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삶
롬 15:1-6
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5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롬 15:1-6 / [약한 자의 짐을 져주어라]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경우에 단지 자신의 기쁨만을 위해 하는 일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더라도 그 일에 의문이나 불만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짐을 덜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2)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그에게 유익을 주어 주님 안에서 성장하게 도와줍시다. 3) 그리스도께서도 자신만을 기쁘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시편 기자가 말한 것같이 ㄱ) 그분은 주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모욕을 대신 당하고 고난을 받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ㄱ. 시69:9) 4)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인내를 가르치고 용기를 주어 장래 큰 희망을 가지게 하려고 기록된 것입니다. 5) 인내와 끈기와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와 서로가 한 마음이 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하시듯 여러분 또한 서로를 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6) 그렇게 해야 우리 모두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한 목소리로 찬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 것인지, 특별히 서로 견해가 다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14장에 이어 계속 이야기합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1) 바울은 신앙 공동체 안에 믿음이 강한 사람과 믿음이 약한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신앙생활에 자유함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믿음이 약한 사람은 의식이나 전통에서 자유로울 만큼 아직 믿음이 성숙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깨끗한 양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음식을 구별하고 특별한 날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이런 문제들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아닌 이상, 믿음이 강한 사람은 믿음이 약한 형제나 자매를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2-3) 강한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범하기 쉬운 실수가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믿음의 사람은 이웃을 기쁘게 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이웃에게 덕을 끼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는 지금까지 존재한 사람 중에 ‘가장 강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가장 강한 사람은 약한 사람의 종이 되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예수처럼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한 마음과 한 입으로(4-6) 바울은 하나님께서 강한 사람들과 약한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과 본을 따라 같은 마음과 생각을 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럴 때 모든 성도가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 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특징은 한 마음과 한 입입니다. 이 특징은 초대교회가 연합할 때 나타난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행 2:46).
적용: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의미는 그분의 행동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오직 한 마음과 한 목소리로 연합된 공동체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세상이 알 수도, 줄 수도 없는 위로와 소망과 평안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절망에 빠진 자는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낙심한 자들은 성경을 봐야 합니다. 상처 입은 자들은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같은 생각을 품고 한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용납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 설 교 >
다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로마서 15:1-13 / 이수영 목사
교회를 정의하는 말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성경이 직접 언급하는 대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에게 있어서 어머니”라는 것도 신학적으로 의미 있는 정의의 하나입니다. 신학적으로 보다 본질적인 교회의 정의는 “구원에로 택하심을 받은 무리의 총수”입니다. 그렇다면 원론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구원받은 모든 사람이 들어가서 영원히 함께 사는 나라라고 할 때 교회는 곧 하나님의 나라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세상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와 전적으로 일치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이 세상 교회에는 우리는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거짓 신자들도 섞여있을 수 있고, 또 다 구원에로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이라 하드라도 아직 그 믿음이 완성되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성령의 역사로 인해서 일생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완성되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와 완전히 일치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가능한 한 하나님나라에 가까워지려고 힘써야 하며, 그래도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거울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믿음이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면 교회 안에는 어차피 믿음이 강한 사람들과 약한 사람들이 항상 섞여있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서로 간에 오해와 긴장과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믿음의 이해와 삶의 모습이 각각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그런 차이와 그 차이로부터 일어날 수 있는 불화와 대립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의와 평강과 희락의 하나님나라(롬14:17)를 보여주는 거울 같은 공동체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도 그 일을 위하여 교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1절을 봅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한다는 말은 믿음이 약한 이들을 비판하지 않고 너그럽게 대하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믿음이 약한 이들의 생각이나 자세나 행동 때문에 짜증나는 일을 참는 것 이상을 말합니다. 그러면 그들의 약점을 담당한다는 말의 구체적인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의미는 바로 뒤따르는 말에서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즉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한 말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강한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 있어서 믿음이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 사이에 생각과 판단이 다를 때 믿음이 강한 사람이 자기 생각이 옳다고 여기고 그래서 옳다고 여기는 자기의 생각대로 행해야 기쁘겠지만 자기의 그 행위 때문에 믿음이 약한 사람이 마음에 근심하게 되고 시험에 들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자기의 기쁨보다 믿음이 약한 이의 기쁨을 택하는 것입니다. 또 다시 반복해서 예로 드는 일이지만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음식물에 관해서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그 음식물을 먹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여기며 그것을 맛있게 먹고 싶지만 그런 음식물은 먹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배려하여 그 음식물 먹기를 삼감으로써 그들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믿음이 강한 이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한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의 행위가 남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함이 없이 자기 좋은 대로 행하지 말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이기주의는 언제나 교회의 평강과 희락을 저해하며 공동체의 일치를 깨뜨리는 악한 요소입니다.
믿음이 강한 이들이 믿음이 약한 이들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들을 기쁘게 하기보다 그들을 기쁘게 하기를 힘쓰라는 것은 그러나 교회가 믿음이 약한 이들이 좌지우지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믿음이 강한 이들이 약한 이들의 약점을 담당하고 그들을 기쁘게 하기를 힘쓰는 것은 믿음이 약한 이들이 옳다고 여기면 옳고 그들이 좋다고 하면 좋은 것이어서가 아니라, 먼저 교회가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의 공동체가 추구하는 것은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 2절에서 쓰기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한 것은 믿음이 강한 이들이 약한 이들의 약점을 담당하고 그들을 기쁘게 하기를 힘쓰는 참 목적이 무엇인지를 적시한 것입니다. 그 목적은 아직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지금 믿음이 약한 상태에서 좋게 여기는 바에 머물러 있지 않고 성숙한 신앙인으로서의 참된 선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그것을 추구하게 되며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덕이 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것을 행하기에 이르게 하는 데 있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이든 약한 사람이든 모두가 공동의 선을 추구하고 공동체의 덕을 세우려는 것, 그것이 믿음이 강한 이들이 약한 이들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들을 기쁘게 하기보다 그들을 기쁘게 하기를 힘써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남을 기쁘게 하기를 힘쓸 것을 권면한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해야 하는 당위성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습니다. 