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0일 히브리서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인내로써" 달리자고 합니다. 대단히 힘든 일입니다. "달린다” 고 하면 참을성 이 없다는 뜻으로 새길 수도 있고 어떤 목표를 향한 노력을 연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인내를 눕거나 움직임이 없는 상태에 한정해서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질병으로 신음하는 이들의 인내를 높고 아름답게 여기지만, 나는 불구와 질병으로 장기간 누워 있는 이 분들이 가장 힘들게 인내하고 있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내가 믿기로 그보다 체득하기 어려운 인내가 있으니 달리는 인내입니다.
크나큰 슬픔을 겪으며 누워 있거나 재정적 파탄에도 평정을 유지한다는 것은 분명히 보통의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힘이며 정신력이라 할 만한 것을 나는 압니다. 경제적 실패 후에도 계속 일하는 능력, 아픈 가슴 안고 여전히 달리는 능력, 영혼의 슬픔 깊은데도 흔들림 없이 일상을 꾸려 가는 능력입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일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 가운데 다수는 아마도 개인적인 시간과 여건이 된다면 슬픔을 적절히 다스리며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혼자 엎드려 울 수 있는 침대가 아니라 모두가 지켜보는 길거리에서 인내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우리는 고요히 앉아 안식하며 슬픔을 묻을 수 없습니다. 열심히 섬겨 가며 슬픔을 묻으라는 부르심입니다. 일터에 가고, 시장에 가고, 모임에 가야 합니다. 가슴에 슬픔 묻고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슬픔을 묻는 방식으로 이보다 어려운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인내로써” 달린다 함의 참뜻입니다.
인자되시는 이여, 이것이 당신의 인내였습니다. 기다리며 달리는 일이었습니다. 최후의 목적을 기다리며 그보다 작은 일을 행하심이었습니다. 당신께서는 갈릴리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셔서 잔치를 망치지 않게 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많은 무리를 먹이심으로 응급한 필요를 채우셨습니다. 하지만 시종 당신께서는 크나큰 슬픔을 지니셨습니다. 그 슬픔을 나누지도 말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다른 이들은 구름 속의 무지개를(창 9:13) 청하겠으나, 나는 당신께 그보다 더한 것을 구하렵니다. 내 구름 속에서 나를 무지개로 만드셔서 다른 이들의 기쁨 되게 하소서. 나의 인내는 당신의 포도원에서 섬길 때 완전에 이를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 모두 사라졌을 때는
다른 이들을 위해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슬픔을 견디는 힘, 의무를 다함에 있고,
다른 이들의 기쁨으로 자신의 슬픔
치유할 줄 아는 이가 제일이니까요.
October 30
Run With Patience
Let us run with patience — Heb 12:1
To run with patience is a very difficult thing. Running is apt to suggest the absence of patience, the eagerness to reach the goal. We commonly associate patience with lying down. We think of it as the angel that guards the couch of the invalid. Yet, I do not think the invalid’s patience the hardest to achieve.
There is a patience which I believe to be harder — the patience that can run. To lie down in the time of grief, to be quiet under the stroke of adverse fortune, implies a great strength; but I know of something that implies a strength greater still: It is the power to work under a stroke; to have a great weight at your heart and still to run; to have a deep anguish in your spirit and still perform the daily task. It is a Christlike thing!
Many of us would nurse our grief without crying if we were allowed to nurse it. The hard thing is that most of us are called to exercise our patience, not in bed, but in the street. We are called to bury our sorrows, not in lethargic quiescence, but in active service — in the exchange, in the workshop, in the hour of social intercourse, in the contribution to another’s joy. There is no burial of sorrow so difficult as that; it is the “running with patience.”
This was Thy patience, O Son of man! It was at once a waiting and a running — a waiting for the goal, and a doing of the lesser work meantime. I see Thee at Cana turning the water into wine lest the marriage feast should be clouded. I see Thee in the desert feeding a multitude with bread just to relieve a temporary want. All, all the time, Thou wert bearing a mighty grief, unshared, unspoken. Men ask for a rainbow in the cloud; but I would ask more from Thee. I would be, in my cloud, myself a rainbow — a minister to others’ joy. My patience will be perfect when it can work in the vineyard. — George Matheson
“When all our hopes are gone,
’Tis well our hands must keep toiling on
For others’ sake:
For strength to bear is found in duty done;
And he is best indeed who learns to make
The joy of others cure his own heartach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