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19일 연중
제16주일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마르코
6,30-34)
When he disembarked and saw
the vast crowd, his heart was moved with pity for them, for they were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and he began to teach them many things.
말씀의 초대
목자는 임금을, 양
떼는 백성을 나타낸다. 이스라엘의 임금과 지도자들이 백성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왕국이 멸망하고 유배를 가게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이 흩어진
양들을 다시 모으시고 정의를 세울 임금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제1독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시다.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바치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를 하나가 되게 하시고 또한 그들이 하느님과 화해하도록 이끄시기 때문이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처럼
살아가는 군중을 가엾게 여기시어 그들을 돌보시고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신다. 그분은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약속하신 착한
목자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레미야 예언자가
예고한 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착한 목자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복음에서 제자들은 첫 번째 전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예수님께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낱낱이 보고합니다. 그들은 많은 경험을 하였지만 피곤하여 지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경험은 기쁨이 용솟음치는 살아 있는
체험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오붓한 시간을 가지시려고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자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복음을 선포하셨는지,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떠나시는 것을 보고 군중은 육로를 이용하여 예수님 일행보다 앞질러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배에서 내리신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셨습니다. 연민과 자비와
사랑의 주님! 그래서 오늘 우리는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하고 화답송에서 노래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세상의 고통을 가엾이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시어, 아픈 사람,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 등 소외되고 도움이 절실하며 인간적으로 홀대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주셨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목자가 없어 흩어져서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시는 목자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은
왜 이렇게 가엾고 측은하게 보일까요? 경제적인 이유를 포함하여 모든 것을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에서 바라보고 찾아 나서기 때문이 아닐까요?
감당하기에 너무 벅차다고 생각되는 시련을 겪을 때, 복음의 군중처럼 예수님을 찾아 나서면 어떨까요? 몸과 마음이 눈에 보이는 안일과 즐거움만을
찾아 헤맬 때에 주님을 찾아 나서면 어떨까요? 올바르고 착하게 살려고 하다가 지치고, 정의롭고 좋은 일을 하다가 실망했을 때, 또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방황할 때 주님을 찾아 나서면 어떨까요?
어렸을 때부터
먹어보지 못했던 음식이 하나 있습니다. 돼지고기였지요. 아니 돼지와 관련된 음식은 하나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 혈압이 높으셔서
병원에서 기름기 있는 음식을 피하라고 했었거든요. 그 뒤 어머니께서는 기름이란 기름을 모두 제거하셨고, 기름이 많다는 돼지고기는 아예 피하셨던
것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 원칙을 지키셨으니 집을 떠나서 신학교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까지 돼지고기를 먹어 본 적이 없었고, 지금
좋아하는 순대나 곱창 같은 것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신학교에서 돼지고기를 먹는 순간, 저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서는
느낌이었습니다. 또한 선배님이 외출 나갔다가 사다주신 순대를 먹는 순간, ‘이런 음식도 있구나!’라는 감탄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지요.
제가 어떤 음식이든
상관없이 특히 처음 보는 음식 또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이유는 그때의 체험이 강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즉, ‘처음 먹어보는 음식인데, 과연
어떤 맛일까?’라는 궁금증이 생기거든요.
이런 식으로 다양한
체험이 생각과 지식을 넓혀줍니다. 갓난아기를 보십시오. 지금 막 태어난 갓난아기에게는 뇌가 없을까요? 아닙니다. 갓난아기도 분명히 어떤 정보를
저장할 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경험이 앎을 가져다주며, 이 세상을 살면서
다양하고 많은 경험을 할수록 지혜를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주님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습니까?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반드시 함께 해야 할 분인데 그분께 대한 경험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힘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또한 단순히 세상 삶에 대한 경험만으로 주님을 완전히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서도 내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때로는 주님께 불평불만을 던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전지전능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눈높이로 우리를 바라보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신 뜻에 맞지 않는다면서 우리들을 벌하시지 않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만 봐도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가르쳐주십니다. 제대로 행하고 있지 않다고 꾸짖는 것이 아니라, 목자 없는 양과 같아 보이는 사람들을 가르침으로써
하느님을 더 잘 알 수 있도록 하십니다.
