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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의 충격 - 가운데 부분
로버트 휴즈 지음 | 최기득 옮김
미진사 1995.07.15
평점
새로움의 충격 - 모더니즘의 도전과 환상
새로움의 충격의 요점 정리중 내용상 길어지는 관계로 3개 부분으로 나누어 정리하였습니다.
이는 전체 목차중 가운데 부분을 발췌하여 올린 것입니다.
[ 목차 ]
기계의 천국
권력의 얼굴
쾌락의 풍경화
유토피아 건축의 환상
자유의 문턱에서
의식의 끝에서 본 세계
환경으로서의 문화
되돌아본 미래
[2] 가운데 부분
유토피아 건축의 환상
20세기 문화는 유토피아적인 발상으로 흩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모두 불발로 그쳤다는 점에 대해서 지극히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유토피아에 대한 동경은 회화나 조각보다는 건축분야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회화는 우리들을 즐겁게 해줄 뿐이지만 건축은 우리의 생활을 포용하는 예술로서 매우 뛰어난 사회적인 예술인 동시에 정치적인 환상의 겉껍질과 경제적 성공의 골격을 상징한다./
어떤 베트남 참전장교가 남긴 유명한 말 - “우리는 그 마을을 구하기 위해 그 마을을 파괴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은 건축가들이 반드시 명심하고 있어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된다./
유럽이 급격한 사회적 불안정상태에 처해 있었던 1920년대 초반 르 코르뷔제는 마치 사회적 폭력에 대한 모든 충동이 불완전한 건축에 집중되기나 한듯이 ‘건축이냐 혁명이냐’라는 격언을 던져놓았다(그러나 프랑스의 최대자본가 한두 명이 포함된 르 코르뷔제의 후원자들은 자신들의 재수를 혁명에 걸 수 밖에 없었다. 즉 포탄에 의한 파괴는 전면적인 재개발사업보다 훨씬 적은 비용이 드는 사업이었던 것이다)/
이상주의적 태도는 완공된 건물보다는 가설을 통하여 표명되곤 하였다. 20세기건축에 있어 가장 영향력있는 건물은 결코 실제작업으로는 이행되지 않았던 도면상의 종이건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이전에 구상되었던 이상적인 설계가 재차 중요하게 인식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유토피아는 지난 수백 년 동안 종이 위에서만 맴돌아왔다. 유토피아가 건축적인 현실로 제시되기 시작한 것은 - 천상의 도시를 묘사한 중세 수사본의 삽화 같은 이미지가 아니라 - 15세기의 일이었다. 플로렌스의 알베르티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 당시 이상적인 도시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지 모색하고 있었고 알베르티의 제자인 필라레테 도 그의 후견인 이름을 따서 ‘스포르찐다’라는 명칭의 도시를 구상하였다./
프랑스 혁명후 프랑스 건축의 이상주의적인 경향은 1800년경부터 환상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제2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치혁명은 상상력에 과대한 산소를 공급함으로써 여러 가지 유형의 선전 이미지를 안출시킨다. 그러한 이미지는 멋들어진 이론적 형태로만 제시될 뿐 현실적으로는 실현불가능하며 그 과대망상적인 중세는 실용주의의 허울을 뒤집어 쓰기가 다반사인 것이다./
농촌지역의 인구를 해체시켜 수력이나 석탄 등 동력이 풍부한 장소로 그들을 이식시킨 위대한 기계는 엥겔스가 프롤레타리아로 규명한 새로운 사회계급, 즉 5살이나 6살부터 기계가 지시하는 대로 살아가야 하는 계급을 출현시켰다. 이러한 상태는 향후 세대 정도의 시간이 흐른후에 피카비아와 랑이 빠져들게 되는 각색된 문화적인 신화, 즉 인간의 동반자로서의 기계라는 미신속에 가려져 있던 사회의 참모습이었다. 19세기의 건축은 이러한 비참한 상태에 대해 아무런 할말도 없었을 뿐 만 아리라 그것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았다. 1870년경에 살았던 교양있는 프랑스인들에게 있어서 ‘건축’이라는 단어는 공공건물이나 공장, 노동자의 회관 등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즉 건축이라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부르주와적 관료체제의 중요한 기능을 과시하는 건물 - 은행, 사원, 박물관, 철도역, 왕궁등 - 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에콜 데 보자르가 프랑스의 건축사업을 장악하고 유럽 전역과 미국에까지 그 영향력을 미쳤던 황금시기는 우연치 않게도 프랑스의 정부규모와 식민지 통치, 그리고 산업계가 확대되어 나간 시기와 일치한다. 나폴레옹 이전의 프랑스에서는 관료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비교적 소수에 불과하였고, 그들의 업무 또한 왕권이라는 실제 권력에 부속된 기능에 불과할 뿐이었지만, 1800년 이후에는 그런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관료계급이라는 새로운 계급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1870년 이후부터는 프랑스의 식민지 영토가 더 이상 확대되지 않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중앙집권화 현상은 더욱 강화되고 있었다. 따라서 파리는 부르즈와 계층으로 하여금 그들이 온 세상을 물려받았다는 확신을 가지도록 만들기 위하여 권위의 영원함을 상징하는 자비로운 건축물을 필요로 하였다. 1875년 가르니에의 설계로 세워진 파리 오페라 건물를 전형적인 경우로 볼 수 있겠지만 보자르에 의해 설계된 건축물들은 그러한 천편일률적인 목적 하에 세워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건물들은 당시 프랑스가 누렸던 ‘잉여가치’ - 대리석,브론즈, 도금등 사치스런 재료로 칠갑화하고 석공과 광택 전문가, 금속 공예가, 그리고 가구 공예가 등 어마어마한 노동력을 동원한 - 를 과시하고 있다. .. 보자르의 건축은 어떤 관대한 표정을 담고 있으며 일개 시민으로 하여금 국가에 대한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신시켜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1875년 경 빈민 계급에 속해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이렇다 할 의미도 주지 못하였다. 즉 ‘건축’을 갖고 있지 않던 가난한 사람들은 오로지 빈민굴에서 우글대고 있을 뿐이다./