바울이 본문 3절에서 말하듯이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 자신은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라는 그 끔찍한 형틀의 고난과 죽음을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자원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의 모든 것은 자신이 아니라 남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다면 하물며 그로 인하여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된 우리 또한 아주 조금이라도 그를 본받아 행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꼭 같이 십자가에 달려서 혹독한 고통을 겪고 처참하게 죽으라는 것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에만 신경 쓰지 말고 형제의 기쁨을 우선적으로 배려할 줄 알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인은 모두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 뜻을 같이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이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같은 죄인들을 용납하심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다면 우리 또한 서로를 용납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본문 5-7절의 말씀을 봅니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여기서 사도 바울이 원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이 꼭 같은 생각을 하고 꼭 같은 말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바란 것은 모두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하며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아무리 같은 신앙공동체 안에 있다 해도 사안에 따라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고 다른 의견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하며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데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럿이 함께 노래할 때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럿이 노래할 때 꼭 같은 멜로디를 제창할 수도 있습니다. 제창도 때에 따라서는 힘 있고 우렁차서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2부로 혹은 3부로 혹은 4부로 혹은 8부로 노래하며 화음을 잘 맞추면 더욱 아름다운 노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소프라노 파트를 부르는 사람이 알토나 테너나 베이스가 자기와 다르게 부른다고 화를 내고 다른 소리는 못 내게 한다면 합창이 되겠습니까? 각 성부의 합창자들이 모두 지휘자를 바라보며 그의 지시에 따라 같은 곡의 자기 파트를 악보대로 정확하게 부르면 아름다운 화음의 합창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두가 지휘자를 잘 보고 그의 지휘에 따라 노래하면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각자 예수 그리스도를 잘 바라보고 따라가면 조화로운 소리와 아름다움이 있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5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는 것을 말하고, 6절에서는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언급하며, 7절에서는 “서로 받으라.” 합니다. 모두가 같은 생각, 같은 의견, 같은 말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뜻이 같고 마음이 같으며 서로 다른 상대를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한 가족입니다. 한 가족 안에서도 다 같은 부모에게서 나왔는데 어쩌면 그렇게 제 각각 다른지 모르는 형제나 자매나 남매들이 있습니다. 성격도 취미도 다 다릅니다. 무슨 일에 있어서나 합의에 이르기가 보통 힘든 일이 아닐 때가 흔합니다. 같이 식사를 하자 하다가도 누가 양식당에 가자 하면 꼭 중국집에 가자는 사람이 있고 중국집에 가자 하면 꼭 냉면 먹으로 가고 싶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매일 같이 지지고 볶고 하는 집안이지만 엄마 아빠를 사랑하는 마음들은 다 같아서 마지막에는 엄마 아빠 좋아하시는 데로 가자 하면 드디어 합의가 이루어지곤 합니다. 서로는 생각이 각각 다 달라도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과 부모를 바라보고 그들이 원하시는 바를 따르려는 뜻에서 일치함으로써 결국은 하나가 되곤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화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장 확실한 길은 교회의 구성원 모두가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를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가 창립 124주년을 맞는 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교회가 우리 자신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모습으로 서있을 수 있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기 위하여 사도 바울을 통해 주신 주님의 권면을 다 같이 진지하게 가슴에 품고 힘껏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 권면이란 믿음의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서로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라는 것이고, 화평의 일과 덕 세우기를 힘쓰라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보다 남을 기쁘게 하기를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또한 더욱 높이 비상하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오늘을 <귀빈초청감사예배>를 드리는 주일로 준비했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이 교회를 찾으신 귀빈 여러분, 또 오래간 만에 다시 이 예배에 참석하신 교우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교회는 좋은 곳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교회는 구원의 진리가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무엇인지, 구원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혼돈스러운 세상과 달리 분명하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그에게서 구원의 복음을 듣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섬기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는 상관도 없고 부하도 없습니다. 사회적 지위나 소유의 크고 적음에 따라 구분되는 좌석이 없는 곳입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일 뿐입니다. 공연장이나 비행기 안에서처럼 일등석이나 이등석의 차별이 없습니다. 모두가 서로를 사랑하고 먼저 섬기기를 기뻐하도록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다 부족합니다. 완벽하지 않습니다. 다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아 기쁨과 감사함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우리가 이 좋은 교회에 나온 것은 우리 자신의 결단에 의한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원에로 선택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천국이 우리의 것으로 예비된 것입니다. 천국은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서라도 소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귀한 선물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 천국의 삶을 즐겨야 합니다. 교회생활은 천국의 삶의 시작이며 완성될 하나님나라 삶의 연습입니다. 이 새문안교회에서 우리 함께 그 삶을 나누며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너희도 서로 받으라
로마서 15:1-7 / 윤영택 목사
지난 주일에 고린도전서 8장을 중심으로‘사랑은 덕을 세운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말씀에 대한 확신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같은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강한 믿음과 약한 믿음이 있는데 강한 믿음은 약한 자들을 업신여기거나 양심에 상처를 주면서 자기 자유를 누리지 않아야 합니다. 자유보다 더 우선되는 것은 사랑입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나보다 연약한 형제를 위해 덕을 끼치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우상의 음식을 먹는 일로 의견이 나뉘었을 때 자유와 사랑이라는 원리를 따라 서로 하나가 되라고 권면했습니다.
우상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님을 아는 성도는 우상에게 드려졌던 어떤 음식이라도 거리낌 없이 먹어도 된다는 확실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혹시라도 그런 지식이 없어 양심에 거리낌을 가진 연약한 형제가 있다면 그 형제가 나의 자유 때문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나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라 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나를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바울은 이런 원리에서 연약한 형제가 음식 때문에 실족하게 된다면 나는 그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라도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전했던 이 원리를 로마에 있는 교우들에게도 보냈습니다. 로마서 14장에서 이러한 내용을 설명한 다음 오늘 읽은 본문 15장에서 다시 한 번 확인시킵니다. 이제 여러분은 갈라디아서와 고린도전서 그리고 로마서가 각각 비슷한 원리를 다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유는 나의 육체를 기쁘게 하는 기회로 삼을 것이 아니라 보다 연약한 이웃을 섬기고 덕을 세우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 1, 2절에 이 원리가 요약되었습니다. 첫째,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합니다. 둘째, 나의 기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여 선을 이루고 덕을 세웁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사랑의 법입니다.
첫째 원리를 살펴봅시다. 믿음이 강한 자는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합니다. 이런 원리에서 바울은 약한 형제들을 위해 고기를 먹지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며 무엇이든지 형제를 거리끼게 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롬14:21).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안에 있는 사람은 삶의 목적이 이렇게 바뀝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내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또한 이웃을 사랑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생명, 건강, 시간, 물질, 재능 등 이 모든 것은 나를 위해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이웃과 나누며 살라고 맡겨주신 선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것만 확실히 알고 행하면 우리의 삶이 더욱 풍성해지고 하나님 나라가 더 아름답게 세워져 갑니다.
우리를 강하게 하심은 나를 자랑하고 힘을 과시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너의 힘을 과시하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원리는 그와 반대입니다. 없는 사람 앞에서 믿음을 자랑하며 돈을 자랑하고 지식을 뽐내며 권세를 부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약한 자들을 섬기고 그들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주셨습니다. 믿음이 약해 실수하고 넘어지는 형제를 보면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고 상한 곳을 만져주는 것이 믿음이 강한 사람이 할 일입니다.
형제의 약점을 들추어 내고 만인 앞에 폭로하여 약한 자를 아주 넘어지게 하는 것은 강자의 힘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아내와 남편의 약점을 이사람 저사람들에게 알려 흉보지 말아야 합니다. 쌓인 스트레스 푼다고 시댁의 약점, 처가의 약점을 여기저기 떠벌이고 다니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 아닙니다. 내 가족의 약점은 내가 보호하고 사랑으로 함께 져야 할 짐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가족들도 서로의 약점을 나누어 짐으로 함께 세워져가야 옳습니다.
둘째로, 강한 사람은 그 강함을 자신의 기쁨이 아니라 이웃의 기쁨을 위해 사용합니다. 내 손에 있는 돈으로 맘껏 사고 먹고픈 것 맘껏 먹으며 누리고픈 것 맘껏 누려 나의 기쁨을 만족시키는 것이 자유가 아닙니다. 나를 기쁘게 하려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더 크고 더 좋은 것 가지고 싶고 그래서 사람들 앞에 내가 가진 것 자랑하픈 욕망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런 악한 본성에 굴복하여 오로지 나의 기쁨만을 위해 살아야 하겠습니까?
