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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of them...
찾아야 할 마을 이름이 '모래네'였다.
귀국한지 삼 일밖에 되지 않아 시차에 채 적응치 못한 탓이었을까.
신촌 로터리에서 갈아 탄 버스 창가에 앉아 바라보던 가로의 풍경은 피곤해만 보였지만, 찾고자 하
는 집은 약도가 필요 없을 만큼 찾기 쉬웠다.
버스에서 내려 모래네 시장 인근의 갈림길을 꺾어 돌자마자 철도 건널목이 나타났다.
그리고 얼마잖아 다시 만난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접어들자, 마르기 시작한 옥수수 대가 담 마냥 늘
어 선 참깨 밭이 눈길에 든데 이어, 듬성듬성 서 있는 스무 채 남짓한 집들을 볼 수 있었는데, 정씨
아저씨 댁은 참깨 밭 끄트머리에 있었다.
흔치 않는 적산가옥.
한 뼘 남짓한 너비의 판잘 가로로 촘촘히 겹쳐 덴 외벽과 추녀에 바싹 붙어 난 창, 지붕 경사가 가
팔러 기와가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만 같았는데, 넓은 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조립식 시멘트담 너
머론 높다라니 곧게 자란 은행나무가 보였다.
뿐만 아니라 전나무와 왕 벗, 향나무는 물론이고, 살구에다 대추, 그리고 손질이 잘 된 정원수에다
벽오동의 넓고 푸른 잎도 볼 수 있었는데, 판자를 엮어 만든 대문은 반 쯤 열려 있었다.
"계십니까..?"
열린 문 사이로, 티끌하나 없이 말끔한 흙 마당과 벽오동 그늘 아래서 깨를 털고 있는 부인이 보여
나지막한 목소릴 내자, 부인이 앉은 채 몸을 돌리는 걸 볼 수 있었다.
"정씨 아저씨 심부름으로 왔습니다만...."
일년 반 동안, 이층 침대에 오르내리는 참마다 정씨 아저씨 머리맡에 걸려 있던 사진 속에서 보아
왔던 얼굴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올린 머리를 한 용모에서 친근감이 느껴졌었는데, 채 말을 맺기도
전 반색을 하며 몸을 일으킨 부인이 낮선 사람을 경계하는 기색도 없이 날 집안으로 인도했다.
한 평 반 남짓의 전실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낡은 신발장 위에 휘일대로 휘인 가질 늘어뜨린 소나
무분재가 놓여 있었는데, 앞서 가던 부인은 복도 중간쯤의 방으로 날 데리고 갔다.
이르지 않은 오후.
좀 어두워 보이던 복도완 달리 방은 밝았다.
맞은편에 나 있는 미닫이로 스며들고 있는 볕 때문이었는데, 이전엔 다다미가 깔렸을지 모를 바닥
은 완자무늬가 연속으로 이어진 비닐 장판이 깔려 있었다.
"그 인.. 잘 있나요..?"
방석을 내온 뒤 손님이 허릴 내리길 기다리던 부인이 몸을 돌려 미닫일 열어젖히곤 호기심 어린 목
소릴 냈다.
"네..잘 계십니다. 건강도 좋으시고.."
"잠시만..."
내 말을 자른 부인이 자리를 떠났다가 잠시 후, 과일 접시가 올려진 쟁반을 들고 다시 모습을 나타
냈는데, 열어젖힌 미닫이 너머의 뒤뜰 화단엔 오후의 햇살이 넘쳐나고 있었다.
"이걸 전해 달라하시기에.."
그 참에야 정씨 아저씨에게서 받은 꾸러밀 내밀었다.
주머니에 들 만한 크기.
"꼭 좀 전해주게..!"
우편으로 보내도 족할 걸 내가 귀국하기 한 달 전부터 머리맡에 두고 있더니, 귀국하기 바로 전날
에야 내 손에 쥐어주며 당부의 말조차 했었는데, 귀중품이라도 든 줄 알았던 꾸러미엔 '파운데이
션' 두 개와 몇 장의 사진, 그리고 짧은 글이 적힌 편지가 전부였다.
