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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5. 묵상글 (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 '아무것도 없이' 정신.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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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2.05 04:14
- '아무것도 없이' 정신
저에 대해서 아시는 분은 잘 아실 텐데
제 일생 꿈은 오늘 복음 말씀을 프란치스코 방식으로 사는 것 곧
돌아다니며 일도 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고 그래서 여러 차례
시도한 바도 있고 안식년이 주어지면 올해 이렇게 지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얘기하면 흉내나 조금 내고 시늉이나 하는 것이지,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똑같이 실천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면 두 가지 면에서 오늘 말씀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다니라고 하시는데
제가 최소한으로 가지고 다녀도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다니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없이 다니지는 못할지라도 그 정신만은 지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제 그 정신이란 무엇이겠습니까?
프란치스칸 정신은 다니며 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오로 사도의 방식이기도 하지요.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데 바오로 사도나 프란치스코가 애긍으로 산 것이 아닙니다.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일해야 하고 일을 해줬는데도 먹을 것을 주지 않을 때
그때 먹을 것을 애긍하라고 하였고 돈은 받지 말라고 하였지요.
그래서 저는 아무것도 없이 다니지는 못하지만 돈 없이 일해서 먹고 살 생각이며
일을 하더라도 돈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려운 집을 돕는 차원에서 할 것입니다.
사실 ‘아무것도 없이’ 정신 곧 무소유의 정신이나 가난 정신은
하느님 외에 다른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않으려는 정신이지요.
그러므로 이 정신은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이 없어도 하느님만 계시면 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의 정신이요,
바오로 사도 말씀대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무엇이든 하려는 정신입니다.
두 번째로 제가 걸리는 것은 복음 선포입니다.
즐기기 위한 여행이 아니라 복음 선포를 위한 여행이라면
다니며 복음 선포를 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면
그렇게 적극적으로 복음 선포를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적극적인 복음 선포란 물론 광장에서 외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가능한 한 복음을 말과 행위로 전해야 하는데
저는 말로도 전하려는 그런 적극성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적극성이 없다고 제가 얘기했는데
실은 적극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열성이 없는 것이 아닌지,
열성이 없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이 아닌지 반성하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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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우리 삶 안에서 희년을 살아내기!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오늘날의 희년 실천은 우리 삶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을까요?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안식일과 희년 경제
우리 삶 안에서 희년을 살아내기
2026년 2월 4일 수요일
저술가 켈리 니콘데하(Kelley Nikondeha)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일상 속에서 희년의 행위를 실천하도록 격려하셨음을 설명합니다:
갈릴래아의 태양 아래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장 구체적인 염려를 두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오늘의 양식, 내일의 빚 없는 삶, 그리고 폭력의 영원한 종말. [1] 이 기도의 구조는 가난한 이들의 근심을 담아낸 오래된 전례적 틀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무거운 압제 속에서도,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의 희망은 가족을 위한 충분한 음식과 다가올 빚의 탕감이었습니다. 백성들의 가장 절박한 문제들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심에 놓여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는 곧바로 '빚의 탕감'이라는 경제적 실천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제국이나 다른 권력이 정의를 선포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날마다 이 혁명적인 기도를 드리면서, 제자들의 세계관은 점차 희년 중심의 현실로 바뀌어 갔습니다. 시선이 달라지자, 그들의 삶의 방식도 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새로운 지평에서 빚의 용서는 제자들이 서로에게 진 빚을 탕감해 주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자유롭게 해 줄 때, 그들을 괴롭히던 빚의 악순환은 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제자가 드린 '빚의 용서를 청하는 기도'는 가장 먼저 이웃이 자기에게 진 빚을 탕감해 줄 때 응답되었을 것입니다. 경제적 자유의 첫 물결은 이웃들이 빚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할 때, 작은 공동체 안에서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참된 이웃됨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웃을 빚의 올가미에 빠뜨리지 않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희년은 오늘 시작된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비현실적인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제자들로부터 희년이 시작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구조적 권력이 가장 적은 이들이 다른 시대와 다른 민족의 지혜를 끌어와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금 당장 희년을 살아내도록 힘을 주셨습니다. - 왕의 칙령이나 나팔(쇼파르)의 소리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니콘데하는 우리가 스스로 희년의 실천에 참여할 때, 그 안에서 드러나는 '복음의 기쁜 소식'을 가리킵니다:
구체적인 경제적 언어와 의도를 담고 있는 주님의 기도는 '희년의 기도'라고도 불립니다. 만일 우리가 이 기도를 마음 깊이 외우고 있는 모든 이들이 그 안에 담긴 도전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희년의 움직임과 경제적 개혁의 큰 물결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 혁명적인 기도는 지금,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희년의 더 큰 흐름 속에 참여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됩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주일을 고요한 축제로 살아내신 부모님 밑에서 자라난 은총을 받았습니다. 집을 떠난 뒤에도 그 주일의 전통을 간직했고, 제 자녀들과 함께 우리만의 방식으로 안식일을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레니타 J. 윔스(Renita J. Weems)가 자신의 묵상(her meditation)에서 쓴 것처럼, 세상의 질서로부터 자유로운 하루가 얼마나 필요한지 깨달았습니다. 저는 안식일의 기쁨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들로 둘러싸여 있지만, 안식일이 참된 기쁨이었던 가정에서 자라난 것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Constance F.
