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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종말론 : 제 4 장 복음의 역사 - 일곱 교회 : 7] 라오디게아 교회.
7] 라오디게아 교회.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오디게아라는 명칭은 후기 헬라 시대(Iate Hellenic)에만 8개가 있었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곳은 소아시아 서부 브루기아 지방, 데니즐리(Denizli)의 서쪽 가까이에 있는 에스기 힛사르(Eski Hissar)라 불리는 고지(古址)라고 한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 하나다(계 1: 11. 3: 14-22).
에베소 동쪽 150㎞ 지점에 있는 살보고스 산(Mt. Salbacus, 2,300m) 북쪽 기슭에 있는 충적층의 평탄한 구릉에 있다. 메안데르 강(R. Maeander)의 상류인 류고스강(R. Lycus)의 유역을 내려다보고 있다.
디오스폴리스(Diospolis) 또는 로아스(Rhoas)로 안티오코스Ⅱ세(Antiochus Ⅱ Theos, BC 261-246)에 의해 재건되었다. 처 라오디게(Laodice)의 이름을 붙여 라오디게아라 했다.
안티오코스 Ⅲ세(BC 242-189)는 유대인(석방된 성인 7,500명)을 여기에 이민시켰다. 빌라델비아와 같이 헬레니즘 문화의 보급을 지향했다. 다른 도시처럼 신전· 극장· 열주가로(列柱街路)로 장식되었다. 한 때 펠가모 왕국에 속했으나, BC 133년 로마가 지배하였다.
에게해와 유브라데 강을 잇는 통상로를 끼고 있는 지리적 조건으로 상업도시로서 금융의 중심지다. AD 60년의 대지진으로 성읍이 황폐했으나 시민은 국고 보조를 거절하고 자력으로 부흥시켰다(계 3: 17).
직물 제조 판매로 유명하다(계 3: 18). 성읍 서쪽 19㎞ 지점 앗둣다(Attudda)에는 브루기아의 신 멘 가루(Men Karou)의 신전과 약학교가 있다. 거기서 갓브기아의 가루라고 불린 안질 약을 정제하여 팔았다(계 3: 18).
이 교회는 바울이 설립한 것이 아니고 그의 동역자들, 특히 에바브라에 의해 목양 사업이 행해졌을 것이다(골 4: 13). 바울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편지를 골로새 교회도 읽게 하고, 골로새 교회로 보낸 편지도 받아보라고 권고하였다(골 4: 16).
(1) 이름과 시대상
라오디게아의 '라오스'라는 말은 '백성, 민중'이라는 말이며, '딕토스'는 '기쁘게 하다, 비위를 맞추다'라는 뜻이다. 또 어떤 곳에는 '민주주의'라고 비유하였다. 다시 말하면 ‘민중의 비위를 맞춘다.’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 정확하게 맞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이 장엄한 섭리, 말씀의 권위, 역사성에 숨을 죽이지 않을 수 없다. 이 엄청난 진리 앞에 우리의 고집이나 자아는 먼지같이 보잘것없다. 안티오쿠스의 부인의 이름이 정해질 때부터 하나님은 섭리하셨다.
대환난 직전에 민주주의 시대가 올 것을 예언하고 있다. 하나님은 성경, 성경 밖의 세계, 온 우주, 개인의 삶까지 전부 볼 수 있다. 민주주의의 근본정신은 기독교에서 나왔다. 그러나 지금은 민주주의가 타락했다.
타락하고 세속화된 민주주의가 교회 안에 들어오고 있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타락한 민주주의는 절대로 민주주의가 아니다. 오늘 이 시대를 세 가지로 본다. '민주주의의 확산, 자유 무역의 확대, 인권의 신장'이다.
그러나 교회는 끝까지 하나님의 신권 통치다. 하나님은 그의 종을 보내어 철저히 신권통치를 하신다. 물론 교회 안에서도 민주적인 요소는 필요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교회가 민주주의로 나가면 안 된다.
1992년 2월에 가톨릭 교황청에서 민주주의를 나타내는 구테타적 발상이 나타났다. 그 때까지는 만장일치제였다. 그러나 그 때부터 투표로 뽑게 되었다. 교황청에도 민주주의가 들어간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간 머무는 동안 이곳에 복음이 전달되었는데, 사도행전 19장 10절이 배경이다.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최초의 감독은 '아킵보'였다. A. D 364년에 32명이 모이는 유명한 종교회의가 있었다. 이 라오디게아 종교회의에서 계시록을 정경에서 빼 버렸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마지막 때는 계시록이 무시당할 것에 대해 역사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① 의미 :민중의 비위를 맞추다. 민주주의.