주님께 대한 체험을
많이 늘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 삶이 힘들고 벅차다면서 주님께 다가서는 것을 미루기만 할 것이 아니라, 주님을 더욱 더 잘 알 수
있도록 하는 노력들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미사, 기도, 묵상, 성경읽기 등뿐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의 실천까지 행할
때 주님을 더욱 더 잘 알 수 있으며,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그 삶이 얼마나 행복한 지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는
아직도 갓난아기와 같은 지식만 가지고 있는 우리가 아닐까요? 그 갓난아기가 체험을 통해 지식과 지혜를 간직해 나가듯이, 우리 역시 주님께 대한
체험을 통해 참된 지식과 지혜를 쌓아야 할 것입니다.
머릿속 지혜를 남과
나눌 줄 아는 사람이 어른이다(레이프 에스퀴스).
한계를 겪어
봐야(‘좋은생각’ 중에서)
엘론 머스크는
창업을 준비하기 전 심각하게 고민했다.
‘창업했다가 망하면
어쩌지? 가난한 삶을 버틸 수 있을까?’
생각만 하다가는
답이 안 나올 것 같아 그는 실험을 했다. 일명 욕구 실험인 ‘하루 1달러로 살기’였다. 그는 마트에 가서 냉동 핫도그와 오렌지 30달러 치를
사 한 달 동안 매일 그것만 먹었다. 돈 없는 삶이 얼마나 힘든지 체험해 본 것이었다.
한 달을 지내보니
살만 했다. 별로 스트레스가 없었다. 그저 컴퓨터만 있으면 행복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결국 ‘한 달에 30달러는 벌겠지?’라고 생각하며
창업에 뛰어들었다. 목표는 인터넷, 우주, 친환경 에너지 세 분야에 혁신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는 선택의
순간마다 늘 자유로울 수 있었다.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온라인 결제 서비스인 ‘페이팔’로 수천억 원을 번 뒤에도
그는 그 많은 돈을 우주 회사와 전기 자동차에 투자해 독보적인 기업으로 키워 냈다.
그는 말한다.
“1달러 실험은 누가 시켜서 한 게 아니었어요. 스스로를 한계 상황에 넣어 봐야 답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덕분에 어디서든 원하는 걸 하면
된다는 확신을 얻었죠.”
한계를 겪어 봐야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에 큰 공감을 하게 되네요. 생각해보니 항상 어렵고 힘든 것들은 피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는
이유들만 만들고 있었네요. 이제는 할 수 있는 이유들을 만들어야겠습니다. 극한의 상황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만 있다면 할 수 없는
것들이 과연 무엇일까요?
쉬라는 건 하늘도
공감
-이기정신부-
만국이 통용하는
부호들을 보면서 명상에 잠겨볼 때가 있습니다. 마침표 쉼표 물음표 따옴표 빼기 더하기 등 신기한 건 잘 통하는 점입니다. 그 중에서 저에게 깊고
좋은 생각과 흐뭇하게 하는 기호는 쉼표입니다.
