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고장 홍천군(洪川郡)
홍천군 관내도 / 홍천 내린천 / 강원도 관내도
1. 홍천군의 자연환경(自然環境)
홍천군은 태백준령의 서쪽인 영서(嶺西)지방으로, 강원도 중부 내륙에 가로로 제법 넓게 펼쳐져 있다.
동쪽은 양양군과 강릉시, 서쪽은 경기도 양평군과 가평군, 남쪽은 평창군과 횡성군, 북쪽은 춘천시 및 인제군과 경계를 맞대고 있다.
지형을 살펴보면, 북쪽에 약수산(藥水山, 1,306m), 응복산(鷹伏山, 1,360m), 구룡덕봉(九龍德峰, 1,388m), 동쪽에는 오대산(五臺山, 1,563m), 상왕봉(象王峰, 1,493m), 두로봉(頭老峰, 1,422m), 남쪽에는 계방산(桂芳山, 1,577m) 등 고산준령(高山峻嶺)이 온통 둘러싸고 있는 이 오지(奧地)라고 할 수 있다.
군내(郡內)를 흐르는 강을 보면, 태백준령이 에워싸고 있는 동쪽의 계곡에서 발원한 홍천강(洪川江)은 서쪽으로 흐르면서 여러 지류와 합쳐져 군의 중앙부를 통과하여 서쪽으로 흐르고, 내린천(內隣川)은 홍천 소계방산(小桂芳山)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냇물인데 이름난 청정지역으로 레저시설인 래프팅(Rafting)의 명소로 알려졌다.
홍천은 산간내륙지방이지만 강 유역에서 5∼10만 년 전, 구석기시대 것으로 보이는 석기(찍개, 긁개, 찌르개) 등이 출토되었고 화촌면(化村面)의 지석묘군(支石墓群)에서 16기(基)의 지석묘가 발견되었는데 이곳에서 민무늬토기도 다량 발견된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BC 15~6세기)와 초기 철기시대(鐵器時代, BC 4~3세기)에도 인간이 이곳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심산유곡이 많다보니 수많은 불교사찰들이 있었는데 현존 사찰로는 수타사(壽陀寺,708)를 비롯하여 천축사(天竺寺), 홍남사(洪南寺) 등 10여 개의 사찰이 있고 불교문화재로는 석탑(石塔), 당간지주(幢竿支柱), 철비(鐵碑), 석불(石佛), 사지(寺址),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비로자나불좌상(毘盧자나불좌상), 불대좌(佛臺座) 광배(光背), 부도(浮도), 사리탑비(舍利塔碑), 소조사천왕상(塑造四天王像),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등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자료가 수도 없이 많다. 또한 문화재자료로 지정도 것으로 수타사삼층석탑(壽陀寺三層石塔), 홍온당부도(紅蘊堂浮屠), 대적광전(大寂光殿), 서곡대사사리탑비(瑞谷大師舍利塔碑), 월인석보(月印釋譜, 권17·18), 봉황문(鳳凰門), 흥회루(興懷樓) 등 헤아리기도 벅차다.
홍천강(洪川江)과 내린천(內隣川)은 수질이 깨끗하여 갖가지 1급수 물고기들이 서식(棲息)하는데 버들치, 피라미, 갈겨니, 쉬리 등은 우세종(優勢種)이라 분류되고 비교적 많지만 열목어(熱目魚), 어름치, 황쏘가리는 희소종(稀少種)으로 분류되며 특별한 보호를 요하는 민물고기이다.
이곳 산간오지였던 홍천은 2017년 서울 양양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홍천을 통과하게 되어 교통이 원활해 졌고 홍천휴게소도 생기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장소가 되었다.