② 상징: 종말 교회를 예표 한다.
(2) 화폐
라오디게아 지방의 화폐 디자인은 ‘닫힌 문짝’이였다. 이 사실은 부요병에 빠져 선교의 문이 닫히는 상태를 예표 한다.
그러나 율법의 문이 닫힌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의 문이 열렸듯이 예언적으로는 선교의 문이 닫힌 뒤에 ‘작은 책’의 비밀이 열려질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올바른 종말론이 활발하게 강단에서 외쳐져야 한다고 본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① 3가지 역할-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 아멘
* 고후 1: 20 -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아멘이시요'(호 아멘)은 문자적으로 '아멘인 자'를 의미하며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칭호로 나타난다. 이것은 70인 역에서 '톤 데온 톤 알레디논'(진실한 하나님)으로 나타나며 '진리의 하나님'(the God of the truth, RSV), '이름이 아멘이신 하나님'(the God whose name is Amen, NEB)으로 번역되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진리이시며, 신실하심을 시사한다.
본문에서는 이러한 칭호가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실하지 못함에 대한 그리스도의 신실성이 부각되고 있다. (1: 5-6. Mounce).
'아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말씀이 전혀 의심할 것이 없는 진실한 분이심을 증명하는 표현이다. 예수님은 아멘이시오 절대자이시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왜 이렇게 나타났을까? 이 시대는 전부 예수님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철저히 '아멘'해야 하며 말씀이 아닌 것에는 철저히 '아니오'라고 해야 한다.
사탄 마귀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씀을 먹지 못하게 한다. 말씀을 혼잡 시킨다. 진리에 다른 것들을 섞어 버린다. 혼합주의와 종교 다원주의가 그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아멘'해야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하셨으며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아멘'하셨다.
ⓑ 충성
죽기까지 충성하셨던 예수 그리스도. '충성되고 참된 증인'은 '아멘이시요'와 동일한 사상을 내포하는 칭호로(Ford, Beasley-Murray, Morris)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하나님이 신실하심을 증거 하시기 위해 온전한 순종과 충성으로 구약의 모든 예언을 성취하셨음을 시사한다( Johnson).
* 계 1: 5, 9 –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 계 2: 13 -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을 뿐 아니라 죽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는 충성되신 분이시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태가 세상을 향해서는 말할 수 없이 부요했지만, 하나님을 향해서는 기아선상을 헤매었다. 하나님을 향한 충성이 없었다.
ⓒ 참된 증인
예수님은 하나님의 참된 증인이시다. 우리도 예수님의 참된 증인이 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을 가리켜 증인이라고 합니까?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아닙니까? 우리는 십자가를 목격한 십자가의 증인들로 하나님의 증인들이다. 우리는 예수를 목격한 예수의 증인들이며 천국을 목격한 천국의 증인들이다.
* 행 1: 8, 22 –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 롬 8: 16 -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 고전 15: 3-4 –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 신 19: 15 -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② 창조의 근본이신 이.
이 말씀은 요한복음 1장 3절, 히브리서 1장 2절에 나오는 말로, 곧 예수님이 창조주시라는 말이다. 이 말씀이 예수님이요 이 말씀이 하나님이라고 했다.
창세기 1장 1절, 천지를 창조하실 때 삼위가 다 계셨다. 지금은 예수님을 창조주로 보지 아니하므로 창조의 근본이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1996년 10월 26일에 교황이 진화론이 맞는다고 인정했다. 그런데 미국 켄사스주에서는 진화론은 잘못된 것이라며 교과서에서 빼 버리도록 결의했다.
1999년 7월 31일, 베이징, 자바인, 네안데르타인, 유인원이라고 했던 것들이 DNA검사를 통해서 전부 가짜라고 밝혀졌다. 저는 이 소식을 듣고 얼마나 통쾌했는지 모른다. 우리 예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믿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습니까? 오늘 이 시대에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기 때문에 아멘이시오, 충성이시오, 창조의 근본이시라고 소개한다.