"이러지 않아도 될 양반이..."
하지만 부인은 그 몇 줄 되지도 않는 편질 읽고 또 읽어 보더니 이윽고 사진을 살피기 시작했는데,
부인이 갑자기 물기 어린 목소릴 내며 몸을 일으킨 건, 맨 마지막 사진을 보고 난 직후였다.
"나하고 어디 좀 가지.."
철야작업 끝, 쉬는 날이 아님에도 느긋하니 쉴 수 있었던 주간 어느 날, 아저씬 캠퍼 뒤 돌산으로
날 끌었다.
산이라기보다 군데군데 풀밭을 볼 수 있는 석회암언덕에 가까웠었지만, 속이 빈 마아가린 깡통과
막걸리, 그리고 생수 병과 생닭이 들어있는 비닐봉지를 들고 캠프를 나선 정씨 아저씨는 병풍마냥
솟아올라 해를 가리고 있는 석회암 그늘에 자릴 잡았었다.
그리곤 마른나무가지와 돌들을 주어 와 화덕을 만든 다음 불을 피우곤, 불 위에 올린 깡통에 물과
생닭을 넣고선 끓길 기다렸었는데, 정씨 아저씨가 주머니에서 카메라를 꺼낸 건 닭이 익어가는 구
수한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한 직후였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은 어깨를 맞대고 앉아 한 손에 닭다리 하나씩을 들고선 카메라를 향했었
다.
두 사람 다 작업복 차림.
머린 바람에 날려 헝클어진 상태인데다가 면도조차 걸러 턱 언저리는 턱 언저리대로 거뭇거뭇.
영락없는 거렁뱅이라, 보는 이로 하여금 측은한 맘이 일게 하고도 남았는데, 귀국하기 두어 달 전
정씨 아저씨와 함께 돌산에 올라 찍은 사진이었다.
응시하고 있던 사진을 내려놓은 다음, 몸을 일으켰던 부인이 슬그머니 방을 나가 버리자 불식간에
분위기가 숙연해지고 말았는데 ,해야 할 바를 몰라 방을 둘러보게 되었다.
애초부터 문을 내지 않은 듯 문지방조차 없는 네 평 남짓한 방.
뒤뜰을 향해 난 장지문의 빛바랜 창호지가 받은 볕을 고스란히 품어내 방을 밝히고 있었는데, 한쪽
벽엔 난이 그려진 장식용 부채가 걸려 있었고, 그 맞은 편 벽은 책장이 벽을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구석에 놓인 탁자 외에는 세간 하나 놓여 있지 않았었는데, 한쪽 벽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책장에
빼곡하니 꼽힌 책들은 더러 빛이 바래거나 손때가 적지 않게 묻어, 그저 장식용으로 꼽아 놓은 책
들이 아님을 알고도 남았다.
"그 이 말이.. 술을 좋아한다고 해서..."
가벼운 발소리에 이어 등을 보인 뒤 자취를 감추었던 부인이 술상과 함께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읽어 봐요..!"
병을 기울여 술을 따르고 난 부인이 나지막한 소릴 내더니 뜬금없이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 내밀
었었는데, 생각 없이 받아 들고 말았다.
- 잘 지내고 있으리라 믿네. 나도 잘 지내고 있으니 염렬랑 말고...화장품 하나 샀으니 아우와 나눠
쓰게. 그리고 이 편지 들고 가는 친구는 내가 아우 삼았네. 술 좋아하니 정희와 더불어 한 잔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걸세 -
편지지 한 장을 채 채우지 못한 짧은 편지, 하지만 부인은 읽고 또 읽었었다.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인데, 어떻게 우리 아저씨와...?"
편지글과는 달리 두 사람이 의형제를 맺은 것도 아니었고, 또 두 사람이 특별히 친하게 지냈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기에, 읽고 난 편질 도로 건네며 할 말을 찾아보았지만 마땅한 말 또한 생각나질
않았는데, 정씨 아저씬 말이 별로 없었다.