2. 3둔(三屯) 4가리(四耕)와 십승지지(十勝之地)
조선시대 유행한 정감록(鄭鑑錄)에 ‘난을 피해 편히 살만한 곳이 3둔(三屯) 4가리(四耕)’라는 말이 있고 또 십승지지(十勝之地)라고 하여 전쟁을 피할 수 있는 장소 10곳을 지정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왜구의 노략질로 골머리를 앓았는데 마침내 선조(1592년)에 이르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엄청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는데 전쟁이 끝나는가 싶더니 5년 후 또다시 쳐들어오니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이다. 이 침략으로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왜놈들의 만행에 치를 떨게 되는데 난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정감록(鄭鑑錄)에서 명시(明示)한 곳이 삼둔(三屯) 사가리(四耕)이다.
정감록(鄭鑑錄)은 조선시대 민간에 널리 유포되었던 도참서(圖讖書)인데 이 책의 내용은 도참설(圖讖說)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기록으로, 도참(圖讖)은 운명이나 미래를 예언하는 것을 말한다.
어찌 보면 황당무계한 내용인 이 정감록(鄭鑑錄)은 당시 무식한 일반 백성들에게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신선(神仙)사상이 주류를 이루는 중국의 도교(道敎)와 일맥상통하는 점도 있다고도 하겠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예언서이기도 한 정감록은 여러 가지 감결류(鑑訣類)와 비결서(秘訣書)의 집성(集成)이며 이본(異本)이 많은 것이 특징인데 저자가 불명확한 것도 특징이라고 한다.
정감록에서 지명(指名)한 3둔(三屯) 4가리(四耕)의 3둔은 강원도 홍천군의 살(生)둔, 월(月)둔, 달(達)둔이고 4가리는 강원도 인제군(麟蹄郡)의 아침가리, 적가리, 연가리와 홍천군(洪川郡)의 명지가리였다.
둔(屯)은 농사짓기 좋은 펑퍼짐한 산기슭을 말하는데 살둔(生屯)은 내린천(內隣川) 상류의 깊은 계곡으로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때에도 희생자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이 살둔(生屯)은 조선조 세조(世祖, 首陽大君)가 단종을 폐위시키고 정권을 왕권을 잡은 후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던 사육신(死六臣) 등을 대상으로 엄청난 피의 회오리가 휩쓸게 되는데 이 후 사육신의 후손들이 이곳 홍천 살둔(生屯)으로 피해 와서 숨어살아 무사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근처의 월(月)둔, 달(達)둔은 현재 사람이 살지 않는 오지이지만 예전 사람이 살았던 마을 흔적은 있다.
4가리(四耕)도 농사지으며 난을 피해 평화롭게 살 수 있다고 꼽은 네 곳인데 삼척 무장공비 침투로 환난을 겪은 후 정부에서 주민들을 모두 대피시킨 후 현재 두어 가구만 남아있는 곳이다.
십승지지(十勝之地) 또한 3둔4가리와 비슷한 의미인데 3둔4가리가 강원도에 집약(集約)되어 있는 반면 십승지지(十勝之地)는 보다 넓은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강원 영월(寧越), 경북 풍기의 금계촌(金鷄村), 경남 합천 가야산 만수동(萬壽洞), 전북 부안(扶安) 호암(壺巖) 마을, 충북 보은 속리산 증항(甑項), 전북 남원 운봉 동점촌(銅店村), 경북 안동 화곡(華谷: 봉화), 충북 단양의 영춘(永春), 전북 무주(茂朱)의 무풍(茂風) 여덟 곳을 가리킨다.
3. 달변가(達辯家) 우리 고모부(姑母夫)
이웃에 살던 우리 고모부는 당신 말씀으로 ‘학교 문턱에도 못 가 보았고,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판무식(判無識)’이셨지만 말을 시작하면 청산유수(靑山流水)요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달변가(達辯家)셨다.
어쩌다 한가한 시간이 있어 한 번 입이 열리면 동년배 어르신들은 물론이려니와 우리또래의 어린 아이들을 앉혀 놓고도 이야기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곤 했다.
