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현상(黃沙現象)
김종길
그 날 밤 금계랍 같은 눈이 내리던
오한의 땅에
오늘은 발열처럼 복사꽃이 핀다.
목이 타는 봄가뭄
아 목이 타는 봄가뭄
현기증 나는 아지랑이 일렁거리고
앓는 대지를 축여 줄 봄비는
오지 않은 채
며칠째 황사만이 자욱이 내리고 있다.
(시집 『황사현상』, 1986)
[어휘풀이]
-금계랍 : 염산 키니네, 진통제 ⸱ 해열제의 약으로 쓰인다.
[작품해설]
‘명징성(明澄性)과 염결성(廉潔性)’의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김종길 시의 특징은 절제된 언어와 감정으로부터 비롯되는 고전적 품격이다. 그의 시는 거의 다 어떤 풍경을 보여 주고 있으며, 그 풍경은 대단히 선명한 이미지로 제시된다. 그래서 그의 시를 흔히 이미지즘 시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이미지스트와는 달리 고전적 품격을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시가 갖는 미덕은 탁월한 상상력으로 빚어내는 이미지의 명징성과 고전적 품격에서 비롯되는 정신적 염결성[매사에 청렴결백하게 행동하려는 태도나 경향]의 조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가뭄이 계속되고 있는 어느 봄날의 황사 현상을 말라고 있다. 겉으로는 평범하고 아무 의미나 감흥이 없는 작품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절제된 언어들이 매우 치밀한 조직 원리에 의해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금계랍’이란 진통제나 해열제로 쓰이는 하얀 가루약으로, 주로 오한에 걸린 사람이 먹는다. 그런데 ‘오늘은 발열처럼 복사꽃이 피’는 봄날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금계랍 같은 눈이 내리’기도 하면서 봄을 느낄 수 없는 추운 날씨였지만, 오늘은 어느새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수많은 꽃들이 떼를 지어 피어 나는 봄날이 되었다. 그것을 시인은 오한과 발열이 반복되는 독감 환자에 비유하여 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며칠 전, 흩날리던 하얀 눈발은 ‘금계랍’ 같은 모습이며, 지금 시인의 눈앞에서 툭툭 꽆망울을 터뜨리는 복사꽃은 마치 발열 같은 것이 된다. 이와 동일한 맥락으로 본다면, 독감 환자는 목이 아프고 현기증이 일어나기에 ‘목이 타는 봄 가뭄’이란 표현과 ‘현기증 나는 아지랑이’라는 표현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봄날, 기다리는 비는 한 방울 내려 주지 않고 봄 가뭄에 시달리는 대지에는 며칠 째 황사 현상만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이 시느 일기가 불순한 어느 봄날의 황사 현상을 독감 환자의 이미지로 그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금계랍’ ⸱ ‘오한’ ⸱ ‘발열’ ⸱ ‘현기증’ 등이 치밀하게 조립되어 하나의 선명한 이미지로 완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이미지를 통해 비는 오지 않고 황사만 자욱한 봄날에서 가질 수 있는 지루하고 답답한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받을 수 있다. 다분히 혼란스럽고 들뜬 상태의 봄날 풍경을 그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은 절제되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김종길은 황사 내리는 가문 봄날 같은 어지러운 마음조차도 절제하여 정신의 품위, 즉 고전적 품격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소개]
김종길(金宗吉)
1926년 경상북도 안동 출생
혜화전문학교 국문과, 고려대학교 영문과 및 동국대학교 대학원 졸업
194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문(門)」이 입선
1955년 『현대문학』에서 시 「성탄제」를 발표하며 등단
1965년 시론집 『시론』을 발간
고려대학교 영문과 교수 역임
시집 : 『성탄제』(1969), 『하회(河回)에서』(1977), 『황사현상』(1986), 『달맞이꽃』(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