References
[1] The Lord’s Prayer is found in both Matthew 6:9–14 and Luke 11:1–4.
Kelley Nikondeha, Jubilee Economics: The Purpose, Practices, and Possibilities for a Better Future (Orbis Books, 2025), 53, 54, 55.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Wei Feng, untitled (detail), 2025,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들판에 서서 두 팔을 자유롭게 펼친 이 사람처럼, 우리는 경제 정의를 지지할 때 솟아오르는 참된 자유를 체험합니다. 더 이상 끝없는 빚의 굴레와 억압적인 채무 관계에 매여 있지 않고,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 안에서 해방된 삶을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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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지금, 이 순간, 여기를 의식하는 삶 -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단순한 행위가 곧 창조의 순간이며, 매 호흡이 새로운 시작입니다!
여러분은 올 한해의 결심을 무엇으로 정하셨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지금, 여기]의 소중함을 영의 눈으로(일상을 성사적인 눈으로) 바라보며 살아가겠다는 것이 제 한해의 결심입니다. 물론 이 결심을 잊을 때도 있을 것이고, 또 밀려오는 걱정과 근심에 휩싸일 때가 있겠지요?! 하지만 다시 또다시 마음을 잡아 보려고 노려하고자 합니다. [지금, 여기]의 소중함과 거룩함을 의식하는 영을 지니고 살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과거라 부르는 것은 단지 기억의 흔적일 뿐이고, 미래는 그 기억을 투영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치 달이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태양의 빛을 반사하듯, 과거와 미래는 현재의 빛을 반사할 뿐입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이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살아 있는 시간이며, 그 빛으로 과거와 미래가 의미를 얻습니다.
흔히 시간은 아득한 과거에서 시작되어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시간은,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지금 이 순간에 창조주 하느님께서 흘려 보내시는 은총의 샘이고 분명한 시작점입니다. 현재에서 솟아나 과거로 흘러가고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미래도 또 다른 지금의 순간을 현실로 맞이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이 곧 창조의 시작, 작은 빅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충분히 용감하다면,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길을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길을 떠나면서 우리의 목적지에 이미 도착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순례자의 삶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틱낫한 스님도 당신의 여러 저서에서, 특히 [Present Moment Wonderful Moment]에서 같은 맥락에서 "지금, 이 순간"을 깨닫고 머무는 수행을 강조합니다.
틱낫한 스님은 이 책에서 호흡과 함께 현재를 의식하는 짧은 게송(偈頌: gatha)을 소개합니다.
예를 들어, "숨을 들이쉬며 내 몸을 고요히 하고, 내쉬며 미소를 짓네. 이 순간에 머무르며, 이 순간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것을 아네." 하며 외는 게송입니다.
저도 예전에 말씀드렸듯이, 숨을 들이쉬며 "나는 너를 사랑한다." 하는 하느님의 말씀 외고, 숨을 내쉬며 "예, 주님, 저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말씀드립니다. 이것을 세 번 정도 한 후, 다시 숨을 들이쉬며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 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외고, 숨을 내쉬며 "예, 주님, 저는 주님의 그 크나큰 자비를 믿습니다!" 하고 욉니다. 이렇게 세 번 정도 하고 나서, 다시 세 번 정도 숨을 들이쉬며 "나는 너와 늘 함께 있다."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외고, 숨을 내쉬며 "예, 주님, 저는 당신의 그 크나큰 사랑을 믿습니다." 하고 욉니다.
이런 식으로 하다 보면 지금, 이 순간과 제 마음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차오르는 느낌이 들기 시작합니다. 비록 제가 죄인일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영원히 저를 끌어안아 주시고 저를 용서해 주시며 함께해 주시는 영원한 주님이요 형제요 친구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 나름대로 말을 만들어 보십시오. 이렇게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현존이 우리 존재를 감싸, 비록 부족하고 죄 많은 우리에게도 하느님의 사랑이 여전히 풍성하게 함께함을 의식하고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만일 제가 다른 것에 의탁하지 않고 오직 이런 하느님의 현존과 말씀에 의탁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바로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채 순례의 삶을 살아가며 다른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우리가 우리의 일상 안에서 이 현실을 잊을 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고자 한다면 주님의 현존과 생명이 우리의 현존과 생명임을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이고, 다시 짧게 하느님의 현존과 용서, 사랑을 함께하심을 기억하며 힘을 얻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쉽지 않지만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이런 연습(수양)을 하게 되면,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단순한 행위가 곧 창조의 순간이며, 매 호흡이 새로운 시작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 다시 힘과 용기를 내어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 사랑과 더불어 하루를 또 사랑으로 시작해 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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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열두 제자의 파견장면으로, “말씀 선포의 사명”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세 장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마르 6,7) 미리 준비시키고 무장시키십니다.
