미) 선수는 선수생활 2년차에 최고령 국가대표라는 그녀의 꿈을 이루고 말았다.
4월 19일
논산문예회관에서 열린 고교·대학·미즈 보디빌딩 대회 및 아시아국가대표선발전에서 +52kg급 국가대표에 도전하여 쟁쟁한 젊은 선수들을 제치고
당당히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작년 미스터&미즈 서울 +52kg 2위, YMCA전국보디빌딩대회 +52kg 1위를 차지하면서 가능성을
보여준 오영 선수는 당당히 자신과의 약속을 이행해냈다.
오영 선수는
결혼하고 아이 키우는 거, 살림하는 거 빼고는 열심히 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여성 선수의 사진을 보면서 비슷하게라도 몸을 만들고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이 운동을 전문적으로 시작하였고 스승(하용인 선수)을 만나 시합까지 준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운동만큼
정직한 운동이 없다'는 그녀는 자신이 땀 흘린 만큼 먹는 만큼 몸이 말을 해주더라고 말했다. 덕분에 현재 자신의 모친, 남편, 딸 또한 오영
선수의 변화를 보고 이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최고령 국가대표
보디빌더이자 60세가 넘는 최초의 보디빌더가 될 예정인 오영 선수의 선전을 기대해 본다.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결국 국가대표까지 된 한 보디빌더의 모습에서, 스스로 할 수 없다면서 포기했던 모습들을 반성하게 됩니다.
주님의 일에
대해서도 이러했던 것은 아닐까요? 할 수 없는 이유들을 찾으면서 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 흘리는 땀의 양에 따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욱 더 커짐을 기억하면서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 오신
예수님
-이기정신부-
사람들은 하늘나라를
만들지 않았으며 하늘나라의 규정도 정할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 규정을 사람들이 마음대로 정해서 지키도록 한다면 잘못된 겁니다. 하늘나라에 가고
안 가고를 사람이 결정하는 능력도 자격도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주일에
쉬라는 말을 밥도 해 먹지 말라는 걸로 정한 건 잘못입니다. 하늘나라의 사항을 사람이 자유해석 해 종교법이라 정했다면 잘못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하느님의 말씀)님이 직접 오셨다는 걸 신앙인들은 믿는 거지요.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마태오 12,1~2)”
-조재형신부-
존경하는 선배
신부님께서 주교님이 되셨습니다.
저는 주교님과
22년 전에 본당신부와
보좌신부로 함께 지냈습니다.
함께 산보를
다녔고,
주교님께서는 성당
마당에서 묵주기도를 자주하셨습니다.
수도자들을 존중해
주셨고,
함께 사목을
하셨습니다.
본당의 모든 일들을
원만하게 처리하셨습니다.
이것은 제가 직접
보고 겪은 일이기 때문에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2년 전 교구청에
들어와서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솔선수범’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막힘이
없고,
걱정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도가에서는
‘上善若水’라고
합니다.
지극히 선한 것은
마치 물과 같다고 이야기 합니다.
물은 자신을
내주면서 만물을 이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근원이
되고,
더러운 것을
정화시킵니다.
물은 다투지
않습니다.
산이 있으면
돌아가고,
바위가 있으면
나누어 가고,
웅덩이가 있으면
채우고 갑니다.
물은 겸손함을 보여
줍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은 넓고 깊은 바다에 이르게 됩니다.
다시금 교구에
좋으신 주교님을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교님께서
상선약수와 같은 사목을 하시리라 믿으며,
영육간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를 드립니다.
며칠 전에 형님이
하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형만한 아우가
없다.’는 말처럼
청년들에게 유익한 강의를 해 주었습니다.
저도 가끔은 강의를
하지만 형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새롭게 느낀 것이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이 직접 체험한
이야기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
2시간 일찍 출근해서
책을 읽었고,
1년에
300권을 읽었다고
합니다.
10년이 넘었으니
3000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형님은 책속에서
답을 찾았고,
책속에서 희망을
보았고,
책속에서 인생의
후반전을 위한 양식을 구했다고 합니다.
저도 책을 가까이
하는 편이지만 형님만큼 읽지는 못하는 편입니다.
