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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키 크룸로프>
<체스키 크룸로프>
잘츠부르크 - 린츠 - 서머라우 - 체스키 부데요비체 - 체스키 크룸로프
8시 10분행 기차를 타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야 했다. 게스트 하우스의 아침식사는 7시 30분부터였으나 주인 아주머니는 우리를 위하여 특별히 7시부터 식사준비를 해 주셨다. 덕분에 우리는 7시 40분 shuttle train을 타고 나갈 수 있었다. 중앙역까지는 3분밖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시간 여유가 충분히 있었다.
집을 나서면서 고마움에 대한 답례로 준비해 간 부채를 선물로 주었다. 시원한 날씨라 부채가 그렇게 많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한국을 알린 셈이다.
잘츠부르크 중앙역을 출발한 기차는 린츠(LINZ)에 9시25분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연착을 하는 바람에 9시35분 출발 예정인 스머라우(SUMMERAU)행 기차를 탈 수 없었다. 후진국도 아닌 나라에서 연착이라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기차는 이미 출발하고 말았으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린츠는 공업 도시라 구경할 것도 마땅하지 않고 역 주변을 둘러봐야 볼게 없었다. 우리의 최종목적지인 체스키크롬로프를 가기 위해서는 스머라우와 체스키 부데요비체를 거쳐야 하는데, 만약에 또 연착을 한다면 우리의 목적지까지 갈 수 있을지가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우리는 11시35분 차를 타고 오스트리아의 국경도시인 스머라우에 가서 체스키 부데요비체행 기차를 기다리기로 했다.
기차 시간까지는 한참 여유가 있어서 한국으로 전화도 하고, 인터넷 검색도 하고, 화장실 볼일도 보았다. 유럽은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이용료를 내야 하는데, 주로 우리 돈 800원 정도에 해당한다. 린츠역의 화장실은 할머니가 관리하고 계셨는데, 만약에 돈을 내지 않고 화장실에 들어갔다간 큰 코 다치게 된다. 문이 자동적으로 잠겨져 안에서는 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할머니 몰래 들어갔다가는 화장실에 갇히는 수가 생긴다. 할머니에게 돈을 내고 신고를 하면 할머니는 열쇠로 문을 열어서 안에서도 자유롭게 문을 열 수 있도록 한다. 화장실이 할머니의 직장이므로 할머니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래야 하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어떤 곳이든 무료로 화장실을 이용하다가 돈을 내려니 화장실 이용료도 여간 비싼게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 내내 입장료 내고 들어가는 곳에서는 나오기 전에 반드시 화장실을 이용하고 나왔다. 물론,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곳인데도 따로 화장실 이용료를 내야 하는 곳도 있었다.
린츠역에서 우리와 같은 처지의 홍콩 청년을 만났다. 그 사람은 우리와 달리 프라하로 가는 길이었는데, 체스키 부데요비체역까지는 여정이 같았다. 그도 아주 난감한 듯, 기차 시간표를 훑어보더니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스머라우 역에서 다시 만났다. 그것도 인연이라 우리는 체스키부데요비체까지 함께 하기로 했다.
스머라우는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시골마을에서 몇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이다. 다음 기차를 탈 때까지는 두 시간의 여유가 있었고, 점심식사도 해야 했다. 철도원에게 부탁해서 짐도 맡기고, 근처의 식당도 소개받았다. 철도원은 동양인인 우리에게 아주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역에서 걸어서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작은 식당이 있었는데, 바깥에서 보기에는 영업을 하지 않는 집처럼 보였다. 그냥 가려다 문을 열어본 우리는 너무도 놀랬다. 안은 그야말로 흥겨움이 가득한 레스토랑이었기 때문이다. 트래킹을 다녀온 한 떼의 사람들, 마을 사람들이 주를 이루고 이방인은 우리만 있었다. 우리는 모두 슈니첼을 시켰고, 나만 샐러드를 시켰다. 그런데 음식이 나왔을 때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양이 엄청나게 많았던 것이다. 양만 많은게 아니라 맛도 정말 좋았다. 여행 중 먹어 본 최고의 슈니첼이었다. 슈니첼에는 양배추 초절임 같은 것과 소스로는 스트로우베리잼 비슷한게 나왔는데, 모두 우리 입맛에 딱 맞았다. 저렴한 가격에 맛있는 점심식사를 할 수 있었던 스머라우의 그 작은 식당은 오래도록 기억날 것이다.