자신, 취업 길에 오른 건 삼월 중순이었다.
막노동꾼이라면 너나없이 사우디에 가지 못해 안달하던 시절.
어쩌다 먹은 마음이 취업문을 열어 '사우디...' 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긴 했었지만,'타이페이'와
'방콕'을 경유 한 뒤 열 네 시간의 비행 끝, 딛게 땅은 그야말로 열사의 나라였다.
공항을 나와 버스로 네 시간을 달려 1,000 여 명이 생활하고 있다는 광활한 사막에 자리 잡고 있던
캠프에 도착했었다.
줄지어 늘어 선 똑같은 모양, 똑같은 색의 가건물과, 들개의 침입을 막기 위해 쳐 놓은 철조망.
난민촌을 연상케 하고도 남았는데, 대부분 동기끼리 한방에 들어 짐을 풀었지만, 나를 포함한 몇몇
은 빈 침대가 있는 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짐을 푼 참엔 아무도 없었지만 해가 지기 무섭
게 방문이 열리더니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들었는데, 그 중의 한 분이 정씨 아저씨였다.
평범한 얼굴,
그렇다고 일상에 찌든 얼굴은 아니었는데, 짐을 풀길 기다리던 끝, 고향이 어디냐, 나이가 몇이냐,
일은 언제부터 했느냐, 라고 물은 걸 포함해, 일년 반 동안 나눈 말은 백 마디 정도에 불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성 싶었다.
"어때요? 그 곳은.."
아랫사람이건만 몸을 틀어 잔에 반쯤 남았던 술을 비우고 난 부인이 내 말을 기다리며 다시 눈길을
보내왔다.
"좀... 삭막하죠..."
말 그대로 먹고 자고 일하고...또 먹고 자고 일하고...
그리고 석 달에 한 번 정도 오아시스로 가, 끝없이 늘어 선 야자대추나무 그늘 아래서 준비해 간 음
식을 먹고, 세차게 솟아올라 수로를 따라 흐르는 차디 찬 샘물에 손이나 얼굴을 담그거나, 몸은 물
론이고 얼굴조차 베일로 가린 채 해수욕을 즐기던 여자 하날 보기 위해 일곱 시간이나 걸리는 거릴
마다않고 간 것들이, 542일간 겪은 일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불시에 일던 한 치 앞도
볼 수 없으리 마치 거센 모래바람과, 덥다기보다 뜨겁다고 해야 할 날씨, 그리고 한 두어 번 볼 수
있었던 홍해의 거짓말처럼 맑던 물과 산호초 얘기를 빼면 달리 할 말도 없었었다.
그 사이 비어버린 부인의 잔에 술을 따르면 부인 역시 내 잔이 비기 무섭게 술을 따르길 몇 번.
술을 좋아하지도, 그저 부인의 말을 자르지 못해 받게 된 술상. 그도 맥주에 불과했지만 취기가 올
라 낮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는데, 부인은 어째서인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었다.
"아저씬 언제 사우디에..."
이어지던 침묵을 깬 건 내 쪽이었다.
"삼년 전 여름이었지..."
정씨 아저씨의 그 곳에서의 생활이 너무나도 익숙해 보여 언제 오셨냐고 물어 본 적이 있었다.
"좀 됐지.."
아저씨의 말은 그 때도 그 뿐이었었다.
"이 집이 어쩌다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됐지...친정아버지가 살고 계셨는데, 우리가 살던 집을 팔고...
그래도 모자라 은행에서 돈을 빌렸는데, 당신이 빚을 갚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며 만류에도 불구하
고.... "
말을 멈춘 부인이 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는 걸 볼 수 있었다.
그 참엔 처음처럼 몸을 틀어 잔을 기울이진 않았었을 뿐더러 말조차 놓고 있었지만 전혀 거슬리지
가 않았다.
