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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갈라티아 1,13-24
루카 10,38-42
주님의 크신 은총으로 인해, 이 큰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저는 또 다시 앞으로 나아갑니다!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유다교 열성 신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신 바오로 사도께서 겪으셨던 고초가 얼마나 컸었던가 하는 것은, 그가 집필한 여러 서한들을 통해서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유다교 입장에서 보면 바오로 사도는 배교자요 배신자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저 그런 신자 중 한 사람이었다면 그리 큰 문제가 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바오로는 앞길이 창창하던 유다교 청년 지도자였습니다.
원로들과 지도층 인사들은 율법에 대한 사랑과 유다교에 대한 열정으로 똘똘 뭉쳐진 인재 바오로를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바오로가 하루아침에 그리스도교로 돌아선 것은 유다교 입장에서 큰 충격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오로가 유다교에 끼친 손실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개종 이후 깊은 광야 수도원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발길 닿는 곳마다 다니면서 끊임없이 외쳤습니다.
수많은 유다인들이 줄줄이 바오로 사도를 따라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으니, 유다 지도층 입장에서 바오로 사도는 눈엣 가시 같은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바오로 사도가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 사이에서 큰 환영을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찾아내고 체포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다니던 바오로였습니다.
그런 바오로 사도가 하루 아침에 개종을 하고, 그리스도교 공동체 근처를 기웃거리니, 신자들 입장에서는 불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러다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는 의구심도 떨칠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바오로 사도는 배신자라는 낙인과 의심으로 가득찬 눈초리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방황했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의 강렬한 주님 체험 이후 바오로 사도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알아주던 말던, 누가 험담을 하던 뒷담화를 하던 상관하지 않고 묵묵하고 충실하게 복음 선포를 향한 여행길을 계속 걸어갔습니다.
놀라운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기회 닿을 때 마다 회개 이전의 부끄러웠던 모습을 공개석상에서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베드로 사도와 함께 초세기 교회를 이끈 쌍두마차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 중의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그 정도 되었으면, 충분히 회개의 과정도 거쳤겠다,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에 대해서 굳이 스스로 들춰내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겸손하게도 바오로 사도는 틈만 나면 지난 시절 자신이 저절렀던 과오와 어두웠던 시절을 사람들 앞에서 고백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한때 유다교에 있을 적에 나의 행실이 어떠하였는지 여러분은 이미 들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며 아예 없애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갈라티아서 1장 13절)
부끄러운 지난날을 고백할 때 마다 바오로 사도는
늘 이런 식으로 말씀을 마무리 짓습니다.
“이토록 부당하고 부족한 저를 당신의 사도로 선택해주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사도로 불릴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크신 은총으로 인해, 이 큰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저는 또 다시 앞으로 나아갑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안식년
복음: 루카 10,38-42
필요한 한 가지는 자기 관리 뿐
오늘 복음은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입니다.
마르타는 보통 예수님을 위해 봉사와 활동을 위주로 하는 이들을 대표하고, 마리아는 기도와 관상을 위주로 사는 사람을 대표합니다.
마르타는 활동을 통한 성과로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사람이고, 마리아는 그저 예수님 곁에서 더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보고 불평하는 마르타에게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마르타를 따르면 예수님께 식모가 되고, 마리아를 따르면 신부가 됩니다.
예수님은 식모와 같은 여인을 원하시지 않고 순결한 신부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집에서 밥도 청소도 하지 않는 아내를 원하시는 것이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랑을 사랑하는 순결한 신부가 신랑이 원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순결한 신부가 식모보다 더 많은 일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식모는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느끼면 지쳐 쓰러지지만, 신부는 신랑을 위해 목숨을 다할 때까지 충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더 사랑하는 것이지, 더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식모가 될 것인지 신부가 될 것인지 우리는 결정해야 합니다.
순결한 신부가 되려고 하다 보면 끝까지 좋은 결과를 내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좋은 결과를 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일에 집중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첫째로 자기관리에 집중합니다.
술, 담배를 하지 않고 운동이 유일한 취미라는 유재석씨도 자기관리에 충실한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그가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끊어가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는 일을 통해 자기를 증명하려 하지 않고 자기관리가 잘 된 모습이 일을 통해 입증되도록 합니다.
