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믿음대로 되라
참고말씀: 막5:35,36; 눅18:10-14; 롬3:9-12
읽을말씀: 마9:1-38
주제말씀: 마9:28,29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첫째, 자신이나 타인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십니다!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마9:28,29)
본문에는 다섯 번의 신유 사건이 소개되고 있는데 이것들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까? 믿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 즉 예수님이 당사자나 타인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신 사건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각각의 내용을 살펴보자면, 중풍병자의 경우는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고,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2절)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의 경우는 본인의 믿음을 보셨으며,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20-22절)
소녀의 경우는 그녀의 아버지, 곧 회당장의 믿음을 보셨으며,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막5:35,36) /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25절)
두 시각장애인의 경우는 본인들의 믿음을 보셨고,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 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27-30절)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의 경우는 그를 예수님께로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각각 고쳐주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32,33절)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예수님은 믿음대로 역사해주시되 당사자나 타인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 하신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더욱 어찌 해야 합니까? 믿음으로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믿음으로 가족과 자녀, 성도를 위해 기도하되, 본인이나 타인의 믿음을 통해 역사하시는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하며, 또한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는 주님의 물으심 앞에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 부르심에 즉시 응답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마9:9)
예수님은 누구를 지나가시다가 부르셨습니까? 마태입니다. 그가 어디에 있을 때 부르셨습니까? 세관에 앉아서 때, 곧 세리로써 세관에서 업무 중일 때 그를 부르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9절 상) 그러자 그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즉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일어나 따르니라.”(9절 하)
그만 부르심 앞에 반응했습니까? 아닙니다. 그의 동료 세리들과 여러 사람들도 주님의 부르심 앞에 응답하여 예수님께로 나아왔습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10절)
그러나 당시만 해도 세리는 누구와 같이 여겨졌습니까? 죄인(罪人)입니다.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10절 중) 바리새인들이 보기에는 그들은 모두 누구에 불과했습니까? 같은 죄인 집단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교제한다고 비난했고,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11절)
이에 대해 예수님은 자신이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든 자를,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점을 천명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12,13절)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의사가 자신이 환자임을 순수하게 인정하고 찾아오는 사람을 진료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 곧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며, 하나님의 의를 힘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자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다는 점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고 오직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과 여전히 의인인 줄 착각 하는 두 부류의 사람만 존재할 뿐입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9-12)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리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18:10-14)
한편, 왜 같이 금식하지 않느냐고 따지는 이들에게는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니이까.”(14절) 무엇을 말씀해주셨습니까? 그들이 여전히 율법의 형식에 얽매여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와 같은 율법적인 태도를 버리고, 오히려 복음에 합당한 새로운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어떤 비유들을 통해 그리 하셨습니까? 혼인집 비유와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15절) 생배 조각과 낡은 옷 비유,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16절)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 부대 비유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17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