ⓐ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헤 아르케 테스 크티세오스 투 데우)에서 '아르케'는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의 최고(最高)의 근원을 나타낸다.
이 칭호는 그리스도의 또 다른 칭호 즉 '알파와 오메가'에서 '알파'에 해당되는 것으로(Beasley - Murray) 그리스도께서 피조물 가운데 처음이란 의미가 아니라 창조자로써 창조의 근본이심을 나타낸다. (Moffatt, Charles, Lightfoot).
* 잠 8: 22-31 – 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23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24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25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26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27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28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29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31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 요 1: 1-3 –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고전 1: 30 -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 골 1: 15-16 –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이 칭호는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을 시사한다(Moffatt).
* 고전 8: 6 -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 만유의 후사
* 히 1: 2-3 –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4) 칭찬 - 한마디의 칭찬도 없다.
(5) 책망
① 미지근한 신앙-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이 시대의 신앙은 미지근하다. 복음의 뜨거운 열정이 없이 혼합되어 있다. 라오디게아가 종말시대라면 최대의 특징은 혼합주의다. 계 17장은 '음녀가 많은 물 위에 앉아 있다'고 했다. 혼합주의에 군립하고 있다는 근거다.
라오디게아는 '리쿠스'라는 계곡에서 들어오는 물과, '히엘라볼리스'에서 나오는 온천물이 서로 만나는 지역이다. 민물과 온천수 두 물이 만나는 곳이다. 따라서 미지근한 상태가 되어 이 물은 도저히 마실 수 없는 상태다. 이것이 곧 혼합주의다.
혼합주의가 나타날 것을 자연환경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오늘, 이 시대는 무엇이든지 섞어져 버린다. 민족이나 문화, 생활의 풍습까지도 섞어진다. 신앙도 세속화 되어 종교도 섞어진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역겨워서 토해버리고 싶으신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이 시대를 정확하게 보여주는지 모른다.
성도 여러분! 믿으려면 확실히 믿고, 안 믿으려면 말아버려야 한다. 그 색깔을 분명히 해야지 믿는 둥 마는 둥 하면 안 된다.
여러분 미지근한 신앙이라고 할 때, 단순히 한 나라만 생각하지 말라. 우리나라도 부정적인 면이 있지만 그래도 세계에서 제일 뜨겁고 열정적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추세는 미지근하다. 어쩌면 그렇게도 정확하고 실감나는지 모른다. 히엘라볼리스 온천물과 리쿠스 강물은 아름답지만 두 물이 합쳐질 때는 구역질나는 물이 된다.
* 수 24: 15-20 –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16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17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올라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과 우리가 지나온 모든 백성들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18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들과 이 땅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니라. 19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20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하니
* 습 1: 5-6 – 5 또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과 6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
* 마 6: 24 -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본문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열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아무런 영향력이 없음을 책망하는 내용이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차지도 덥지도' 즉 그리스도를 대적하며 세상과 타협하지도, 혹은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소유하지도 않은 상태로 미지근하였다. (16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에 대해 무관심하고, 자만하는 자들이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차든지 덥든지'하라는 요구는 양자 중 반드시 하나를 선택하라는 의미라기보다 '차든지'와 '덥든지'의 중간 상태를 택하는 그들의 '미지근한 상태'에 대한 신랄한 책망이다(Johnson).
무엇이 우리의 신앙을 뜨겁게 하는가?
1. 성령이 뜨겁게 한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하심).
2. 말씀이 뜨겁게 한다.
3. 사랑이 뜨겁게 한다.
4. 은혜가 뜨겁게 한다.
② 차든지 덥든지 하라.
ⓐ 차든지 -성령의 생수를 받으라는 말씀이다.
* 요 4: 10-14 –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요 7: 37-39 –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 슥 13: 1 -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 슥 14: 8 -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 계 22: 1 -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 창 1: 6-7 – 6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 덥든지 - 성령의 불을 받으라는 말씀이다.
* 행 2: 1-4 –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의 생수나 성령의 불을 받아 열심 있는 신앙으로 게으른 것을 물리쳐야 하겠다. 성령의 역사로 열심이 생기게 된다. 엘리야나 바울 같은 열심이다.사 9: 7에 여호와도 열심히 역사하신다.
* 사 9: 7 -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6) 책망의 종류
여섯 가지 죄 -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① 부자라 부요 하다.