<둘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이는 진리가 검증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당시의 고대 근동의 관습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그들 안에’ 실현되어야 함을 요청합니다. 곧 ‘파견 받은 자들’ 사이에 이미 형성된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복음 선포’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파견 받은 자’는 먼저 복음화 되어야 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선포하면서 동시에 하느님 나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복음 선포의 길’이 본질적으로 ‘함께 가는 길이요 여정’(시노달리따스, sinodalitas)임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결국, ‘함께 가는 길’로의 초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파견 받은 우리가 함께 가는 길이며, 동시에 하느님과 함께 가는 길입니다. 바로 그러한 그들의 삶 자체가 증거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마르 6,8)
이는 오로지 당신께 의탁하고 당신께 신뢰를 두고 가는 길임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왜 지팡이는 가져가라고 하셨을까요?
‘지팡이’는 여행자에게 있어 들짐승을 쫓는 무기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모세의 ‘지팡이’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양치기 모세에게는 단순히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지팡이였지만, 말씀과 함께 바다를 내려치면 물결이 갈라지고, 바위를 두드리면 물이 솟아나고, 병든 이들이 쳐다보면 살아나게 하는 ‘구원의 지팡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지팡이’로 인류 구원과 사랑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바로 그 ‘지팡이’에 매달려 있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1코린 1,23)로 말입니다.
<셋째 장면>에서는 ‘파견 받은 이’가 할 일이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는”(6,12-13 참조) 것이며, 그 일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파견하신 분의 뜻에 따라, 그분의 능력으로 일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파견하신 그분께 매여 있고, 그분 권능의 지팡이인 ‘말씀의 지팡이’를 꼭 붙들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마르 6,8)
그렇습니다. 주님!
제가 길을 떠나온 것이 아니라, 당신이 보내셨습니다.
저를 뽑아 부르시어, 당신의 권한과 말씀을 심어 보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여행 보따리도 전대도 필요하지 않음은
당신께만 의탁하는 까닭입니다.
더 이상은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음은
당신의 말씀이 전부인 까닭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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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외국에 살면서 가끔 가슴이 뭉클해지는 노래가 있습니다. 설날에 부르는 ‘고향의 봄’이 그렇습니다. 어버이날에 부르는 ‘어머니 은혜’가 그렇습니다. 광복절에 부르는 ‘애국가’가 그렇습니다. 고향과 조국에 대한 향수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노래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8년 동안 웃지도, 울지도 않았던 소녀가 있었습니다. 소녀는 병원에서 지내면서 희망없이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런 어느날 가수 조용필의 ‘비련’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의사와 병원 관계자는 소녀의 눈물을 보면서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조용필 측에 연락했습니다. 한번 병원에 오셔서 소녀에게 노래를 불러 줄 수 있는지 알아보았습니다. 조용필의 매니저는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바쁘기도 하고, 하루에 공연을 취소하면 1억 원이 손해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던 조용필은 매니저에게 그날 공연이 몇 개 있는지 물었습니다. 매니저는 공연이 4개 잡혀 있다고 하였습니다. 조용필은 위약금을 모두 본인이 지급하겠다고 하면서 소녀가 있는 병원으로 갔습니다. 조용필은 소녀의 손을 잡고 ‘비련’을 불러 주었습니다. 그러자 소녀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에 감격한 소녀의 부모님이 감사의 사례를 하겠다고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조용필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사례금은 필요 없습니다. 저의 노래 인생 중에 가장 귀한 출연료는 오늘 소녀의 눈물이었습니다.’ 가수 조용필은 노래로 성공한 가수였습니다. 저도 조용필의 노래를 좋아했습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국민 노래가 되었습니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한 편의 시와도 같았습니다. ‘그 겨울의 찻집’은 서정적인 감성을 느끼게 합니다. ‘바람의 노래’는 삶의 이정표와 같았습니다. 조용필은 나눔으로도 멋진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드러나지 않는 곳에 많은 기부를 하였다고 합니다.
