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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월인月印) 외 / 임보 시집 仙詩 <구름 위의 다락마을> 에서 3
bora 추천 0 조회 8 13.05.21 10:1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월인(月印) / 임보

 

 

애를 갖고자 하는 여인들은 

사내를 만나지 않아도 된다 

보름밤에  

용정(龍井)이란 우물가에 앉아서 

물 속의 달을 삼키면 

배가 불러 온다 

태어난 아이는  

귀 밑에 용의 비늘을 하나 

달고 나오는데 

그것이 곧 애비의  

징표다.

 

 

 

 

 

 

  

 

자작나무에서 돌배나무까지 / 임보

 


그대 사는 세상이 얼마나 넓은가고
묻기에
동(東)은 아침인데 서(西)는 저녁이고
남(南)은 여름인데 북(北)은 겨울이라고
대답했더니
토공(土公)이 웃는다
그의 집 뜰은 한 십여 평 되는데
하루에 만 리를 달리는 그의 말(馬)도
뜰 좌편의 자작나무 한 가지 끝에서
뜰 우편의 돌배나무 한 가지 끝까지
이르는 데는
몇 천 년이 더 걸린다고 한다.

 

 

 

 

 

 

 

 / 임보

 

 

표(瓢)라는 자는 

푸른 눈썹이 3치쯤 돋아 있다 

늘 큰 박통을 등에 지고 다니는데 

천년 묵은 고목의 죽은 가지들도 

그의 손이 가 닿기만 하면 

싹이 다시 돋아난다 

그가 지나는 곳의 풀들은 

그의 장대 키가 묻히도록 무성히 솟아오르고 

온갖 백과(百果)들도 다투어 

그 맛과 곱기를 자랑하며 흐드러지게 열리는데 

누가 무슨 연고인가 묻자 

마른 나무 뿌리를 좇아 

한 천년쯤 물을 나르다 보니 

그놈들도 물바가지를 알아 보는가 보다고 한다 

어떤 자의 말로는 

표(瓢)는 나무의 말을 알아듣는 귀를 달고 다닌다는데 

그가 혼자 숲속을 거닐 때 

주위의 나뭇가지들이 그를 향해 어우러지는 것을 보면 

과연 고개를 끄덕일 만도 하다.

 

 

 

 

 

 

  

 

병(甁) / 임보 

 

 

와우(蝸牛)라는 자는 

호리병 하나만 차고 

산하(山河)를 흘러다니고 있다 

시장하면 병을 기울여 

술로 목을 적시고 

졸리우면 병 속에 기어들어 

잠을 잔다 

그 작은 병 속에 어떻게 들어간단 말인가 

그런데 병 속엔 혼자만이 아니라는 소문도 있다 

허기사  

마셔도 마셔도 바닥이 나지 않는 걸 보면 

그 속에 누가 들어앉아서 

노상 술을 빚어대고 있는 모양이다. 

 

 

 

 

  

 

어익(魚翼)/ 임보

 


사부(沙夫)의 낚시줄에는 고기들이
한꺼번에 너댓 마리씩 물려 오르다
공중에서 떨어져 내린다
잠시 지켜보고 있었더니
줄 끝에 낚시는 없고
낚시밥만 매달려 있다
말하자면
낚시줄에 먹이를 달아
고기들에게 나누어 주는 셈이 아닌가
그럴 바엔
줄 끝에 매달 일이 아니라
그냥 던져 주면 쉬울 걸
그렇게 하고 있는가고 했더니
고개를 흔든다
알고 봤더니
어족(魚族)들에게 날아오르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중이었다
솟아오른 고기들의 앞지느러미가
새의 날개처럼 돋아 퍼덕이고 있다.
 

 

 

 

 

 

 

 / 임보

 

 

북악(北岳) 기슭에는
토문(土門)이란 자가 북과 함께 살고 있는데
한번 두드리면 그 소리가 천 리를 울린다.
남천(南川) 물가에는
지음(至音)이란 자가 비둘기와 함께 살고 있는데
그 소리만 듣고도 토문(土門)의 마음을 환히 본다.
북이 울릴 때마다
지음(至音)은 비둘기를 날려 보내
친구의 가슴을 어루만지는데
토문(土門)은 비둘기 다리에 매달린 헝겊으로
마른 이마를 씻기도 하고
혹 젖은 눈을 말리기도 한다.
 

