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9일 [연중 제9주간 금요일]
마르코 12,35-37
선생은 학생에게 가스라이팅 당하지 않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제들, 바리사이, 사두가이, 율법학자들과의 논쟁에서 승리한 다음, 내친김에 이스라엘 전체의 믿음을 흔들어놓습니다.
바로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일 수 없다는 논리로 말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 맞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다윗의 후손께 호산나를 외쳐도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육체적으로는 구약의 예언대로 다윗의 후손일지라도 내적으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란 것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너희들에게 가스라이팅 당하지 않을 거야!”란 뜻이 들어있습니다.
사람들이 사람을 심리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자신들이 조종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놔야 합니다.
며칠 전에 축구선수 박주호 선수가 은퇴하였습니다.
그는 축구선수이기도 하지만 세 아이를 둔 가장입니다.
일정에 따라 한두 달 집을 비우는 일도 있어서 가족에게 계속 미안한 마음이었습니다.
기자가 장녀 나은이와 남동생 건우의 반응을 물었습니다.
나은이는 아빠가 은퇴한다고 하였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빠는 돈을 어떻게 벌거야?”
저도 아버지가 일을 가지 않으면 불안해져서 아버지에게 일 가라고 종용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도 아버지를 가스라이팅합니다.
만약 아버지가 아이들 아버지의 정체성만 가지고 있다면 분명 가스라이팅 당합니다.
아이들이 자신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건우는 남자답게 요즘 축구에 많이 빠져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은퇴한다고 말했을 때
“왜 축구를 그만둬?” 하며 울려고 했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앞으로 너와 축구를 더 많이 할게”라며 건우를 달랬고, 나은이는 “앞으로는 다른 일 해볼게”라고 말했더니 안심하더랍니다.
요즘 식당에 가보면 아이들이 상전인 경우가 많습니다.
옆 식탁에 어른들이 식사하고 있는데도 아이들은 소리 지르고 뛰어다니고 난리를 피웁니다.
하지만 부모는 제재할 줄 모르고 오히려 아이들에게 애걸하며 부탁합니다.
그런 식으로 교육이 될까요?
부모는 부모이기도 하면서 더 높은 수준의 누군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교육할 수 있습니다.
안드레아 보첼리는 천상의 목소리를 지닌 테너이고 얼굴도 잘생겼습니다.
1958년 9월 22일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의 작은 마을 라자티코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시력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선천성 녹내장을 가지고 태어났고, 12살 때 축구 사고로 조금이나마 볼 수 있던 시력도 잃습니다.
그의 부모는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아이를 지우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 에디 보첼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아이라며 아이를 낳기로 했습니다.
그녀의 믿음과 사랑에 따른 이러한 결정은 다양한 인터뷰에서 보첼리에 의해 인정되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음성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음성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심각한 선천성 녹내장을 안고 태어났던 보첼리. 다행히 한쪽 눈에는 약간의 시력이 살아 있었습니다.
부모는 눈이 보이지 않는 대신 청각이 예민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음악을 시키기로 합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피아노와 플루트, 색소폰을 배우게 했습니다.
목소리가 아름다웠던 보첼리는 ‘노래 잘하는 소년’이 되어 학교와 성당에서 인정받으며 성가대 독창자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친구들과 축구 경기를 하던 도중 골키퍼를 맡고 있던 보첼리에게 날아온 공이 그만 눈에 맞는 바람에 그나마 남아 있던 한쪽 시력마저 완전히 잃고 말았습니다.
오래전부터 갈망하고 꿈꿔왔던 오페라 가수의 꿈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눈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움직임이 있는 공연은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부모는 그의 재능을 더 키워주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12세에 시력을 잃었음에도 전혀 그의 장애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강한 자신감을 심어주고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규칙적인 활동에 참여하도록 격려했습니다.
그들은 그가 평범한 삶을 살고 꿈을 향해 일할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이러한 끊임없는 격려는 그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테너가 되는 길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보첼리의 부모, 알레산드로와 에디는 모두 이탈리아 문화와 전통에 깊숙이 박힌 로마 가톨릭의 강한 신앙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에게 신앙이 없었다면 시력이 보이지 않는 아들에게 심한 죄책감을 느껴 그에게 가스라이팅 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첼리의 부모는 반은 자녀에게 속해있고 반은 하느님께 속해있었습니다.
하느님께 속해있는 사람은 그래서 심리적으로 자녀들에게 조종당하지 않으며 당당한 교육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반신이 없는 아이, 제니퍼 브리커를 입양한 샤론과 제랄드 브리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제니퍼에게 지나친 연민을 느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딸로 여기고 “할 수 없다”라는 말을 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제니퍼는 자서전에서 “모든 것은 가능합니다:
당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믿음과 용기를 찾으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장애를 지는 아이에게 잔인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을 믿는 부모는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으로 자녀를 교육합니다.
자녀가 울고 원망하더라도 휘둘리지 않습니다.
연민에 빠지지 않고 빠지게 허락하지도 않습니다.
훌륭한 교육자는 반은 학생에게 반은 자신의 스승에게 속해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당연히 다윗의 후손이기는 하지만 또한 하느님께도 속해있음을 잊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9일 [연중 제9주간 금요일]
마르코 12,35-37
하느님께 최우선권을 드립시다!
저희 살레시오회는 철저하게도 중앙집권제입니다.
총장님, 그의 대리자 관구장님을 예수님, 돈보스코의 대리자로 여기고 철저히 순명합니다.