오늘과 내일 서울 대교구의 서품식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부제와 사제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오늘 독서는 새 사제들이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네 자손들이 제 길을 지켜 내 앞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성실히 걸으면, 네 자손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의 왕좌에 오를 사람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당신 약속을 그대로 이루어 주실 것이다.” 그렇습니다.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고, 후배들이 계속 사제서품을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은 새 사제들의 행동과 사명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길을 떠날 때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어도 옷은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그렇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먼저 하느님의 뜻과 의로움을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는 것이 새 사제들의 사명입니다. 이는 세례를 받은 모든 신앙인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들의 차례입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시련과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면 좋겠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지금 순간을 감사하며 지내면 좋겠습니다. “내가 아는 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 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바람의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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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십니다!
어느 정도 교육받은 제자들이 오늘은 장거리 복음 선포 실습을 떠납니다. 제자들 전직이 어부나 농부, 세리나 열혈 당원 등등 전혀 다른 직종이었기에, 새로운 스타일의 일, 복음 선포 앞에 다들 긴장했을 것입니다.
떠나기 직전 스승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모아 놓아 이런저런 훈시 말씀을 건네십니다. 오늘 해당되는 훈시 말씀은 여장 훈시입니다. 즉 전도 여행길에 짐을 어떻게 싸야 하는지 상세히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들어보니 꽤 가혹합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보름 한 달 지속되는 장거리 여행길인데, 제자들은 적어도 백만 원씩은 받으려나, 아니면 맞춤형 비상 식량 보따리라도 하나씩 주시려나 기대했었는데, 웬걸 하시는 말씀.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
제자들은 훈시 말씀을 들으면서 다들 속으로 ‘이거 너무 하시는 거 아닙니까?’ 하는 불평불만이 솟구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복음 선포자로 살아보니, 예수님 말씀 구구절절 하나도 틀린 말씀이 없습니다. 복음 선포자는 자신이 선포해야 할 복음에 매진하고 몰두해야지, 다른 대상에 마음을 두기 시작할 때, 순식간에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사람으로 전락합니다.
물론 돈이라는 것,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 그래야 사람 구실 할 수도 있고, 한 인간 존재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하며 살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라야지, 거기에 슬슬 맛을 들이고, 빠져들기 시작하면 가장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대상인 복음과 주님은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즉시 돈이 가져다주는 편리함과 안락함, 세속주의에 물들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의 존재 이유와 관련해서 그릇된 프레임에 깊이 빠져 너무나 어색하고 웃기는 삶을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외모 지상주의, 물질만능주의, 성적지상주의, 완벽주의, 착한 사람 증후군, 메시아 콤플렉스, 히어로 콤플렉스...
있는 그대로의 나, 본연의 내가 아닌 잔뜩 어깨에 힘이 들어간 나, 너무나 과도하게 고쳐지고 포토샵된 나로 치장하려니 그 삶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아무것도 지니지 마라는 예수님의 권고 말씀은 돈이나 식량뿐만 아니라 과도하게 포장된 나 아닌 나를 버리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거짓 나, 과장된 나, 나 아닌 나로 살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라는 요청이라 확신합니다.
주님께서는 잔뜩 부풀리거나 반대로 잔뜩 웅크린 내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십니다. 과대 포장한 내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 나를 사랑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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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드디어 진실이 밝혀질 날이 올 것 같습니다.
고독사 한 분의 이야기를 올리고 난 후에 제 대부님과 통화를 했습니다. 대부님도 같은 레지오 단원입니다. 저는 본당을 옮겼기에 협조단원으로 있는 것입니다. 같은 레지오 단원이라 단톡방을 같이 공유를 하는데 내일 있게 될 자매님 장례미사가 레지오장을 하게 돼 그와 관련된 공지를 톡으로 받고 제가 어떤 질문을 이 공지문을 올리신 분이 꾸리아단장을 맡고 계시는 분이라 드렸는데 그 질문을 보시고 대부님이 뭔가 제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을 하셔서 제가 장문의 글을 올렸습니다.
대부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대부님은 제가 영세를 받았을 때부터 대자이지만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엄청 주목을 받게 돼 한편 마음속에 뿌듯했고 자랑스러웠는데 언젠가부터 계속 본당에서 불협화음이 생기니 이건 제가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언제부터는 원만한 관계가 아닌 그런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제 애물단지로 전락이 된 것처럼 생각을 하다보니 그런 편견 속에서 제가 한 질문이 또 눈에 거슬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문제가 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건 오해이고 또대부님께서 뭐가 잘못된 것인지 논리적으로 반박을 했습니다. 대부님을 향해 반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많은 다른 단원이 보고 있기 때문에 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면 또 이상한 소문이 퍼져나갈 게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 글을 보셨는지 무척 당황하신 모양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조목조목 완벽하게 반박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간 몇 개월 동안 본당에서 뵈어도 어쩔 수 없이 인사도 하는둥 마는둥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여러 차례 대부님께서 저를 나무라고 비판을 공개적으로 톡에서 하시니 제가 해명을 하려고 전화를 해도 문자를 해도 거부만 하시다가 오늘은 톡에 제가 올린 장문의 글을 보고 전화를 주셨습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일단 틀리고 자시고 할 게 아니고 논리적으로 조금도 빈틈없이 소명을 했기 때문입니다.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조금 전에 통화를 마쳤습니다.