 

 

 

 

 

 

대국(對局) / 임보 



오동나무 그늘 밑에서
두 노인이 바둑을 놓고 있다
가만히 들여다봤더니
두 분의 기력이 八, 九급쯤?
二급인 내가 보기엔
참 답답하고 안타깝기만 하다.
지켜보고 있던 내가 참다 못해
"끊어서 잡으십시요"
하고 흑(黑)의 노인에게 훈수를 했더니
"아직 빈 땅이 많은데 왜 싸움을 거나?"
하고 듣지 않는다.
"치중(置中)하여 파호(破戶)를 하면 잡을 수 있습니다"
하고 이젠 백(白)의 노인을 거들었더니
"살려 주고도 이기면 그게 더 낫지 않겠나"
하고 웃는다.
도대체 이 벽창호 노인들
내 훈수엔 아랑곳하지 않는다.
싱거운 바둑은 해가 기우는 줄도 모르고 계속되었는데
백팔십여 수쯤에 이르러서
갑자기 흑(黑)이 돌을 던지고 말았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내 보기엔 분명 흑이 열댓 집 앞서고 있는데
돌을 던지다니
알고 보았더니
그들이 상(上으로 치는 선승(善勝)은 일호승(一戶勝)
오호(五戶) 이상의 승(勝)은 패(敗)보다 낮은 것으로 치는데
부득이 그 욕심을 줄이지 못할 때는
차라리 돌을 던져
상대에게 예의를 갖추는 모양이다.
그러니 그들의 바둑 급수를 내가 어찌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얼굴이 붉어져 얼른 자리를 뜨고 말았다.

 

 

 

 

 

 

 

밀원(蜜園) / 임보

 

 

도화동(桃花洞) 계곡에 들어서니

온 산천이 복숭아꽃 천지다

천의 군중들이 웅성이듯

두런대는 소리가 골짝을 울리고 있는데

자세히 들으니 벌들의 날개 소리가 아닌가.

한 사흘 꽃길을 밟아 오르다 보니

향기와 꽃물에 온통 절은 내 몸뚱이 또한 분홍 도화덩이다.

벌들이 눈썹과 어깨 위에 자주 내려 앉아

쌓인 꽃가루를 쓸어가곤 한다.

꽃길이 다하는 곳에 천인절벽이 막아서는데

석벽의 구멍마다에 수백만 군의 벌들이 집을 짓고 있다.

한 노파가 긴 장대를 들고 앉아 있기에 무얼하는가 물었더니

꿀을 훔치러 오는 도적들을 지키는 중이라 한다.

먼 산모롱이 바위 위에 곰 한 녀석이 어정거리고 있다. 

 

 

 

 

 

 

 

정(釘)임보



자암동(紫巖洞) 골짝 석굴 속엔
한 석공(石工)이 살고 있는데
그는 백 척 암벽에 종일
무엇인가 새기고 있다.
무슨 글자 같기도 하고
무슨 부적 같기도 한
떡살 모양의 형상을 쪼아가는데
이레를 지켜보고 있는 동안
겨우 한 획을 뚫는다.
말 한 마디 건네지 않고
연일 석벽에 달라붙어
정만 두드리고 있는데
그의 정이 머물다 간 석벽의 길이가
천 리도 넘는다.
도대체 저 암벽에 매달린 석공의 나이는
얼마나 된단 말인가.

 

 

 

 

 

 

 

석경동(石鏡洞 / 임보

 


백하(白河)의 사공에게 석경동을 물으니
짚고 있던 지팡이 끝을 내밀며
잡고 따르라고 한다.
잔잔한 백하의 강 언덕을 거슬러
한나절쯤 올랐을까
문득 천지가 은빛이더니
하늘을 찌르는 수정 절벽들이
코 앞을 가로 막는다.
전생(前生)의 형상이 돌거울에 내비친다는
석경동(石鏡洞)이 아닌가.
허나 아무리 기웃거려도
내 형상이 드러나뵈지 않아 어리둥절했더니
사공이 이르기를
이승에 아직 뿌리를 둔 자는
눈이 흐려 그 맑음에 닿을 수 없다고 한다.
사공은 그의 스승을 뵙고 며칠 쉬었다 오겠다며
자운동(紫雲洞) 굴 안으로 사라지고
나는 다시 왔던 길을 되밟아
홀로 백하(白河)의 나루터로 내려가는데
오던 때 한나절 길이
이레 밤낮을 걸어도 끝날 줄을 모른다.
다 지쳐빠진 몰골로 드디어 나루에 이르자
먼저 온 사공이 웃고 있다.

 

 

 

 

On the Indus River in Kalabagh (Best in Larger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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