그날 형님은 인생을
효과적으로 살 수 있는 다섯 가지 방법을 제시해주었습니다.
이것은 참된 신앙의
길을 가는 과정과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첫째는
‘변화’라고
하였습니다.
다윈은 진화의
과정에서 살아남은 종은 바뀐 환경에 변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강한 것이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변화한 것이
살아남은 것입니다.
변화는 신앙의
언어로 표현하면 ‘회개’입니다.
회개는 내 마음의
채널을 하느님을 향해서 돌려놓은 것입니다.
둘째는
‘독서’라고
하였습니다.
한권의 책은 대략
30년의 지혜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100권의 책을 읽는다면
3000년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변할
수 있고,
변하는 사람은 거친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독서’는 신앙의 언어로
이야기 하면 바로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나침판과 같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강점’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강점이 있습니다.
자신의 강점을
알고,
그것을 키워가는
사람은 인생의 경쟁에서 앞설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잘 할 수 있는 재능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강점을
안다면 이미 절반은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언어로
이야기 한다면 ‘은사’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은사,
예언하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선교하는
은사,
들어 주는 은사가
있습니다.
자신이 받은 은사를
알면 더욱 알차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는
‘습관’입니다.
형님은 매일
2시간씩 책을 읽는
습관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습관을
만드는 것 같지만 결국은 습관이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습관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매일 꾸준한 노력이
있어야 비로소 습관이 됩니다.
이것을 신앙의
언어로 이야기 한다면 ‘기도’입니다.
매일 기도하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다섯째는
‘목표’입니다.
세상은 목표를 알고
가는 사람이 성공하기 마련입니다.
미국의
하버드대학교의 경영학과를 졸업한 학생들을 조사하였다고 합니다.
목표를 정한
졸업생이 목표가 없는 졸업생들보다 소득이 10배 이상 높았다고
합니다.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실천한
졸업생이 목표가 없는 졸업생들보다 소득이 100배 이상 높았다고
합니다.
가야할 곳을 알고
길을 떠나는 사람은 발걸음이 힘차고 가볍기 마련입니다.
신앙의 언어로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나라’입니다.
약속의 땅은
모세처럼 10가 기적을
일으켜야만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공은 꼭 좋은
가문에 태어나야만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회개할 수
있다면,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내게 주어진
가능성을 나의 것으로 바꿀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이루어주시는 하느님께 맡겨 드릴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 이미 하느님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다
-반영억신부-
가끔은 많은 것을
아는 척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면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무안을 주면 다음부터는 좀 겸손해 질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마음의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고 넘어갑니다. 그야말로 시쳇말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그를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이삭을 뜯어 먹은 행위에 대해서 못마땅해 하였습니다. 당시 안식일 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해서는 안 되는 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 항의하자 “성전 보다 더 큰이가 여기에 있다” 하시고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이시고 안식일의 주체이십니다. 그러니까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밀이삭을 잘랐다는
것은 안식일에 추수를 하지 말라는 규정을 어긴 것이고 손으로 비벼서 먹었다면 타작하지 말라는 조항에 어긋납니다. 그리고 손으로 비벼서 후후 불어
껍질을 털어냈다면 키질을 하지 말라는 법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편지를 뜯는 것도 불을 지피는 행위도 금지사항입니다. 닭이 안식일에 알을
낳았다면 그 역시 먹을 수 없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렇게 철저히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한 법이 오히려 올가미가 되고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유다인이
살고 있는 이웃에 계신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문을 두드려서 나갔더니 자기 집의 가스 불을 꺼 달라고 부탁을 하더랍니다. 가스 불! 자기가 끄면
되지 그런 부탁을 하러 오나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안식일이 되기 전 불을 켰는데 끄기도 전에 안식일이 온 것입니다. 불을 지피는 일을 금지하고
있으니 안식일이 다 가기까지 켜 놓을 수도 없고……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부탁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겉모양에 묶여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당신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법조문을 지키기에 앞서 법의 의미와 내용을 살리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이웃에게 자선을 베푼 다음 의식상의 규정을 준수하라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알맹이 보다는 껍데기에 충실해서 야단을 맞았다면 오늘
우리는 알맹이를 빌미 삼아 규정을 무시하고 소홀히 하여 꾸중을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주님의 날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찾기
보다는 내 취미와 즐기는 일을 더 우선시 하고 기도와 미사는 뒤로 미루고 있으니 말입니다.