'부요하여'(페플루테카)는 현재 완료형으로 이제 완전히 부요한 상태에 도달했다는 의미이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스스로가 부요하여 더 이상 바랄 것이나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그들은 상당히 부요하였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매우 빈곤하고 곤고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서머나 교회와 대조를 이룬다. 서머나 교회는 외적으로 가난하였으나 영적으로 부요하였던 반면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 반대였다.
라오디게아는 돈이 많았다. 얼마나 돈이 많은지 시세로가 이곳에서 신용장으로 현금을 바꿔 썼다고 할 정도다. 이곳은 은행이 발달하여 돈이 많은 곳이었다. 주후 60년에 대 지진이 났는데, 돈이 많아서 모든 피해를 자력으로 복구 했다.
오늘의 시대도 부요하다. 교회들도 물질이 풍요로운 시대다. 믿음도 신자들이 다 부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죄악이다. 우리는 이런 때에 내가 부족하고, 내가 모자라고, 믿음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는가하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
* 잠 13: 7 - 스스로 부한체하여도 아무 것도 없는 자가 있고 스스로 가난 한 체하여도 재물이 많은 자가 있느니라.
* 신 8: 12-14 – 12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13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 호 12: 8 -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내가 수고한 모든 것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내게서 찾아 낼 자 없으리라. 하거니와
* 눅 12: 19-20 –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② 곤고한 것
'곤고한 것'은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약탈되거나 파괴당했을 경우를 묘사하는 것으로 그 어떤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없는 상태를 나타낸다.
* 시 137: 8 -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 롬 7: 24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러한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영적 상태는 물질적 부와 정반대로 가련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Lenski, Moffatt, Morris). '곤고한 것'은 정말로 곤란한 것을 말한다.
여러분들이 영적으로 갈등이 없다는 것은 영이 죽었다는 것이다. 시체들은 때려도 모른다. 영적으로 괴로운 것을 깨닫지 못한다.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른다. 철학, 무신론적 철학 사상이 들어가서 독일 교회가 다 죽어버렸다. 다 죽어서 화인 맞아버리니까 모른다.
* 마 9: 12 -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 롬 2: 17-23 – 17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 딤전 4: 2 -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③ 가련한 것
'가련하다'는 것은 곧 불쌍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 오늘 이 시대의 믿음이 불쌍하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교회와 성도들이 주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사회의 부요가 교회로 들어와서 신앙을 식게 하고, 부요에 젖어 식은 신앙을 부여잡고 괴로움을 겪는 모습은 가련할 뿐이다.
* 슥 11: 5 - 사들인 자들은 그들을 잡아도 죄가 없다. 하고 판 자들은 말하기를 내가 부요하게 되었은즉 여호와께 찬송하리라. 하고 그들의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는 도다.
* 눅 18: 11-12 –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 롬 11: 20 –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 고전 4: 8-10 – 8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 고전 15: 19 -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④ 가난한 것-영적 가난 함.
'가난'은 육적 가난이 아니라 영적 가난이다. 이 교회는 미지근한 신앙으로 인해 영적인 요소를 다 잃어 버렸다. 즉, 주님 말씀처럼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아무 쓸모가 없는 상태임을 알려 주는 것이다.
오늘 이 시대도 믿음이 가난하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교회들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가난한 것이 섬기는 교회와 자신에게는 없는지 회개하고 바라보아야 한다.
홍수 속에 식수가 갈급하듯이, 교회의 홍수 속에 진리를 외치는 말씀의 선포는 사라져 가고 있는 현실을 보자.
* 잠 30: 9 -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 눅 1: 53 -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 고후 8: 9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⑤ 눈 먼 것 -영적 소경.
'눈먼 것'은 라오디게아에 특수한 안약과 의학교가 있었던 것과는 달리 영적 시각 장애자로 분별력을 잃은 것을 의미한다. 라오디게아는 안질의 안약을 발명함은 물론이고 의학교를 세워 의술이 발달된 이곳에서 눈먼 것을 모른다는 책망은 역설이다. 이것은 그들의 영적 상태가 감겼다는 것이다.
시대를 보지 못한다는 것으로 징조와 시대, 진리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 시대의 징조를 보는 눈이 필요하다. 성경을 통해 역사를 보는 눈이 필요하다.