뿌리박혀 있는
돌이나 고리 있는 말뚝을 생각하며 절로 끄덕여집니다. 걸거나 매어 잠시 쉬며 멈추게 하는 배 정착 고리나 박힌 돌이 그래요. 쉼표가 있어 숨
쉬고, 엎어진 김에 쉬라는 그런 건 하늘도 공감하나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마르코 6,31)”
하느님의 목자인
농민
-박재식신부-
7, 8월이 되면
성당 근처 마을에 있는 우리밀영농조합에서 운영하는 작은 식당에서 종종 점심을 먹습니다. 우리밀 라면과 부추전을 안주 삼아 막걸리도 한잔 하면서
자연스럽게 농민들을 만납니다. 그분들은 저와 20년 이상 친구, 가족과 같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평생
열성적으로 농사를 지으셨습니다. 일 년 내내 엄청난 시간을 투자해 작물과 가축들을 돌보십니다. 기존 농법만을 고집하지 않고 외국의 선진농법도
부지런히 배울 정도로 열심히 노력하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같은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분들은 부모님을 모시고 자식들을 키우며 사는 40대였습니다. 지금은
부모님은 하늘나라로, 자식은 도시로 떠나고 부부만이 서로 의지하며 살고 있습니다. 마을에는 하루가 다르게 빈집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동네
어귀에서 뛰놀던 아이들을 본 지가 너무 오래됐습니다.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그분들은 평생 동네 일꾼으로 살아야 하는 비애를 안고 있습니다.
마을회관과 같은 ‘어르신’들을 위한 공간에도 출입할 수 없습니다.
그분들과 대화를
하면서 여러 가지를 배웠습니다. 가장 소중한 배움은 욕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또 가난하지만 너그러운 삶입니다. 과거 부인에게 명령조의 언어를
사용하고, 밥상머리에서 감정을 폭발시켰던 형제님들이 지금은 대부분 공처가로 변했습니다. 세상일도 정치, 경제적인 측면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진실을 토대로, 생명 존중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오늘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내가 그들을 돌보아 줄 목자들을 그들에게 세워 주리니,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 잃어버린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23,4)라는 주님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진정한 목자, 지도자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줍니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은 백성에게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고 말합니다. 목자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신앙
선조들도 한결같이 목자였음을 강조합니다. 아브라함은 비겁하고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하는 사람이었지만 목자의 삶을 통해 용기 있고 자신의 가족과
동물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하느님의 사람이 됐습니다. 이사악도 그렇습니다. 사라는 이집트 여자 하가르가 아브라함에게 낳아준 아들이 자기 아들
이사악과 함께 노는 것을 보고(창세 21,9) 이스마엘과 하가르를 내쫓으라고 요구합니다(창세 21,9-10). 이처럼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낸
이사악은 아브라함과 비슷했습니다. 부인 레베카를 필리스티아 임금인 아비멜렉에게 누이라고 속이는 비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자의 일을 하면서
양보를 배우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게 됐습니다(창세 26).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중에서부터 형과 싸우고, 거짓말과 배고픔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이용했습니다. 외적으로 아름다운 라헬을 사모하는 그의 가치관에서
지연, 학연, 혈연을 중시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그가 하느님을 만나고 목자의 삶을 살아가면서 당대 최고의 권력자에게 축복을
베푸는 멋진 신앙인으로 변화됩니다.
우리 시대에도
성경에 나오는 선조들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대로 된 가격을 받지 못하고 손해를 보는 현실에서도 최선을 다해 생명을 가꾸는 농민들이
이 시대의 진정한 목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주변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돕고, 자녀들과 이웃에게 수확한
농산물을 보내주며 잘살아가길 기도하는 농민 어르신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시골 식당에서 또 다른 하느님의 목자를 만나 열심히 이야기를
들어야겠습니다.
가서 좀
쉬어라
홍성민
신부-
“요즘
바쁘시죠?”라는 말이 가장 흔한 인사말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바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이젠 좀 쉬고 싶다는 말을
어디서나 듣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 잘 쉬는 사람은 보기가 어렵습니다. 모두가 바삐 뛰어나가는데, 나만 뒤처질까 하는 걱정에 쉬는 것이 오히려
마음을 불안하게 합니다.