제가 그동안 영세를 받고 무수한 음해를 받았다는 걸 서로 공방을 하다가 오늘 결정적인 정황이 포착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그동안 악의적인 소문으로 저를 괴롭게 했는지 그 이유가 대부님이 의도하지 않았는데 그만 모르게 누설한 것입니다. 지금 저는 피를 토할 그런 심정입니다. 제가 신부님과 어떤 마찰이 생긴 이유도 어떤 신자의 모략이 개입돼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없는 사실을 악의적으로 소문을 내고 또 신부님께 보고를 했던 것입니다.
제가 해가 바꼈으니 이제 재작년이 되겠네요. 꾸르실료 신청을 했습니다. 오래 전부터 신청을 했는데 수녀님과 문제가 생긴 것 때문에 복사도 짤리고 또 그런 이유로 본당에서 7년 동안 꾸르실료를 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새신부님도 오셨고 또 마침 하계 8월이고 신부님도 가신다고 하시면서 같이 갈 형제가 있다면 신청을 하라고 공지도 하셔서 제가 이번에는 어쩌면 잘은 모르지만 꾸르실료를 통해 신부님이 저에 대한 인식을 전환할 수 있게 만들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 싶어 신청을 했는데 마침 제 아버지 기일날 저녁이 화요일이었고 미사가 7시 반에 있기에 기일미사를 봉헌하려고 가는데 사무실에서 예물을 신청하고 나오니 신부님께서 갑자기 저를 성당 입구 마당에서 부르셔서 갔는데 첫마디 말씀이 "베드로 형제님, 꾸르실료 간다고 신청을 했다고 하는데 참석하려고 하는 저의가 무엇이냐" 고 하셔서 순간 너무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습니다. 여기서 사용한 단어 '저의' 이 단어 때문에 너무나도 당황스러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습니다만 오늘 대부님과 이야기를 하는데 어떻게 이와 관련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성당에 누군가가 이상한 악의적인 모함을 했던 것입니다. 제 어머니가 후처로 들어와 제가 막내인데 저를 낳고 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나머지 형제는 배다른 형제라고 그런 소문 때문에 신부님께 그런 사람을 꾸르실료에 보내는 건 아니라고 건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또 고려를 해야 한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부님이 직접 그런 이야기는 할 수 없으니 못 가게 할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할 수 없으니 왜 꾸르실료에 가려고 하는지 그 연유를 물어서 어떻게 꼬투리를 잡아 못 가게 하려고 하셨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했다는 게 추론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문제는 정말 돌아가신 제 어머니와 제 형제들을 아무리 형제들은 하느님을 안 믿는다고 해도 그런 있지도 않은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리고 그걸 신부님께 전해서 신부님과 마찰까지는 아닌데 그당시는 도무지 왜 제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렇게까지 꾸르실료를 근 8년 동안 본당에서 보내주지 않는지 너무나도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단지 조금 억울하다 보니 신부님께 그렇다고 항의를 한 것도 아니고 정말 제가 공동체에 뭔가 잘못했다면 이번 기회를 통해서 철저히 반성을 하겠다고 그렇게 말을 본심이 아니더라도 해야 보내주실 수 있겠다 싶어 그랬는데도 안 된다고 하셔서 그렇다고 신부님과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안 그래도 찍힌 상태인데 또 마치 신부님께 "네. 허락하지 않으시면 기다리겠습니다"라는 식으로 순명을 해야 하는데 순명을 하지 않았다고 또 더 찍히게 된 것입니다. 오늘은 이 사실도 안 게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악의적으로 사람들이 저에 대해 음해를 하려고 거짓 소문을 퍼트렸는지 결정적인 정황증거가 나온 것입니다.
대부님께 이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제 어머니는 생모이고 또 후처도 아니고 정실부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도 있고 또 형제들과 유전자 검사를 하면 다 한 배에서 나온 형제라는 걸 증명도 할 수 있고 아니면 어릴 때부터 지켜본 이웃집 누나가 최근에 성당에 다시 냉담을 풀고 오는데 그 누나도 증인이 될 수 있다고 하니 이제서야 어떻게 이런 게 이런 식으로 소문이 그동안 나돌았다면 이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어서 대부로서 정말 그동안 이처럼 많은 악의적인 소문이 나돌았다는 사실을 본당 공동체에 알려서 그동안 저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지금 피를 토하고 통탄할 지경이지만 한편 이 사실을 통해 그동안 저를 음해하려고 하는 사람을 대부님께서 진상을 조사해 완전히 이건 거짓이라는 사실을 본당에 공표하겠다는 걸 약속해 주셨습닉다. 지금 마음은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입니다.
