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사는 세상이 얼마나 넓은가고 묻기에 동(東)은 아침인데 서(西)는 저녁이고 남(南)은 여름인데 북(北)은 겨울이라고 대답했더니 토공(土公)이 웃는다 그의 집 뜰은 한 십여 평 되는데 하루에 만 리를 달리는 그의 말(馬)도 뜰 좌편의 자작나무 한 가지 끝에서 뜰 우편의 돌배나무 한 가지 끝까지 이르는 데는 몇 천 년이 더 걸린다고 한다.
귀 / 임보
표(瓢)라는 자는
푸른 눈썹이 3치쯤 돋아 있다
늘 큰 박통을 등에 지고 다니는데
천년 묵은 고목의 죽은 가지들도
그의 손이 가 닿기만 하면
싹이 다시 돋아난다
그가 지나는 곳의 풀들은
그의 장대 키가 묻히도록 무성히 솟아오르고
온갖 백과(百果)들도 다투어
그 맛과 곱기를 자랑하며 흐드러지게 열리는데
누가 무슨 연고인가 묻자
마른 나무 뿌리를 좇아
한 천년쯤 물을 나르다 보니
그놈들도 물바가지를 알아 보는가 보다고 한다
어떤 자의 말로는
표(瓢)는 나무의 말을 알아듣는 귀를 달고 다닌다는데
그가 혼자 숲속을 거닐 때
주위의 나뭇가지들이 그를 향해 어우러지는 것을 보면
과연 고개를 끄덕일 만도 하다.
병(甁) / 임보
와우(蝸牛)라는 자는
호리병 하나만 차고
산하(山河)를 흘러다니고 있다
시장하면 병을 기울여
술로 목을 적시고
졸리우면 병 속에 기어들어
잠을 잔다
그 작은 병 속에 어떻게 들어간단 말인가
그런데 병 속엔 혼자만이 아니라는 소문도 있다
허기사
마셔도 마셔도 바닥이 나지 않는 걸 보면
그 속에 누가 들어앉아서
노상 술을 빚어대고 있는 모양이다.
어익(魚翼)/ 임보
사부(沙夫)의 낚시줄에는 고기들이 한꺼번에 너댓 마리씩 물려 오르다 공중에서 떨어져 내린다 잠시 지켜보고 있었더니 줄 끝에 낚시는 없고 낚시밥만 매달려 있다 말하자면 낚시줄에 먹이를 달아 고기들에게 나누어 주는 셈이 아닌가 그럴 바엔 줄 끝에 매달 일이 아니라 그냥 던져 주면 쉬울 걸 그렇게 하고 있는가고 했더니 고개를 흔든다 알고 봤더니 어족(魚族)들에게 날아오르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중이었다 솟아오른 고기들의 앞지느러미가 새의 날개처럼 돋아 퍼덕이고 있다.
북 / 임보
북악(北岳) 기슭에는 토문(土門)이란 자가 북과 함께 살고 있는데 한번 두드리면 그 소리가 천 리를 울린다. 남천(南川) 물가에는 지음(至音)이란 자가 비둘기와 함께 살고 있는데 그 소리만 듣고도 토문(土門)의 마음을 환히 본다. 북이 울릴 때마다 지음(至音)은 비둘기를 날려 보내 친구의 가슴을 어루만지는데 토문(土門)은 비둘기 다리에 매달린 헝겊으로 마른 이마를 씻기도 하고 혹 젖은 눈을 말리기도 한다.