"그 일 만난 건 내가 고교를 졸업한 직후였어. 난 이 집에서 나고 여기서 자랐는데, 꿈도 많았지만
형편이 어려워 진학은 못했지. 회사에 들어갔고, 그 회사에서 아저씰 만났지..잘 생기지는 않았지
만, 한가한 참이면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에 마음이... 그런 모습이 왜
그리 좋아보였던지...친정엄마가 일찍 돌아가셔서 나만 바라보고 사셨던 아버진 나와 맞지 않는 사
람이라며 반대했지만 듣지 않고 일년 남짓 만나던 끝, 식을 올리고 말았었지..."
사사로운 얘기.
모래 내 행 버스에 오른 참에도 이런 얘기까지 듣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지만, 부인이 초
면의 날 두고 사사로운 얘길 서슴없이 이어가게 된 건, 지금 생각해 보아도 단지 몇 잔 술 때문이라
고만은 여겨지지 않는 일이었다.
"영식일 낳은 다음, 둘째 아일 가졌지만 까닭 없이 유산이 되고 말았지... 그 후론 아이가 서지 않아
하나만 키우며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이가 회사를 그만 두더니 막노동판에 발을... 무슨 까
닭에선지 알 수 없었지만 땀에 찌든 작업복도 못마땅했고, 날마다 몸에 상처를 달고 오는 게 싫어
탓도 해 봤는데, 그 때마다 그 인 그 일이 좋다며 내 말을 잘라 버렸었지. 후후..! 하도 답답해 누군
가에게 어째서인가 하고 물어 봤더니, 역마살이 끼어서 그런다나.. 그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당신
이 좋아서라면 싶어 마음을 접었더니 적잖은 세월을... 게다가 늘그막에 이역만리까지 가게 될 줄
은..."
어쨌거나 부인의 나직한 목소린 이어지고 있었는데, 해가 짧아지기 시작하는 맹추.
뒤뜰 제법 굵은 돌배에 실려 있던 볕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금방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는데, 담담
하니 얘길 이어가던 부인이 불을 밝히기 위해 말을 자르곤 몸을 일으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현관
쪽에서 발자국소리와 함께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와 여자의 고운 음성이 동시에 들렸었다.
"어머니, 다녀왔습니다."
"형님..저도요."
잠시 후 모습을 보인 남잔 경찰복 차림이었고, 서른을 갓 넘긴 듯이 보이는 여잔 깃에 주름이 든 새
하얀 블라우스에 검정의 주름치마 차림이었다.
"그냥 앉아 있어.. 그리고 저녁 먹고 가.."
부인이 일어나는 날 만류하더니 전등스위치를 올려 복도 불까지 밝히곤 둘을 맞이했다.
"어떻게 둘이 같이.."
"버스에서 내리니까 작은 엄마가..."
어정쩡한 상태로 앉아있으려니, 뒤따라 들어서는 여잘 돌아보며 말을 맺은 남자가 술상 앞의 날 향
해 눈길을 보내 왔다.
코며 입 꼬리, 그리고 눈매가 정씨 아저씨와 퍽이나 닮아 보였었는데, 나인 서른이 되려면 좀 멀어
보였다.
"인사 드려. 아버지와 함께 근무하다 너 아버지 심부름으로 오셨다는구나."
역시였는데, 아들은 모자를 벗더니 말없이 허릴 굽혀 인사를 했다.
난 앉은 것도 아니고 선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로 인사를 받았었는데, 역시 머리만을 숙여 인
사를 마친 작은엄마란 여자가 저녁준비라도 할 듯 앞치마를 챙겨 걸치곤 주방 싱크대 앞에 서는 걸
볼 수 있었다.
"어머니. 전 옷 좀 갈아입고요."
아들이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섰는데. 현관어귀에 있던 나무계단을 오르는 아들의 발소리가 멎은
참, 부인이 여자에게 다가가며 낸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둘이 같이 할까...국이나 찌게도 준비해야 하니까...”
“그냥 앉아 계세요... 손님 혼자 두시면...”
하지만 여자의 한마디에 부인과 난 다시금 대좌하게 되었는데, 네 사람이 크지 않은 식탁에 무릎을
맞대고 앉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었다.
삶은 만남으로 점철되는 것 일 것이다.