국제양식을 출범시킨 건축가들은 모더니스트 건축이 특권계급에 예속된 방종상태를 벗어나서 사회적인 위기상태에 대한 하나의 민주주의적인 해결책으로 제시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현대성’이라는 개념은 낭만과 이성이 독특하게 혼합된 상태를 의미하였고 또한 그것은 마르크스 주의가 바탕하고 있는 동일한 뿌리에서 출발하였다. 아직 확실하게 파악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유토피아가 테크놀로지와 대량생산체계 속에 잠재되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르 꼬르뷔제와 마찬가지로 독일의 그로피우스와 반데어 로에는 마치 신기루를 보는 듯한 태도로 건축가를 사회학적인 수도승이나 선각자라고 생각하였다. 한마디로 말해 그들은 건축에 의해 사회가 개혁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철과 유리로 된 조립식 건물로서 명료한 기능성을 겸비한 이상적인 건물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인간을 출현시켜야 할 필요가 제시 되었다. 그것은 르 꼬르뷔제가 구상했던 ‘단위인간(Modular figure)'으로 속도와 사회주의, 평범한 음식, 생명력 있는 색깔, 위생적인 생활방식, 일광욕, 낮은 천정, 그리고 축구를 좋아하는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었다./
문화의 진보라는 것은 실용적인 물체로부터 장식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데어 로에가 남긴 이 ‘적을수록 좋다(less is more)’라는 유명한 격언은 장식이란 배설물에 불과하다는 루스의 신념에서 비롯되었음이 분명하다. 위생학적인 어조로 가득찬 루스의 태도가 과연 어떤 보육학적인 관심과 결부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의 글을 읽고 나면 대형판유리가 ‘국제양식’의 출현에 있어 차지하는 기여도 만큼이나 배설역제 또한 중요한 공헌을 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테크놀로지는 문화를 개조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적인 반윤리로서 정당한 이유없이 행해질 뿐이다. 테크놀로지의 힘은 역사를 괴멸시킨다/
철제골조에 대한 기초개념은 이미 목재의 형식으로 나타나 있었다. 그것은 풍선골조라고도 불렸는데 왜냐하면 기둥을 세우고 나무를 얹는 구식공법에 비교해 볼 때 그러한 구조는 상당히 가벼웠기 때문이다. 이 골조 방식은 두 가지의 새로운 기계적 발전, 즉 북미의 울창한 삼림을 무한한 목재의 보유지로 탈바꿈시킨 제재장비와 기계생산된 못의 출현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
발터 그로피우스의 말대로 집산적인 의지로 만들어진 ‘수정과 같은 새로운 신명의 상징’으로 자처하여 공예와 디지인 분야에서 수도원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던 바우하우스의 이상은 신비적인 표현주의가 팽배했던 당시의 분위기 하에서 제대로 이해될 수 없었다. 또한 당시에는 그들의 작품이 신비로운 유토피아 분위기를 띠거나 너무 종교적이고 또는 미친 작당이라 하여 현대건축사에서 간과되고 있는 개별 건축가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력은 ‘국제양식’이 표방했던 희망, 이론, 전략뿐만 아니라 실제로 디자인된 물체에도 나타나고 있었다. 사실 현대건축의 주동향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바와는 달리 독일 표현주의에 상당히 의존하였으며 현대건축과 독일 표현주의를 연결시키는 고리는 유리라는 재료뿐만 아니라 건축가를 사회적 의지의 통합자, 정치를 초월한 건설가, 그리고 일종의 메시아로 파악하는 니체적이고 낭만주의적인 이상이었다./
감정과 희망, 그리고 기대로 가득찬 이러한 연극적 상황은 유리의 용도에 대해 유토피아적 이상을 간직하고 있었던 독일 건축가들의 보편적 태도였다. 아방가르드를 지향하고 있던 이들 이외의 다른 건축가들도 그러한 이념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었다. 또한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초기작품에 있어 그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었던 것은 어떤 ‘기능적인’ 이론이 아니라 정결하게 반짝거리는 프리즘의 이미지 였다./
유리는 고층건물의 본질이고 고층건물은 현대도시- 철제골격에 걸어놓은 얇은 막의 행렬 - 의 본질이 되었다. 거기에는 하중을 견뎌야 하는 두꺼운 벽이 더 이상 요구되지 않는다. 그리고 반데어 로에는 곧은 선과 합리적인 사고, 그리고 세련된 비례와 세부처리에 있어 이성의 화신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1923년 간행된 <작업논문>은 새로운 개념의 건축에 있어서 하나의 영원한 선언적 가치를 지닌다. 여기서 그는 “건축이란 공간적으로 파악된 한시대의 의지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시대정신(Zeitgeist)에 부응하기 위하여 건축가는 “모든 미학적 고찰과 모든 원칙, 그리고 모든 형식주의를 거부해야 한다.”이러한 그의 지시는 오늘날에 와서 되돌아 볼 때 기이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로에보다 더 심하게 원칙주의와 형식주의에 매달렸던 사람들은 바로 그의 모방자들이었음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건축은 객관성을 지닐 수 밖에 없는데, 이유는 그것이 대량생산과 조립식 건물로 대변되는 기계문화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자재로는 콘크리트, 철, 유리 등을 사용해햐 한다. 국수가락이나 원두막은 필요없다. 철제 대들보에 의해 무게를 해결해야지 벽이 무게를 지탱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 건물은 뼈와 피부만 갖추어도 충분한 것이다” 이런 구조를 염두에 둔다면 개인적인 환상이 발붙일 틈은 조금도 없게 된다. 로에는 냉철하게 말했다. “개성의 중요성은 이제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건축가 개인의 운명은 더 이상 우리의 흥미를 끌지 않는 것이다.” /
로에는 도시계획에 큰 흥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1920년대에 독일과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그의 동료들은 그것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새로운 건축 양식의 핵심개념은 건물 하나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라는 문제가 아니라 유토피아적인 도시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그리하여 당시의 건축가들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을 택함으로써 도시 전체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었다. 이러한 계획에 있어서 가장 공통적으로 나타났던 특징은 사회적 위생상태에 대한 집착이었다. 미래의 인간은 도로나 광장, 골목골목에서 웅크린 채 살아야하는 대신 고층건물 사이에 할당된 녹지대를 산책하도록 유도된다. 그리고 그들은 합리화된 생활방식에 보조를 맞추어 지정된 장소, 지정된 시간에 한 가지의 일만을 수행하도록 계획되었다./