가끔 전 세계 모든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보내주시는 서한은 교과서 중의 교과서로 여깁니다.
읽고 또 읽고 마음에 새기고 구체적인 청소년 사목 현장에서 실천하려고 발버둥 칩니다.
최근 내려오는 지침이나 과제 가운데 단골손님처럼 등장하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우선권’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마르코 복음의 표현도 같은 맥락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마르 12,37)
이 땅에 육화 강생하신 예수님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성왕 다윗왕과는 비교 조차 안될 정도로 크고 높으신 분임을 암시하십니다.
오늘 우리 삶 안에서 하느님은 모든 것 위에 계시는가, 오늘 내가 내리는 모든 결정과 선택 앞에서
하느님께 우선권을 드리는가, 하느님은 오늘 내 삶 안에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는가, 한번 점검해볼 일입니다.
인간은 놀라울 정도로 미묘하고 복합적인 존재입니다.
육체와 영혼이 우리 안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동물적인 본능이 깊숙이 숨어있는가 하면,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정도의 이타성도 잠재되어 있습니다.
정말 나약해서 흔들리는 갈대같이 별것도 아닌 존재 같지만 때로 얼마나 선해질 수도 있는지,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지...
이런 우리 인간이기에 고른 성장이 필요합니다.
지적인 교육뿐만 아니라 영적인 성숙을 위한 노력, 인간적 성숙을 위한 노력, 육체적 성숙을 위한 노력이 동시에 요구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디 그렇습니까?
어떻게 해서든 죽기 살기로 달달 외우고, 반복해서 문제를 풀어 좋은 성적 내는 것이 지상과제입니다.
무한 경쟁 체제, 일렬로 줄 세우기 문화 앞에서 함께 가는 동료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어떻게든 나만 잘 풀리면 그만입니다.
하느님의 영역, 신앙이 설 자리가 점점 축소되는 분위기입니다.
특히 우리 청소년들에게 하느님과 교회에 대해, 신앙과 배려에 대해, 가난과 겸손의 덕에 대해 이야기 하면 웃어버리는 경향도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정말 어려운 시대, 참으로 다양한 도전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습니다.
그럴수록 신앙인들은 더 외쳐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이사야나 예레미야 예언자처럼,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전지전능하심을.
그분의 참되심을, 결국 그분께서 승리하실 것임을.
마르코 복음사가는 하느님의 위치를 어디에 둬야 하는지 명확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소홀히 해오고 등한시해왔던 하느님의 위치를 다시금 재설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세상 모든 것 위에, 다른 모든 것에 앞서 내 삶의 최우선 순위로 다시 한번 하느님의 위치를 자리 매김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작업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하느님, 우리 뇌리 속에서 점차 외곽으로 밀려나시는 하느님을 다시 한번 삶의 중심으로, 정신이나 사고의 중심으로 회복시키는 작업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6월9일 [연중 제9주 금요일]
복음: 마르 12,35-3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다윗은 시편 110에서 장차 자신의 후손으로 나타나실 분을 ‘나의 주님’이라고 했는데 만일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면 어찌하여 다윗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라고 부를 수 있었겠는가? 하는 질문이 나온다. 예수님은 무엇을 가르치시고자 했는가? 예수님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셨으며 당신 자신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다윗의 자손인 동시에 다윗의 주시라는 것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문제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이 담고 있는 시대적 의미이다. 이 호칭 속에는 이스라엘을 회복할 정치적, 민족적 정복자로서의 왕의 의미가 가득히 들어있다. 왜냐하면, 정복당해 고통을 겪고 있던 그들은 지상 왕국의 건설자로서의 그리스도를 기대했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지상 왕국의 건설자, 정복자로서의 메시아의 개념을 빼버리고 하느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참모습을 알리고 그분의 사랑을 전해주며 사람들을 천상 아버지께 인도하는 메시아의 모습을 알려주기 위하여 그랬다.
그분은 다윗의 자손이시며 다윗의 주님이시다. 하느님이시며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분이 어머니이신 여인을 통하여 오셨다. 세상의 주님이시며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니 마리아의 주님이시다. 하늘과 땅의 창조자이시니 마리아의 창조자이시기도 하다. 그분은 마리아의 주님이시며 마리아의 아들이시며, 마리아의 창조자이시고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 그분은 마리아의 아들이셨기에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린 것이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이며, 신성으로는 다윗의 주님이시다.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를 육에 따라 다윗의 후손으로 여길 뿐, 다윗의 주님이신 하느님이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예수께서는 그들의 가르침을 올바로 고쳐주고 계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메시아를 찾는 우리의 믿음의 자세는 어떤가? 당시의 유대인들이 정복자들에 의해 시달리고 고통당하는 속에서 자기 나라, 자기 민족을 해방해 주고 지상 천국을 건설해 줄 구원자, 그리스도를 기다리듯이 나는 내 생활 속에서 나의 현세적인 편안함과 바라는 일의 성취 또는 자기 생활의 안락만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찾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진정 자신에게 구원과 하느님의 사랑을 가져다주시는 그리스도를 더 잘 받아들이려 애쓰고 있는지? 나는 내 생활에서 현세적인 것과 하느님의 뜻, 어느 쪽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생활하는지? 우리 각자 자신의 신앙의 자세에 대해서 살펴보고, 올바른 신앙의 길로 나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이러한 자세를 가질 수 있도록 은총을 구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