내 손에 있는 돈과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든지 그것은 나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자유를 나 좋을대로만 사용하지 않고 이웃을 돌아보아 나눔으로 선용하길 원하십니다. 희년운동은 더 많이 소유한 사람들이 사회의 약자들에게 나눔을 실천하자는 운동입니다. 개인의 소유가 늘어나고 재산이 확장되는 것을 강제로 통제하고 몰수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무 많이 가졌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누려야 할 행복의 터전을 빼앗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희년운동은 가난한 사람,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에게 자발적인 나눔을 실천하는 정신입니다. 일하지도 않고 놀고 먹는 게으른 사람에게 무조건 퍼준다는 말이 아니라 일하고 싶지만 기회조차 얻지 못하여 주저앉은 사람들에게 일할 수 있는 터전, 일하는 보람을 얻는 기회를 나누는 것이 희년의 정신이며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함입니다.
지하철 역과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칼을 휘두르는 묻지마식 범죄가 사회를 두려움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에게 무차별 칼부림을 한 사람은 해서는 안될 짓을 저질렀습니다. 아무리 내 처지가 불운하고 힘들어도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식으로 자기 울분을 풀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나오도록 절망감과 패배감을 안겨준 이 사회도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가진 것으로 자기 배만 채우고 도에 넘치도록 과시하며 배우지 못하고 가지지 못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회 분위기가 우리 사회를 갈수록 병들게 합니다. 약자들이 희망을 갖지 못하도록 무참하게 짓밟는 강자들의 차가운 시선과 거만한 태도는 약자들로 하여금 분노를 폭발하게 만듭니다. 갈수록 무서워지는 세상을 탓하며 나를 방어려고 더 많은 돈과 학력과 지위로 더욱 높고 견고한 방어벽을 쌓으려 하기 전에 이웃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가지는 일부터 먼저 시작해야 합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라는 것이 무조건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나쁜 일인 줄 알면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아첨하기 위해 가담하고 협력하는 것은 이웃을 기쁘게 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도덕적인 삶이나 휴머니즘에서 나오는 선행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이 전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는 도덕과 윤리차원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나온 명령입니다. 바울은 3절 이하에서 그것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하셨으니 우리도 그를 본받아 그렇게 살아야 마땅합니다. 이것이 분명하지 않으면 내가 나의 강한 믿음으로 나의 자유를 절제하여 나를 기쁘게 하지 않고 이웃을 기쁘게 하는 희생적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하며 교만해 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빚진 사람들입니다. 내가 먼저 받은 갚을 수 없는 큰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의 빚을 이웃에게 갚으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람으로 오셨고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사양하고 세상으로 오신 주님은 죄인들을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자기에게 좋은 대로만 사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기쁨을 위해 하늘의 권세를 내려놓으신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용서하신 것처럼,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대로 우리가 서로 용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주님이 먼저 손을 내미셨기 때문에 내가 오늘 이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연약한 자들, 실패한 사람들을 향해 자업자득이니 인과응보니 하는 식의 차가운 평가를 내리는 것보다 이웃이 겪고 있을 아픔을 이해하고 함께 나누는 마음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고인이 되신 하용조 목사님의 로마서 강해설교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용서했다면 여러분도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했다면 사랑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미움이 아니고 사랑이며 정죄가 아니고 용서입니다. 잘못은 고쳐져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고쳐져야 합니다. 비판이 아니고 사랑이며 정죄가 아니라 격려로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용서하셨는데 왜 우리가 안된다고 합니까? 우리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주님이 하셨으니 우리도 용서하고 서로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무신론자 이어령 박사가 기독교인으로 회심했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마음이 즐거웠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정반대의 기사를 읽었습니다. 본래 기독교인이었다가 불교로 개종한 사람이 어느 기독교계 신문 기자와 인터뷰한 내용인데 그 기사를 보며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보는 듯하여 가슴이 답답하였습니다. 어릴적부터 신앙생활을 했고 길거리 전도의 열심도 있었던 사람인데 일본으로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얻었고 사회적으로 괜찮은 위치에서 일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 자유함이 없어 갈등하다가 다니던 교회를 떠나 성공회 교회를 찾아갔지만 거기서도 답을 얻지 못하고 선불교 선방에서 삼천배를 한 후 비로소 하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기사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소개합니다.
“나는 죄인이라는 말이 싫었다. 기독교 신앙이 나에게 한계가 있었던 것은 좀 더 자유로운 삶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쳇바퀴 돌듯이 만들었다. 복을 받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기 때문에 그런 신앙이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 교회를 떠났다고 예수를 버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교회에서 가르쳐 주지 않은 예수를 만나고 싶었다. 성공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못난 사람들을 껴안은 분이다. 각자 깨달음을 통해 그분과 하나가 되고 내가 온전한 사람이 되는데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가 됨이다.”
그 글을 읽으며 오늘날 한국교회의 병폐와 헛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 같아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느끼며 가슴이 저리도록 아팠습니다. 잘못된 가르침을 받으며 자란 그 마음 속에 자리잡은 비진리의 악영향이 이렇게 한 영혼을 병들게 하였습니다. 그는 그 교회에서 자라고 배우는 동안 나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아니라 예수 믿고 성공해야 한다는 성공철학과 성공했다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었습니다. 자신 뿐 아니라 주위에 있는 다른 교우들의 불완전한 모습을 보며 자유와 평안이 없었던 그는 성경의 진리가 무엇인지 예수님과 나의 관계가 무엇인지 제대로 정리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교회를 떠나버렸습니다.
그렇게 목말라 찾았던 진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지 못하고 사람에게서 찾으려다 실패하고 실망한 전형적인 예입니다. 선불교에 몸담아 생각과 마음을 텅 비우는 자유로움 속에서 내가 원하던 방식의 대답을 들었을 때 이제야 진리를 터득했다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던 사람이 자신이 원하던 진리를 자신이 원하던 방식으로 만났을 뿐입니다. 어쩌면 그가 처음부터 원하던 자유와 진리는 그런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비결을 가르쳐 주고 그런 사람을 높여주며 그것이 구원과 복인 것처럼 선전하라고 세워진 기관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의 승리를 선포하며 그 이름으로 죄씻음 받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비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그리스도를 닮아 사는 법을 배우는 기관입니다. 성공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그 길은 고난과 시험과 낮아짐과 섬김 그리고 십자가의 길이며 부귀영화나 성공 신화를 간증하기 위해 정상을 향해 줄달음하는 길이 아닙니다.
그런데 선불교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그분은 교회의 의미나 구원과 자유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을 겨를도 없이 성급하게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가 다니던 지역 교회를 떠날 수는 있지만 교회의 주인과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을 만날 길이 없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가 만났다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그의 마음 속에 들어온 다른 신지식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다녔던 교회에서 그리고 영국의 성공회를 출석하는 동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주장하고픈 것은 결국 선방에서 깨달음을 통해 발견한 자기 자신이 구원의 시작이고 구원 그 자체였습니다. 그것이 불교가 말하는 참나, 참자아이며 부처라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 혹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길은 선불교가 기독교와 다를 바가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외면하고 비본질적인 것에 집착하여 연약한 믿음을 병들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본질은 성경이 확실하게 제시하는 내용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은혜가 본질이라면 비본질적인 것은 무엇을 먹고 마시느냐, 어느 날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냐와 같은 부차적인 문제들입니다. 어떤 식으로 찬송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할까, 예배는 한 시간이면 될까 두 시간을 드려야 할까 이런 비본질적인 부분에서 서로 견해가 다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와 고린도에 있는 교우들에게 이런 비본질적인 문제로 서로 갈라서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며 본질적인 주제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라 당부합니다.