르 꼬르뷔지에가 루이 16세를 존경했던 심리는 상당히 타당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르 꼬르뷔제가 추진했던 ‘방사형의 도시’의 건설을 위해서는 개인의 토지소유권과 지역분할에 관한 제반 규정을 철회시켜야 했는데 그러한 작업은 오로지 독재적인 권력에 의해서만 가능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르꼬르뷔제가 1925년 수립한 <브와쟁 계획>은 파리 시가를 합리적으로 재건하기 위한 그의 계획에 있어 가장 구체적인 완결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계획은 20세기가 초래한 막대한 교통량을 낡고 비좁은 파리 시가지의 상황으로는 도저히 해결되지 못한다는 르 꼬르뷔제의 생각에서 착안된 것이었다. 사실 파리의 건물들은 생활하기에 불편하고 지저분했으며 위험성마저 수반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20세기 초반 유럽의 도시관리 담당자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재개발 사업’이란 것도 계획성이라고는 없는 중구난방식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파리의 거리는 르 꼬르뷔제가 ‘당나귀 길’이라고 불렀듯이 도시의 입구에서 상가지역 또는 종교건물로 이어지는 꾸불꾸불한 보행로로서 중세적인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파리를 합리적으로 개선하려한 최초의 인물이 루이 14세였고 그 두 번째 인물로 바론 하우스만을 둘 수 있다면 르 꼬르뷔제는 세 번째의 인물로 인정 될 수 있다./
마구잡이로 맞닥뜨리게 되는 도로상태를 증오하였고 그 대신 신속한 통행이 가능한 도시를 염원하였다. “우리는 이미 교통의 양상이 어마어마하게 달라졌음을 목격하였다. 자동차, 자동차! 속도, 속도! 사람들은 열광과 기쁨에 사로잡힌채 운반된다 ..힘에 대한 열광과 기쁨.” 르 꼬르뷔제는 자동차에 의해 전통적인 거리의 개념이 사라지게 되며, 유토피아에서 살게 되는 사람들은 모두 자동차를 소유하게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되면 ‘방사형 도시’의 시민들은 지금까지 도시인들이 파리에서의 생활을 통하여 만끽할 수 있었던 우연한 만남, 동네의 특색, 다양성 등은 향유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1923년 발표된 <하나의 건축을 향하여>라는 글에서 르 꼬르뷔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단 한가지의 생각에 고무되어 신전을 축조하였다. 여기에는 주위의 산만한 풍경이 전체구성의 일부분으로 포함된다. 따라서 지상의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그들의 생각은 단일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는 푸리에가 품었던 이상사회에 대한 개념, 즉 ‘사회주의적 공동주택’의 개념으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었다. ‘사회주의적 공동 단체’는 이익을 공유하는 집단으로서 대략 1백 명의 구성원으로 조직된다. 르 꼬르뷔제는 1천 6백명에 달하는 마르세유 사람들을 하룻밤 사이에 <연합주택>에 수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가졌던 생각 중의 대부분은 ‘기계시대의 문턱에서 푸리에가 던진 예언자적 가설’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연합주택>이 극단적일 수도원 분위기를 띠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 기인한다. 생경한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벌집같이 생긴 이 건물에서는 프라이 버시를 유지하기가 힘들고 어린이를 위한 방도 선반의 넓이 정도로 극히 제한되어 있다.(르 꼬르뷔지에는 자식이 없었고 그는 또한 어린애들을 상당히 싫어했다). 한편 그는 단체생활의 자족성을 실현하기 위하여 s층에다 ‘구매공간(shopping mall)'을 설치하였는데, 그의 이론에 따르자면 장을 보기 위하여 누구라도 건물을 떠날 필요는 없었다./
비록 프랑스의 르 꼬르뷔제가 그 대명사의 역할을 수행하기는 했지만 1920년대의 유럽에 있어서 기계미학과 ‘국제양식’의 본무대가 된 곳은 독일이었다. 바이마르에 있었던 바우하우스라는 이름의 학교는 바로 이런 운동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때 이후로 ‘바우하우스’라는 단어는 날카로운 윤곽과 합리성을 수반한 기계적 양식으 동의어로 쓰여지게 되었다. 20세기의 어떠한 미술학교나 디자인 센터도 바우하우스 만큼 유럽인의 사고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바우하우스의 이념은 그저 양식적인 ‘외양’에 입각하여 전개된 것이 아니다. 바우하우스의 철학적 바탕은 거기서 수행된 디자인 작업 이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예술과 테크놀로지>라는 전시회는 향후 바우하우스가 지향하게 되는 새로운 방향감각을 설정해 주었고 그로피우스 자신의 경력에 잇어서도 하나의 전환점으로 작용하였다. 즉 이 전시회를 계기로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재료라고 생각되어온 목재에 대한 언급은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데사우 바우하우스 건물은 산학협동체계에 대한 강력한 상징으로서 하나부터 열까지 철과 콘크리트 그리고 유리로 만들어졌다.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가 여러 가지 실질적인 문제들 - 집단주택, 산업 디자인, 인쇄공정, 도안, 사진, 그리고 ‘기본형의 개발’등을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바우하우스는 “모든 낭만적인 장식과 변덕을 일소하고 자동차와 기계에 의한 생활환경에 대한 명확하고 긍정적인 태도”를 형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집단주택의 개념은 바이마르 독일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사회적 관심사가 되었으며 따라서 바우하우스도 이 문제를 중요하게 취급하게 되었다. 독일 마르크 화폐가 안정세를 되찾고 1923년의 인플레이션이 가라앉게 되자, 1924년부터 바이마르 정부는 집단주택의 건설에 본격적인 박차를 가했으며 향후 8년동안 독일에는 어느 나라에서도 발견할 수없는 많은 양의 건물과 시민을 위한 주택이 건립되었다. 바이마르의 건설 등이 최고조에 달했을때 신축된 주거시설은 총 건설량의 70퍼센트 이상에 달해 있었다 - 그 예산의 대부분은 사유지 임대료에 대한 15%의 세금으로 조성된 것이었다. 이러한 건설작업은 대부분 그로피우스, 타우트, 에리히 멘델존등 ‘국제양식’의 건축가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특히 투철한 공산당원이었던 에른스트 마이는 프랑크 푸르트의 도시계획 책임자로 있으면서 도시 전체의 건축문제에 관한 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노력은 전세계의 유토피아주의자들이 사랑했던 사횢의적 주택의 고전적 형태인 ‘집합주거지(Siedlung)’로 나타나게 되었다. 집합주거지는 욘 베체만이 풍자적으로 묘사했듯이 합리적 주택의 낙원으로 가정되었다./