주님의 날은 주님과
함께 쉬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면 거룩함이 넘쳐나게 되고 이웃도 우리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 앞에서도 폼 잡지 말고!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사랑의
기적
-파스카
축제-
-이수철신부-
모든
기적은 하느님의 기적이고 그 기적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동기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 기적이라 함이 맞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하여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작금의 시대입니다.
기적중의
기적이 파스카 축제의 기적이요, 모든 사랑의 기적의 중심에는 파스카의 주님이 계십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현실이 참으로 엄중하고 긴박합니다.
어느때보다
기도가 절실한 시대입니다.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의 인터뷰 기사내용에 공감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이후
120년간 이어져 온 식민지,
분단, 서구 추종 근대화와
물량주의
성장 패러다임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고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라는 생각이 들어요.
120년전
상황과 지금이 너무 비슷하다,
그때
청일전쟁 거치면서 조선이 무너지고 시스템 자체가 완전히 붕괴했다.
학문도
시대와 함께무너졌다는 거죠-
-청일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결국 조선사람들이었는데, 청일전쟁은 동학군 진압전쟁이었잖아요.
지금은
북이 그런 구실로 이용될 수 있는 상황이잖아요.
국지전이
일어나면 북을 친다, 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주겠다는 명분하에 미사일을
발사하고
그러다
보면 과거와 똑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어요.
상상으로만
그칠 것이라는 보장이 없어요-
-구한말
상황을 다시 맞지 않으려면 남북관계 개선해야 합니다.
북과의
관계 개선외에 달리 출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도
1층을
짓지 않고는 2층을 지을 수 없다는 말을 했는데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북한
문제를 풀지 않고 중국, 러시아 대륙으로 발을 뻗을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정부로서도
북한과의 관계 개선이 유력한 돌파구일 수 있죠-
하여
저는 하느님 사랑의 기적을 간청하며
미사경문중
꼭 괄호 안에 '남북한 모두'를 넣어 다음처럼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님의
뜻대로 교회(와 남북한 모두)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되게 하소서-“
무한경쟁,
적자생존, 각자도생의 신자본주의 정글의 시대에
간절히
바라는 바 사랑의 기적이요, 사랑의 노력이요, 사랑의 공동체 건설입니다.
동방영성에
관한 책을 번역하다
실수로
2장, 20쪽(포인트10)을 날려버렸다 어제 다시 번역완료했습니다.
디지털
시대가 얼마나 위험스럽고 위태한 시대인지,
또
정보의 선善하고 지혜智慧로운 활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사랑의
기적이 될 수 있는지는 사람 손에 달렸지만 이 또한 기도의 대상입니다.
번역
중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 위대한 문호 톨스토이가 쓴
정교회
주교와 세 은수자들의 만남에 대한 아름답고 감동적인 전설적인 일화가 있어 나눕니다.
-주교는
순례 도중 무명의 작은 섬에 대한 소문을 들었는데 그 섬 안에는 세 노老 은수자들이 자신들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면서 전 삶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주교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선장에게 그들을 방문할 수 있도록 그 섬에 배를 멈추도록 간청했다.
선장은
마지못해 동의하고 섬 가까이 닻을 내렸다.
해변가에
도착하자 주교는 노젓는 이들과 갑판위에 자리 잡았다.
세
은수자들은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은발의 수염에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다.
겸손을
다해 그들은 주교를 환영하면서 깊은 절을 드렸다.
주교는
그들을 축복한후
그들이
그들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무엇을 하는지 또 어떻게 하느님을 섬기는지 물었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데 어떤 방법도 없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다만 서로 섬겼고(served) 서로 지지해주었다(supported).
주교는
가난한 은수자들이 기도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는 것이란 모두가
하늘
향해 두 손을 들고 "당신은 셋, 우리도 셋,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반복하는 것이었다.
주교는
이 무식한 은수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는 것이
교회의
지도자로서 자기의 책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빈약한 학습자들이었고 온종일 가르쳐야 했다.
