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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19일 수요일 말씀묵상 ♣
성경:누가복음15:8-10(신121P)
제목: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8.어떤 여자가 열 1)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1)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할렐루야! 오늘도 말씀을 묵상하시고 승리의 삶을 사시기를 소원합니다.
***{제목}***“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여러분!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교훈하기 위해 오늘 잃은 양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잃은 양을 찾으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구원에 대한 편견을 제거하셨습니다(1-2).
2. 잃은 양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계십니다(4절).
3. 잃은 양을 찾는 즐거움이 있습니다(5-7절).
여러분! 우리는 오늘 잃은 양을 찾는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잃은 양을 찾고 계십니다.
몇 해전에 이산가족의 상봉을 TV를 통해서 보았습니다. 아마 그때 방송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국민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눈물겨운 기쁨의 상봉의 장면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인생이 하나님과 이산되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되었습니다.
이렇게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일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영혼을 하나님과 상봉시킴으로 교회 전체가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교회의 존재 목적입니다. 잃어버린 주님 자신의 양을 찾아 궁극적 구원의 기쁨을 나누는데 있습니다.
7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한 사람의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너무도 크게 기뻐하십니다.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죄인을 회개시켜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잃은 양을 찾음으로 이 신령한 기쁨을 맛보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눅15:8-10)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의 비유가 연속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이야기(3∼7절), 그리고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11∼24절), 그리고 세번째는 오늘 본문 말씀인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고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8∼10절).
그런데, 이 세 가지 비유는 재미있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잃어 버렸다” 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목자가 양 한 마리를 잃어 버렸고, 여자가 드라크마 하나를 잃었으며, 아버지가 아들을 잃었습니다.
“잃었다” 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찾았다” 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았고, 여자가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으며, 아버지가 잃은 아들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의 공통점은 다시 찾은 후에 “크게 기뻐했다” 는 것입니다. 잃은 양을 찾은 목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자, 잃은 아들을 찾은 아버지가 크게 기뻐했습니다.
보통 기뻐한 것이 아니라, 잔치를 열며 기뻐했다는 내용입니다.
이 비유에서 등장하는 목자, 여인, 그리고 아버지는 모두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양, 드라크마, 탕자는 우리 인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잃어버린 양이나 탕자의 경우에는 자기의 의도적인 선택에 의하여 길을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양은 자기 마음대로 목자를 떠나 갔습니다(눅15:4). 아들도 자기 마음대로 아버지의 품을 떠나 나갔습니다(눅15:13).
그러나 이와는 다르게 오늘 본문인 드라크마의 경우에는 자기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는 잃어 버려진 자리에 던지움을 당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드라크마의 비유는 다른 비유와는 다른 특이한 차이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양은 자기의 선택에 의해서 목자를 떠나갔습니다. 또한 탕자도 자기의 선택에 의해서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마치 오늘의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하나님을 떠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거절했습니다. 말씀을 거절하고, 주님의 진리를 거절합니다. 복음을 거절합니다. 메시지를 거절합니다.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하나님을 떠나가는 모습을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롬1:23, 25).
이들은 모두 양과 같고 탕자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에서는 여인이 동전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동전을 애타게 찾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드라크마는 은전으로된 로마의 돈입니다. 이 드라크마는 이스라엘의 데나리온과 비슷한 정도의 가치가 있었습니다. 장정 한 사람이 하루동안 노동을 해서 벌 수 있는 돈입니다.
동전은 말을 하거나 걸어다닐 수 없는 생명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여인의 품을 떠난 것이 아니라, 여인이 잃어버렸습니다.
동전은 아무런 생명이 없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 비유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마치 동전처럼 생명이 없는 존재일 수밖에 없으며, 이는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에 관한 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입니다(엡2:1, 골2:13). 이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똑똑해서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어떤 특별한 재능이 있거나 자격이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게 하는 밖으로부터의 어떤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 역할을 하시는 이가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오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죄를 깨닫게 하고, 예수를 믿도록 도와주십니다(요16:7-11, 14:26).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드라크마는 어떤 값어치가 있길래 이 여인은 그토록 잃은 드라크마를 찾기 위하여 애를 쓰는 것입니까?