우연히 만난 홍콩 청년은 26살로 건축가가 꿈이라고 했다. 대학을 마치고 한 달 여정으로 유럽을 여행하고 있는 청년의 여행노트를 보고 감동했다. 건축학도다운 꼼꼼한 메모와 스케치들. 마음에 드는 건물이 있으면 그곳에서 몇 시간에 걸쳐서 스케치를 한 것들을 보며 작은 전율을 느꼈다. 단체로 우루루 다니면서 이곳저곳을 누비기에 바쁘던 한국의 대학생들이 머리를 스치면서 저런게 진정한 여행의 맛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좋아하는 일을 위해, 미래를 꿈꾸면서 혼자 다니는 여행......
점심을 먹고도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어서 마을을 둘러보았다. 넓은 농토가 광활하게 펼쳐지고 저 멀리 마을을 이루고 있는 아주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우리에게 다가온 오스트리아의 작은 시골 마을도 아주 풍요롭게 다가와 그 동안 가지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인상을 바꿀 수 있었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오스트리아 남학생과 펜팔을 한 적이 있다. 3년 정도 편지를 주고 받다가 연락이 끊어졌었다. 그때 그 남학생은 자기 동네가 담긴 사진을 보내주기도 했는데,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때는 어떻게 저런 곳에 살 수가 있을까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번 여행에서 보니 오스트리아의 대다수가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 남학생은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 동안 잊고 있었는데, 다음에 시골집에 가면 편지 상자를 풀어 보아야겠다. 그때만 해도 진주에서 부산까지 5시간이나 걸리는 완행버스를 타고 다닐 때이니까 내가 오스트리아를 여행할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할 때였다. 앞으로 20년 뒤면 세상은 또 어떻게 변해 있을까?
우리는 2시 45분 기차를 타고 체스키 부데요비체로 향했다. 국경은 Horni Dvoristes란 곳이었는데, 스머라우에서 5분쯤 걸리는 곳이다. 그곳에서 여권 검사를 끝내고 우리는 체코로 들어섰다. 체코에 왔다는 것을 간판에서부터 느낄 수 있었다. 눈에 익지 않은 문자의 간판이 늘어났다. 그리고 또 하나는 집들의 모양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집들은 한결같이 예뻐서 농가라고 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집이었다. 하지만 체코로 접어들자 농가의 모습을 한 집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의 집들이 항상 손님을 배려하여 정돈해 놓은 집이라면, 체코의 집들은 생활의 냄새가 배인 집들이었다.
체스키 부데요비체는 맥주로 유명한 곳이지만 우리는 그곳을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구경을 한다고 해도 몇 시간에 불과해서 환전만 조금 하고 그만 체스키 크룸로프로 바로 가기로 한 것이다. 피곤한 우리들로서는 현명한 결정을 내린 셈이다. 체스키 크룸로프에 도착한 시간이 5시 54분이었으니까.
체스키 부데요비체에서 체스키 크룸로프로 가던 기차는 잊을 수 가 없다. 우리의 비둘기호보다 더 심한 기차로 속도에 있어서야 비둘기호보다 빠르지만, 딱 두 칸밖에 없던 미니 기차, 선로와 레일이 부딪치며 내는 소음, 에어컨이 전혀 없어서 더운 김만 내뿜던 객실, 그 속에서도 꿋꿋하게 책을 읽고 가던 아가씨, 반쯤 술에 취해 장난끼가 발동해 있던 한 떼의 청소년들, 바깥으로 보이던 체리나무와 들판들.... 더위만 아니었으면 참 괜찮은 추억이 되겠지만 문명의 이기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시골 기차는 정말 힘들었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가장 그리워지는 여행의 기억이다.