운명 또한 사람과의 만남, 일과의 만남, 그리고 시간과 공간과의 만남이 계기가 되는 건지도 모를
일인데, 내가 아저씨가 쓰고 있던 이층 침대의 위 칸을 쓰게 되지 않았다면, 가져 간 자명종시계 대
신 아저씨가 매일 아침 날 깨우지 않았다면, 머리맡에 두었다 저녁마다 한 두 페이지씩 읽던 보들
레르의 '악의 꽃'과 프루스트의 시집을 읽어보라며 내 머리맡에 두지 않았다면 등등, 술자리를 갖
게 된 인과를 들자면 끝도 없을 테였지만, 일어나야 할 때를 놓친 것도 놓친 거지만, 예상치 않았던
술자린 쉬 끝날 기미를 보이질 않았는데, 작은 엄마란 여자가 요리한 닭도리탕만큼은 맛이 좋았었
다.
큼직큼직하게 썰긴 했지만 양념이 잘 벤 감자는 입맛에 딱 맞았었는데, 부인이 다시 새 술병을 딴
뒤 스스로 자신의 잔을 채운 참에는 아들이 염려스런 목소릴 냈다.
"어머니.."
"응, 괜찮아...모처럼 인데도 취하지 않네... 너도 한 잔 하련...?"
"아니. 대기하고 있는 중이라 연락 오면 곧바로..."
"자넨..?"
식사를 마친 아들이 손을 저어보인 뒤 허릴 세워 방을 나가자, 나와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앉아 있
던 부인이 마주앉은 작은 엄마란 여자에게 잔을 내밀었다.
"한 잔만.."
여자는 사양치 않고 잔을 들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석 잔이 되어 금방 술병이 바닥나고 말았는데,
양 볼이 발그레하니 물든 여자완 달리 부인 얼굴은 그 참에도 변함이 없었다.
“자네.. 이 사람, 우리 집 양반과 닮은 것 같지 않은가..?”
부인이 뜬금없는 얘기를 꺼낸 건 새로 딴 술병도 바닥이 얼마 남지 않은 참이었는데, 빤히 보아오
는 눈길을 의식을 고갤 들자 여자와 눈길이 마주치고 말았다.
“글쎄요..”
곧 눈길을 돌리고 말았지만, 부인이 틀어 올린 머릴 한 반면 여잔, 펌 머리를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
하고 미간이며 눈언저리가 부인과 흡사 해, 두 사람이야말로 닮았다는 느낌이 강했다.
“문 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을 처음 본 순간, 그 사람 젊었을 때와 너무 흡사해 순간적으로 가슴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전혀 남 같지가 않네..”
“후후...그러고 보니 조금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다시금 여자가 부드러운 목소릴 내며 날 빤히 보아 온지라 멋쩍어진 나머지 반 쯤 남은 술잔에 손
을 뻗치고 말았다.
"그 이가 저 사람 얘기도 하던가..?"
부인이 다시금 날 향해 나지막한 목소릴 내며 맞은 편 여자를 턱짓해 보인 건, 부인이 내 빈 잔에
술을 채우고 난 뒤였는데, 부인 생각과는 달리 정씨 아저씨완 그다지 많은 얘길 주고받질 않았다.
이층 침대를 함께 썼기에 그리 생각 할 수도 있었지만 정씨 아저씨는 물론이고, 나 역시 주절주절
늘어놓는 편이 아니었는데, 정씨 아저씨 머리맡에 붙은 사진 속에서 여잘 보긴 했었다.
"아저씨 작은 마누라..."
귀를 울린 뜻밖의 말.
정작 부인은 남 얘기라도 하듯. 게다가 여자에게 들어 란 듯 목소릴 높이기까지 했었는데, 그럼에
도 불구하고 표정에 변화가 없는 여자완 달리 내 머리 속만큼은 갑자기 복잡해지고 말았다.
“우리 편하게 앉아서 한 잔 더 할까..?”
그렇다고 함부로 입을 뗄 사항도 아니어 입을 봉하고 있으려니 심중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 부인이
몸을 일으키더니 소반을 꺼내 좀 전 앉아있던 방에다 다시 술상을 보기 시작했다.