1. 잃은 드라크마의 가치.
드라크마는 은전으로 되어 있었는데 값어치로 따진다면 사실 이 한 개의 드라크마는 별로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이 드라크마가 어떤 드라크마인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약혼식 때 남자 쪽에서 여자에게 열 드라크마를 에쁜 줄에 꼬아서 선물하는 그런 관습이 있었습니다.
선물을 받은 신부는 드라크마 열 개를 가지고 머리에 장식하여 결혼식장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약혼한 여인에게는 드라크마 하나 하나가 신랑이 준 사랑의 증표였기 때문에 매우 귀중한 것이었습니다.
만일 그 중에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당시에는 그 혼사가 깨어지기까지 하는 매우 귀한 증표였습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귀중한 것입니까? 이것은 돈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매우 귀중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우리 모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매우 귀한 드라크마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가치는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보배스러운 드라크마 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드라크마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서약이 담겨져 있습니다. 영원히 변치 않겠다는 사랑의 서약입니다.
그런데 드라크마를 잃어버리게 되면 결혼을 파기하는 것이요, 사랑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를 잃었으니 이 여인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꿈속에서라도 잃은 그 드라크마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여인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는 여인의 모습을 우리는 상상하게 됩니다.
여기서 잃어버린 드라크마는 잃어버린 한 영혼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막8:36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라고 말씀하므로 인간의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도 귀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소중한 영혼도 티끌 속에 묻혀 잃어버린 드라크마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처럼 잃어버린 영혼이 되어 티끌 속에 묻혀 있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변을 보십시오. 죄악의 티끌 속에 묻혀 뒹구는 영혼들이 많습니다. 불신과 의심, 정욕과 쾌락의 티끌 속에 묻혀있는 영혼들이 많습니다.
땅에 떨어져 티끌 속에 묻혀 있는 드라크마는 전혀 값어치가 없는 존재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와같이 잃어버린 영혼 티끌속에 묻힌 영혼은 살았으나 죽은 목숨입니다.
마치 비 없는 구름이요, 열매 없는 가을 나무와 같아서 의미없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유1:12, 잠25:14, 엡5:11) .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주변을 보면 잃은 드라크마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반드시 찾아내어야 하겠습니다.
2. 잃은 드라크마의 비극.
누가복음 15장에 나타난 세 가지 비유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들 비극적인 사실을 담고 있습니다.
그 비극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아니하고 그 자리를 떠난 데서 생긴 비극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사회는 모든 것이 자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아버지 자리, 어머니 자리, 자녀들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직장에서는 사원의 자리, 대리의 자리, 과장의 자리, 부장의 자리, 사장의 자리가 있습니다.
국가도 마찬가지로 공무원의 자리, 군인의 자리, 의원의 자리, 대통령의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역할입니다. 자리에는 그 자리에 맞는 역할이라는 것이 항상 있습니다.
아버지 자리는 아버지에 맞는 역할이 있고, 어머니의 자리에는 어머니의 역할이 있습니다. 신문기자는 그 기자의 역할이 있고, 교수는 교수의 역할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 대한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할 때는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그 자리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면 그 가정은 흔들리고 맙니다.
군인이라는 자리에서 그 군인이 해야 할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장한 상태에서 탈영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국민을 보호해야할 사람이 오히려 국민을 위협하고 탈취해 가는 두려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정치인이 그 자리의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하고 자기의 이익만 추구한다면 나라꼴이 엉망으로 되어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리보다는 그 역할이 훨씬 더 중요한 법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역할의 중요성을 모르고 자꾸만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역할주의를 지향하는 사람과 지위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모인 가정이나 교회, 단체, 나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시는 여러분들은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자리주의를 지향하는 자가 되지 말고 자기가 있어야할 자리에서 해야할 역할을 잘 감당하는 존귀하신 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양은 있어야 될 자리! 목자의 곁을 떠나므로 낭떠러지에 가서 비참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아들이 있어야 될 자리는 아버지 집에 있는 것인데 아버지의 품을 떠나므로 그는 탕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드라크마는 있어야 될 자리 여인의 품에서 떠나므로 땅에 묻혀 있는 비극이 있었습니다. 이 모두가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남으로 생겨진 비극이었습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없으니 해야 할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 것은 또 당연합니다.