대국(對局) / 임보
오동나무 그늘 밑에서 두 노인이 바둑을 놓고 있다 가만히 들여다봤더니 두 분의 기력이 八, 九급쯤? 二급인 내가 보기엔 참 답답하고 안타깝기만 하다. 지켜보고 있던 내가 참다 못해 "끊어서 잡으십시요" 하고 흑(黑)의 노인에게 훈수를 했더니 "아직 빈 땅이 많은데 왜 싸움을 거나?" 하고 듣지 않는다. "치중(置中)하여 파호(破戶)를 하면 잡을 수 있습니다" 하고 이젠 백(白)의 노인을 거들었더니 "살려 주고도 이기면 그게 더 낫지 않겠나" 하고 웃는다. 도대체 이 벽창호 노인들 내 훈수엔 아랑곳하지 않는다. 싱거운 바둑은 해가 기우는 줄도 모르고 계속되었는데 백팔십여 수쯤에 이르러서 갑자기 흑(黑)이 돌을 던지고 말았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내 보기엔 분명 흑이 열댓 집 앞서고 있는데 돌을 던지다니 알고 보았더니 그들이 상(上으로 치는 선승(善勝)은 일호승(一戶勝) 오호(五戶) 이상의 승(勝)은 패(敗)보다 낮은 것으로 치는데 부득이 그 욕심을 줄이지 못할 때는 차라리 돌을 던져 상대에게 예의를 갖추는 모양이다. 그러니 그들의 바둑 급수를 내가 어찌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얼굴이 붉어져 얼른 자리를 뜨고 말았다.
밀원(蜜園) / 임보
도화동(桃花洞) 계곡에 들어서니
온 산천이 복숭아꽃 천지다
천의 군중들이 웅성이듯
두런대는 소리가 골짝을 울리고 있는데
자세히 들으니 벌들의 날개 소리가 아닌가.
한 사흘 꽃길을 밟아 오르다 보니
향기와 꽃물에 온통 절은 내 몸뚱이 또한 분홍 도화덩이다.
벌들이 눈썹과 어깨 위에 자주 내려 앉아
쌓인 꽃가루를 쓸어가곤 한다.
꽃길이 다하는 곳에 천인절벽이 막아서는데
석벽의 구멍마다에 수백만 군의 벌들이 집을 짓고 있다.
한 노파가 긴 장대를 들고 앉아 있기에 무얼하는가 물었더니
꿀을 훔치러 오는 도적들을 지키는 중이라 한다.
먼 산모롱이 바위 위에 곰 한 녀석이 어정거리고 있다.
정(釘)/ 임보
자암동(紫巖洞) 골짝 석굴 속엔 한 석공(石工)이 살고 있는데 그는 백 척 암벽에 종일 무엇인가 새기고 있다. 무슨 글자 같기도 하고 무슨 부적 같기도 한 떡살 모양의 형상을 쪼아가는데 이레를 지켜보고 있는 동안 겨우 한 획을 뚫는다. 말 한 마디 건네지 않고 연일 석벽에 달라붙어 정만 두드리고 있는데 그의 정이 머물다 간 석벽의 길이가 천 리도 넘는다. 도대체 저 암벽에 매달린 석공의 나이는 얼마나 된단 말인가.
석경동(石鏡洞 / 임보
백하(白河)의 사공에게 석경동을 물으니 짚고 있던 지팡이 끝을 내밀며 잡고 따르라고 한다. 잔잔한 백하의 강 언덕을 거슬러 한나절쯤 올랐을까 문득 천지가 은빛이더니 하늘을 찌르는 수정 절벽들이 코 앞을 가로 막는다. 전생(前生)의 형상이 돌거울에 내비친다는 석경동(石鏡洞)이 아닌가. 허나 아무리 기웃거려도 내 형상이 드러나뵈지 않아 어리둥절했더니 사공이 이르기를 이승에 아직 뿌리를 둔 자는 눈이 흐려 그 맑음에 닿을 수 없다고 한다. 사공은 그의 스승을 뵙고 며칠 쉬었다 오겠다며 자운동(紫雲洞) 굴 안으로 사라지고 나는 다시 왔던 길을 되밟아 홀로 백하(白河)의 나루터로 내려가는데 오던 때 한나절 길이 이레 밤낮을 걸어도 끝날 줄을 모른다. 다 지쳐빠진 몰골로 드디어 나루에 이르자 먼저 온 사공이 웃고 있다.