어느 유치원에서
버스 뒷자리에 앉는 것에 대한 경쟁이 생겼습니다. 맨 뒷자리에 앉기 위해 마치는 종이 울리면 모두 버스를 향해 달립니다. 버스에 앉을 자리가
부족한 것도 아니고, 뒷자리에 앉으면 특별히 좋은 점도 없지만, 경쟁이 붙고 그 경쟁에서 이기고 싶은 마음이 모두를 달리게 합니다. 그렇게
달려나가다 보니 가끔은 넘어지는 친구들도 있고, 다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의 철없는 모습이지만, 우리 사회 어른들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내가 이것을 왜
하는지, 무엇 때문에 가지려고 노력하고, 얻으려고 애를 쓰는지 생각해 볼 시간을 가지지 못합니다. 남들보다 더 부지런히 살면,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살 수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너무 바빠서 이미 가진 것도 누리지를 못합니다.
삶의 순간순간에
우리는 멈추어야 합니다. 멈추어야만 장애물도 보이고, 내가 왜 그리로 가려고 했는지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정말 내가
가려고 했던 쪽인지도 볼 수 있고, 지나가는 길의 아름다운 풍경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나와 함께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멈추어야만
볼 수 있습니다.
지난주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스승님 앞에서 제자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한 일들을 보고
하였습니다. 자랑스러웠던 기억, 부끄러웠던 기억, 즐거웠던 추억과 사람들로부터 상처받았던 일까지 모두 예수님께 꺼내 놓았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가서 좀 쉬어라’이었습니다. 쉼 속에서 다시금 되돌아보고, 정리하고, 반성해야 새로운 삶으로 옮겨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쉬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세상 속에 파견되어,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일상에서 우리는
제자들처럼 예수님께 돌아와 쉬어야 합니다. 내 삶의 자랑과 부끄러움, 상처와 기쁨,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와 쉬어야
합니다.
한 주간을 시작하는
오늘, 하느님 앞에 나와 잠시 머무르셨으면 좋겠습니다. 고요한 침묵 안에서 주님 앞에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 삶의 의미를 다시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게
그거
-박창균신부-
1995년
농민주일이 제정되어지고, 1996년 7월 셋째 주일에 제 1회 농민주일을 지내 후 벌써 20회를 맞이합니다. 두 번이나 강산이 변하는 시간이
지난 지금 우리 농촌은 얼마나 변화되었을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좋은 쪽으로 변화된 것이 아니라
더 못한 쪽으로 변화가 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지난 7월 3일
고성 두호마을에서 ‘소몰이 투쟁’ 3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소를 전업으로 키우는 농가가 대부분이지만, 1985년 당시 소는
농가의 주요 부업으로 농민들의 희망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정부는 외국에서 소 20만 마리를 수입하고 쇠고기 90만 마리 분을 수입하여 소 값이
60~80%나 폭락하였습니다. 생존의 위기에 처한 농민들은 1985년 7월 1일 고성 두호마을에서 소 38마리와 100여명의 농민들이 왕복
30리 길을 걸으면서 ‘소몰이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 시위는 이 후 진주 관방마을을 비롯하여 전국 22개 지역의 ‘소몰이 시위’를 이끌어내는
계기가 됩니다. 또한 이 시위는 외국 농, 축산물 수입 반대운동의 확산과 전 국민에게 농민문제의 심각성을 구체적으로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부나 관에 대한 농민들의 불신은 극에 달하였습니다. 정부가 권장하는 농산물은 아예 심지말자는 것이 그 당시의 정서였습니다. 마늘 심으라고 해서
마늘 심으면 마늘 값 폭락하고, 양파 심으라고 해서 양파 심으면 양파 값 폭락한다는 식이였습니다. 정부의 권고대로 파종을 했다가 망하면 모든
것이 농민 개인의 책임으로 넘겨졌습니다. 어디에 하소연 할 곳조차 없는 농민들은 가톨릭 농민회를 중심으로 피해 보상을 요구하였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농민들은 어떠한 모습인가요? 쌀만은 수입하지 않겠다던 정부가 지난 5월 8일 밥쌀용 쌀까지 수입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농산물들의 수확량이 많아져
가격이 떨어지면 모든 책임은 농민들이 져야합니다. 하지만 수확량이 떨어져 가격이 올라가면 물가의 안정을 위하여 외국으로부터 가격을 맞출 때까지
수입을 합니다. 이미 많은 우리의 아이들은 외국의 과일이 우리의 것으로 알만큼 외국의 과일들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농민들은 농사를 지어서는 먹고
살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먹고 살기위해서는 부가가치가 높은 특수 작물을 재배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형화를 해야 합니다. ‘가족농의 해’를
지냈지만 그것은 저 먼 천국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 동안 교회도
많은 노력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외형상으로는 많은 발전을 하였습니다. 본당마다 우리농 매장도 많이 생기고, 직매장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마산교구 전체가 100가구도 안 되는 ‘가톨릭 농민회’ 생산품의 10%도 소비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30년이 지났지만 더 나쁜 쪽으로 진화되는
정부나,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교회나 ‘그게 그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참된
만남에는 그리움이 따른다
-박영식신부-
‘스승’이라는
말은 스님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이다.