그런데, 더 큰 비극이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드라크마는 자신이 잃어버린 존재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아마도 마루 밑이나 아니면 어느 구석에 먼지가 잔뜩 쌓인 곳에 떨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 드라크마는 그 자리가 좋은 자리라고 생각하면서 이 자리가 행복한 자리라고 생각하면서 그 자리에 그냥 그대로 머물러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생명이 없었기에 그와 같은 생각도 전혀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한 인간의 비극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리! 어두움에 있으면서도 그런 사실조차 깨닫지도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들 주변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내게 하나님이 필요하고, 예수님이 필요하고, 중생이 필요하다는 이 기본적인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 현대인의 비극인 것입니다.
3. 잃은 드라크마의 행복.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증거하는 것 같습니다.
“잃은 양이여!, 잃은 탕자여!, 잃은 드라크마여! 너는 행복한 존재로다!” 하고 말씀합니다.
잃은 양이나 탕자나 드라크마는 모두 다 행복한 존재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양을 잃어버린 목자나, 아들을 잃은 아버지, 그리고 드라크마를 잃은 여인은 한시도 그를 잊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나를 알아주고 나를 찾아준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사실입니까? 내가 그 자리에 없어도 알아주는 이가 없고 찾는 이가 없다면 그는 불행한 존재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여인은 한시도 잊지 않고 찾았습니다.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찾기 위하여 노심초사 밤잠을 자지 아니하고 열심히 찾았습니다.
목자는 한 마리의 양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마음을 조리며 찾아 헤맸습니까?
이리와 늑대에게 잡혀 먹지는 않았을까? 염려하며 온 광야를 뒤지며 찾았을 것입니다.
또한 잃은 아들은 어떠했습니까? 아직도 거리가 먼데 그 아버지는 떠난 아들이 “언제나 돌아오려나!” 하면서 밤낮으로 나간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뿐만아니라 잃은 드라크마는 여인의 뇌리 속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꿈속에서도 잃은 드라크마를 생각하고 있었으니 이 드라크마는 행복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여인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나를 잊지 않고 찾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49:15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자기의 자식을 잊어버리는 어머니가 어디 있느냐는 겁니다. 그것도 아직 젖을 떼지 않은 아들을 어찌 잊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오늘의 시대는 아이를 낳고도 버리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천륜을 어기는 악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식을 버린다고 합니다. 미혼모가 되어서 버리고, 기형아라고 버리고, 형편이 어렵다고 버립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오늘의 시대를 다 아시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을 어미가 잊어버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혹시 어머니가 그 낳은 자식을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 선언이 하나님의 심정이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4. 드라크마를 찾으시는 하나님.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여인은 잃은 드라크마를 찾기 위하여 어떻게 했습니까?
여인은 먼저, 등불을 켜고 찾았습니다. 8절 말씀에 보면,
“등불을 켜고” 라고 했습니다.
왜 등불이 필요했습니까? 드라크마가 있는 곳은 어두운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유대인의 집은 창문이 많지 않기 때문에 낮에도 방안은 어두웠습니다. 그래서 낮에도 등불을 켜고 찾아야만 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내 이웃들 아니 내 삶의 자리가 어두움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래서 우리에게는 빛이 필요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1:9절에서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라고 말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참된 빛이 되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세상에는 거짓된 빛이 많습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빛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살리시는 참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 여인은 집을 쓸며 찾습니다(8절).
먼지를 일으키며 샅샅이 찾았습니다.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잃어버린 은전을 찾고야 말겠다는 이 여인의 심정을 볼 수 있습니다.
요1:14절 말씀에서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라고 말씀했습니다.
나를 찾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티끌 속에 이 어두움 속에 이 사망과 절망 속에 그 분이 뛰어들어와 나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메세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원어 성경에 보면 이 드라크마는 보통의 드라크마가 아닙니다.