예수 믿으면 성공해야 하고 정상에 올라서야 하며 부자가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주장은 복음의 본질이 아닌 성공철학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데간데 없고 비본질적인 성공철학이 난무하여 성공하지 못한 한 영혼을 초조하게 만들고 방황하게 하는 교회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그 책임이 큽니다. 성공신학, 성공복음에 사로잡힌 많은 사람들이 남들처럼 성공하지 못하여 바닥을 헤맬 때 불안과 죄책감에 억눌려 쓰린 가슴을 안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거기에 참 자유가 있겠습니까? 내가 소속한 교회가 지향하는 목표에 적극 동참하지 못하고 목표달성을 위해 내가 기여한 것이 미미하다 생각될 때 밀려오는 죄책감과 부담은 자유와 평안함을 빼앗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만나기도 전에 먼저 교회에 와서 부딪히는 복잡한 인간관계와 시간, 물질의 부담은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을 낳고 나를 그리스도로부터 더 멀어지게 합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에 염증과 불만을 가지고 떠나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앞에서 언급한 사람이 ‘나는 교회는 떠났어도 예수를 버린 것은 아니다’ 라고 했지만 결국 교회가 아닌 다른 공동체 그것도 선불교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다고 당당하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몸담고 있던 지역교회가 불완전했다면 그보다 건강한 교회를 찾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영국 성공회를 찾아갔는데 거기서도 답을 얻지 못해 결국 교회를 떠났다고 하니 그가 원하던 교회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나는 죄인이라는 말 듣는 것이 싫었다고 했는데 내가 죄인이라는 깨달음이 없으면 당연히 자신의 죄 문제에 대하여 깊은 고뇌도 없고 내 죄를 대신하신 그리스도가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로운 사고의 날개를 펼치고 현세와 상상의 세계를 넘나들다 어느 순간 내가 신과 하나가 되었다는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가 교회에 실망하고 떠나야 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만나야 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전히 나누고 전하는 교회다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믿음이 강한 자도 약한 자도 함께 주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고 서로 용납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고학력자와 저학력자, 고위직에 있는 사람과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주 안에서 한 가족으로 받아져야 합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강한 자가 약한자의 약점을 담당하며 자기의 기쁨을 위해 살지 않고 다른 사람의 기쁨을 위해 살 때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복음의 내용입니다.
사회에서 발생하는 많은 범죄행위 배후에 없는 자와 낮은 자들을 향한 가진 자들의 거만함과 무자비함이 자리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사회의 약자들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질 수 없습니다. 너희가 게으르고 무지하며 성실하게 일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람들 때문에 내가 귀찮고 불편하다 불평할 것이 아니라 나만큼 누리지 못하는 이웃의 연약함을 돌봐주는 행동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이 <로마서 강해>에서 ‘본질적인 것들에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들에서는 자유를, 모든 것에서 사랑을’이라는 글귀를 인용했습니다. 너희가 서로 받으라는 말씀은 이 원리를 실천할 때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은혜 같은 본질적인 문제가 공격을 받을 때 서로 마음이 일치해야 하지만 삶의 방식에 서로 다른 견해가 있을 때는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되 서로의 양심을 존중하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사랑은 약한 형제를 위해 나의 자유를 절제하는 데까지 이릅니다. 우리 주님이 바로 이런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하늘 영광을 버리고 우리를 위해 낮고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받아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이었던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께서 나를 받으셨으니 나도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결함이 있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 받으시며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받으시고 복 주신 것은 나의 유익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나를 부르신 까닭은 나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복을 나누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부르는 축복송 ‘당신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축복의 통로, 당신을 통하여서 열방이 주께 돌아오게 되리… 당신을 통하여서 열방이 주께 예배하게 되리’라는 가사를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복을 나누시고 기쁨을 주며 그리하여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십니다. 이런 귀한 사명을 받은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이웃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아보며 서로 용납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한 주간 주의 은혜 속에 평강 넘치기를 바랍니다.
힘
로마서 15:1-7 / 최성규 목사
힘의 원천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주 만물의 운행을 계획하시고 이끄십니다. 오직 하나님께만이 창조의 힘, 운행의 힘, 섭리의 힘이 있습니다. 힘의 원천이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도 힘을 주십니다. 성경말씀을 통하여 힘을 주시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힘을 주시고, 성령님을 통하여 힘을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세상 모든 만물에도, 세상 모든 사람에게도 힘을 주십니다. 갓난 아기가 젖 먹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하나님이 그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개개인에게만이 아니라, 가정에도, 교회에도, 나라에도 힘을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힘을 키워야 합니다. 힘을 키우는 것만큼, 낭비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마음속에 갈등과 고민이 있으면, 힘이 낭비됩니다. 가정공동체, 교회공동체, 사회공동체, 직장공동체, 나라공동체에서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면, 힘이 소진됩니다. 우리는 힘 있는 사람, 힘 있는 나라가 되기 위해 자신의 힘이 무엇인지 알고, 그 힘을 바른 방향으로 분출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힘을 바르게 쓰는 방법에 대해 알아봄으로, 힘 있는 사람, 힘 있는 대한민국이 됩시다.
첫째, 강자의 힘
강자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힘이라고 해서 다 힘이 아닙니다. 힘은 잘 조절할 때, 진정한 힘이 됩니다. 조절되는 불은 기계도 돌리고, 국도 끓이고 밥도 짓습니다. 그러나 산불과 같이 조절되지 않는 불은 재산과 생명을 앗아갑니다. 마찬가지로, 강자라고 힘을 조절하지 않은 채 마음대로 써서는 안 됩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힘을 써서도 안 됩니다. 강자의 진정한 힘은 힘을 덜 쓰는 것입니다. 강자로서 힘을 덜 쓰는 것은 두 가지 의미입니다. 하나는, 자신을 위해서는 힘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엄청난 힘이 있으셨지만,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위해 힘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를 위해 기적을 행하지도 않으셨고, 제자들을 부리지도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롬 15:3)라고 증거합니다. 자신을 위해 힘을 쓰지 않은 것은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고전 9:12)고 고백합니다.
강자로서 힘을 덜 쓴다는 것의 또 다른 의미는 약한 자를 위해 힘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고 말씀합니다. 강한 자는 자신보다 약자를 낫게 여겨야 합니다. 물도 아래로 흐를 때, 바다가 됩니다. 가는 곳마다 살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물이 고여 있으면 썩습니다. 물은 흐를 때, 생명수가 되는 것입니다. 강한 자도 이처럼 힘이 아래로 흐르게 해야 합니다.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가 시끄럽습니다. 뉴스를 볼 때마다, 얼마나 답답한지 모릅니다. 강자들의 힘이 조절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조화와 타협은 없고 대치만 있습니다. 약점을 담당해주기보다는, 약점을 물고 늘어집니다. 교회가 기도해야 합니다. 산불은 꺼지고, 생명수가 흐르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국가지도자들이 성령충만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방향을 잡아주시면, 힘이 힘을 얻어 많은 이에게 유익과 희망을 줍니다. 대한민국의 국력이 올라가고, 대한민국의 국격이 세워집니다.