‘중’이라는
낮춤말 대신에 존경하는 뜻에서 ‘사승’師僧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이
사師님이
변하여 ‘스님’이
되었고 또 한 가닥은 ‘스승’,
선생을
뜻하기에 이르렀다.
삼국유사에
보면,
신의
자리에 오른 무당이 신의 뜻에 따라 가르침을 베푸는 스승으로 존경을 받았다.
예수님은
군중에게 회개를 재촉하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악마에 사로잡힌 사람들과 병자들을 고쳐주심으로써 당신이 하느님의 구원을 베푸는 참된 스승이요
목자임을 드러내셨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 평생 사는 목적이 서로 기쁘고 행복하게 살다가 하느님의 세계로 가야 하는 존재임을 가르쳐주신다.
현세가
영원한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주어진 준비 기간임을 가르쳐주신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기심과 물욕에서 해방하여 하느님의 뜻을 지키는 자녀로 만들어주신다.
우리가
날마다 하느님의 말씀을 벗하며 살아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하게 하신다.
인생의
성패는 현세뿐 아니라 죽은 뒤의 세계도 밝게 비추어주는 등불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지 혹은 그분을 배척하는지에 달려 있다.
참된
만남에는 그리움이 따른다.
그리움이
따르지 않는 만남은 이내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진정한
만남은 서로 눈을 뜰 때 이루어진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도 그분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마음이 필요하다.
이러한
설렘임이 없으면 진정한 만남이 아니라 한 때의 마주침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을
진하게 체험하려면 자기 자신을 끝없이 가꾸고 다스려야 이기심을 없애고 예수님을 향한 애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좋은
친구를 만나려면 먼저 나 자신이 좋은 친구감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친구란
내 부름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만나는 경우에도 나의 삶을 그분의 뜻에 일치시켜야 그분을 강렬하게 체험할 수 있는 법이다.
서로
닮아야 친해진다는 뜻이다.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도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 보일 때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
하느님을
닮아야 그분의 친구가 된다.
마음속에
폭풍이 몰려오고 파도가 친다고 다 사랑이 아니다.
이는
요구만 가득해 상처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부질없는 바람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마음속에 가득히 고이는 잊지 못할 애틋함이 있어야 진짜다.
참사랑은
그리움이란 다리를 건너 서로 하나가 된다.
그리울
것도 없이 한순간 불타오르는 사랑만 바란다면 그것은 불장난이요 서로 안 만난 것처럼 떠나가야 한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라야,
고통과
시련을 이겨낸 뒤라야 정직한 사랑을 했는지 드러난다.
가슴이
수없이 무너져 내리고 모든 욕심을 다 버리고 서로 아낌없이 닮아갈 때 참사랑을 할 수 있다.
하느님과
우리의 사랑도 그러하다.
그래야
하느님이 우리의 유한하고 조건부의 사랑을 영원하고 무조건의 사랑으로 승격시켜주신다.