잃은 드라크마 앞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는데, “그 드라크마(The piece)”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9절).
그러니까 많은 드라크마가 있지만 다른 드라크마가 아니라, 잃어버린 드라크마 바로 “그 드라크마” 를 가르키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TV를 보니까, 어떤 어머니가 아들을 잃어버렸습니다.
더구나 그 아이는 정신 박약아요 지체 부자유자였습니다. 누구의 도움이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어머니가 그 아이의 손이 되고 그 아이의 발이 되어 주었습니다. 집안의 모든 생활이 그 아이한테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도 늘 다니던 병원에서 치료를 하고, 어머니가 의사와 상담을 하는 중에 잠깐 사이에 그만 그 아이를 잃어 버렸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타겠습니까? 음식이 입에 넘어갈리 없습니다. 잠이 올리 없습니다. 전단지를 많이 만들어서 그 아이를 찾기 위하여 날마다 거리를 다닙니다.
지나가는 아이들을 보면 모두 자기 아들 같습니다. 그러나 뛰어가서 확인해 보면 아닙니다. 그 아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아들들이 있지만 내 아들, 그 아들이어야만 됩니다.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오늘 본문에서 잃어버린 드라크마는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인이 잃어버린 “그 드라크마” 를 찾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여인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아내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기쁨의 탄성을 지릅니다.
9절 말씀에 보면
“또 찾아 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계속해서 10절 말씀에서는 찾았을 때의 감격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했습니다.
여러분! 이 여인은 드라크마 하나를 찾았다고 잔치를 열었습니다. 양을 찾은 목자도, 아들을 찾은 아버지도, 모두 잔치를 열며 기뻐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드라크마 하나를 찾았다고 잔치를 연다?
돈의 값어치로 따진다면 잔치를 벌이면 오히려 손해가 막심합니다. 그러나 이 드라크마는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엄청난 값어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찌그러진 동전일지라도 그 드라크마는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영혼 한 사람이 구원받을 때의 기쁨을 어떻게 표현하셨습니까?
눅15:7절 말씀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했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입니다.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면 하늘에서는 잔치를 벌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론}***
여러분!이 드라크마는 어떤 값어치가 있길래 이 여인은 그토록 잃은 드라크마를 찾기 위하여 애를 쓰는 것입니까?
1. 잃은 드라크마의 가치.
바로, 우리 모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매우 귀한 드라크마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가치는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보배스러운 드라크마 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잃은 드라크마의 비극.
3. 잃은 드라크마의 행복.
잃은 드라크마는 여인의 뇌리 속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꿈속에서도 잃은 드라크마를 생각하고 있었으니 이 드라크마는 행복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여인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나를 잊지 않고 찾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 드라크마를 찾으시는 하나님.
여러분! 여러분도 하나님의 품을 떠나 잃어버린 바된 “그 드라크마” 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 드라크마가 남편일 수 있고, 아내일 수 있고, 우리 자녀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웃이나 친척일 수도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그 드라크마” 는 “나” 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떠났었다면 그 드라크마는 “나” 입니다.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여인은 빗자루를 들고 샅샅이 쓸며 뒤졌습니다. 마당도 쓸고, 부엌도 쓸고 여인은 온 집안을 쓸면서 열심히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
전도자들이 이렇게 해야 될 줄 믿습니다.
아파트, 시장통 동네 구석구석을 쓸어야 합니다. 가족 가운데 누구인가를 찾기 위하여 쓸어야 합니다. 친족가운데 누구인가를 찾기 위해서 쓸어야 합니다.
때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피곤하고 지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나는 너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거야! 반드시 찾고야 말겠어!” 라고 수없이 외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어이 찾아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여인의 결단을 배워야 합니다. “나는 포기하지 않겠다!” 는 믿음을 가지고 그 드라크마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택함을 받고, 먼저 부르심을 받아 구원받은 우리들을 통하여 “그 드라크마” 를 찾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여러분을 통하여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큰 기쁨을 돌려 드리는 존귀하신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묵상:누가복음15:8-10절입니다.오늘도 말씀을 묵상하시고 여인과 같이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시고 끝까지 찾으시기를 소원합니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