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호 루카 신부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이사야 1,10-17 마태오 10,34─11,1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과 그들이 받게 될
보상에 대하여 소개합니다.
제자들이 따라야 할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 ‘칼’은 예수님 말고 ‘다른 것을 사랑하는 삶’을 자르고, ‘자기 십자가를 피하는 삶’을 베어 내며,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삶’을 잘라 내라고 주신 것입니다.
제자의 삶은 예수님께 충실한 데서 비롯하는 단호함이라는 ‘칼’을 필요로 합니다.
어설픈 제자에게 들린 ‘칼’이 떠오릅니다. 자기 실속을 위협하는 복음의 요구를 잘라 내고,
주님의 일을 베어 내며, 복음의 가치들을 쳐 내는 칼, 자신을 위하여 만든 ‘칼’입니다.
여러분의 손에 들린 ‘칼’은 누구의 칼인가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그 삶을 통해 얻게 되는
행복과 기쁨, 평화의 중심에 그분 대신 ‘나 자신’이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정신이 번쩍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을 청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 베네딕토 아빠스를 기억합니다. 베네딕토 성인은 「규칙서」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의 모든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께서는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베네딕토 성인이 보여 준 제자의 삶이 우리 안에서도 지속될 수 있도록 전구를 청합시다.
대전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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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규 베네딕토 신부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이사야 1,10-17 마태오 10,34─11,1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놀랍고 두렵습니다.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며 속죄하고 화해하는 것이
중요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언자를 통하여 전해지는 이 말씀은 청천벽력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선포합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몸과 마음과 생각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제물을 바치는 것은 속죄하고 화해한 것을 보여 주는 행동입니다.
그보다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은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이고 화해입니다.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비슷한 의미로 들립니다.
다른 누구보다 먼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요구입니다.
사람 간의 관계에 얽매여 있고 그 관계 안에서만 나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참된 자신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 관계를 무시하고 무조건 벗어나라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하느님 앞에 있는 자신만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이웃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럭저럭 잘 지내는 것을 평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언자를, 의인을 그리고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진정한 평화가 시작됩니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자신을 깨끗이 하라는 말씀처럼,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를 통하여
이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평화를 위한 길입니다.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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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이사야 1,10-17 마태오 10,34─11,1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신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분명,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일진데, 어째서 평화에 칼이 필요한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병든 환자에게는 수술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우리 심장에 꽂혀 우리의 안주와 이기심을
도려내고, 세상에 꽂혀 세상의 불의와 부정을 절단하는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우리 가슴에 꽂혀 우리를 살리는 칼이요, 이 세상에
던져져 이 세상을 살리는 칼입니다. 죽이기 위한 칼(살인검)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활인검)입니다.
그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십니다.
평화로운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마태 5,9) 곧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칼을 주십니다.
이처럼, 말씀은 우리에게 혁명을 요청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는 한 권의 혁명서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뒤집혀진 혁명가들입니다. 그리고 “참 행복선언”을 선언하는
진복팔단은 혁명선언서입니다. 그것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혁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강론(2013.11.1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혁명가가 아니라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혁명가가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우리를 혁명가가 되게 만듭니다.”
이 혁명은 진리의 말씀인 쌍날칼에 의해 실행되는 혁명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속셈과 생각을 갈라냅니다.”(히브리서 4,12)
‘내 칼을 받아라.’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의 칼’을 선사하십니다. 그것은 ‘타인에게’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던져라’고 주는 칼입니다. 자기 자신의 심장에 던지라고 주는 칼입니다.
사실,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금은보석의 값비싼 선물더미가 아니라,
그를 수술할 수 있는 칼인 것입니다. 병든 몸에다 금은보석으로 치장했다 해서 결코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듯, 병자는 칼로 병을 도려내는 수술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 던지신 칼이야말로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입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한 칼이요, 말씀을 이루기 위한 쌍날칼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칼이 자신의 가슴에 꽂아야 할 일입니다.
사랑의 불화살인 이 칼에 기꺼이 찔림 당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내 목에 칼을 견주시고, 말씀하십니다.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오 10,39)
이처럼, “제자의 길”은 그야말로 도전입니다. 결코 양다리를 걸칠 수도, 두 주인을 섬길 수도 없는,
아니 자신의 목숨마저 내 걸어야하는 도전입니다. 그것은 사도 요한의 권고대로,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그 어느 것도, 제 자신마저도 결코 당신보다 앞세우지 말라 하심이오니,
오늘 제게 말씀의 칼을 꽂으소서! 그 칼로 저의 심장을 가르고 저를 수술하소서!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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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제 목에 칼을 견주소서.
당신 영의 칼로 저의 자애심을 내리치소서!
제 심장에 당신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그 어느 것도 당신보다 더 사랑하지 말게 하소서!
말과 혀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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