* 사 42: 19 - 맹인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내가 보내는 내 사자 같이 못 듣는 자겠느냐? 누가 내게 충성된 자 같이 맹인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같이 맹인이겠느냐?
* 요 9: 40-41 –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 벧후 1: 9 -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렁텅이에 빠진다.
* 사 29: 9-12 – 9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맹인이 되고 맹인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10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11 그러므로 모든 계시가 너희에게는 봉한 책의 말처럼 되었으니 그것을 글 아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그것이 봉해졌으니 나는 못 읽겠노라 할 것이요, 12 또 그 책을 글 모르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글을 모른다 할 것이니라.
* 사 56: 9-12 – 9 들의 모든 짐승들아. 숲 가운데의 모든 짐승들아. 와서 먹으라. 10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11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12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마시자. 내일도 오늘 같이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⑥ 벌거벗은 것 -믿음의 수치.
라오디게아는 직조업이 발달했다. 그런데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영적으로 볼 때 너희가 벌거벗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벌거벗으면 부끄러운 것이 다 드러난다. 하나님 앞에 믿음의 행위가 다 벌거벗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라오디게아 시대를 말하는 것이지만, 예언적으로 오늘 이 시대를 말한다. 여러분은 이런 말씀을 듣고 볼 수 있는 것에 감사하시기 바란다. 라오디게아에는 칭찬이 하나도 없다.
중세 암흑시대가 타락했다고 하지만, 영적으로 볼 때는 지금이 훨씬 타락했다. 이와 같은 때에 우리가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철통같이 믿어야 한다.
* 창 3: 7, 10-11 –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 사 20: 4 - 이와 같이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 보이리니
* 사 47: 3 - 네 속살이 드러나고 네 부끄러운 것이 보일 것이라. 내가 보복하되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리라.
* 나 3: 5 – 보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 치마를 걷어 올려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나라들에게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뭇 민족에게 보일 것이요.
(7) 권면
만일 권면이 없다면 최악의 상태다. 말라기는 영적인 의미에서 대환난과 상통하다. 구약의 마지막 부분으로 최고 타락한 시대였다.
마지막 대 환난 때도 가장 타락한 때가 될 것이다. 이 시대는 희망이 있고, 소망이 있다. 의사가 '당신, 술 끊으시오, 약 먹으시오, 운동하시오' 이렇게 충고해 주면 아직 소망이 있다.
그런데 '당신 알아서 하시오' 하면, 이제 끝났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권고(처방)하고 계신다.
①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영적으로 가난한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불로 연단한 금, 곧 시련을 통한 믿음을 사서 영적으로 부요해지라고 권면한다. (Johnson).
* 사 55: 1 -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금 같은 것은 달란트 사명이요 기도를 담은 대접이다.
* 마 25: 15 -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 계 5: 8 -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불로 연단한 금'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금을 모아서 불 속에 넣으면(용광로에 넣으면) 금은 금끼리 모이고, 찌꺼기는 빠져서 찌꺼기들끼리 모인다. 그 전에는 같이 있다가 뜨거운 불을 가열하면 금은 금끼리, 찌꺼기는 찌꺼기끼리 모인다.
신앙이 그렇다. 미지근하면 세상의 모든 욕망 가운데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열정적으로 믿으면 비진리 같은 찌끼들은 사라져 버리고 금 같은 순수한 믿음(순금)이 된다.
불 속에서도, 어떤 환난 속에서도, 뜨거움 속에서도 금 같은 순전한 신앙을 갖으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렇다. 불로 연단해야 순금이 된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야 내가 정금같이 나오는 것이다.
ⓐ 불 -성령의 불.
ⓑ 연단한 금- 정금
* 욥 23: 10 -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 말 3: 3 -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 고전 3: 12-13 –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 약 1: 12 -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 벧전 1: 7 -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 부요 하게 하라- 성령에 충만한 생활.
* 딤전 6: 18 -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②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흰옷을 사라는 것은 의의 옷을 입으라는 말씀이다. 라오디게아는 광택 있는 검은 양모 생산지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양모가 아닌 '흰 옷' 곧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는 의의 옷을 입고 영적으로 수치스럽게 벌거벗은 것을 가리라고 권면하신다.