그대 사는 세상이 얼마나 넓은가고 묻기에 동(東)은 아침인데 서(西)는 저녁이고 남(南)은 여름인데 북(北)은 겨울이라고 대답했더니 토공(土公)이 웃는다 그의 집 뜰은 한 십여 평 되는데 하루에 만 리를 달리는 그의 말(馬)도 뜰 좌편의 자작나무 한 가지 끝에서 뜰 우편의 돌배나무 한 가지 끝까지 이르는 데는 몇 천 년이 더 걸린다고 한다.
귀 / 임보
표(瓢)라는 자는
푸른 눈썹이 3치쯤 돋아 있다
늘 큰 박통을 등에 지고 다니는데
천년 묵은 고목의 죽은 가지들도
그의 손이 가 닿기만 하면
싹이 다시 돋아난다
그가 지나는 곳의 풀들은
그의 장대 키가 묻히도록 무성히 솟아오르고
온갖 백과(百果)들도 다투어
그 맛과 곱기를 자랑하며 흐드러지게 열리는데
누가 무슨 연고인가 묻자
마른 나무 뿌리를 좇아
한 천년쯤 물을 나르다 보니
그놈들도 물바가지를 알아 보는가 보다고 한다
어떤 자의 말로는
표(瓢)는 나무의 말을 알아듣는 귀를 달고 다닌다는데
그가 혼자 숲속을 거닐 때
주위의 나뭇가지들이 그를 향해 어우러지는 것을 보면
과연 고개를 끄덕일 만도 하다.
병(甁) / 임보
와우(蝸牛)라는 자는
호리병 하나만 차고
산하(山河)를 흘러다니고 있다
시장하면 병을 기울여
술로 목을 적시고
졸리우면 병 속에 기어들어
잠을 잔다
그 작은 병 속에 어떻게 들어간단 말인가
그런데 병 속엔 혼자만이 아니라는 소문도 있다
허기사
마셔도 마셔도 바닥이 나지 않는 걸 보면
그 속에 누가 들어앉아서
노상 술을 빚어대고 있는 모양이다.
어익(魚翼)/ 임보
사부(沙夫)의 낚시줄에는 고기들이 한꺼번에 너댓 마리씩 물려 오르다 공중에서 떨어져 내린다 잠시 지켜보고 있었더니 줄 끝에 낚시는 없고 낚시밥만 매달려 있다 말하자면 낚시줄에 먹이를 달아 고기들에게 나누어 주는 셈이 아닌가 그럴 바엔 줄 끝에 매달 일이 아니라 그냥 던져 주면 쉬울 걸 그렇게 하고 있는가고 했더니 고개를 흔든다 알고 봤더니 어족(魚族)들에게 날아오르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중이었다 솟아오른 고기들의 앞지느러미가 새의 날개처럼 돋아 퍼덕이고 있다.
북 / 임보
북악(北岳) 기슭에는 토문(土門)이란 자가 북과 함께 살고 있는데 한번 두드리면 그 소리가 천 리를 울린다. 남천(南川) 물가에는 지음(至音)이란 자가 비둘기와 함께 살고 있는데 그 소리만 듣고도 토문(土門)의 마음을 환히 본다. 북이 울릴 때마다 지음(至音)은 비둘기를 날려 보내 친구의 가슴을 어루만지는데 토문(土門)은 비둘기 다리에 매달린 헝겊으로 마른 이마를 씻기도 하고 혹 젖은 눈을 말리기도 한다.