“형님... 괜찮으시겠어요”
“응.. 걱정 말게..! 이 사람이 왠지 남 같지 않고... 또 자네와 술 하는 것도 오랜만이고....”
서둘러 설거지를 마친 다음 술상 앞에 허릴 내린 여자의 염려는 아랑곳없이, 잠겨들기 시작한 목소
릴 내며 부인이 여잘 향해 빈 잔을 내밀었고, 여잔 여자대로 조심스레 술을 채웠었다.
비록 낯 색엔 드러나지 않았지만, 잠겨들기 시작한 목소리만큼은 부인이 술이 오르고 있음을 말해
주고도 남았는데, 취기 때문일까 좀 전과는 달리 든 잔을 단번에 비우더니 술잔 가장자릴 훔치곤
옆에 앉은 내게 내밀며, 다시금 나지막한 목소릴 냈었다.
"이상하지? 우리 세 사람..! 하지만 흉만 보진 말게, 남들이 무어라든 어떻게 보면 이렇게 살지 않
으면 안돼는 사람들이어서인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 참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기에 함부로 입을 뗄 수도 없어, 묵묵히 잔을 받아들곤 부인이 잔을
채워주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는데, 부인이 잔에 넘치기 직전까지 따라 준 술은, 잔을 기울여 머금
은 순간 느낀 쓴 맛과는 달리, 목구멍을 넘어가는 참의 느낌은 그다지 나쁘질 않았다.
"노래 한 번 들어 보련..?"
부인이 고갤 돌려 날 보아왔다.
동그란 얼굴과 올린 머리.
흰머린 보이지 않았지만 눈가엔 살아 온 흔적이 역력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말았다.
아니---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어지러운 사바세계 의지할 곳 바이없어 모든 미련 다 떨치고 산간벽절을 찾아가니
송죽바람 쓸쓸한데 두견조차 슬피 우네
귀촉도 불 여귀야 너도 울고 나도 울어 심야삼경 깊은 밤을 같이 울어 세워 볼까.
간밤 꿈에 기러기 보고 오늘 아침 오동우에 까치 앉아 나를 보고 짖었으니 반가운 편지 올까
그리던 님이 올까 기다리고 바랐더니 일락서산 해는 지고 출문망이 몇 번인가
언제나 유정님 만나 화류동산 춘풍리에 이별 없이 살아 볼까.
얼씨구나 좋다 지화자 좋네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형님, 취하셨나 봐요.."
작은댁이 부인을 바라보는 눈길엔 염려스러워 하는 기색이 넘쳐나고 있었는데, 애절함과 서러움
이 느껴지는 노래 때문일까 부인 눈에 눈물이 맺혀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취하긴..."
그런 걸 덮기라도 할 양, 비어버린 잔을 들고는 내게 내밀며 작은댁을 향해 다소 잠긴 듯한 목소릴
냈다.
"자네가 한 잔 따라주게.."
부인의 말에 작은댁이 희고 고운 손으로 내 잔에 술을 채웠다.
"고생 많으셨죠?"
날 향해서는 처음 연 입.
평범한 얼굴. 하지만 목소리에만큼은 윤기가 넘쳐나고 있었는데, 눈이 마주 친 순간 눈길에 든 작
은댁의 눈 또한 목소리만큼 맑아 보였다.
"이 사람, 자네 오라비가 동생 삼기까지 했다네. 이상하지? 웬만해선 누군가에게 마음 줄 사람이
아닌데..."
"그러게요.."
받은 잔을 들어 단숨에 비우고 난 작은 댁이 날 빤히 보아오는 걸 알 수 있었는데, 왠지 낯간지러운
느낌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든 술잔을 단숨에 비우고 말았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있었다.
"많이 자랐네.. 자네가 이 집에 들어 온 해에 심었는데..."
뒤뜰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고, 방을 밝히는 불빛을 받은 화단의 홍매화줄기가 바람에 살랑대는 모습이 어쩐지
스산해만 보였는데, 다시금 들린 부인의 나직한 목소리가, 부인 역시 상념에 젖은 채 화단의 홍매
화를 응시하고 있었음을 말해주었다.