* 갈 3: 27 -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 벧전 1: 19 -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 계 16: 15 –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롬 13: 12-14 –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 엡 6: 13-17 –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 흰옷
'벌거벗은'이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말할 수 없는 수치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즉, '옷을 벗는다.'는 것은 심판과 굴욕의 상징인 동시에 '좋은 옷'을 입는 것은 바로 영광의 표시이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육적인 부요에 넘쳐서 영적으로 벌거벗은 수치를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흰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해야 했다.
'흰옷'은 거룩과 성결을 말한다. 그러니까 거룩한 생활, 성결한 생활, 믿음의 생활, 경건한 생활, 기도 생활, 말씀 생활, 주일 성수 생활, 봉사 생활을 통해서 벌거벗은 부분을 가리라는 것이다. 즉, 불로 연단한 금 같은 신앙을 갖으라는 것이다.
ⓑ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라. -희생, 봉사, 섬김.
* 사 20: 1-4 - 1 앗수르의 사르곤 왕이 다르단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니라. 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니라.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며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징조와 예표가 되었느니라. 4 이와 같이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 보이리니
ⓒ 보이지 않게 하라. -섬김의 생활로 살라.
③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이 지역의 특산물인 안약을 사서 치유하라고 권면함으로 그들의 영적 시각 장애를 치유하고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라고 권면하셨다. 이 말씀은 영적으로 눈을 뜨라는 뜻이다. 영계를 바라볼 수 있는 성령의 전망력과 판단력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이 시대를 좀 보아라. 영계를 좀 보아라. 사탄의 역사를 좀 보아라. 하나님의 세계를 좀 보아라.'하는 것이다.
오늘 이 시대를 영적인 눈을 뜨고 보아야 한다. 영적으로 보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기도를 많이 하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것은 완전하지 않다. 그러면 무엇으로 볼 것인가? 말씀으로 보는 것이 완전하다. 그것만이 100% 정확하다. 말씀을 통해 모든 것을 보시기를 바란다.
ⓐ 안약 -영적 진리. 영적 세계를 볼 수 있는 성령.
ⓑ 사서 바르라 -간구하여 소유하라.
ⓒ 보게 하라. -신앙의 영적인 눈을 떠라.
* 사 55: 1 –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④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로 '아가파오'(사랑하다)로 표현되는데 본 절의 '사랑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필로'로 되어있다. 문자적인 차이로 인해서 혹자는 '아가파오'가 하나님께서 은혜로 사랑하시는 모습을 나타내는 반면에 '필로'는 그리스도의 판단으로 사랑하심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Bengel).
그러나 필로는 '아가파오'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Barclay, Charles). 왜냐하면 신약에서도 자주 '필로'와 '아가파오'가 같은 뜻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 요 5: 20 -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 요 16: 27 -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 책망하여 징계
'책망'(엘렝코)는 원래 '낮춤'을 의미하는 말로 '말로써 교훈하고 다스리는 것'을 나타낸다.
'징계'는 책망이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랑하는 자의 잘못을 방관(傍觀)하지 않으시며 사랑어린 책망과 징계로 인도하신다.
징계와 책망은 그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지만 바로 깨달으면 큰 축복이다. 징계와 책망을 경히 여기지 말고 열심히 회개하여 참 하나님의 사람이 되자.
* 딤전 5: 20 -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
* 히 12: 5-10 –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 종 된 자의 회개
사명자가 먼저 회개하여야 한다.
* 겔 9: 3-6 – 3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5 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6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 백성 된 자의 회개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했던 자들이 회개하여야 한다.
* 계 7: 13-14 – 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 신 8: 5 -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 삼하 7: 14 -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 욥 5: 17 –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 약 1: 12 -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 계 11: 3 -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책망은 사랑의 동기에서 일어난다. 잘못에 대한 책망이 없고 무관할 때 이미 관계는 끊어진 상태이다. 그러므로 책망받을 때 열심히 회개해서 새롭게 변화되어야 한다.
* 히 12: 5-8 –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⑤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열심을 내라'(젤류에)는 현재 명령형이다.
* 왕하 19: 31 -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 행 22: 3 –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 롬 12: 11 -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 고후 7: 11 –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 고후 11: 2 -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예배생활, 전도생활, 각 기관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라는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육상의 계주 경주로 비유한다면 마지막 주자에 해당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 중요성은 앞의 교회들과 비교할 수 없다.