바우하우스의 철학은 모더니스트 디자이너의 역할을 부상시킴에 있어 최소한 뉴욕 현대미술관에 디자인 컬렉션이 마련되기 전까지 20세기 후반에 나타났던 어떤 문화적 정책보다도 더 귀중한 공헌을 하였다./
바우하우스 디자인이 거두어들인 특허 사용료는 학교와 해당 디자이너에게 반반식 배분되었고 학교에 할당된 액수의 절반은 당장 산업적으로 응용될 수 없는 ‘선구적’인 실험작품을 추구하는 디자이너에게 돌아갔다. 사실 바우하우스가 내놓은 디자인은 대부분 그러한 실험성을 띤 것이었다./
육체를 전시하는 이러한 태도는 네덜란드 출신의 게리트 리트벨트에 의해 분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그는 네덜란드에 활동했던 드 스틸(de stijl) - 양식(the style)이라는 이상주의 예술가 모임의 일원이었다. 그들이 의미했던 ‘양식’이란 역사의 종말이 도래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게 되는 절대적 형태와 그 기능, 즉 절대불변의 양식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 모임의 주요 구성원으로는 조각가였던 조르주 반통겔루, 화가인 반 되스부르크와 몬드리안, 그리고 건축가 오우드가 있었다. 그들이 가졌던 이상은 바우하우스에도 영향을 주었지만 추상을 향한 선교사적 실천력에 있어서는 바우하우스를 훨씬 능가하였다./
‘드 스틸’이 의도했던 목적은 그 목적이 결코 달성되지 못했다는 사실만큼이나 분명한 것이었다. 1차세계대전과 그런 참상을 불러온 사회에 대해 욕지기를 느끼고 자신들이 자본주의에 입각한 개인주의적 세태와 새로운 질서 속에 태어날 정신적 세계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고 믿었던 ‘드 스틸’의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범세계적인 인간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예술은 에스페란토어와 마찬가지로 초국가적인 형태, 즉 하나의 ‘세계적인 언어’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그들의 작품에는 르 꼬르뷔제가 꿈꾸었던 ‘흰색의 세상’과 버금가는 극단적인 추상형식이 나타났다. 여기서 곡선은 완전히 배제될 수 밖에 없었는데 곡선이란 지나치게 ‘개인적인’ 성격을 내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와같이 ‘드 스틸’은 개인의 존재를 무시하고 세계의 존재로 나아감에 있어서 중세 비밀결사조직의 꼿꼿한 태도를 유지하였다. 색채를 빨강, 노랑, 파랑 그리고 검정과 흰색으로 제한시키고 형태 또한 직사각형으로만 한정했던 바우하우스의 디자인 조차도 ‘드 스틸’의 시각으로는 장식성과 안락에 타협하는 것으로 거부되었다. 이런 엄격한 태도에 입각하여 ‘드 스틸’은 회화뿐만 아니라 건축을 비롯한 모든 예술에 적용될 수 있는 형태체계를 제안 하였다./
그러나 ‘드 스틸’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술이란 원래 국수주의를 극복할 수 없는 데다가 당시 네덜란드의 가주점 주인들은 ‘드 스틸’이 기대하는 그런 이상주의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 스틸’이라는 이름이 아직까지 남아 있게 된 것은 20세기가 낳은 뛰어난 예술가 중의 한사람인 피에트 몬드리안(1872 ~1944)의 존재 때문이라 생각된다. 사실 몬드리안의 그림은 복잡한 인간관계로 이루어지는 실세계에 대해 이렇다할 영향을 주지는 못했지만 예술이라는 허구의 세계에 있어서는 예외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유토피아 도시를 건설하려 했던 건축가들의 계획과는 달리 몬드리안의 그림이 오늘날에도 우리를 감동시킬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예술의 영역이 이상적인 허구의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술의 세계에 등장하는 사물은 실제로 사용될 수 없는 사물이며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그러지지도 않는다. 거리를 따라 걷거나 건물 속을 지나가듯이 그림 속을 걸을 수는 없다. 그림이란 인간세태와는 달리 부패하지도 않는다. 그림이란 낙원을 건설하는 데에 필요한 참된 바탕인 동시에 하나의 체계를 이루어나가는 벽돌이 될 수 있는 것으로서 시각에 의한 색채인식을 통하는 일 이외에는 인간의 육체와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는다. 한편 건축이나 디자인은 인간의 육체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있는 그대로의 신체조건이나 사회적 상황을 철두철미 존중하지 않는다면, 인간적이거나 실용성있는 건축을 만들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때 유토피아 계획에 있어서 ‘고전적인’모델이 되는 대부분의 계획은 비인간적이거나 심지어 당치도 않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계획은 그 계획의 배후에 깔린 사회적 가설이 신빙성을 상실하게 됨에 따라 그만 포기되고 말았다. 이제 어떤 누가 진보와 완전성을 믿을 것이며, 어떤 누가 유토피아적 건설가를 신용할 것인가?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파리와 같은 주요도시를 찾아가서 사회의 합리화라는 이름으로 무엇이 자행되었는지를 구경하면 된다. 우르반 7세가 베르니니에게 판테온의 구리판을 철거하도록 명령하였을때 어떤 익명의 익살꾼은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말을 남겼다 - “야만인도 못한 짓을 바레리니는 해냈다” 낡은 파리에 대해 르 꼬르뷔제가 감행했던 전쟁은 1945년 이후 전세계의 모든 도시에 불붙게 되었고 그 결과 고층건물과 그 사이사이에 황량한 포장도로는 현대적인 대량 주거개념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포악한 제도적 모더니즘에 입각하여 파리 근교에 세워진 ‘라 데팡스’나 알로가 그리니에 세운 ‘라 그랑드 본’이라는 신도시에서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런 시가지에는 모자이크로 만든 카프카와 랭보의 대형 초상화를 설치함으로써 콘크리트의 폐허에 무언가 ‘새 생명’을 불어넣으려는 시도만이 발견 될 뿐이다./