"자네와 나, 인연 닿은 게 근 십년은 됐지..? 영식이가 열 서너 살 때였으니까.."
가라앉은 분위기를 깨려는 듯 부인이, 비어버린 작은댁의 잔에 다시 술을 따르곤 작은댁을 물끄러
미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네요..."
"기억나나? 내가 처음 자넬 찾아 갔을 때..?"
"네..."
"자네 존잴 알게 된 지 보름 만에 한 걸음이었어. 그 이, 낌새가 아무래도 이상해 진지하게 물었더
니 순순히 자네 얘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었는데, 다린 다리대로 후들후들... 하
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지. 하지 않았다기보다 할 수 없었던 건지도 모르지만... 그 후, 혼자 한
숨 짓길 여러 날. 자네 머리채를 잡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봐야겠다는 생각만큼은, 이러던
저러던 한번은 봐야겠다는 생각이... 그래서 자넬 찾았지. 그런데 자넬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
이 먼저..."
"죄송해요, 형님,,"
"새삼스럽게... 그런데 이상한 건, 내가 안 것으로 끝날 줄 알았던 두 사람이..그 이가 여전 자넬 찾
는 것 같아 하루는 물어보았었지. 어쩔 거냐고...그랬더니 그 이 말이... 자기도 모르겠다고..."
“저도... 저도 형님이 다녀가신 후 어찌해야 할지 몰라... 하지만 오라버닐 뵙지 못하면 일이 손에
잡히질 않고.. 어디 먼 곳으로 떠나 버릴까 싶은 마음이 일기도 했지만 그러지도 못하고..."
"바보 같은 사람... 늘리고 늘린 게 사낸데... 여려빠져 자신의 마음 하나 추스르지 못하는 사람 뭐
가 좋아서... 내가 자넬 불러들인 건 후회하지 않지만 가끔 아직 젊고 고운 자넬 보노라면, 차라리
그 때 자네 머리채라도 잡고 휘둘러 그 이에게서 떼어 놓는 게 옳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 그랬더라
면 세월이 약이라, 다 잊고 좋은 사람 만나 지금쯤은 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을 터인데..."
"형님에겐 죄스러운 맘은 변함없지만 오라버니 만난 것도, 또 이렇게 살게 된 것도 후회하지 않아
요. 팔자려니 하고 체념해서 일지는 모르지만 그냥 형님과 지내는 게 맘이 편하고..."
두런두런.
두 사람이, 무거운 얘기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남의 얘기라도 하듯 담담하니 얘길 이어가고 있었다.
끼어 들 자리도 아닌 것 같아 묵묵히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무심코 든 눈길에 뒤뜰을 덮은
짙은 어둠이 달려들어 이제 그만 일어나 돌아가지 않음... 라고 마음먹은 순간, 갑자기 온몸의 힘이
일시에 빠져나가는 동시 머릿속이 하얘지더니, 종내는 천정조차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었다.
부인에 비해 많이 마신 건 아니었지만 술이 약했던 나로선 과음이었는데, 돌기 시작한 천정이 구토
기까지 불러, 돌아가는 천정을 의식하며 몸을 일으킨 뒤 방을 나와 현관 쪽의 화장실로 걸음을 옮
기기 시작했다.
“형님이 따라 가 보세요...”
작은댁의 염려스러워 하는 목소리가 들린 데 이어, 날 부축하는 부인의 손길이 느껴 진 건, 자신 변
기통에 얼굴을 묻은 것과 동시의 일이었다.
“후후...몇 잔 술에...”
부인의 부드러운 음성을 귀로 하며 거듭 거듭 토한 후, 입을 가신 뒤 세면까지 하고서야 화장실을
나왔지만 눈앞이 어질 거리는 건 변함이 없었다.
"좀 누워 봐.."
부인이 베개를 꺼내 왔다.