3둔은 어디어디이고, 4가리는 어디어디가 틀림없다는 둥, 난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十勝之地)는 어디어디라는 둥, 조선이 망하면 정도령(鄭道令)이 계룡산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리라는 예언이 있는데 지금 현대의 정주영이 틀림없다’는 둥...
또, 어디서 들었는지 60년을 3천 번, 즉 1만 8천년을 살았다는 ‘삼천갑자 동방삭(三千甲子東方朔)’ 이야기며, ‘도참설(圖讖說)’과 ‘정감록(鄭鑑錄)’ 등으로 어찌 보면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인데 얼마나 확신에 차서 설명을 해대는지 엄청나게 신기할뿐더러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너희들 삼천갑자 동방삭을 들어봤나? 아, 저승사자의 실수로 젊은 동방삭이 염라대왕 앞에 끌려왔는데 염라대왕이 명부(名簿)를 보니 잘못 데려왔거든. 그래서 얼른 돌려보내라고 호통을 쳤지. 그런데 동방삭이 염라대왕이 한 눈을 파는 사이 명부를 슬쩍 드려다 보니 자기 이름 밑에 「수(壽) 일갑자(一甲子):60년」라고 쓰여 있거든. 아, 그래 이놈이 몰래 붓을 들고 한일(一)자를 삼천(三千)으로 바꾸어 썼대.
그리고는 돌아와서 냅다 도망 다니며 저승사자를 피한 거여. 노한 염라대왕이 숨어 다니는 동방삭을 당장 잡아오라고 하였는데 저승사자가 수소문하여보니 동방삭이 마침 조선(朝鮮) 땅에 있는 것을 알고 우리나라로 와서 그 부근 시냇가에서 시치미를 뚝 떼고 앉아서 숯을 씻고 있었거든.
마침 동방삭이 지나가다가 이상하여 물어 보았더니 저승사자가 시치미를 뚝 떼고 ‘숱이 검어 더러워서 씻고 있다.’고 하자 동방삭이 ‘내가 삼천갑자(三千甲子)를 살았지만 숯이 검다고 씻는 놈은 첨 봤다’고 하자 저승사자가 냉큼 잡아갔다는 거여. 그 숯을 씻던 곳이 바로 용인(龍仁) 땅 탄천(炭川)이여.’
훗날 확인해 봤더니 경기도 용인에 정말로 탄천(炭川)이 있고, 개울 바닥에 숯처럼 생긴 시커먼 돌이 깔려있다고 한다.
4. 홍천에 전승(傳乘)되는 설화(說話)
<오음산(五音山) 삼마치(三馬峙)>
삼마치(三馬峙) 고개는 홍천과 원주를 잇는 국도 중간쯤에 있는 큰 고개로 그 마루턱에 오음산(五音山)이 있다. 옛날 이 고을사람들은 오음산에서 다섯 명의 장수가 태어난다는 속전(俗傳)을 믿고 이들이 행여 반역을 일으킬까 두려워 산골짜기에 구리를 녹여 붓고 쇠창을 꽂았다고 한다. 예전 내려오는 이야기로 장수가 태어나면 나라에 반역을 일으키는 반역자가 된다는 속설(俗說)이 있었다.
산골짜기에 구리를 녹여 붓고 쇠창을 꽂아 장수의 혈맥이 끊겼던지 바위에서 검붉은 피가 용솟음치면서 다섯 가지 괴상한 울음소리가 사흘 밤낮을 그치지 않고 울려왔다. 사흘이 지난 저녁 주인을 잃은 백마 세 마리가 나타나 애달프게 울다가 고개를 넘어 어디론지 사라졌다. 그 뒤부터 마을사람들은 이 산을 다섯 가지 울음소리가 났다하여 오음산(五音山), 고개를 삼마치(三馬峙)라 불렀다고 한다.