관료주의자들은 항구도시를 싫어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항구도시는 외부로부터의 영향에 너무 민감하기도 하려니와 여러 가지 언어가 범람하는 동시에 행활구조가 복잡하여 통치하기에 곤란한 요소가 많이 때문이다. 터키의 수도가 이스탄불 대신에 앙카라에 세워진 것이라든지, 호주의 수도가 시드니 대신에 캔버라에 세워지게 된 것도 다 이런 사정에 기인한다. 브라질은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항구 도시 중의 하나인 리오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리오는 수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기능을 이미 자연스럽게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쿠비책은 해안지방에서 약 1천2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붉은 흙투성이의 내륙 고원지대 - 여기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다. - 에 통치의 본거지를 마련하였다. 이 계획은 르 꼬르뷔제를 추종했던 남아메리카 출신의 건축가 가운데에서 가장 재능이 뛰어났던 두 명의 건축가에 의해 추진되었다. 르 꼬르뷔제의 직접적인 영향 하에서 루치오 코스타는 도시계획을 전담하고 오스카 니메이어는 주요 기념건물을 설계하였다. 브라질리아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 도시는 태양빛, 이성, 그리고 자동차의 승리로 대변되는 ‘미래도시’로 건설될 작정이었다. 만일 ‘국제양식’이 국가적 차원의 자긍심과 무한정한 양의 현금지원에 의해 추진될 수 있었다면 아마 이 도시의 건설이 의도했던 바와 마찬가지의 면모를 나타내었을 것이다./
그림으로 묘사되거나 사진에 찍힌 브라질리아의 모습은 일대 장관으로 보인다. 아마 그것은 지구상에 세워진 신도시 가운데서 가장 사진발이 잘 받는 도시일 것이다. 광활한 도로, 하늘을 찌를듯한 대형건물, 기념탑, 인공연못에 있어서 브라질리아는 근 일 세기전에 프랑스의 보자르 건축가들이 원했던 국가차원의 기념건축과 유토피아적인 모더니즘을 융합시켜 놓은 것처럼 보인다. 브라질의 건축비평가들은 브라질리아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차마 비판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여론기관에서는 찬사의 소리밖에 내놓지 않았다. 더군다나 국외의 비평가들은 그 엄청난 지리적 거리 때문에 실제로 그 모습을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간에 이 도시의 참모습은 그렇게 고상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브라질리아 건설 사업은 끝이 나게 되어 1960년 공식적인 출범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때 이후로 한쪽 구성에서는 도시의 구조가 허물어져 내리고 다른 한쪽 구성에서는 끊임없는 보완공사를 진행해야 하는 꼴불견이 연출되어왔다. 건설업자의 날림공사와 정부관료의 부조리에 의해 기념건축의 금속부분은 녹이 슬고 콘크리트는 떨어져 나갔으며 자연석을 붙인 건물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태는 현실에 부합되는 계획보다는 가상의 미래를 위해 무엇인가를 계획할 때에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보여주는 멋진 교훈이 된다. ..결과적으로 브라질리아는 20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에 미래의 도시라는 환상에서 쫓겨났고 그 결과 그만 공상과학소설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브라질리아는 값비싼 댓가를 치른때 현실적인 공간 대신 추상적인 공간을, 복합적인 의미대신 오직 하나의 의미만을, 인간적인 필요 대신 정치적 야망을 염두에 둘 때 아무것도 아닌 허접쓰레기만이 남게 된다는 진실을 어렵게 환기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
이런 의미에서 브라질리아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건축분야에 관한 한 20세기의 후반에는 ‘미래’의 죽음이 분명히 느껴지고 있었다. 바로크 시대와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와 마찬가지로 현대적 건축의 동향도 새롭게 태어났다가는 사라져 버렸다. 현대건축은 어느 정도의 걸작품을 남겨 놓기도 했지만 그 원리는 새 세상에 대한 희망을 촉진시킬 힘을 이미 상실하고 있었다.현대건축운동에 복음과 같은 추진력을 부여해준 동시에 건축가를 ‘예술의 제왕’이라고 생각했던 표현주의적 이상은 소생의 가망성없이 사멸해 버렸다. 건축가이자 비평가였던 피터 브레이크가 1974년 현명하게 지적하였듯이, “우리는 한시대가 막을 내리는 순간에 서 있는 동시에 또 하나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순간에 서 있기도 하다. 그러나 건축가 없는 건축으로 나타날지는 몰라도 이 전환의 시기에도 건축은 계속 진행될 것이다”/
오늘날 명확하게 드러나는 현상은 바로 현대건축의 동향에 대한 전면적인 이단적 움직임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유를 향한 끊임없는 도전의식 없이는 사회를 건축적으로 ‘정화’할 수 없으며 건축가의 윤리강령은 사회의 현실과 그 속에 내재된 내용과 부합되는 작업수행을 규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기억되는 것만이 현실적인 것이다. 있지도 않은 미래를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활용가능한 과거를 저당잡히지 않으며 현재에 존재하고 있는 것을 재활용하는 한편 필요한 만큼의 범위 내에서 계획을 잡는 편이 훨씬 나은 일이다. 도시 생활에서 있어서는 오로지 보주주의적인 경향만이 정상적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모더니스트들의 논쟁은 근 1세기 동안 지속되어야 했지만, 그런 분탕은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철재 다음으로 미래의 유토피아 건설에 필요했던 두 번째 재료는 강화 콘크리트였다. 콘크리트로 만든 블록은 압축에는 강하지만 장력에는 약한 결점을 지닌다. 즉 그 표면은 알갱이 처럼 쉽게 떨어져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장력이 일어나는 지점(보통 골조기둥이나 슬라브 천정 속)에 쇠막대를 끼워넣는다면 그 길이를 무한정 확장 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강하게 되며 돌이나 벽돌의 한계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더군다나 콘크리트는 건조되기 전에 액체처럼 다룰 수 있기 때문에 어떤 형태라도 주형이 가능하다. 그리하여 1880년과 1920년 사이에 걸쳐 사진술과 미세 광학이 제공해준 자연계의 작은 조직형태를 차용하여 이전의 건축에서는 볼 수 없었던 표현적 형태의 세계가 열리게 되었다. ..한편 대형 판유리는 건축에 있어 유토피아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가장 뛰어난 재료로 인정되고 있다. 고딕 성당의 독특한 장식으로서 종교적 감화의 기능까지 발휘하였던 스테인드 글라스는 4백여 년 동안 성스러운 명예를 누려 왔다. 그러나 현대의 판유리는 그 의미에 있어 또 다른 분위기를 내포한다. 그것은 투명성과 가벼움, 그리고 구조적인 과감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판유리는 벽돌이나 석재의 성질에 정 반대 된다. 즉 판유리가 눈동자의 예민한 막처럼 반응력 있는 표면을 가지는 반면, 석재나 벽돌은 세상에 대해 두꺼운 껍질을 형성해 버리는 둔감한 재료인 것이다. 따라서 건축에 신비감을 부여하고자 했던 독일의 일부 건축가들에게 있어서 판유리는 대단히 소중하게 취급되었다./