마라톤 선수가 마지막 골인 지점을 향하여 열심을 내듯이, 주의 날을 사모하는 성도들도 그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열심을 내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요 2: 17 -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 갈 4: 18 -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 딛 2: 14 -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 벧전 3: 13 -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회개로 가는 길도 역시 뜨거운 열심 그 후에 연결되는 것이다. 고요하게 묵상하는 것으로는 회개하기 어렵다. 양심의 뜨거운 열정이 필요하다. 영혼의 새로운 창조는 철학적 관념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이해의 각도를 변하게 하는 지적 형태를 교정하는 것이 아니다. 온몸으로 느끼고 발휘하는 회개 운동이 삶 전체에 관여하여 혁명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책장 속의 책을 바꿔 끼워 넣는 방향의 설정이 아니다.
책 속의 주인공을 실제로 만나는 현장이다. 드라마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다. 그러므로 자연히 열심을 뿜어낼 수밖에 없다. 열심이 없는 신자는 신앙의 진정한 진의를 체험할 수 없다.
열심만 낸다고 진리를 다 알 수 있다는 공식은 아니다. 충성에도 마찬가지로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하시므로 신앙은 열심 있는 태도는 시작과 과정에서 절절하게 나타나야 할 것이다. 신앙은 지적(知的)인 것이 아니라 동적(動的)이다.
회개하라.
이것은 잘못된 신앙관을 돌이키라는 것이다. 저는 이것을 보고 예배 시간에 '천부여 의지 없어서'라고 찬송한다. 이것을 보고 '예수님처럼, 초대 교인처럼 살지 못한 죄'를 회개한다.
회개하면 하나님은 죄의 질을 묻지 않고 죄의 양도 묻지 않고 죄의 기간도 묻지 않으신다. 우리가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1. 미지근한 신앙을 회개해야 한다.
2. 신앙적인 자만을 회개해야 한다.
3. 곤고한 것을 회개해야 한다.
4. 가련한 것을 회개해야 한다.
5. 가난한 것과 눈먼 것을 회개해야 한다.
6. 벌거벗은 것을 회개해야 한다.
'회개하라'(메타노에손)은 부정 과거 시상이다. 이 두 개의 명령문의 시상 변화는 '단번에 결정적으로 회개하고 지속적으로 열심을 내라'는 의미를 갖는다. (Moffatt, Rebertson).
⑥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신다. - 회개를 기다리시는 예수님
'서서'(헤스테카)는 현재 완료 시상으로 이미 오셔서 준비가 완료된 상태를 의미한다.
'두드리노니'(크루오)는 현재 시상으로 지금도 계속해서 두드리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것은 죄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인내와 사랑을 알리시는 모습으로 불신앙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초청과 약속의 말씀이다. (Mounce, Trench).
* 아 5: 2-4 – 2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4 내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움직여서,
* 눅 12: 36-37 –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 요 10: 7 -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 벧전 3: 20 -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 누구든지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본문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회개 촉구의 권면을 듣고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의 결과를 나타낸다.
* 신 26: 7 -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 창 27: 22 - 야곱이 그 아버지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이르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 욥 37: 2 - 하나님의 음성 곧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똑똑히 들으라.
ⓑ 영접 -문을 열면.
문을 열라는 것은 주님을 영접하라는 것이다.
유명한 홀만 혼트의 예수님이 문밖에 서 계시는 그림을 다 보셨을 것이다. 그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면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문 바깥쪽에는 문고리가 없고, 안에만 문고리가 있다.
그러므로 안에서 문을 열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 요즘은 이웃 사람끼리도 마음의 문을 안 연다. 목사끼리도, 장로끼리도, 성도끼리도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마음을 열지 않으니까 말씀이 들어가지 않고, 그래서 예수님이 마음 밖에, 교회 밖에 계신다. 교회들이 타락하고, 혼합주의, 종교 다원주의가 성행하므로 예수님이 그 속에 계실 수 없다.
ⓒ 주님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주님께서 직접 찾아가신다.
⑦ 더불어 먹으리라.
'먹고'라는 헬라어는 저녁식사를 의미하는 데이프논[deipnon]에서 유래하였다. 단어의 시제로 볼 때 저녁은 종말을 상징한다. 이것은 식사의 방법으로 입증된다. 또 본문의 문맥적 구분으로 입증된다.
