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덕 베드로 신부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예레미야 7,1-11 마태오 13,24-30
“그러자 그 둘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창세 3,7). 아담과 하와가 죄를 저지르고 난 뒤에 한 첫 행동은 ‘알몸을 가리는 것’
이었습니다. 하느님께 더 이상 알몸을 보여 주고 싶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누구에게 ‘알몸’을 보여 줄 수 있나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알몸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알몸을 보여 주기 싫어졌다는 것은 이제 그 사람과 맺은 사랑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죄는 하느님과 우리가 맺은 사랑의 관계를 깨지게 합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쳐라. ……
너희는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으로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고,
너희 자신도 모르는 다른 신들을 따라간다. 그러면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 안에 들어와
내 앞에 서서,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이런 역겨운 짓들이나 하는 주제에!”
죄는 우리 마음 속에 착각을 일으킵니다. 죄 안에 있거나 그 죄를 계속해서 저질러도
‘우리는 구원받았다.’라고 생각하는 착각, 하느님과 깨져 버린 관계를 알아채지 못하게 하는
착각 속에 우리를 가둡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마지막 날까지 미루셨습니다.
모두 회개하여 다시 하느님께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느껴집니다.
주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해소에서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 우리의 알몸을 그분께 보여 드릴 수 있는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아멘.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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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예레미야 7,1-11 마태오 13,24-30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지금은 많이 달라지기는 했어도 그래도 우리의 주식은 쌀이지요. 어머니께서 묵은 쌀에서
벌레가 생긴다고 걱정하시는 말씀을 듣곤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부엌은 깨끗하고 유리로 된
창문이 있어서 들어 올 틈도 없는데 쌀을 넣어두는 단지에 쌀벌레가 기승을 부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옛날 어머니께서 하셨던 말씀을 자신도 하게 됩니다.
‘아니, 쌀벌레는 어디서 생기는 거야?’
마태오가 전하는 주님의 비유 말씀 중에 ‘가라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가라지'라고 번역하였는데, 한자로는 '패자(稗子)'라고 번역하는데 돌피로 이해합니다.
영어로는 'Weed's라 번역하는데 뜻은 잡초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팔레스틴에서는 보통 보리나 밀에서 섞여 사는 '잡초'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잡초를 다른 말로 '독보리(毒麥)'라고도 하는데 그 자체에는 독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축 중에서 이것을 먹으면 중독을 일으킬 수 있어 꺼려하는 풀이기도 합니다.
가라지의 특징은 이삭이 패기 전까지는 생김새가 밀이나 보리와 분간이 어려운데 한 순간에
성장이 빨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라지가 추수전에는 한 뼘 정도 비쭉 더 나와서
눈에 띄게 됩니다. 그래서 일꾼들이 밀과 보리에 섞이는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미리 뽑아 단을 만들어 태워버리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오늘 복음의 비유 말씀에서 밀과 가리지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심을 때는 좋은 씨를 심었는데 추수를 앞두고 보니 가라지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가라지는 결실이 되어도 열매로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붙어 있으므로
일일이 뽑아서 한데 모아 불에 태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이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선인과 악인의 차이를 적절하게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씨를 뿌리는 사람은 '사람의 아들'이며 '밭'은 세상이고, '좋은 씨'는
천국에 속한 이들이며 가라지는 악을 저지르는 자들을 일컫는 것입니다.
몰래 가라지를 심는 원수는 마귀를 뜻하며 추수 때에는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추수하는 자는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의 말씀으로
농부가 좋은 땅에 뿌린 씨와 원수가 가라지를 덧 붙여 뿌린 비유 대해 설명하십니다.
그런데 가라지가 자라자 종들이 주인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주인은 원수가 그랬다고 대답하자 종들이 다시 가라지를 거두어드리는지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주인이 대답합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 들이라고
하겠다”(마태오 13,29-30)
주님께서 드시는 이 비유에서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납니다. 악인에 대해서 종말까지
기다리시겠다는 뜻도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엄청한 일인 억울한 일을 당하면
'하늘도 무심하시지.'라는 탄식의말을 합니다. 얼핏 보기에는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 잘 되는 것
같아도 인간적으로도 불행해지고 또 하느님의 심판으로도 징벌을 몰아서 받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나의 잘못에 대해서도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잊지 말고 회개하고 또
사회정의에 대해서도 기다릴 줄 아는 너그러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세상은 단번의 심판,
속전속결의 결과를 좋아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지루하게 느낄 정도로 악인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세상의 판단을 넘어서
추수할 때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사회도 가라지가 있다는 생각하며 여유롭게 살 수 있어야 하겠지요.
세상의 구조가 어떤 공동체이든간에 약 10%가 말썽을 일으키고 못되게 군다네요.
그러니 원수가 심은 가라지의 의미를 우리의 삶에서 새기며 인내와 너그러움,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잘못에 대한 성찰과 회개가 항상 뒤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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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예레미야 7,1-11 마태오 13,24-30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마태오복음에서 세 번째 설교집인 13장은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핵심 메시지인
'하늘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일곱 가지의 비유를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중 두 번째인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마태오 13,24)
당신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밭으로 삼아 좋은 씨를 뿌리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분명 좋은 씨는
좋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신의 밭'에 침입자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마태오 13,25).
그렇습니다. 가라지가 뿌려진 것은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벌어진 일입니다.
곧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나아가 자신의 밭에 뿌려진 '좋은 씨'를 방치한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자신 안에 심어진
말씀의 씨앗에 응답하지 않고 잠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가라지는 뿌려집니다.
그러기에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먼저 '좋은 씨'의 존귀함을 깨닫고 깨어 지켜야 할 일입니다.
그 리고 가라지와 밀을 분별할 줄을 알아야 하고, 가라지가 기승을 부리는 것을 막고
'좋은 씨'가 잘 자라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마태오 13,28)라고 말하는 종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오 13,29-30)
사실 가라지는 밀의 뿌리와 서로 얽혀 있기에 자칫 가라지를 뽑으려다 밀까지 뽑히게 되기
때문에 수확 때에 뿌리를 함께 뽑아서 분리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두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밀’인 사람들에게 수확 때까지 견뎌내는 성실함을
당부함이라 말하며, 한편 히에로니무스는 ‘가라지’인 사람들에게 회개의 가능성을 열어 둠을
시사한다고 말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성 베네딕투스는 그의 [수도규칙]에서 말합니다.
“악습은 미워하되 형제들은 사랑할 것이다. 책벌함에 있어서는 현명하게 할 것이며 너무 지나치게
하지 말 것이니, 녹을 너무 지우려다 그릇을 깨뜨리는 격이 되지 않기 위함이다.”(규칙서 64,12)
사실 공동체 안에도, 가정 안에도, 우리 자신 안에도,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고 있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참으로 망막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때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마태오 6,14)라는 주님께서 가르쳐준 기도를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혹이나 악을 제거하거나 없애주거나 해결해달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그것으로부터 구해달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 속에서 당신이 주님이심을 깨닫고, 주님이신 당신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동행하시는 주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 속에서 주님 사랑하기를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오늘의 샘 기도>
주님!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 되게 하소서!
제 안에 하늘이 열리고 당신의 나라가 자라나 온갖 나쁜 것들을 도려내고
당신 형상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이 세상과 형제들과 공동체를 밭으로 주셨으니 제 손이 당신 사랑을 뿌리게 하소서.
오늘, 우리 안에 당신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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