둘째, 약자의 힘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약자이셨습니다. 강하신 예수님이 그렇게 매 맞으시고, 가시관 쓰시고,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셨습니다.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조롱하고 무시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가장 약하실 때, 가장 큰 일을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면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류의 구세주로서, 하나님 아들로서 하실 일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도 약자였습니다. 사도들은 배운 것도, 금과 은도 없었습니다. 제대로 된 조직이나 건물도 없었습니다. 강한 자들의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약한 초대 교회가 당대 최고로 강한 나라였던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했습니다. 약자의 힘은 약함입니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상대의 강함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인정해야 바른 길이 보입니다. 강한 자를 비난하고 끌어내리려고 하면 둘 다 죽습니다. 누구 탓만 하는 사람에게는 변화도 없고, 발전도 없습니다.
약함은 약함이 아닙니다. 약하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것이 진정 약한 것입니다. “난 약해”라고 하면서 포기하거나, 도움받기만을 바라는 것이 약한 것입니다. 약하다고 비굴해지거나, 비참해지지 맙시다. 우리에게는 약할 때 강함 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의 편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고와와 과부의 아버지이십니다(시 68:5). 하나님은 약한 자를 찾아 오셔서 능력을 주시고, 치료하시고, 해결하시고, 복 주십니다. 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은 강함 되십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고 증거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약할 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납니다(고후 12:9). 성령이 거하시면 우리는 약한 자가 아니라, 힘 있는 자가 됩니다. 힘 있는 자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기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계시기에 우리는 승리할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고후 4:8,9). 우리는 넘어질 수는 있어도 망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늘 승리합니다.
셋째, 더 강한 힘
성경은 구원의 책입니다. 동시에 성경은 교훈의 책입니다(롬 15:4). 많은 교훈 중에서도 구약성경이 우리에게 중요하게 교훈하는 것이 있습니다. 화합과 연합이 ‘더 강한 힘’이라는 것입니다(시 133:3 전 4:12).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입성했을 때, 철옹성 여리고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여리고 성을 돌자, 그 성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여리고 성을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의 아이 성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방심했습니다. 아이 성을 너무 쉽게 보고 연합하지 않았습니다. 욕심에 눈 멀어 아간이 사리사욕을 채웠습니다. 한 마음이 되지 못한 결과 그들은 우습게 여긴 아이 성에서 무너졌습니다. 작은 틈이 땜을 무너지게 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로마 교회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바울의 간절한 기도제목은 화합과 연합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롬 15:5,6)고 증거합니다. 성도들이 연합할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더 강한 힘이 생기고, 그 힘으로 더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마가다락방에 힘이 없는 사람, 120명이 모였습니다. 그들이 마음이 하나 되어 기도할 때, 오순절 날 성령이 임했습니다. 120명 모두가 다 성령세례 받았고, 성령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세워졌고, 전 세계로 복음을 들고 나갔습니다. 우리도 더 강한 힘을 원한다면, 연합해야 합니다. 연합과 화합의 첫걸음은 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롬 15:7). 성령이 계시는데도, 화합이 되는 공동체가 있고 그렇지 못한 공동체가 있습니다. 이는 서로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우리를 예수님이 받아주셨듯, 우리도 서로 따뜻하게 받아주고 맞아들입시다. 차이점만 찾으려 할 것이 아니라, 공통점에 주목합시다. 논쟁하지 말고 대화합시다. 연합하고 화합하는 것이 가장 큰 힘이고, 가장 큰 행복입니다.
힘은 두 얼굴을 가졌습니다. 힘을 모으면, 나도 살고 남도 살립니다. 그러나 힘을 남용하면, 나도 죽고 남도 죽이는 일이 일어납니다. 서로 힘을 모음으로 같이 살고, 힘을 모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힘을 모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성도의 매력과 하나님의 영광
로마서 15:1-6 / 송기성 목사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2010년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가장 신뢰하는 종교기관 평가에 있어 카톨릭 교회는 41.4%, 불교(사찰)는 33.5%, 개신교회는 20.0% 세 번째로 나타났습니다. 심지어 개신교인들 중에서도 개신교회를 가장 신뢰한다고 답한 비율은 47.5%로 절반에 못 미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 매력을 상실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일찍이 인간의 진정한 매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성도로서의 삶에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내면적이고 영적인 것이며,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성도의 매력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그 향기를 드러냅니다. 반대로 매력이 없는 교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됩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 자신을 “예수 중독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로 살고 예수로 죽기까지 그는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주님을 본받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진정 매력 있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시급한 과제는 바로 성도의 매력을 회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인 줄 믿습니다.
1.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며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해야 합니다.
로마서 15:1-2의 말씀입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교회에는 믿음이 강한 사람이 있고 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강한 사람이라고 해서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에게도 약점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약한 사람이라고 해서 강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에게도 강점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장점만 있고 단점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단점만 있고 장점이 전혀 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마다 다 일장일단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약점을 담당해야 합니다.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며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 이웃을 기쁘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행복해집니다.
뉴욕 메츠(Mets) 프로야구 팀의 투수 팀 버그(Tim Burke) 선수의 미담입니다. 이 젋은 부부는 몸이 약한 아이들을 입양하여 자기 아들 딸로 키우고 있습니다. 첫 딸인 스테파니는 한국 고아인데 미숙아로 태어나 본래 허약한데다 심장 수술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둘째로 입양한 아들 라이안은 과테말라의 고아로서 갑상선에 문제가 있으며 정신질환의 가능성도 갖고 있습니다. 셋째로 입양한 딸 니콜은 한국 고아인데 나면서부터 오른 손이 없는 아이입니다. 왜 하필이면 이런 아이들을 입양하여 사서 고생을 할까? 버크 부부는 이런 물음에 대해서 아주 감동스러운 대답을 했습니다. “분명히 우리 부부는 이 불쌍한 세 아이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으면 죽을 아이들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 아이들을 키우면서 깨달은 것은 오히려 이 아이들이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아이들은 우리에게 감사를 알게 하고, 행복을 깨eke게 하며, 고통을 극복할 힘을 주고, 참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약점을 비난하거나 외면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과 질고 등의 약점을 대신 담당해주신 것처럼 다른 사람의 약점을 마땅히 담당해야 합니다. 여기서 “마땅히”(오테일로멘)라는 말은 “빚지다”, “의무가 있다” “해야만 한다”(must)는 뜻입니다. 그리고 “담당한다”(바스타제인)는 말은 그 약점을 대신 짊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의무사항입니다. 그러기에 사도바울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라고 명하였던 것입니다. 맞습니다. 짐을 서로 지는 사람 곧 약점을 서로 담당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법 곧 사랑의 법을 성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약한 자를 기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참으로 매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줄 믿습니다.