정준하 씨는 말합니다.
“재석아, 너 너무 재미없게 산다.
몸이 재미가 없잖아.”
정형돈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 그렇게 재미없게 사는 거 주위 사람들이 스트레스야.”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점점 재석이 형이 무섭다고 느껴진다. 그러니까 너무 좋은데, 슈퍼맨이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운동도 진짜 열심히 하고 담배도 끊고 점점 이형, 범접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가는 느낌이랄까!”
무한도전이 끝나고 다른 멤버들은 활동이 약해져도 유재석씨는 언제나 건재합니다.
유재석씨가 집중하는 것이 일이 아닌 자기관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의 결과는 자기관리에서 나옵니다.
이것을 소홀히 하면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유재석씨도 놀란 자기관리 장인이 있는데 바로 박진영씨입니다.
박진영씨의 자기관리 방법을 들으며 유재석씨도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박진영씨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배고파!”, “죽겠다!”입니다.
조금만 먹으면 바로 살이 찌는 박진영씨는 일주일의 반 이상 하루 20시간 공복을 유지합니다.
1일 1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엔 운동하며 힘들어 죽겠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자기관리를 하는 것입니다.
성공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런 사람이 배 두드리며 먹고 놀아도 되는데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자기관리를 하는 것일까요?
그는 매년 한 곡씩 노래를 발표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올해도 ‘When We Disco’라는 곡으로 복귀를 했습니다.
그의 음원 수입이 국내 1위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이렇듯 꾸준한 성과를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타는 일로써 자신을 증명하려는 사람의 전형이고, 마리아는 먼저 자기관리부터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봉사와 기도 중 하나만 끊으라고 하면 어떤 것을 끊으시겠습니까?
활동을 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활동을 끝까지 이어갈 수 있습니다.
자기관리를 하는 사람은 그것을 이용하여 분명 무언가 이루어내고 싶은 열망으로 들끓습니다.
그래서 일에 지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 중심인 사람은 그 일이 잘되지 않으면 실망하고 지치고 그래서 쉽게 포기하게 됩니다.
일보다 자기관리가 우선입니다.
박찬호 선수도 첫 메이저리그 성공신화를 이루어내고 후배들에게 미국에서 성공하기 위한 적합한 조언을 달라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치지 않는 것입니다.”
잘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관리를 우선시하라는 것입니다.
꼭 필요한 것은 하나뿐입니다.
나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해지면 주위 사람들도 거룩해집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려다가는 자신도 거룩함을 잃습니다.
제가 살을 조금 빼니까 저절로 주위 사람들도 다이어트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일로 나를 증명하려 하지 말고, 내가 일을 통해 증명되도록 합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관리가 필요한데,
신앙인 처지에서는 그것이 기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기도로 여기고
기도시간을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마련할 줄 알 때 다른 하는 모든 일도 잘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성사담당사제
복음: 루카 10,38-42: 마르타와 마리아
오늘 복음은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가 예수님을 맞이하는 장면이다. 두 자매는 모두 주님을 사랑했다. 마르타는 봉사와 환대의 모습으로, 마리아는 경청과 관상의 모습으로 주님을 맞고 있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말한다. “마르타는 봉사의 본보기를, 마리아는 관상의 본보기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러나 관상은 봉사의 뿌리이며, 봉사는 관상을 통해 힘을 얻는다.”(De Officiis, II,11,88 요약)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태도를 칭찬하시며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42절)라고 하신 것은, 봉사의 가치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일이 모든 봉사의 근원임을 일깨워 주시는 것이다. 말씀을 듣지 않고는 참된 봉사도 사랑도 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마르타는 성경 곳곳에서 주님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보여 준다. 오빠 라자로가 죽었을 때도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21)라고 고백했던 이는 마르타였다. 마르타는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40절)라고 한다. 그녀의 사랑과 믿음은 진실했지만, 봉사의 분주함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잃고 짜증을 낸 것이다. 주님은 그 순간, 마르타를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의 사랑으로 초대하신 것이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교회 안에서 봉사하고 활동하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모든 활동이 말씀의 경청과 기도의 뿌리 위에 놓이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지치고 불평하게 된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이며, 신앙생활의 숨결이다.”(2565항 참조) 마리아가 보여 준 관상의 태도는 모든 신앙인의 기본자세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나는 말씀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가? 혹시 봉사와 활동에 몰두하느라 말씀과 기도의 자리에서 멀어진 것은 아닌가?