자유의 문턱에서
절대적인 자유에 대한 소망은 정신적 생활에 있어서 하나의 불변수로 작용한다. 20세기에 나타난 모든 미술운동 가운데에 있어서 이러한 본질적인 소망에 가장 깊이 관련되어 있었던 것은 초현실주의였다./
실제 초현실주의는 카톨릭 신앙과 마찬가지로 종교적 도그마와 교리문답, 성자, 세례식, 성처녀 마리아는 물론 까다롭고 성미 급한 교황까지도 겸비해 두고 있었다. 교황과 같은 이 인물이 바로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 1896~1960)이라는 사람이었다. 1920년대 브르통은 현대미술에 깊은 매력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현대미술의 특징은 그가 행한 수다스런 찬양의 노래와 일치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그는 환자들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꿈을 분석하게 되었고, 이때의 경험은 “초현실주의의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즉 정신의 본래적 힘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합리성이나 윤리와 같은 억압기제로 부터의 해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브르통은 광기에 대한 시각에 있어서 19세기의 낭만주의에서 20세기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태도를 가장 잘 물려 받았던 인물이었다./
드 기리코(Giorgio de Chirico 1888~1978)는 그리스계의 이탈리아인으로서 1차 세계대전 직후에 파리에 선보인 그의 작품들은 브르통을 비롯한 초현실주의 차원에 있어 불안감으로 가득찬 신세계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입장에서 키리코의 작품은 낭만주의 예술과 초현실주의를 연결시키는 필연적인 고리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이성적이거나 감각적인 표면으로 덮힌 19세기 회화 즉 밝은 껍질을 가진 인상주의, 확고한 물질의 세계를 구축했던 쿠르베, 더 멀리는 이상적 형태를 추구한 신고전주의 등의 저변에는 신비, 우수 그리고 공포로 가득찬 꿈의 세계가 깔려 있었다./
키리코의 작품에 있어서 초현실주의자들이 가장 경탄했던 요소는 모더니스트 화가의 한 사람으로서 키리코가 이룩했던 형식적 과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물체 사이에 이루어지는 이상하고도 우연한 만남, 그리고 그 명확한 묘사로서 이러한 요소는 달리나 마그리트 등 나중에 등장하게 되는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박진감있는 표현에 있어서 하나의 전조가 될 수 있었다. 그러한 묘사력은 꿈을 실제처럼 보이게 만든다. 또한 초현실주의자들은 키리코가 발휘했던 무대 연출력에 고무되기도 하였다. ..단어, 소리, 이미지, 물체, 사람등의 예기치 못한 만남에 의해 이상한 아름다움이 태어난다. “수술대 위에서 일어나는 재봉틀과 우산의 우연한 만남은 아름답다” 브르통이 키리코의 그림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은 바로 이런 종류의 아름다움이었다./
우발적인 형상을 활용하라는 레오나르도의 가르침은 초현주의자들에게도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막스 에른스트의 상상적인 이미지는 외설문학과 맞먹는 저돌적인 면을 가지면서도 그 만큼의 지루한 반복은 하지 않는다. 그의 콜라주 소설은 외설문학과 마찬가지로 소년기의 욕구억압에 대한 하나의 보복수단이었다./
1880년과 1930년 사이에 걸친 반 세기는 프랑스에 있어서 ‘손수 만들기(do it yourselfery)'풍조의 황금 시기 였고 이것은 조형예술에 있어서 어느 정도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카메라가 널리 보금되어 있지 않아서 시각적인 기억에 대한 사진의 역할이 충분히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메라를 일상적으로 생활하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에 비교해 볼 때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그들이 본 것을 그림으로 나타내 보려는 사람의 수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비록 소박파의 화가들이 1세기 전의 프랑스라는 상황에서 하나의 희귀한 존재였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결코 멸종한 상태에 처해 있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민속전통이 사멸했다고 하더라도 소박파의 전통은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소박파의 화가들은 개별화가로서의 가치를 스스로 확신하는 한편, 농촌과 어촌의 민속예술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는 도시거주자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앙리 루소(Henry Rousseau 1844~1910)는 이러한 소박파 가운데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15년 동안에 걸친 하급 공무원 경력 때문에 ‘세관원’이라고도 불린 루소는 그의 작품을 마네와 제롬므, 부게로, 샤반느 등의 작품과 함께 살롱에 나란히 전시하려는 욕망에 타오르고 있었다. 만일 그가 자신이 소유한 원시적 기질을 떨쳐 버리고 ‘보다 나은’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면, 그는 충분히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관료체제의 살롱으로부터 거절당한 ‘직업적’ 현대화가들과 함께 1886년 이후 매년 ‘앙데팡당 전시회’에 참여 할 수 있었다. ..