체스키 크룸로프에 도착했다. 마을은 기차역과 조금 떨어진 듯했다. 기차역에는 호스텔을 소개하는 팜플렛들이 많았다. 아마도 프라하에서 당일치기로 가능하니까 자고 가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물어물어 구시가지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관광안내소가 있었다. 그때가 5시였는데, 문을 닫을 시간이었지만 먼발치에서 우리를 보신 할머니는 우리를 위해 문을 닫지 않고 기다리고 계셨다. 우리가 지리를 물어보자 기다렸다는 듯이지도를 내어주며 손짓발짓으로 말씀해주셨다. 시간 관념이 철저한 그네들이지만 할머니이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란 생각이 든다. 아니면 동양인에 대한 호기심이었을 수도 있고. 할머니는 우리를 마지막으로 문을 걸어 잠그셨다.
그런데 우리에겐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원래 6명으로 예정되었기 때문에 집을 두 군데 구한 것이다. 더블 룸 3개가 있는 곳이 없어서 부득불 두 군데를 구했는데 따로 떨어지기엔 좀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한 군데는 그냥 값을 지불하고 포기하더라도 같은 곳에 머물기로 했다.
역에서 가까웠던 Pension Danny에 도착해서 아가씨에게 부탁을 해, 다른 숙소인 트래블스 호스텔로 전화를 해서 취소해 줄 것을 부탁했다. 처음에는 나보고 직접 하라고 하더니, 말도 서툴고 제대로 전달이 안 되니 대신 좀 해달라고 사정을 했더니 그래주겠다고 했다. 트래블스 호스텔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취소할 수 있냐며, 하룻밤 숙소비는 내어야 한다고 했다. 미안하다고 사정을 하고는 Pension Danny에 함께 묵게 되었다.
피곤에 지친 우리들은 잠시 쉬고 밥을 먹기로 했다. 그때는 이미 슈퍼도 문을 닫아서 슈퍼에서 음료를 사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번에는 내가 너무 피곤하여 산들이와 집에서 쉬고 곽선생님과 김선생님께서 도시 탐험에 나섰다. 그리고선 도시 지리를 대충 익히고 돌아오셨다.
우리는 중앙광장까지 가서 그곳의 중국식당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밥은 맛있었지만 밥값은 너무 비쌌다. 저녁을 먹고 나서 산책 겸 소화도 시킬 겸 크룸로프 성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책과 텔레비전에서 보던 중세의 도시를 내려다보는 맛은 일품이었다. 주황색 지붕으로 둘러싸인 크룸로프는 평화 그 자체였다. 미야지키 하야오 감독의 만화 영화 <마녀배달부 키키>에서 키키가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던 도시 같은 느낌을 주었다. 중세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우리는 사람들이 많이 가는 성 안의 공원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하도 서둘러 가길래 우리도 따라 갔더니 뭔가 공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스탭들이 통로를 막고 있었다. 무슨 공연이냐고 물었더니 무슨 연극이라고 했다. 우리는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관람을 하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마지막 입장객인지 할인도 해줬다.