격언이나
속담은 참된 스승의 입에서 나온 생명과 행복의 말씀이요 인생의 의미를 밝히는 생명의 길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격언,
속담,
명언에
귀가 쫑긋해지는 것을 느낀다.
이는
우리가 이 말씀을 많이 닮아간다는 기쁜 소식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노래를
부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언제나 어디서나 노래를 발견한다.”(스웨덴
속담)
이처럼
말씀을 좋아하는 사람은 언제나 말씀을 인생길,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가는 길을 밝히는 등불로 삼는 법이다.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는 사람은 서로 스승 구실을 한다.
“너니까
그것을 할 수 있다.”
하는
선생님의 말 한 마디는 평생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시련을 이겨내게 해주는 힘이다.
그뿐만
아니라 스승의 조언 한 마디로 악조건을 이기고 훌륭한 운동선수나 뛰어난 예술가가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캘리포니아대학교의
연구에 따르면,
친구에게
“고마워.”
하는
칭찬을 들은 사람들은 그에게 더 고마워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서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사랑해.”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말이다.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하는 입맞춤은 성행위보다 훨씬 더 부부관계를 따뜻하게 해준단다.
꾸준한
독서나 위대한 스승의 말씀 속에서 우연히 가슴을 울리는 은유 한 마디가 내 안에서 ‘잠자는
거인’,
나의
천재성을 일깨워줄 수도 있다.
참된
스승은 내가 꼭 만나야 할 사람이 누구이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명의
길과 파멸의 길을 가르쳐준다.
나를
안아주고 나의 성공을 기원하고 내 심신의 피로를 풀어주는 스승이나 친구가 없다면 돈이나 권력은 무용지물이요 나의 삶은 긴 가뭄에 척척 갈라진
논바닥과 다를 바 없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게 마련이다.
착한
사람에게는 그 선함을 배우고,
악한
사람에게는 그를 보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할 수 있다.”(공자)
-조재형신부-
유럽 문명과 문화의
뿌리인 그리스가 심각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그리스는 커다란
장점을 가진 나라입니다.
유럽의 허브라고 할
수 있는 항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나라들이 그리스의 항구를 이용하고 있으며,
그리스는
‘선박
왕’이라고 부르는
부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는 자연적인
강점입니다.
그리스에는 유럽의
고향이라고 할 만큼 많은 문화유산들이 있습니다.
해 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로 관광을 떠납니다.
이는 문화적인
강점입니다.
또한 그리스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만큼이나 일을 많이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민족적인
강점이기도 합니다.
이런 그리스가
유럽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기 때문입니다.
부유한 사람들이
세금을 적게 내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세금을
걷어서 운영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세금을
내야할 사람들이 내지 않는다면 국가는 정상적인 운영을 할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그런
부정과 부패를 제대로 바로잡지 못하는 지도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빼어난
자연,
훌륭한
문화유산,
민족적인 근면함이
있어도 그것을 통합하고,
이끌어갈 지도자가
정의롭지 못하면 모래위에 지은 집과 같기 마련입니다.
우리나라는
1997년 엄청난 경제적인
위기를 경험했습니다.
당시의 충격은 전
국민의 가슴에 깊은 충격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의 가족도 당시의
경제위기의 파도를 넘지 못해서 아직까지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금 모으기
운동’과 같이 전 국민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였습니다.
정부는 강력한
구조조정을 단행하였고,
눈물을 머금고
우리의 기업을 헐값에 외국기업에 매각하기도 했습니다.
국민,
기업,
정부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경제위기를 함께
극복했습니다.
계절이
변하듯이,
태풍이 불듯이
국가적인 위기는 올 수 있습니다.
경제는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민족은 냉엄한 국제 질서에서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런 위기를 남의
탓으로 돌리고 싸움을 일삼는 민족은 도태 될 것입니다.