2. 비방하는 자의 비방에 대해서 인내와 위로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로마서 15:3-4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누구에게나 칭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비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전에 “비방”이란 “남을 헐어서 욕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솔직히 칭찬받는 것을 좋아하고, 비방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칭찬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남을 칭찬하는 데에는 인색하고 비방하는 일에는 부지런한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제사장과 장로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비방을 당한다는 것은 불쾌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모든 비방을 참고 견디어내셨습니다. 그러기에 사도바울은 시편69:9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사람들의 비방과 비난에 부딪혀 오해와 중상을 받게 되지만 성경이 주는 교훈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인내와 위로로 소망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내가 없으면 소망도 이룰 수가 없으며, 위로가 없으면 소망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예수그리스도는 인내와 위로로 소망을 이루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를 본받아 인내와 위로로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어떤 시련과 고난 중에서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그 이웃을 기쁘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소망찬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양정신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1920년 황해도 송화에서 출생한 양 목사님은 여섯 살에 열병으로 시력을 잃었습니다. 그 후 그녀는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수없이 원망하고 좌절했습니다. 심지어 가족들도 그렇게 보았습니다. 그녀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쓸모없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하오리까?” 그때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딸아, 네가 눈은 보이지 않으나 귀는 들리지 않느냐? 입으로 말은 할 수 있지 않느냐? 머리로 생각할 수 있지 않느냐? 손을 쓸 수 있지 않느냐?” 그녀는 믿음으로 대답했습니다. “오 하나님, 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나이다.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겠나이다. 머리로 하나님을 생각하겠나이다. 손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겠나이다.” 그 후 그녀는 1948년에 한신대학교, 1956년에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 1960년에 페퍼다인대학원을 졸업하고, 1977년에는 기독교장로회에서 최초의 여성목사가 되어 교회를 개척한 목회자로, 교수로, 사회사업가로, 특히 시각장애인들에게 희망의 빛을 안겨주는 봉사자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랑스런 숭의인 상”과 “한신상”을 받기도 한 그에게 붙여진 존칭은 “한국의 헬렌켈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은 자기를 비방하는 사람들의 비방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불행한 현실에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은 오히려 그 역경에서 인내를 익히며,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며,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소망의 빛을 비추어 주는 삶을 보여줍니다. 그러기에 사도바울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맞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의 매력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데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 환난은 절망이 되지 않고 오히려 인내와 연단과 소망을 이루는 축복이 됩니다. 그러므로 비방하는 자의 비방에 대해서 또는 온갖 편치 않은 시련에 대해서 인내와 위로로 소망을 갖는 사람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며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참으로 매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줄 믿습니다.
3. 서로 뜻을 같이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로마서 15:5-6의 말씀입니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사도바울은 아예 하나님을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God, the source of patience and encouragement)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서로 뜻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서로 뜻을 같이하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인내와 위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게 해주셔야 가능합니다. 맞습니다. 한 마음과 한 뜻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도시마다 거리마다 그 특유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소개된 미네소타주의 도시 “하모니”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도시를 형성하게 되자 주민들이 그 도시의 이름을 지으려고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많은 제안이 있었습니다만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습니다. 모임이 지루해지고 언성도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밤늦도록 계속된 모임은 더 이상 참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참석자 중 한 사람이 견디다 못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치며 제발 좀 일치와 화합을 이루자는 뜻에서 “Let us have harmony! "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그 말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Yes, Let's have harmony!"하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래서 그 뜨거운 논쟁을 그치고 도시의 이름을 “Harmony, Minesota"로 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은 자기주장만을 고집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은 서로 뜻을 같이 하여 화합과 일치를 이룹니다. 거기에는 십자가 신앙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성령의 역사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 신앙이 있는 곳에는 화합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일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바울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Do your best to preserve the unity which the Spirit gives by means of the peace that binds you together. 엡4:3)라고 명하였던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지켜야 할 것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 의 하나 되게 하신 일치와 화합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서로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은 화합과 평화를 이루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참으로 매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줄 믿습니다.
성도의 매력과 하나님의 영광,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며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십시다. 비방하는 자의 비방에 대해서 인내와 위로로 소망을 가지십시다. 그리고 서로 뜻을 같이하여 화합과 일치를 이루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너희도 서로 받으라
로마서 15:1-7 / 배 혁 목사
우리가 지난 주일에 믿음에 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간청합니다. “예수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지만, 그러기에는 자신들의 믿음이 부족함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상태를 늘 점검하며, 우리의 믿음이 비록 겨자씨보다 작을 지라도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날마다 성장하여서, 장성한 믿음의 분량을 이룰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로마에 있는 교인들의 믿음을 살피면서, 어떠한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교회들이 그렇듯이, 로마교회도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특별히 로마는 역대 최강의 제국이었던 로마제국의 수도였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세계의 사람들이 그 길을 따라 로마에 왔고, 로마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교회 안에도 다양한 생각과 문화, 생활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상태도 다양하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그 다양함을 하나로 묶어 낼 수 있었던 것은, 6절의 말씀과 같이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다양함 속에서 사도바울은 한 마음과 한 입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다양한 모습들이 있어서 서로 다를지 모르지만, 그 모습가운데서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고, 하나님 만이 세상의 참된 신이요, 존귀하신 분임을 드러내는 데는 한 마음과 한 입술로 그 일들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은, 믿음이 강하던지, 약하던지에 상관없고, 살아가는 모습이 아무리 차이가 나더라도 모두가 공통적으로 이루어야 할 삶의 목표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로마교인들이 일치하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7절의 말씀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서로를 받다'라는 것은 서로를 영접하고, 환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한 마음과 한 입술로 영광돌리는 일들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받고 환영할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는 무관하게, 하나님만 잘 예배하고 내 신앙만을 지킨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차이가 있고 다름이 있음에도 서로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서로를 용납하고, 그러한 모습을 통해서 또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곳에 계시는 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서로 꼭 필요하신 분들입니다. 서로를 받는 것은 개인의 이해관계를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러한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이제 서로를 받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떠한 방법으로 서로를 받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서로를 받으라는 것은 서로의 약함을 담당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강한 부분이 있고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한국의 지하철의 좌석을 보면 노약자 보호석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지하철에 이러한 노약자 보호석이 있다고 합니다. 연로하신 분이나, 임산부들, 장애인들은 육신적으로 약한 사람에 속하기 때문에 그들이 우선적으로 않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서 그들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강함을 가지고 약한 사람의 자리를 뺏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을 배려하는 것이 선하고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
그런데 믿음생활을 하면서도 이런 류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사도바울은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 해야 할 일 중에 하나로, 믿음이 약한 사람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믿음이 강한 사람으로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강함으로, 믿음의 약한 자들의 약점을 담당하고, 그들을 받아줄 작정이 되어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믿음의 강함과 약함을 예로 들 때에, 고기를 먹고 못 먹고를 예로 들었습니다. 그 당시에 시장에서 파는 고기 중에는 이방신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에 우상의 제물로 쓰였던 고기들이 팔리기도 했습니다. 그러기에 그 고기를 대하는 두 가지 입장이 있었는데 그 입장에 따라 믿음이 강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구분을 하기도 했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고기를 대할 대에, 고기가 비록 우상에게 드려진 것일 수도 있지만, 어차피 우상은 의미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마음에 거리낌없이 먹으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약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시장에서 파는 고기 중에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가 있으니, 그것이 마음에 걸려서 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를 먹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을 수 있고, 못 먹고 하는 것으로 믿음이 강하다거나 약하다고 절대적으로 구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이러한 상황에서 약한 자들의 연약한 부분을 비난하지 않고, 그것을 담당하고 수용하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6:16절에서,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믿음의 강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유익에 따라서 절제하며 살았는데, 그 유익은 자신의 유익이 아닙니다. 연약한 자의 믿음이 강건해 질 수 있도록 연약한 자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의 유익을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약한 자든, 강한 자들, 모든 교회의 사람들이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를 힘썼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바울을 믿음이 강한 자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에 있던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스스로를 절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강한 자의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그 약점까지도 담당할 수 있고,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진정으로 성도가 가져야 할 믿음의 강함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 이전에, 이미 믿음이 강한 자나, 약한 자, 모두를 받으신 분이 있으십니다.