날이
어둬져 배에 돌아가기에 앞서 주교는 그들에게 그리스도교 신학에 대한 짧고 단순한 강의도 했다.
그러나
보라!
해가
지고 배가 섬을 떠날 때 모든 승객들은 먼거리에서도 그들을 놀라움으로 가득 채운 광경을 보았다.
세
은수자들이 마치 마른 땅처럼 물위를 달려오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배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들은 주교에게 주님의 기도를 다시 알려줄 것을 엎드려 간청했다.
가련한
은수자들은 이미 까맣게 주님의 기도를 잊었기 때문이다.
주교는
경외심에 가득 차 십자가를 긋고 은수자들에게 그들 자신의 기도를 계속하도록 말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르침이 필요없었기 때문이다.
다음
주교는 노 은수자들 앞에 절하고 기도를 청했다.
그들이
돌아서서 섬을 향해 바다를 가로질러 뛰어가다가 시야에서 사라진 섬의 한 지점위에서는
동틀녘까지
한 빛이 빛나고 있었다.-
얼마나
아름답고 의미심장한 감동적 일화인지요.
사랑의
기적입니다.
그들이
한 일이라곤 다만 서로 사랑으로 섬기고(served) 지지한(supported)일 뿐이었습니다.
오늘
말씀도 '사랑의 기적' 렌즈를 통해 보면 그 의미가 환히 드러납니다.
사랑의
기적 중심에는 언제나 파스카의 주님이 자리하고 계심이 오늘 복음이 입증합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태12,6ㄴ-8)
바리사이의
공격의 예봉을 무력하게 만든 이 말씀 또한 사랑의 기적입니다.
절대적인
주님 사랑의 잣대 하에 안식일도 상대화됩니다.
오늘
1독서 탈출기에서 이집트의 압제로 부터 해방의 자유를 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파스카 축제 역시 하느님 사랑의 기적입니다.
"이날이야말로
너희의 기념일이니, 이날 주님을 위하여 축제를 지내라,
이를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대대로 축제일로 지내라.“
(탈출12,14)
우리는
죽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에 의해 최고로 업그레이드 된 파스카 축제인 미사를,
주님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매일 봉헌합니다.
매일
거행되는 사랑의 기적, 파스카 축제의 미사은총이
우리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며,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바꿔줍니다.
끝으로
식당 창밖 능소화꽃들을 보며 쓴, '삶은 축제다'라는 글을 나눕니다.
-삶은
축제다/때되어/송이송이/환하게/피어나는 꽃들처럼,
날마다/새롭게
활짝/사랑 꽃들로 피어나는/삶은 축제다-
아멘.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 12,2)
-오상선신부-
페이스북에 성당에
들어갈 때 민소매와
반바지 옷차림으로 들어가면
되는가 하는 그림이
올라왔더군요.
물론
덥다고 너무
야한 옷차림으로 미사를
본다는 것은 볼상
사납지 않느냐는 이야기겠지만 꼭
이런 글을 올려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옷차림으로 오든 상관치
않으시고 온
자체로 기뻐하시지 않을까요? 우리
인간적인 관습에 따라 우리가
별로 권장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느님께서도
싫어하시는 양 가르치려
한다면 오늘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따지는 것과 무슨
다를 바가 있을까요?
하느님을
우리의 잣대로 판단하여 하느님을
우리 수준으로 끌어내리지
맙시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크신지를 이야기하고
나누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한상우신부-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소중하신
주님께서는 소중한
것이 정녕
무언지를 다시
우리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주님의
자비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자비는
우리 삶의 본질입니다.
주님의
자비를 기억하는
축복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은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가장
행복한 것은 주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주님을
만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다시금
마음을 되찾는
날이며 하느님
생명에 감사하는
날이
됩니다.
참된
형제가 되는 길은 하느님
자녀라는 이사실에서
우리가 출발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이사실에 눈뜨는
것입니다.
너를
비판하는 시간이
아니라 나를
반성하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사람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관계의 출발이 다시금
그리스도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삶의
모든 것은 자비를
향합니다.
삶의
한가운데는 자비하신
주님이 계십니다.
아름답고
빛나는 것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먼저
우리 마음을 돌볼
줄 아는 안식일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언제나
진실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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