루소가 갖고 있었던 선명한 상상력은 그의 그림에 내포된 충동적인 꿈의 환상을 더욱 고조 시킨다. 바로 여기에 모호한 구석이라곤 없는 ‘현장에서 제작된’ 이미지가 나타나는 것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좋아했던 또 한 사람의 소박파 작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소유한 시골정원의 밀폐된 공간 속에 어떤 입체적인 작품을 만든 사람이었다. 그것은 아마 19세기의 예술가들이 만든 ‘비전문적’작품가운데에서 가장 정교하고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신비로운 작품으로 꼽힐 것이다. 그가 바로 베르디낭 쉬발(Ferdinand Sheval)이라는 사람으로서 그는 리용에서 40마일 가량 떨어진 오떼리브 마을에서 우체부로 일하고 있었다. 흔히 ‘우체부 쉬발’이라고 불렸던 그는 자신이 살아온 43년동안 이렇다 할 특별한 일을 해 놓은게 없는 인물이었다...바퀴차를 끌고 우편배달을 나가기 시작한 쉬발은 괴상하게 생긴 돌을 보다 많이 모으게 되었다. 그는 돌을 수집하느라 잠을 설치면서도 아침저녁으로 돌을 쌓아 갔다. <우체부의 꿈의 궁전>이라는 조형물은 그리스, 앗시리아, 이집트 건축의 ‘진정한 기원’에 대한 쉬발의 생각을 담아내고 있다. ..이 ‘상상의 궁전’은 얼마있지 않아 초현실주의 운동에 있어서 가장 신성한 장소로 대접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에른스트는 ‘우체부 쉬발’을 찬양하는 콜라주 작품을 만들었고 브르통은 그에 관한 시를 짓기도 하였다./
바르셀로나는 미로의 작품뿐만 아니라 초현실주의의 전개와 깊은 유대를 가졌던 도시이다. ..탄력성있게 똘똘 말린 유기적인 형태 또한 모든 측면에서 아르 누보와 연결되고 있으며 환상적인 형태 변형도 마찬가지 이다. 건축분야에 있어서 이러한 변형된 형태의 메타포를 가장 일관성있게 다루었던 건축가로는 카탈로니아의 현대주의자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i 1852 ~1926)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건축에서는 우리는 형태가 기능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미끄러지고 추락하며, 해체되었다가는 재조직되는 가변적인 색채, 가변적인 질감을 가진 건물, 즉 부드러운 건축, 액체와 같은 건축, 황홀경에 빠진 건축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고전주의 건축가들의 관점으로 본다면 <속죄교회>와 역시 바르셀로나에 세워진 더 극단적인 <파르크 구엘>은 그저 미친 짓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이런 종류의 건물에는 단 하나의 직선도, 단 하나의 권위도 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1920년대를 풍미했던 모더니스트의 선구적인 취향 - 한마디로 말해 바우하우스적인 취향 - 에 비추어 볼때 아르 누보 양식은 속이 뒤집힐 정도로 방종한 것일지 모르지만, 초현실주의의 관점에 의하자면 그것은 하나의 기적과 같은 것이었다. 건물의 견고함을 스스로 부정하는 대형건물 말고는 보다 더 강하게 상상력을 자극하며 보다 더 자기모순적인 형식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런 건물은 ‘욕망’이 구체화 된 것이다. 가우디의 건축이 표방하고 있는 아르누보 양식의 극단에는 신경쇠약적인 안달상태와 부풀어오른 내장의 에너지, 그리고 메타포로 변해나가는 물질에 대한 감각이 느껴진다. 미로보다 젊고 다소 의심스럽기 조차한 카탈로니아 출신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에게 있어서 이러한 감각은 하나의 분명한 제질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화가들이란 흔히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모방하기 마련이지만(미로의 후기작품들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의 작품은 작품시장의 수요를 충족시키면서 물밀듯이 팔려 나갔다) 달리는 그런 행위에 있어 예외적인 열정을 발휘하였다. 그는 예술가에 대한 두가지의 상투적 관념을 충실히 실행해 보임으로써 사회적인 영예를 누릴 수 있었다. 그중 하나는 모든 화가를 옛 대가(라파엘로, 루벤스 같은)로 생각하는 태도이며, 다른 하나는 예술가를 괴물(랭보, 반 고호 같은)로 생각하는 태도이다. 달리는 이러한 두 가지의 특징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하면서도 대중 앞에 자신의 이미지를 제시함에 있어서 이 두가지 특징을 한몸에 지니기나 한 듯이 조야하지만 선명하게 보여지려고 몸부림쳤다. 바로 여기에서 두 개의 달 리가 등장하게 된다. 그 중 하나는 초창기의 달리로서, 그는 엄격한 개인적 환상과 고삐풀린 상상력에 사로잡힌 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하나의 달리, 즉 후기의 달리는 베르미어와 벨라스케즈의 작품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이 두 화가의 장점을 한몸에 물려 받은 후계자라고 믿게 만들었다./
아마 파리시의 단순한 외양에 의존했던 예술가들은 오로지 입체파 화가들 밖에 없었으리라, 이와 같이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자연이란 별로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연 대신 복잡하게 얽힌 문화양상 - 벼룩시장을 가득 메운 여러 가지 종류의 고물 - 속에서 다양한 소재를 발견하였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에는 폐품은 폐품일 뿐이지 ‘골동품’이나 ‘수집품’으로 취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벼룩시장에 나온 물건은 거의 모두 공짜로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벼룩시장은 자본주의의 배후에 깔린 무의식적인 태도를 반영한다. 즉 그곳에는 폐기된 물건이나 잉여 생산된 물품, 패배자, 가치없는 의식등으로 뒤범벅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거기에서는 ‘재봉틀과 우산이 수술대 위에서 만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며 어떤 절차를 거치고 난 뒤 그것은 ‘초현실주의 오브제’라는 새로운 예술형식이 출현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오브제’란 콜라주를 입체적으로 연출해낸 것이다. 사진작가요 오브제 작가이기도 한 미국의 만 레이(Man Ray)는 오브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오브제는 그 자체 아무런 특징이나 매력이 없는 물체를 관찰한 결과로서 나타난다. 나는 그 자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물체를 선택한다. 그리고 나는 그 물체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미적인 특징을 완전히 무시해 버린다. 나는 장인의 솜씨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이 뛰어난 장인들로 가득차 있다고 말하지만 꿈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조금의 가치도 없는 물건이란 없다. 여러분은 가장 사치스런 물건 속에서도 항상 최소한의 용도를 발견할 수 있다』