로마서 14:3절에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고기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나 모두 하나님께서 먼저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바울도 그러한 하나님을 따라 다른 이들의 약점을 담당했던 것입니다.
또한 성육하신 예수님도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심으로 우리를 받으셨습니다.
이사야서 42장은 앞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글입니다. 그런데 메시야의 성품을 말할 때에 42:3절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의 연약함을 아셨습니다. 그러기에 그 상함을 고쳐주시고 치유하여 주셔서 다시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꺼져가는 등불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그 등불을 꺼지지 않도록 보호하시고 불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병이 들어 죽어가는 인생, 연약한 인생을 꺾거나 끄지 않으셨습니다. 죄를 지었으니 마땅히 죽을 죄인이라고 방치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셨습니다. 죄로 병들어 죽어가는 저와 여러분을 고쳐주시고, 살려 주시고 구원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있습니까? 예수님 앞에 나오십시오. 예수님 앞에 내려 놓으시고 아뢰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 연약함을 비판하며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불쌍히 여기시며 치유하여 주시고 새롭게 세워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믿음으로 세워주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한 마음과 한 입술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2. 그리고 서로 받으라는 것은,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서로의 약점을 담당할 뿐만 아니라, 이웃을 기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의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상대방을 기쁘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상대방에게 선하지 않고 덕이 되지 않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그 모범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마태복음 3:17절에,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세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뜻하심을 이루고자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다가 모습이 희게 변하셨던 변모산 사건이 마태복음 17장에 나옵니다. 그 때에 그들을 덮은 구름속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 되었던 분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쁨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죄로 인해서 죽는 것을 막으셨고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이것이 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기쁜 소식, Good New 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기쁨을 위해 사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또한 죽어가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시고자 자신을 내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예수님의 기쁨이었습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 목사님의 생애를 보면 이웃을 위해서 많은 헌신을 하시며 사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감리교회를 시작하신 웨슬리 목사님은 특별히 주변에 소외된 이웃들을 기쁘게 하신 분이었습니다. 가난한 이웃들에게 더 많은 도움을 주기 위해서 자신의 씀씀이를 줄이며 사셨습니다.
이웃을 구제하기로 결심한 첫해에 삼십 파운드를 벌어 이십팔 파운드를 생활비로 쓰고 이 파운드를 구제로 썼습니다. 다음해에는 수입이 배로 늘어 육십파운드를 벌었고, 여전히 이십팔 파운드만 생활비로 쓰고 삼십이 파운드는 이웃을 구제하는데 썼습니다. 셋째 해에 수입이 구십 파운드로 뛰었으나 역시 생활비는 이십팔 파운드만 쓰고 육십이 파운드는 구제했습니다. 넷째 해는 백이십 파운드를 벌어 다시 이십팔 파운드만 생활비로 쓰고 구십이 파운드는 가난한 이웃에게 주었습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 자신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서로를 기쁘게 해 주십시오. 그것을 위해서 헌신하십니다. 그것이 서로를 받는 일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3. 서로를 받는 일은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서로를 받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사람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사람들을 기쁘시게 하시고자 이 땅 가운데서 고난과 죽으심을 당하셨지만, 도리어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예수님께 미쳤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예수님을 향해서 죽이라고 고함을 지르며 거짓으로 비방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받으며 연약함을 담당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고자 살아갈 때에 자신도 이를 행하는 것이 쉽지 않고, 상대방도 이러한 일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힘들게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때에 우리가 바라볼 하나님은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입니다. 5절에 보면, 하나님을 묘사하기를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받으시기 위해서 인내하셨습니다. 죄된 사람들을 인내하시며 참으시고 기다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시는 일이 있으십니다. 5절에,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고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서로의 약함을 받아 주고, 이웃의 기쁨이 되기 위해 비방을 받고, 때로 나의 기쁨을 양보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더 하나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서로가 서로를 받으면서 바라보아야 할 분은, 그 상대방이 아니라 하나님인 것입니다. 나의 연약함을 인내하시고 참으시며 담당하셨던 하나님, 그리고 하늘의 소망으로 나를 위로하시고 세워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서로를 받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귀한 믿음의 사람들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습이 천차만별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될 수 있는 목표는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서로 받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서로를 받는 삶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주심으로 모범이 되셨고, 그 모습으로 서로를 받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먼저 서로의 약함을 받아주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하여서 이루어지는 미숙함과 죄된 모습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그 연약함을 담당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강한 믿음을 주신 것은, 그 믿음으로 자랑하고, 약한 자를 업신여기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 강함으로 다른 이들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그들을 기쁘게 섬기라고 주신 것인 줄로 믿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서로의 연약함을 보게 될 것입니다. 슬픔을 보게 될 것입니다. 각 개인과 가정, 그들의 삶속에 있는 아픔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부족한 부분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든 연약함을 받으시고, 우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던 자리로 이끄셨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서로 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도록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원합니다. 우리의 다양함과 차별됨이 상처와 아픔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 서로 뜻이 같아지며,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한 소망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됨의 근거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본 받아
로마서 15:1-6 / 김광일 목사
워싱턴포스트지의 기자였던 로라 블루멘펠드(Laura Blumenfeld)는 아버지에게 총격을 가한 테러범과의 화해 과정을 담은 ‘복수, 희망의 스토리-Revenge: A Story of Hope’ 라는 책을 펴내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1986년 아버지와 함께 이스라엘을 관광하던 중에 팔레스타인 테러범이 쏜 총탄을 머리에 맞고 아버지가 쓰러지는 끔직한 일을 당하였습니다. 다행히 아버지는 목숨을 건졌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반드시 복수 하겠다’는 일념뿐이었습니다. 히브리어와 아랍어에 능통했던 그녀는 워싱턴포스트지의 기자로 채용되어 1998년 이스라엘로 건너갔습니다. 곧 바로 이스라엘 법원기록을 뒤져 어렵사리 범인을 찾아내었습니다. 복수의 칼을 간지 12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범인의 이름은 ‘오마르 카티브’, 그는 25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이었습니다. 그녀는 피해자의 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범인과 가족들을 만났습니다. 막상 범인을 만나 얘기를 듣다 보니 범행동기에 관심이 갔습니다. 복수에 대한 충동이 끊이지 않던 그녀는 번민 끝에 복수심에 불타는 아랍인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복수와 관련된 역사적 사례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복수는 동물적인 본능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물리적인 복수는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복수는 범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테러범을 용서하기로 하고 1999년 범인의 가석방을 위해 법원에 청원서를 제출하였습니다. 판사의 질문에 “우리 가족이 카티브를 용서했으니 이젠 이스라엘이 용서할 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가석방을 불허했습니다. 그녀는 처음으로 아버지와 함께 테러범의 집을 찾았습니다. 용서를 구하는 범인의 가족들과 포옹을 나누며 그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녀는 수기를 맺으면서 “중동의 평화를 바란다면 꽉 막힌 정치문제부터 풀려고 할 것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가족들이 서로 만나고 이해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진정한 복수는 용서와 화해라는 사실임을 깨달았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교회라는 한정된 범위 안에서만 할 것이 아니라 세상의 현장에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될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구원받은 이방인들을 향한 메시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벽을 허물고 모든 죄인들을 은혜의 복음에로 초청하셨듯이 성도들은 서로 솔선하여 사랑의 봉사를 실천함으로 한 몸인 것을 드러내라고 권면합니다. 또한 이를 가능케 하는 방법이 그리스도 예수를 본 받는 데 있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본문 5절에 나타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는 원어로 ‘카타 크리스트 예순’인데, 직역하면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 입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의 특성과 모범을 본받으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십니까? 성육하신 하나님으로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표준이시며 모범이십니다. 모름지기 성도된 자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야 합니다. 일찍이 손양원 목사는 자신을 가리켜 ‘예수의 중독자’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로 살고 예수로 죽기까지 철저하게 예수 중심으로 본받고자 힘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손 목사는 진정한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어떻게 행하여야 합니까?