우리는 마르타처럼 봉사하면서도, 마리아처럼 주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는 균형 잡힌 제자가 되어야 한다. 말씀에서 생명과 힘을 얻을 때, 우리의 봉사는 불평이 아니라, 참된 기쁨과 열매로 이어질 것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42절)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초대이다. 오늘 하루, 우리도 잠시 분주함을 멈추고 주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여야 한다. 그때 우리의 봉사도 더욱더 복음적이고 열매 맺는 봉사가 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삶은 짧지 않다. 우리가 짧게 만들 뿐이다.”
로마 제국의 철학자이며 집성관이었던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의 말입니다. 이 말은 삶을 제대로 쓸 줄만 안다면 ‘충분히 길다’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문장을 보면서 나 자신에게 계속 질문하게 됩니다.
“삶을 제대로 쓰고 있는가? 아니면 그냥 흘리고 있는가?”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는 삶을 제대로 살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남의 뒷담화를 비롯한 판단과 단죄 역시 삶을 제대로 사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 정작 중요한 것을 행하지 못하는 삶 역시 제대로 사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남을 위해 사는 것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의 실천을 위해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향해 우리는 삶을 제대로 산다고 칭찬합니다.
내년에 있을 세계 청년 대회의 홈스테이 신청을 받으며 놀란 사실이 있습니다. 부모는 홈스테이를 신청하려 하는데, 중고등학생 자녀가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공간에 낯선 사람이 들어오는 것이 싫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신청을 주저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하지 않을까요? 성인이 되면서 계속 낯선 사람을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사랑의 실천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의 집을 방문하십니다. 마르타에게는 동생 마리아가 있었는데,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랍비의 발치에 앉는 것은 공식적인 제자만 앉을 수 있는 것인데, 여성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것은 금기시하거나 기피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발치에 앉았다는 것은 여성 역시 하느님의 제자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합니다.
시중드는 일 역시 초대 교회의 핵심 사목 행위인 봉사와 섬김을 의미합니다. 분명 좋은 일입니다. 문제는 분주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음이 사방으로 갈라지고 분산됨을 의미합니다. 마르타는 섬김 자체보다, 그 섬김 때문에 중심인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불평과 비교의 늪에 빠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1)
마르타의 노동을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그녀를 지배하는 염려를 짚어내십니다. 봉사가 주님과의 일치에서 나오지 않으면 이웃을 향한 판단과 원망으로 변질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도 주님과의 일치에서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참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하느님을 향하여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엄청난 선물을 받았습니다(성 아우구스티노)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10.06.화.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2)
우리는 하루에도
너무 많은 것을 붙잡고 있습니다.
많은 일 때문에
삶의 중심이 자주 흔들립니다.
마리아는 바로 그 중심을
제대로 선택했습니다.
삶을 통일시키는 중심이며,
마음의 중심을 되찾는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결국 한 가지,
주님 안에 온전히 머무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면서도
정작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기에
하느님께 우리를 맡기는 것입니다.
많은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의 군더더기를 덜어낼수록
가장 필요한 한 분,
하느님께로 돌아갑니다.
하느님을 중심에 모시면
일도 제자리를 찾고,
관계도 제자리를 찾으며,
걱정과 욕망도 제자리를 찾습니다.
분산된 삶에서
본질적인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선택하기 위해
나머지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분과 친교를 이루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께 마음을 모으는
사랑과 평화의 날 되십시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한 분이신 주님을 먼저
선택하는 소중한 오늘이
우리의 가장 좋은 몫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 전주교구
※김건태 루카 신부님, 성사담당사제
일과 기도
복음 저자 루카만이 전하는 오늘 이야기에서, 우리는 행동이냐 아니면 들음이냐, 또는 일이냐 아니면 기도이냐 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이 두 주제를 아우르는 현실을 목격합니다.
