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 119편*
허의원이 계룡산 유구마을로 돌아가고 싶다고하자 김항국이 팔을 내저었다.
어허 안될 말씀입니다.
지금쯤 유구마을 허의원님의 집도 쑥대밭이 되었을 것입니다.
별 일이야 없겠지만 지금 내려가시면 영 일을 그르치게 될것입니다.
마음을 단단하게 가지고 기다리십시오. 곧 이어 내의원 수의로 부름받으실 것입니다.
내의원요?
허두겸은 내의원 수의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이 어린시절 내의원수의 였던 아버지를 따라 궁궐에 드나들었던 기억들이 아슴프레 떠올랐다.
어린시절에는 그게 마냥 좋기만했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만약에 아버지가 내의원 수의만 아니었으면 지금까지 살아계실지도 몰랐다.
아무리 좋은 자리라고 해도 앞날이 보장되지않는 삶은 좋다고 할 수없었다.
아버지도 당대에는 명의 소리를 들으며 내의원수의를 지냈지만 저승사자를 이기지는 못했다.
아무리 뛰어난 명의라고해도 하늘의 뜻을 거스릴 수는 없는 것이다.
허두겸은 어떻게하여 자신이 지금 대궐의 문앞에 머물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없었다.
어린시절 가족이 단란했던 때가 그립기는 했지만 자신이 내의원 수의가 되어 그시절을 재현하기는 싫었다.
장가를 들어 자신과 닮은 아이를 낳고 아버지와 똑같은 길을 간다고해도 그게 결국 행복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돌이켜보니 지난날 백두산에서 어린아이의 사체를 보며 의술을 익힌일이며 마장동에서 소와 돼지를 잡으며 익힌 의술이 다 무슨 소용이었나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아버지처럼 내의원 수의가 되려고 했던것은 정말 아니었다.
그게 아무리 좋은 자리라고 해도 한순간에 목을 내놓아야하는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본인은 자결로 끝을 맺으면 끝이 날지 모르지만 남은 가족은 어쩌란 말인가.
이제 대궐의 목전에 와 있는 것 같기는한데 지금의 상황은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스승님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대감님의 힘이라면 무사히 넘길 수가 있겠지요?
그게 지금 힘든 상황입니다.
지금 그쪽에 손을 내밀었다가는 같이 불을 뒤집어 쓸 수가 있습니다.
적당히가 아니라 아예 거리를 두는 게 나을 것입니다.
*명의120편*
풍기를 떠나 죽령을 넘은 지연은 나흘만에 북창동 이한로 대감집에 도착했다.
허의원을 만나자 달려가 품에 안기고 싶었는데 차마 그럴 수없었다.
불과 며칠 전에 소백산에 갔다가 낯선 심마니 총각과 너럭바위 위에서 정사를 벌인 일이 떠올라 부끄러웠다.
안처사의 다리는 잘 회복이 되었느냐?
네.지금은 거뜬하게 걸어다니십니다.
지연은 안호정이 몸도 회복했지만 마음씀씀이도 옛날과 확연하게 달라졌다고 전했다.
으음. 그거 참 잘되었구나.
사람은 몸만 병이 드는게 아니다.
몸보다 마음이 병들면 본인은 물론이고
주변사람까지 고통을 당하는것이다.
지연이 자신을 한양으로 부른 까닭을 묻자 지금바로 유구마을로 내려가 찾아오는 환자들을 돌보라고했다.
허의원은 이상하게 돌아가는 한양의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당분간은 내가 이곳을 떠나갈 수 없을것 같구나.
뒤따라 내려갈테니 먼저가서 환자들을 돌보도록하여라.
그날 저녁 이대감의 별채에서는 두 남녀가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운 새벽녘 지연은 허의원의 무릎에 머리를 묻고 설잠이 들었다.
허의원은 잠든 지연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농익은 여인의 향이 머리속으로 파고들어 하초가 뻐근하게 부풀어 올랐지만 차마 다른 마음을 먹을수 없었다.
그 옛날 보천에서 역병이 데려가버린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의 모습이 그대로 지연의 모습에 남아있었다.
허의원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잠든 지연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가져다댔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구름처럼 떠도는 여인의 운명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여자는 강가에 자라는 버드나무와 같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장마가 들어 큰물이 지면 뿌리째 뽑혀 물살에 떠내려가는 버드나무는 떠내려가다가 아무곳에나 멈추면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자란다고했다.
이여인은 지금 자신이 어떤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옛날 보천의 외딴 움막집에서 마지막을 맞은 어머니와 여동생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만약 지금 그런 상황을 맞이한다면 두 사람을 살려낼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답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명의소리를 들으며 의원질을 했지만 정작 죽을 운명에 처한 사람을 구해내지는 못했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새벽녘 봉창이 희미하게 밝아왔다. 어디선가 장탉이 울었다.
허의원은 자신의 무릎 위에 잠든 지연의 머리를 들어 이불 위에 내려놓았다.
조용히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이한로 대감이 잠들어있을 사랑방 앞으로가서 한참 을 기다렸다.
이대감은 일부러 허의원을 만나는 것을 피해왔었다.
오늘은 이렇게 새벽에라도 찾아와 이대감을 꼭 만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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