* 눅 22: 29-30 -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더불어 먹으리라’는 천국에서 누리게 될 가장 친밀한 교제의 약속으로 여기서 '먹고 마신다'는 말은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 아침은 '아크라티스마(?κρατ?σμα)'인데, 마른 빵 조각을 포도주에 찍어 먹는 것을 말한다.
ⓑ 점심은 '아리스톤(?ριστον)'으로 도로가나 가로수, 광장에서 먹는 도시락을 말한다.
ⓒ 저녁은 '데이프논(δε?πνο)'인데, 오래 앉아서 이야기하며 먹는 친교의 식사를 말한다.
여기서 먹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마 24: 45에 보면 '때를 따른 양식'이다. 저녁을 먹자고 했다. 저녁은 종말을 의미한다.
아침은 구약 시대를, 점심은 신약 시대를 예표 한다면 저녁은 종말시대, 재림의 때를 말한다. 마지막 때 작은 책, 계시록이 열릴 것이며, 주님의 재림 복음이 너희 안에 들어가서 이 말씀의 교제가 있겠다. 너와 내가 말씀으로 교제하고, 말씀으로 하나 되는 것을 얘기한다.
지금 라오디게아 교회는 문을 열어야 하고, 열심히 믿어야 한다. 마지막 때는 계시록이 확 열릴 것(역사 속에 현실로 드러남)이다.
마지막 때에 일곱 영, 성령의 농사가 여물 때 늦은 비가 쏟아지듯이,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여 작은 책 요한계시록이 폭발적으로 죽은 영혼들을 살려내고 주님이 오신다. 따라서 지금은 열매 맺을 때이다.
* 아 5: 1 - 내 누이, 내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우유를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많이 마시라.
* 암 9: 14 -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이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 그들이 황폐한 성읍을 건축하여 거주하며 포도원들을 가꾸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 눅 17: 8 -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 약 5: 3 -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8) 상급의 약속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리라.’
본문은 승리자에게 주시는 약속이다.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으심은 그의 왕적 지위를 시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에 앉음으로 왕적인 지위를 누리시는 것처럼 승리자에게도 그와 동일하게 권세를 허락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할 것에 대한 약속이다.
* 계 2: 26-27 – 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 계 5: 10 -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 계 20: 4-6 –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 눅 22: 28-30 –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누가 이기는 자입니까? '이기는 그'라는 의미가 역사적으로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 개개인에게 주시는 말씀이지만, 복음적으로는 전 세계 어느 시대, 어느 교회 모든 성도에게 주신 말씀이면서도 예언적으로는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종말의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① 내 보좌에- 천국 보좌.
'보좌에'(엔 토 드로노)에는 '위에'를 의미하는 전치사 '에피'가 아니라, '안에'를 의미하는 '엔'이 사용되어 단순히 보좌에 앉는 것뿐 아니라 그 이상의 명예와 권세를 주시며 참여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시사한다. (Plummer).
이렇게 그리스도의 권면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적인 통치를 공유하게 될 것이다.
* 마 19: 28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패자는 비참하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패자는 승자의 발에 입을 맞춘다. 왕이 나와서 적군들이 입을 맞출 때 발로 그 목을 눌러 버린다.
발에 입을 맞추는 것은 그의 노예가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우리가 사탄에게 지면 사탄의 노예가 된다. 그러므로 사탄에게 절대적으로 이겨야 한다.
이기는 자에게는 축복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기셨다. 육적으로 이기신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이기셨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재림이 역사적으로 임박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시대를 신앙으로 이겨야 한다.
ⓐ 심판의 보좌.
ⓑ 영광의 보좌.
②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 단 7: 13-14 – 13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 엡 1: 20-23 –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 함께 앉게 한다.
ⓑ 함께 영광을 받도록 한다.
ⓒ 함께 심판하신다.- 받은 고난에 대한 보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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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참된 증인이시다. 우리도 예수님의 참된 증인이 되어야 한다.
💖사랑의 향기는 만리를 가고도 남습니다. 오늘도 건강과 함께
좋은 사람들과 좋은 향기로 좋은 인연 이어가는 날 되시기 기원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참된 증인이시다. 우리도 예수님의 참된 증인이 되어야 한다.
설교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참된 증인이시다. 우리도 예수님의 참된 증인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