제 어머니를 사람들이 그것도 돌아가신 분인데 모욕을 했다는 사실에 어떤 자식이 이렇게 되면 분개하지 않을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를 통해 저의 억울함도 풀 수 있겠다는 희망도 보이는 면에서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대부님은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는 힘들겠지만 조용히 기다려 달라고 하는데 일단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제가 힘이 없기 때문에 주교님께 가서 부디 아런 억울한 사연을 풀어주십사 하고 하소연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일단은 약속을 했으니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눈물이 납니다. 어쩌면 어머니께서 하늘에서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 아들을 보니 너무 가슴이 아파 제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하느님께 애원을 하셨는지도 모르겠다는 기분입니다.
정말 어떤 사람이 그런 모함을 하고 거짓 소문을 퍼트렸는지 찾아냈으면 하는 맘 간절합니다. 어떻게 보복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본당에 이런 식으로 저에 대한 악의적인 다수의 소문은 완전 거짓이었다는 걸 알려서 제 억울함이 풀어진다면 저는 그것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잘 기다려질지는 모르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주일에 성전에서 이런 사실을 알려 거짓이라는 걸 알리고 싶지만 그래도 약속을 한 것이니 힘들어도 기다려보려고 합니다. 제가 이틀 전인가 안목이란 내용을 언급하면서 역사적 사실인 충신과 간신을 비유적으로 왕을 군주에 비유해서 그럼 충신과 간신은 본당 사목위원과 같은 인물이 해당될 텐데 그 내용을 언급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사례가 바로 이 사례와 어쩜 똑같은지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 하늘에서 제 어머니가 이런 저를 보시면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부디 제 억울함을 풀어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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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묵상 : 고독사한 한 자매님의 일기장을 보고.......
이틀 전에 예전에 개신교 다닐 때 봉사를 한 멤머 중에 한 형제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고독사나 병사 아니면 독거노인 사망 후 유품정리하는 봉사회원이었습니다. 몇 년 전에 개인적인 부탁으로 전화를 한 이후에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는데 전화가 온 것입니다. 처음엔 안부전화를 물었습니다. 그냥 안부전화였는 줄 알았는데 부탁을 하나 했으면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부탁인지 하고 물어보니 고독사한 여자분이 계신데 가보니 천주교 신자였던 것 같다고 해서 마침 제가 천주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이왕이면 천주교인이 좀 같이 해 줬으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그냥 그런 것 하고 상관없이 이미 시에서 어떻게 조치를 해서 일반적인 조례에 근거해 무연고 처리가 이미 된 상태였던 것입니다.
처음에 유품을 정리하러 갔는데 묵주랑 십자고상이 있어서 천주교 신자인 줄 알았고 또 어떤 노트를 보고 신자였다는 걸 알았는데 아마 20년 정도 냉담을 한 것 같았습니다. 고향은 강원도였던 같습니다. 일기장 같은 걸 보니 강원도에서 신자생활을 한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추적을 해서 먼 친척을 찾았는 모양인데 왕래가 끊어진 지 이미 오래돼 시신을 인수하는 걸 거부했나 봅니다. 저도 자세한 건 잘 모르지만 그렇게 해서 무연고 처리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그래도 종교는 개신교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같은 기독교인지라 고인되신 분의 종교를 존중해 성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것 때문에 저를 호출했던 것입니다.
통영에 먼 친척이 있어서 어떻게 자리를 잡은 모양인데 그 친척마저도 세상을 떠났고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가족들과도 소식이 끊긴 지도 오래된 모양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노트를 보고 대충 알았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한 인간으로서도 그렇고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정리를 하다가 사진 하나가 나와서 봤는데 5년 전 사진인 것 같았습니다. 사진에 언제 찍었고 무엇을 할 때였다고 메모가 돼 있었습니다. 사진상으로 봐서 얼굴로 보면 지금쯤 아마도 예순 중반쯤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같이 함께 정리를 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정확한 건 모르지만 아무튼 오랜 세월 냉담한 건 맞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개종을 한 이후엔 유품정리를 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습니다. 오늘 하고 돌아오면서 마음도 많이 아팠던 게 물론 고독사한 분의 사정 또한 마음이 아팠지만 저도 천주교를 지금 신앙으로 하고는 있지만 이런 문제를 떠나서 우리는 진짜 예수님의 가르침을 떠나서 인간적으로도 신앙공동체에서 만약 소외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진짜 복음의 가르침을 정확하게는 아니더라도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을 하는가 하는 것에는 정말 회의적입니다. 솔직히 표현하면 어쩌면 역겹다고도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제 얼굴에 침뱉기인 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14년 동안 보고 느낀 것입니다.