메레 오펜하임(Meret Oppenheim)은 1936년 ‘초현실 주의 오브제’가운데서 가장 견고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컵 하나와 쟁반, 숟가락을 털로 감싸버림으로써 그녀는 깜짝 놀랄 만한 힘을 가진 자체 모순적 이미지를 만들 수 있었다. <털 속의 점심식사>라는 이 작품은 하나의 성적인 상징으로서 오랫동안 비밀스런 이면을 유지해 왔다. 다시 말해 이 물체가 유도하는 행위, 즉 따듯한 액체를 담은 털이 많은 찻잔에 그녀의 입술을 갖다대는 행위는 예술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강렬하고 가장 예기치 못했던 여성동성애의 이미지를 부각시켜놓고 있는 것이다./
초현실주의에 의한 오브제 예찬은 초현실주의 운동에 또 다른 성격을 부여해 주었다. 그것은 ‘경이로움’ - 브르통이 “발작적인 아름다움”이라 부른 성적인 흥분감 - 이 현실의 껍질에 가려져 있지만, 그것은 어디서든 발견될 수 있다는 믿엄이었다. 벨기에 출신인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1989 ~1967)는 이러한 믿음을 가장 멋지게 입증해 보였다. 자극과 주의를 끌어 모으려는 곡예, 정치적 논란, 혼란, 섹스 스캔들, 우정의 파괴, 그리고 동강난 종교의 위기상태를 우려 먹었던 초현실주의 운동의 와중에서 마그리트는 매우 무기력한 작가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는 브뤼셀이라는 점잖은 도시에서 살았고 오로지 한 여자와 함께 평생을 보낸 사람이었다. 1930년대의 파리 미술계의 기준에서 평가한다면 그는 잡화상 주인정도에 불과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멍청하게 보였던 마술사는 매우 뛰어난 상상력을 갖고 있었다. 마그리트는 프리쓰, 포인터즈, 알마 - 타데마스등 빅토리아 시대의 화가들이 이야기 그림(narrative painting)으로 대중에 봉사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현대의 대중에게 봉사하였다. 현대미술은 피카소에서 바넷 뉴만에 이르기까지 신화적인 인물들로 점철되어 왔지만 이야기 형식을 빌어온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이런 차제에 마그리트는 현대미술에 있어서 이야기 그림의 대명사가 되기도 한다. 그의 작품은 한 장의 그림이기 이전에 우선 하나의 이야기와 같은 성격을 가지지만 인생의 단편이나 역사적인 장면을 주제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진다. 그 것들은 매우 진부한 설명방식에 의해 불가능한 세계를 순간적으로 포착한 하나의 기록이다. 수수께끼 그림의 대가로서 마그리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고 이미지의 세계에 대한-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 그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1923년 르 꼬르뷔제는 기능성만이 참작된 평범한 담배 파이프 하나를 디자인하였다. 그로부터 5년후 르 꼬르뷔제의 단순한 합리주의에 반발한 마그리트는 <이미지의 배반>이라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파이프가 아니라면 그것은 어떤 물건이란 말인가? 그것은 하나의 물체로서 기억의 방아쇠를 당겨주는 ‘한장의 그림’에 불과한 것이다. 이 그림에 적힌 “이것은 파이프가 아닙니다”라는 문장은 현대미술의 표허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것은 언어의 의미가 상징물에 의해 전달되거나 아니면 차단당하는 방식에 대하여 하나의 선언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림이란 그 속에 묘사된 대상이 아니다‘라는 관점을 이처럼 짧고 간결하게 제시했던 화가는 없었다. ..그의 행위는 한쪽 끝에서는 철학적 개념을 건드리고 다른 한쪽 끝에서는 장난과 연결되었던 것이다. /
마그리트의 관심은 보다 깊이 있는 차원에 지향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언어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그는 회화적인 묘사가 발휘하는 언어적 기능에 집중하였다. 다시 말해 그는 대상으로 채택된 물체를 기술하는 언어의 잠재력에 매료되어 있었던 것이다. 똑같은 형태를 갖춘 두 개의 물감 얼룩을 두고 하나를 ‘거울’이라 하고 다른 하나를 ‘여자의 몸’이라고 불렀을때 그의 의도는 그저 자아도취적인 태도를 놀려보자는 것이 아니라 박약하기 그지 없는 기호(sign)의 성질을 드러내보이려는 데에 있었다./
마그리트의 그림은 만일 실세계의 어떤 부분이 비합리적인 동시에 일관성있게도 보여질 수 있다면 도대체 분명하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없다’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그가 이런 시각적 폭발장치를 계속 터뜨려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사고가 그 뇌관의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대포알이 발사될때 친숙한 이미지의 베일은 벗겨지며 그 결과 우리는 이 그림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자유의 문턱에서>에 서 있게 되는 것이다./
‘비극적인 동시에 시간을 초월하는’ 주제는 도시으 거리 위에서 쉽사리 발견되지 않았으며 더군다나 초창기의 추상표현주의가 일상생활과 접촉할 수 있었던 기회는 초현실주의에 비해 훨씬 드물었다. 따라서 폴록이나 로드코, 스틸 등의 화가들은 문명 이전의 시대, 즉 ‘원시적인’ 부족시대와 같이 역사적 시기로 한정시킬 수 없는 분야에서 자신들의 이야깃 거리를 구하고자 노력하였다. 다시말해 이들은 작품 감상자의 머리 한구석에 동굴 속에 웅크리고 있는 조상의 모습이 각인될 것을 기대하였던 것이다./
1947년 무렵 초월적인 추상회화로 나아가고 있던 로드코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우리가 사물의 정체에 대해 갖고 있는 일상적인 생각은 감수성의 한계를 타파하기 위하여 마땅히 분쇄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감수성을 제약함으로써 현대사회는 환경의 실상을 보다 노골적으로 은폐해 왔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