염치불구하고 벽 쪽에 몸을 누인 뒤 눈을 감자, 비로서야 울렁거리던 속이 좀 편해지기 시작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간간히 들리던 찻길의 소음조차 뜸해 진 것이 밤이 깊어 진 것만은 알 수 있었는데, 귀가해야한다
는 게 반뿐만의 생각이었기 때문일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두 사람
의 말소리가 자장가처럼만...
Epilogue.
띵한 머릴 의식하며 부인 댁을 나온 건, 다음 날 아침 느지막 무렵이었다.
"또 들려요"
대문 밖까지 따라 나온 부인이 미소와 함께 다정한 목소릴 냈지만 이 후, 정씨 아저씨 댁엔 걸음하
지 않았다.
일을 찾지 못해 쉬는 동안, 간간히 다정해 보이던 부인은 물론, 정씨 아저씨 생각이 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모래 내 행 버스에는 끝내 오르질 못했었다.
세상을, 그리고 우리네 삶을 잘 알지 못하던 시절이었기는 하지만, 그런 형태의 삶이 부도덕해서라
든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게 된 나머지 발걸음 하지 않은 건 결코 아니었기에, 막연하지만
모래 내 행 버스에 오르고픈 마음을 거머잡는 무언가가 있었던 게 아니었나 싶기만 하다.
그런데, 뜻하잖게 정씨 아저씨 소식을 듣데 된 건 일 년여나 지난 후였다.
회사에서 재취업치 않겠냐고 물어 왔고, 가야 할 곳이 '리비아'라고 해, 난 보름 만에 다시 '트리폴
리' 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뒤, 일년 가까운 세월을 삭막함 속에서 보냈었는데, 여권을 반납하러 회
사에 간 길에 예전에 한 방에서 기거하던 이를 만났다.
"그 양반...죽었어. "
이런저런 얘기 도중, 정씨 아저씨 근황을 물었더니 바쁜지 그렇게만 말하곤 몸을 돌리려는 그를 잡
고 다시 물었다.
"아니..어쩌다..?"
“모두 ‘사고' 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그 양반 죽으려고 작정하고 오 층에서 뛰어 내린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안전망 너머의 '푸팅'철근에 곶감처럼 꿰일 수 있겠어?"
들을 수 있었던 건 그 말 뿐이었다.
그 참에도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하는 걸 알고도 남았었다.
뿐만 아니라 돌아오는 길의 버스 속에서도 철근에 꿰인 정씨 아저씨 흉한 '주검'은 물론, 왜? 라는
단어가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었는데 프로이트는 ‘ 운명은 생각의 결과이다’ 고 했다.
그들 세 사람의 만남도, 그들이 그런 삶을 영위하게 된 것도, 그리고 정씨 아저씨의 이해 할 수 없
는 죽음이 그들의 생각 때문인지 아님, 프로이트의 말에 반하기는 하지만 미리 결정지어진 운명 때
문인지는 지금에도 알 수 없다.
나로선 그야말로 오다가다 만난 사람들...
이 십년도 더 된 지금에 와서도 정씨 아저씨는 물론이고, 부인이나 작은댁이 사물에 대해 어떤 가
치관을 갖고 있거나 갖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을 뿐더러 그들 삶을 두고, 옳다 그르다 말 할 수는
없다.
“남 같지 않네...”
함에도 잊혀지기는 고사하고 어제나 그제의 일처럼, 거저 평범해 보이기만 하던 정씨 아저씨와, 한
남자에게서 벗어나질 못했던 부인과 작은댁의 얼굴이 지금까지도 생생하기만 한 것은, 부인이 나
를 두고 작은댁에게 했던 말과, 거저 남 같지만은 않다는 말에 내포된 ‘우리가 누구든, 결국 비슷비
슷한 이들 중 하나’ 이기 때문인지도 모르는 일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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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운 글
잘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봄 꽃 향기같은 행복한 삶 되세요
고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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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히
배독하고 갑니다.*^^*
코빌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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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행복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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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문운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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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동행하는 날 되시며
늘
코빌님
하세요 
들이 활짝 피어나는 아름다운 주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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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고 행복하게 보내세용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