제가 조금 적나라하게 표현을 해보겠습니다. 아주 일부만 빼고 천주교는 일단 개신교에 비해서 엄청 차이가 나는 게 어떤 신자가 있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해서 신앙생활을 하는지 그런 정보가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개신교처럼 신방 같은 문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방이 없다고 해도 실제 사목의 일선에서는 그런 걸 모르고 사목하는 게 현실입니다. 그나마 유일한 게 있다면 봉성체하는 신자가 있다면 봉성체를 해야 되기 때문에 그것 외엔 특별한 경우 아니면 거의 전무한 실정입니다.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국가에 비유하면 권력있고 힘있는 사람들이 국가 권력을 사유하듯이 교회도 이와 닮은 점이 많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닮은 게 아니고 똑같다고 표현하는 게 맞습니다.
교회는 고작 성탄 시기에만 강론에서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구유에 누워계시는 아기 예수님을 빙자해서 예수님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이 세상에 구세주로 왔다고 표현하며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가장 누추한 자리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도 그와 같이 예수님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는 강론대에서 그렇게 선포되지만 말만 그렇지 현실은 전혀 허울뿐입니다. 실제 이런 교회의 모습은 지금도 형법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폐지가 된 줄 아는데 예전에 혼인빙자간음죄가 있었습니다. 세상 법에 비유하자면 예수님이 만약 현대판 판사로 계신다면 지금 우리가 속한 천주교의 공동체 모습을 보고 어떤 판시를 하실지 제가 보는 견해로는 혼인빙자간음죄와 비슷한 판시를 하실 것 같습니다. 이거 세상법이지만 하늘나라 법전에 죄목이 있다면 아마도 예수님 말씀 빙자 거역죄라고 억지로 견강부회해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고인되신 자매님이 어떤 연유로 냉담을 하게 된 것인지는 정확하게 잘 모르겠지만 노트에 끄적끄적 적혀 있는 내용을 보면 성당을 향해 가지는 억한 감정이 그대로 쏟아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차마 그 표현을 옮기지는 못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분과 그 어떤 분도 연관은 없는 사람들이지만 사실 넓은 의미에서는 우리도 그분의 죽음 앞에 일말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분의 메모 하나만 표현해보겠습니다. 아마 한때는 교회에서 엄청 봉사도 많이 하고 봉헌도 많이 한 것 같았습니다. 교회가 어려울 때는 정말 하느님을 위해서 자신의 많은 것을 물질적으로나 몸으로 희생을 했는데 어떻게 세상을 살다보면 기업도 마치 부도가 돼 어려움에 처하듯이 한 개인도 불의의 사고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될 수 있는 건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런 상황에 처한다고 해서 성당에 손을 내미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그런 건 못할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게 생각함에도 왜 교회를 원망하는 맘이 생길까요? 안 도와줘서 그런 게 아닙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게 아니라 극단적인 표현을 하면 아예 모른 체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심리적인 배신감이 든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마음으로 물질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어떻게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는 상황이 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교회가 그런 것까지 하나하나 신경을 쓸 수 있겠느냐고 한다면 그런 신자는 그럼 어디가서 위로를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통탄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딸을 죽게한 것은 어려운 처지에 놓인 딸을 경제적으로 도와주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런 어려움을 마음으로나마 같이 아파하고 어떻게 헤쳐나갈지 함께 고민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신앙공동체라는 조직을 통해 이 땅에 교회를 예수님께서 세우신 것인데 그 교회가 그런 기능을 하지 않는 불구와 같으니 어찌 피눈물이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제가 너무 지나친 생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이게 지금 대한민국의 천주교 현 실정입니다. 참으로 가슴이 아파 저려옵니다. 항상 글 말미에는 감사합니다로 마무리하는데 이 글에서는 그런 인사를 드리는 게 힘이 드네요. 지금이라도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교회를 세우신 그 원의를 잘 이해해서 그 뜻을 헤아려드리는 교회로 거듭났으면 하는, 간절한 희망을 가져봅니다. 근데 희망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슬픈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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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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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6,7-13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를 위해 열 두 제자를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권고가 각 본당에 둘씩 짝지어 파견되는 저희 사제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이에 오늘은 강론보다 사제로써 자기반성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둘씩 짝지어 가라고 하십니다. 그건 사목생활이 혼자 하긴 버겁고 또 외로우니 서로 기대고 의지하라는 뜻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사제단이 먼저 참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라는 뜻입니다. 수많은 양떼를 이끌어가는 사목자로써, 사랑과 존중 그리고 신뢰를 바탕으로 좋은 관계를 맺는 모범을 보여주라는 것이겠지요. 본당에서 주임신부와 부주임 신부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용서하라는, 서로 사랑하라는 복음선포의 힘이 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먼저 사제단이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고 그 일치를 중심으로 하여 본당 공동체 구성원 전체가 일치되도록 잘 이끌라고 하시는 겁니다.