<쌍계사(雙溪寺)>
내촌면(內村面)에 있는 쌍계사(雙溪寺)에 얽힌 전설로, 신라 서곡대사가 절터를 볼 때 계란을 묻어 닭이 울어야 명당(明堂)이라고 하면서 밤중에 계란을 묻었다. 과연 새벽에 닭 두 마리가 홰를 치며 울어 쌍계사(雙鷄寺)라고 이름을 지었다가, 후에 두 줄기의 시내가 흐름을 보고 쌍계사(雙溪寺)로 고쳤다고 한다.
<백우산(白羽山) 장수>
옛날 홍천군 내촌면 백우산 기슭 매지골에 화전을 일구며 사는 초맹삼이란 어질고 착한 농부가 살았는데 화전민(火田民)이라 조상의 제사를 지낼 때에는 이웃 동네에 가서 쌀을 몇 됫박 구해다가 제사를 올리는 형편이었다고 한다. 부인 허을란 역시 마음이 착하고 남편을 잘 공경하여 인근에서 금슬 좋은 부부로 소문이 나 있었지만 나이가 오십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
어느 해 가을, 일을 끝내고 잠시 쉬고 있는데 설악산으로 간다는 늙은 스님이 찾아와 시주를 청하였다.
마음이 착한 부부는 스님을 반갑게 맞아 강낭콩을 넣은 밀범벅을 대접한 후 농사지은 콩을 한 됫박 시주했다. 그랬더니 스님은 ‘나무아미타불’을 몇 번 되뇌고는 떠났다고 한다.
그런데 이듬해 봄, 신기하게도 부인의 몸에 태기(胎氣)가 있어 놀랐는데 가을이 되자 부인은 드디어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아들을 낳아서 부부의 기쁨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일 뿐 즐거운 일에는 슬픔이 따른다고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겼다. 새로 태어난 아기가 백 일이 지나기도 전에 걷기 시작하고 기운이 장사였는데 더욱 이상한 것은 밤마다 살그머니 나갔다가 자정이 지나서야 옷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들어오는 것이었다.
부부는 차츰 겁도 나고 기이하여 하루는 몰래 뒤를 따라가 숨어서 아들이 하는 행동을 훔쳐보았더니 이게 웬일인가? 어린 아이는 칼을 들고 무술 연습을 하는데 그야말로 신출귀몰,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모습이 비호같았다.
집으로 돌아온 부부는 방바닥에 엎드려 밤새도록 통곡했다. 그 당시에는 장수를 낳으면 나라에 화를 입힌다고 하여 아이가 성장하여 힘을 쓰기 전에 부모의 손으로 죽여야 한다고 했다. 아이는 자라면서 무술이 점점 늘었고 그 소문은 동네에 널리 퍼져 나갔다. 장수아이에 관한 소문은 널리 퍼져서 원주에 있는 감영(監營)에까지 들어가게 되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아들을 죽이기로 했다.
어느 날 뇌성(雷聲)이 천지를 뒤흔들고 번갯불이 쉴 새 없이 번쩍이는 밤, 부부는 피눈물을 머금고 잠자는 아들의 배 위에 콩 두 가마니를 얹었다. 눈을 부릅뜬 아들은 말똥히 저주하는 눈빛으로 부모를 쳐다보자 콩 한 가마니를 더 얹어 아이를 죽이고 말았다. 장수가 죽자 장수를 따라 나타났던 용마(龍馬)도 울며 헤매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홍천 도관(道寬) 2리에 ‘우렁골’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그 때 용마가 울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 ‘쉴 바위’라고 불리는 넓은 바위도 있는데 아기장수가 쉬었던 바위라 하고 그 곳에서 3km 쯤 떨어진 곳에 ‘약세’라는 곳이 있는데 용마의 죽통과 말 발자국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고 한다. 장수를 모실 수 없게 된 용마는 슬피 울면서 헤매다가 크게 한번 뛰어 영월 땅에 떨어져 죽었다고 하는데 영월에는 용마의 무덤이 있었다고 하며 아들을 죽인 부부는 시름시름 앓다가 오래가지 못해 죽었다는 전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