공연은 <백조의 호수> 발레 공연이었다. 실내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야외극으로 중세 연극의 원형을 볼 수 있는 극이었다. 처음에 발레라는 것을 알고는 약간 실망도 했지만 결코 실망할 일이 아니었다. 공원 안에는 공연을 할 수 있는 야외무대와 함께 원형관람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야외무대 뿐 아니라 관람석 주변 모두를 무대로 활용하여 연극이 가능하게 준비해 두었다. 여름 내내 다양한 발레 공연을 하고 있었는데 운 좋게도 그 중의 하나를 관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산책하는 기분으로 나온 터라 얇은 옷을 입고 나왔는데, 밤이 되자 날씨가 쌀쌀해져서 제법 추었다. 사람들이 두터운 담요 하나씩을 들고 달려오더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연은 2시간이 넘게 걸리고 날씨는 추어서 조금 괴로웠지만 달리 다른 방도가 없었다. 관람을 그만두고 가려고 해도 사방이 모두 무대라서, 또 관람석이 언제 돌아갈 지도 모르니까 갈 수도 없었다. 곽선생님 아저씨는 공연을 보다가 일찍 가시기로 했는데, 꼼짝없이 갇히는 신세가 되셨다. 산들이도 민소매티에 짧은 치마만 입고 나온 터라 정말 힘들었다. 우리의 준비 부족으로 얼어 죽을 뻔하긴 했지만 잊을 수 없는 좋은 경험이었다. 누군가 체스키 크룸로프에 간다고 하면 꼭 야외 발레극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짐을 꾸리고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모든 여행지마다 최소한 2박을 하겠다고 예정했으나 크룸로프만은 1박으로 잡을 수밖에 없었다. 한 도시에서 하루만 묵고 떠난 다는 것은 그 도시를 그저 스쳐 지나는 것이라 정말로 피해야 하지만 일정이 빠듯하여 알면서도 더는 묵을 수가 없었다. 전날 밤에 본 발레 공연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아침 7시 30분에 룸서비스로 아침식사가 왔다. 빵과 버터, 치즈, 차, 커피, 바나나로 준비된 아침식사는 진수성찬이었다. 어느 고급 호텔 못지않은 식사였다. 싼 숙박비에 비하면 너무나 고급 식사였다.
그런데 8시 30분에 체크아웃을 하려고 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방값 때문에 한동안의 실랑이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6명분의 방값을 내라고 했다. 몇 차례의 전화와 이야기, 그리고 예약지를 보여주며 겨우 해결하여 5명분의 방 값을 냈다. 어제 다른 호텔을 취소하고 한 곳에만 머무는 과정에서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적극적으로 따져서 자신의 이익을 챙길 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는 호스텔에 짐을 맡겨두고 시내 구경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 가는 길 - 비를 피해 다리 밑 신세를 지면서>
밤에 올라갔던 크룸로프성을 다시 한번 더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에곤쉴레 하우스>로 가서 전시회 관람을 했다. 크룸로프는 쉴레의 어머니가 태어난 곳이었는데, 쉴레는 이곳에서 자주 보냈고, 그 이유로 쉴레 문화센터를 건립하여 쉴레의 작품을 상설 전시하고 다른 사람들의 특별전을 열고 있었다. 우리가 갔을 때는 샤갈, 쇤베르그, 그리고 체코의 유명한 조각가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쇤베르그는 작곡가인 동시에 화가였다. 그의 자화상은 뭉크를 떠올리게 했다. “전통의 정신을 추구하는 예술의 형식적 과정은 의식적 행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예술은 무의식의 편이다.”라고 말한 쇤베르그는 그림을 통하여 그의 정신을 표현한 듯했다.
산들이는 쉴레의 그림을 보면서 내내 ‘변태그림’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인간의 원초적인 면을 직설적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점심은 Wood Maria라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블타바강가에 자리 잡은 레스토랑은 보헤미안 전통 요리로 유명한 집이었으며, 집에서 손수 만든 아이스크림과 허브차로도 유명했다. 옆자리에 앉은 독일인 가이드는 우리에게 그 집의 요리에 대해 극찬을 했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점심시간에는 자리가 없어서 기다리거나 돌아가야 되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는 맛을 가지는 식당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환영받는 법이다.
숙소에 가서 짐을 찾고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크룸로프는 작은 도시이고, 중세의 돌길이 그대로 남아 있어 차가 다니기에는 불편한 도시라 버스터미널까지 걸어서 가기로 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비를 맞았다. 갑자기 소나기가 강하게 내렸는데, 그때 우리를 도와 준 것인 다름 아닌 다리였다. 다리 밑 신세를 진 것이다. 그때 만약 다리가 없었다면 우리는 비를 쫄딱 맞았을 것이다. 다리가 그렇게 고마운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블타바 강에서는 가족단위로 래프팅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는데 비가 오는데도 래프팅을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이 었다.