둘째,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있어 지팡이는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를 치유하며 마귀를 쫓아낼 권한을 주님께로부터 위임받았다는 표징이지요. 오늘날 본당 신부들에게는 아마 ‘영대’가 그 표징이 될텐데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재물을 더 가지려고 욕심 부리고,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는 건 주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만 그리고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에만 집중한다면 그런 것들에 신경 쓸 겨를이 없지요. 또한 탐욕이 내 눈을 가리고 걱정이 내 마음을 사로잡으면 신자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돌볼 수 없으니 조심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탐욕과 걱정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이들을 돌보려면 먼저 내 안에서 그것들을 비워내야 합니다. 내가 어느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잔잔한 물이 되어야 신자분들이 자기 마음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이집 저집으로 옮겨다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철새가 먹을 것을 찾아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것처럼 나와 마음이 잘 맞는 신자, 나에게 잘 대해주는 신자들을 찾아 다니면 양들을 보살피고 이끄는 목자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편애나 차별이 내 관심의 울타리 밖에 머무는 신자들에게는 실망이 되고 상처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일꾼이 주는 대로 음식을 먹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나에게 이끌어주시는대로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공평하게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넷째, 나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내 말을 듣지 않으면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내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너른 마음을 닮아야 할 사제가 옹졸하고 뒤끝 있는 것만큼 꼴불견이 또 없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생각과 입장이 다르기에, 내가 옳은 것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그른 것 싫은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요. 그런 점 때문에 심지어 구세주마저 배척하며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이 바로 나약한 인간입니다. 그러니 사목자로써 옳다고 판단하여 내린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는 신자들이 있어도, 신자들을 향한 사랑과 배려로 한 일이 오해를 사거나 반대에 부딪혀도 의기소침해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혹여 그 과정에서 서운함, 미움, 슬픔, 원망처럼 내 영혼에 시커먼 때를 묻히는 먼지 같은 감정들이 생기면 용서와 사랑으로, 나도 누군가에게 그럴 수 있다는 철저한 자기 성찰로 깔끔하게 털어내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마음에 사랑과 자비만 남기고 계속 가라고 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마음 깊이 새기고 이곳 목3동에서의 삶을 잘 마무리해야겠습니다. 다음 임지에서는 더 나은 사제, 더 성숙한 사제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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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선교활동은 일차적으로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7-13).”
1) 선교활동은 일차적으로 ‘나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이 아직 구원을 못 받은 사람을 인도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나, 복음을 전해 듣는 사람이나 모두 다 ‘구원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선교활동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9,22ㄴ-23).”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 9,25-27).”
여기서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는, “나도 구원을 받으려는 것이다.”이고,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는, “나 자신이 구원받지 못하고 탈락자가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할 때에는, 자신은 이미 구원을 받은 것처럼 잘난 체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먼저’ 충실하게 ‘구원의 길’을 잘 걷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즉 내가 먼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루카 6,39)”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잘 걸어가고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그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2) 선교활동은 ‘섬김’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예수님께서 구원의 대상인 우리를 섬기신 것처럼(루카 22,27), 그렇게 우리도 ‘섬김’을 실천함으로써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고압적인 태도로 가르치려고 하면 안 되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자처하면서 상대방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취급해도 안 됩니다.
남들보다 조금 먼저 신앙인이 되었다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열두 사도가 바오로 사도를 무시하지 않았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남들보다 먼저 시작하고 더 오래 했다면, 그만큼 더 성덕을 쌓아서 남들보다 더 겸손한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를 자주 봅니다.
신앙생활에서 선후배를 따지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교만입니다.>
3)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빈손’으로
가라고 지시하신 것은, 돌아올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오라고 지시하신 것과 같습니다.
선교활동은 장사도 아니고 영업도 아닙니다.
물질적인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교활동은 ‘구원의 은총’을(복음을) 전해 주는 일이기 때문에, 물질적으로는 ‘빈손’으로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또 ‘섬김’과 ‘형제애’를 실천하는 일이기 때문에 물질적인 대가를 받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마태 10,8).
바오로 사도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라고 말합니다(1티모 6,8).
그런데 ‘빈손’으로 가라는 지시 때문에 먹는 문제를 걱정한 제자가 몇 명은 있었을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마태 10,1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은 당신의 일꾼을 당연히 먹이시는 분이니 먹는 문제를 걱정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4) 예수님의 지시에 대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도 걱정이 없을 수 없다.
걱정거리가 생기면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과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도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가 아니라, “걱정되니까 신앙생활을 한다.”로......
사실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이
실제로 많고, 그런 일들 때문에 걱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처지이긴 한데......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합니다.
주님께서 그런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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