대국(對局) / 임보
오동나무 그늘 밑에서 두 노인이 바둑을 놓고 있다 가만히 들여다봤더니 두 분의 기력이 八, 九급쯤? 二급인 내가 보기엔 참 답답하고 안타깝기만 하다. 지켜보고 있던 내가 참다 못해 "끊어서 잡으십시요" 하고 흑(黑)의 노인에게 훈수를 했더니 "아직 빈 땅이 많은데 왜 싸움을 거나?" 하고 듣지 않는다. "치중(置中)하여 파호(破戶)를 하면 잡을 수 있습니다" 하고 이젠 백(白)의 노인을 거들었더니 "살려 주고도 이기면 그게 더 낫지 않겠나" 하고 웃는다. 도대체 이 벽창호 노인들 내 훈수엔 아랑곳하지 않는다. 싱거운 바둑은 해가 기우는 줄도 모르고 계속되었는데 백팔십여 수쯤에 이르러서 갑자기 흑(黑)이 돌을 던지고 말았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내 보기엔 분명 흑이 열댓 집 앞서고 있는데 돌을 던지다니 알고 보았더니 그들이 상(上으로 치는 선승(善勝)은 일호승(一戶勝) 오호(五戶) 이상의 승(勝)은 패(敗)보다 낮은 것으로 치는데 부득이 그 욕심을 줄이지 못할 때는 차라리 돌을 던져 상대에게 예의를 갖추는 모양이다. 그러니 그들의 바둑 급수를 내가 어찌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얼굴이 붉어져 얼른 자리를 뜨고 말았다.
밀원(蜜園) / 임보
도화동(桃花洞) 계곡에 들어서니
온 산천이 복숭아꽃 천지다
천의 군중들이 웅성이듯
두런대는 소리가 골짝을 울리고 있는데
자세히 들으니 벌들의 날개 소리가 아닌가.
한 사흘 꽃길을 밟아 오르다 보니
향기와 꽃물에 온통 절은 내 몸뚱이 또한 분홍 도화덩이다.
벌들이 눈썹과 어깨 위에 자주 내려 앉아
쌓인 꽃가루를 쓸어가곤 한다.
꽃길이 다하는 곳에 천인절벽이 막아서는데
석벽의 구멍마다에 수백만 군의 벌들이 집을 짓고 있다.
한 노파가 긴 장대를 들고 앉아 있기에 무얼하는가 물었더니
꿀을 훔치러 오는 도적들을 지키는 중이라 한다.
먼 산모롱이 바위 위에 곰 한 녀석이 어정거리고 있다.
정(釘)/ 임보
자암동(紫巖洞) 골짝 석굴 속엔 한 석공(石工)이 살고 있는데 그는 백 척 암벽에 종일 무엇인가 새기고 있다. 무슨 글자 같기도 하고 무슨 부적 같기도 한 떡살 모양의 형상을 쪼아가는데 이레를 지켜보고 있는 동안 겨우 한 획을 뚫는다. 말 한 마디 건네지 않고 연일 석벽에 달라붙어 정만 두드리고 있는데 그의 정이 머물다 간 석벽의 길이가 천 리도 넘는다. 도대체 저 암벽에 매달린 석공의 나이는 얼마나 된단 말인가.
석경동(石鏡洞 / 임보
백하(白河)의 사공에게 석경동을 물으니 짚고 있던 지팡이 끝을 내밀며 잡고 따르라고 한다. 잔잔한 백하의 강 언덕을 거슬러 한나절쯤 올랐을까 문득 천지가 은빛이더니 하늘을 찌르는 수정 절벽들이 코 앞을 가로 막는다. 전생(前生)의 형상이 돌거울에 내비친다는 석경동(石鏡洞)이 아닌가. 허나 아무리 기웃거려도 내 형상이 드러나뵈지 않아 어리둥절했더니 사공이 이르기를 이승에 아직 뿌리를 둔 자는 눈이 흐려 그 맑음에 닿을 수 없다고 한다. 사공은 그의 스승을 뵙고 며칠 쉬었다 오겠다며 자운동(紫雲洞) 굴 안으로 사라지고 나는 다시 왔던 길을 되밟아 홀로 백하(白河)의 나루터로 내려가는데 오던 때 한나절 길이 이레 밤낮을 걸어도 끝날 줄을 모른다. 다 지쳐빠진 몰골로 드디어 나루에 이르자 먼저 온 사공이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