예수님은 마르타와 마리아를 대립시키려는 의도를 보이지 않으십니다. 무엇이 우선인지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하시나, 그렇다고 마르타의 몸짓을 단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마르타와 마리아, 둘 다 예수님에게 소중한 존재들이지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바가 동일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마르타는 활동적이어서,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데에서도 무엇이 필요하고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손님 대접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매여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과도한 염려는 주님을 모시기에 적합한 자세가 아닙니다. 주님 모심에 우선적이어야 하는 것은, 푸짐한 성찬을 나누는 일보다는, 먼저 주님을 중심으로 함께 모이는 일, 서로 만나는 일,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습니다. 끝없이 지속되는 들음의 시간! 어떤 내용이길래, 언니 마르타를 도와야 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분 말씀 듣기에 푹 빠져 있는 것일까? 복음 말씀은 이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남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점과,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말씀 듣기에 지칠 줄 모른다는 점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대화 상대로 등장하는 마르타는, 들음 또는 기도를 아무것도 하지 않는 행위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행위로 취급하는 사람들처럼, 조바심을 감추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분명 당신을 식사에 초대하고 식사 준비를 위해서 바삐 움직이는 마르타를 보시고 존경과 함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에게 부족함이 있다면, 조바심의 도가 지나치다는 점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있구나.” 잠시라도 함께 앉아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주님께 대한 사랑이 구체적인 행동을 통하여 드러날 수 있는 것처럼,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현존을 가슴 깊이 체험하는 행위 또한 사랑의 위대한 표현임을 인식하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행동과 들음, 일과 기도, 그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문맥으로 본다면, 예수님은 일에 치우치는 모습은 문제가 될 수 있어도, 들음과 기도에는 아무리 치우치더라도 문제가 될 것이 없음을 은연중에 강조하시는 듯합니다. 우선은 당신의 뒤를 이어 지상교회를 책임져야 할 사도들이 그대로 따라야 할 대목이며, 다음으로 일보다는 기도에 늘 부족함이 많은 우리가 명심해야 할 지점입니다.
오늘 하루도, 들음과 기도 안에서 주님을 뵙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살핀 다음, 구체적 행동을 통하여 그 뜻을 펼쳐나가는, 의미 있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카톡 신부님 - 굿뉴스
※김경진 베드로 신부님 - 한마음청소년수련원
'관상'은 활동의 뿌리이고, '활동'은 관상의 열매입니다.
'활동'과 '관상'은 서로 반대되는 두 삶이라기보다
균형을 이루고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영역입니다.
'활동'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협렵자로서
사람과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관상'은 하느님 발치에 머무르면서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현존을 깊이 체험하는 기도의 삶입니다. 복음묵상과 의식성찰과 영적 식별도 이에 해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좋은 몫”을 선택했다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활동의 뿌리가 관상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지 활동을 경시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관상 없는 활동은 쉽게 지치고 다칩니다.
활동 없는 관상은 현실을 회피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성숙한 삶은 기도의 힘으로 봉사하는 활동가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관상으로 내면을 채우고 채워진 나를 세상에 도움이 되도록 봉사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 서울대교구
복음말씀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1,13-24
형제 여러분, 13 내가 한때 유다교에 있을 적에
나의 행실이 어떠하였는지 여러분은 이미 들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며 아예 없애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14 유다교를 신봉하는 일에서도
동족인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보다 앞서 있었고,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심이었습니다.
15 그러나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16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17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18 그러고 나서 삼 년 뒤에 나는 케파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름 동안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
19 그러나 다른 사도는 아무도 만나 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만 보았을 뿐입니다.
20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이 글은 하느님 앞에서 말합니다만
거짓이 아닙니다.
21 그 뒤에 나는 시리아와 킬리키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22 그래서 나는 유다에 있는 그리스도의 여러 교회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23 그들은 “한때 우리를 박해하던 그 사람이
지금은 자기가 한때 그렇게 없애 버리려고 하던 믿음을 전한다.”는
소문만 듣고 있었습니다.
24 그리고 그들은 나 때문에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38-42
그때에 38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