첫째로 약점을 담당해야
만수 김정준(金正俊) 박사는 찬송가 9장 ‘하늘에 가득 찬 영광의 하나님’의 작사자이며 한신대학 학장을 역임하였고 구약학의 학문적 토대를 닦은 신학자 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젊은 시절, 폐병으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요양소에 들어갔지만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들을 수용하는 방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방이라고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김목사도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살아 있는 동안 가치 있는 일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병실을 다니면서 위중하여 거동을 잘하지 못하는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물도 떠다 주고, 각혈을 하는 환자의 피도 닦아 주고, 최선을 다해 환자들을 섬겼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는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고 교계에 영향력 있는 신학자와 목사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약해도 우리가 섬길 수 있는 약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언제나 강자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작고 미미한 힘이라도 자신만을 기쁘게 하려하지 말고 이웃을 기쁘게 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본문 1절입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여기의 ‘담당한다’의 ‘바스타제인’은 ‘지탱하다, 운반하다’는 뜻인데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자는 우리의 죄악과 질고를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합니다. 또한 ‘마땅히’는 ‘오페일로멘’ 인데 ‘빚지다, 해야만 한다’ 의 뜻으로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단어입니다. 약한 자가 짐을 지기에 힘든 부분을 강한 자가 거들어 그 짐을 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인데 강한 자는 사랑 안에서 이 일을 행해야 합니다. 사랑만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약점을 담당하러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우리의 병을 짊어지셨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저주를 담당하셨습니다. 약점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약점을 담당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것입니다. 세상 논리는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논리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히려 강한 자가 자기보다 약한 자들을 도우며 더불어 사는 하나님 나라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약점을 들추어내어 비난할 것이 아니라 서로 약점을 담당하며 선을 이루어야 합니다. 선이 하나님과의 윤리적 관계라면 덕은 인간과의 윤리적 관계입니다. 따라서 약점을 담당하는 일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일이 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에 공동체의 덕을 세우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소망을 나누어야
랍비 휴고그린(Hugo G. Gryn)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수용소에 갇혀 온갖 고난을 겪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독일의 잡지에 기고했는데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그날은 1944년의 몹시 추웠던 겨울날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날이 유대인의 명절인 '하누카의 저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날 아버지는 저와 친구들을 건물 한 구석으로 모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품안에서 진흙으로 만든 주발과 버터 한 조각을 꺼내었습니다. 버터는 수용소에서 구하기 어려웠던 것인데 아버지는 버터를 녹이시더니 거기에 심지를 적셔 불을 붙이셨습니다. 제가 ”왜 그 귀한 버터를 먹지 않고 낭비하느냐”고 항의했더니 아버지는 불꽃을 가만히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람이 밥을 먹지 않고도 3주간을 살 수 있지 않느냐? 전에 수용소에서 사흘 동안 물을 안주어서 목말라 고통을 당했지만 그래도 물 안마시고 사흘 동안 살 수가 있지 않았느냐? 그렇지만 너도 알다시피 사람은 희망이 없으면 한 시간도 살 수 없지 않느냐? 내가 버터에 불을 붙인 것은 우리가 이 절망적인 수용소에 있더라도 하나님은 질그릇 가운데 희망의 불꽃으로 우리와 같이 계신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놀라운 말입니다. 고난에 빠진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가슴속에 희망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역경과 고난에도 헤쳐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소망을 잃어버린 백성은 멸망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온갖 비방과 핍박이 있을지라도 소망으로 극복하였던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야 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여기의 비방은 ‘남을 헐어서 욕함’ 이란 사전적 뜻입니다. 바울은 시편 69편 9절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을 위하여 일을 하다 보면 사람들의 비난과 반대에 부딪혀 오해와 중상을 받게 되지만 이때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끝까지 인내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인내가 없으면 소망도 이룰 수 없으며, 위로가 없으면 소망도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내와 위로로 소망을 이루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해야 합니다.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에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성경의 위로하심으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 소망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며 절망하는 약한 사람들에게 소망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내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약한 자들과 더불어 소망을 나누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로 뜻을 같이해야
성 프란체스코(St. Francesco)가 제자 레오날드와 함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레오날드는 본래 귀족의 아들이었으며, 자기의 특수한 배경과 신분으로 말미암아 유달리 자존심이 강했던 자였습니다. 그의 특성 때문에 프란체스코 종단에 속한 형제들은 공동체 생활에서 자주 어려움을 경험하곤 했습니다. 그 날도 프란체스코와 함께 길을 가던 레오날드는 프란체스코가 탄 나귀를 끌고 가는데, 갑자기 마음에 불평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이 영적인 스승이라고 하지만, 귀족의 아들인 내가 보잘 것 없는 배경을 가진 이 사람이 탄 나귀를 끌고 다녀야 하다니....” 마음속으로 불평의 소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귀를 타고 가면서 레오날드를 위해 기도하던 프란체스코는 곧바로 레오날드의 마음속에 불평이 가득하다는 것을 성령으로 감지 할 수 있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형제여! 형제가 맞소. 형제가 나귀를 타고 가는 것이 합당하오. 내가 걷겠소.” 프란체스코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레오날드는 길에 엎드려 마음속에 있었던 자존심과 시기를 자백했습니다. 그 후로 프란체스코 종단은 레오날드로 인한 분열의 위기를 넘어섰다고 합니다. 성령의 사역에 의한 사랑과 겸손만이 일치를 이룰 수 있음을 교훈하는 이야기입니다.
본문 5절입니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 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은 자기주장만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도 무시하지 않습니다. 뜻을 같이하여 화합과 일치를 이룹니다. 그리고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합니다. 그러나 이일이 결코 쉽지 않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마음을 같이 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 가장 필요한 부분은 뜻을 같이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강한 자가 약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이 손해 보는 일같이 여겨져 꺼리면서 하나 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더욱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그 길을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한 뜻과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함께 하나가 되는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뜻과 마음이 일치되지 못하고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면 결코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토트(John Stott)는 2007년 7월 18일 영국에서 열린 케직 사경회에서 은퇴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위대한 복음주의 신학자이었기에 회중들은 그가 마지막으로 어떤 설교를 할 것인가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 제 삶이 끝나가려 하는 지금, 제 마음이 안식을 얻는 그 곳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 원한다”라고 서두를 꺼낸 스토트 목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품으신 뜻이 무엇인가?”의 물음을 던지고 차분히 말을 이어갔습니다. 로마서 8장 29절을 본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임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바울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삶에 있음을 증거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하나님의 영광으로 그 향기를 드러내어야 합니다. 부디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시기 바랍니다. 위로와 인내로 소망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약한 자와 한 뜻을 이루어 하나님께 함께 영광 돌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