블타바강은 흘러 흘러 프라하까지 가는데 그 긴 강을 따라가며 사람들은 래프팅을 즐긴다. 우리에게도 더 많은 시간이 있다면 하루쯤은 래프팅을 즐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은 오감을 통하여 느껴야 한다고 하는데, 가난한 우리들은 눈으로만 즐기는 편이다. 좀더 여유를 가지고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즐길 수 있는 여행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고생고행하며 버스 터미널을 찾아갔다. 그런데 버스터미널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티켓을 파는 사무실도 없고 그저 버스 승강장만 있으니. 게다가 벽에 적어 놓은 시간과 차시간이 달랐다. 할 수 없이 모든 버스를 훑어가며 프라하행 차를 찾았다.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버스 터미널 - 허허벌판 같던 황당한 때>
동유럽은 차에 거의 에어컨이 없다. 우리는 버스의 외관을 보면서 어느 차가 에어컨이 있을까를 예상해 보곤 했지만 결론은 거의 모든 차가 에어컨이 없으며, 투어 버스 정도만 에어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김선생님께서는 우리가 탈 버스는 Express인데, 분명히 에어컨이 될 거라며 기대를 하셨다. 그렇지만 우리 버스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저, 중간에 다른 곳에서 내려 차를 갈아타지 않고, 프라하에 바로 가는 것만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프라하로 가는 길에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끝없는 평원이었다. 대단위 규모의 농업국가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체스키 크룸로프 이야기>
* 에곤쉴레에 대한 이야기
에곤실레는 오스트리아의 빈, 합스부르크 왕가가 몰락하기 직전 화려함과 불안감이 뒤섞인 도시를 무대로 활동했던 화가 에곤 실레는 1890년 도나우 강변의 툴른에서 태어났다 .
1906년 빈 미술 아카데 미에 입학 했으며, 그곳에서 대스승이자 친구와도 같았던 구스타프 클림(GustavKlimt1862~1918)를 만나 깊은 영향을 받는다.
1908년 클로스터노이부르크에서 열린 전시회에 처음으로 참가했고, 1909년에는 보수적인 분위기의 아카데미를 떠나 새로운 예술가 그룹(Neukunstgruppe)을 결성했다.
이후 표현주의적 성격을 띤 그의 회화 양식은 성숙기에 접어들었는데, 특히 1911년에 클림트의 소개로 만난 모델 발리 노이칠과 함께 인상적인 작품을 많이 제작했다.
사춘기 소년과 소녀에 강한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모델로 작품을 제작하던 실레는 1912년 미성년자 유과와 외설적인 그림을 그렸다 는 혐의로 체포되어 24일 동안 감옥 생활을 했다.
1915년 갤러리 아르노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개최한 후 , 모델 발리와의 동거 생활을 끝내고 에디트 하름스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이후 작품을 꾸준히 제작하여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로서 확고한 지위를 얻게 된다.
1918년 제49회 빈 분리파 전시회 에 참가하여 국제적인 명성까지 얻었으나, 몇 달 후 에스파냐 독감에 걸려 아내 에디트가 사망했고 사흘 뒤 실레 역시 독감에 감염 되어 스물여덟이라는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시대의 불안과 실레 자신의 내면적인 고독, 욕망, 혼란이 뒤섞인 작품들은 현대를 사는 우리의 삶을 투영하기에 영원한 공감대를 얻고있다.
* 우리가 묵었던 집Pension Danny
- 체코의 박공지붕의 내부를 알 수 있는 집. 체코는 도시가 작아서 집들이 박공지붕이다. 우리네 주택들과는 달리 좁은 면이 도로르 향해 나 있는데, 모두 현관을 밖으로 내기 위한 지혜였다고 한다. 좁은 집 때문에 집 안에는 에외 없이 다락방이 있다. 우리가 잔 집도 3층으로 된 박공 지붕의 집이었는데 산들이와 내가 잔 곳은 다락방이었다. 낮에는 조금 덥기도 하지만 참으로 안락한 곳이었다. 가격에 비하여 아주 좋은 곳이다. 체스키 크룸로프는 당일치기로 많이 왔다가서 방이 많다. 여유가 된다면 며칠 쉬면서 수상스포츠를 즐기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성안에서 매일 저녁 음악 공연도 있으므로 중세의 성에서 연주회를 감상하는 것도 멋진 추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