서울 교구에는
229개의 본당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본당은
믿음과 사랑,
나눔과 친교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재정적인 어려움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신자들은 마음이
열리면 더불어 나눌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없어서
상가에서 지내는 것도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새로이 성전을
신축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상가 건물의 좁은
공간에서 TV
모니터를 통해서
미사에 참례하는 것도 얼마든지 참을 수 있습니다.
미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 수가 적은
것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강점이 될
수 있습니다.
서로를 잘 알 수
있기에 가족처럼 지낼 수 있습니다.
저도
300명가량 되는
성당에서 3년 동안 신자들과
함께 지냈던 적이 있습니다.
초대교회처럼 서로를
위해서 나누었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낼 수 있었습니다.
딱 하나 공동체가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분열입니다.
분열된 공동체는
재정적인 넉넉함이 있어도,
화려하고 커다란
성전이 있어도,
신자수가 많아도
위기를 겪기 마련입니다.
왜 공동체가
분열될까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먼저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매일 한 시간씩
미사 전에 기도하는 사제는 영적인 힘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뜻을 이루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기 마련입니다.
내가 필요한 사람을
우선적으로 만나기보다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먼저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외로운
사람,
억울한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조건
없이 그들과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사제가 본당에서
그렇게 살 수 있다면 본당은 분열되지 않을 것입니다.
겸손한 모습으로
찾아가는 사목을 하면 좋겠습니다.
구역모임,
레지오
훈화,
각 단체의 모임에
가능하면 잠깐이라도 함께 하면 좋습니다.
그러면 몇몇
신자들의 달콤한 말 보다는 신자들의 고민과 아픔을 직접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례가 나면 제일
먼저 가서 연도를 바치면 좋겠습니다.
유족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고,
유족 중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기에 선교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시흥
5동 성당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84세이신 어르신께서
파주에서부터 교리를 배우러 오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직행버스,
지하철,
마을버스를 타시고
교리를 배우러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가실 때도
마찬가지로 마을버스,
지하철,
직행버스를 타고
가시는 거라 하십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짜증을 내는 저에게 할아버지의 모습은 좋은 가르침이었습니다.
동창신부님께 강의를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날자와 시간을
말씀드렸고,
강의 주제와 시간도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께서
장소이야기를 하니까 좀 멀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장소가 멀면
잘 안 가려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아직
신앙을 잘 모르시면서도 저렇게 열심히 나오시는데,
우리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늦장을 부리고,
짜증을
내고,
불평을 하는 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온 몸과 마음으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고 전해
주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재물이나 명예가
아닙니다.
권력이나 세상의
지식이 아닙니다.
서울대학교에
합격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것도 축하할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잠시의 기쁨은 주지만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하느님입니다.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었음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톨릭
신앙의 핵심입니다.
자유인 -이수철신부-
누가
자유인입니까? 여러분은 자유인입니까?
누구나
갈망하는바 자유인입니다.
요즘
읽고 있는 책도 자유인인데 썩 흡족하지는 않습니다.
마침
면담차 집무실에 들어 온 자매가 책 제목을 보고 말했습니다.
"저도
자유인이 되고 싶은데 잘 되지 않습니다. 아직도 계속 자유를 찾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30년간 살아 온 교포로 참 자유를 찾아 한국에 와서 1년간 자유롭게 살고 있는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역설적 고백입니다.
히틀러에
반대하다 체포되어 처형되기 전 백장미단의 핵심멤버인 한스라는 청년은
쩌렁쩌렁
울리도록 외쳤다 합니다.
"자유여,
영원하라.“
우리
믿는 이에게 자유는 무엇입니까?
마침
어제 '동방영성의 탐구'라는 책에서 동방영성가의 고백에 공감했습니다.
'거룩한
장로들(the holy elders)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
참 자유는 이기적 열정과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전제로 한다.
본질적으로
자유는 그리스도께 종속됨을 의미한다.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이다.
우리
수도승들에게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다.
그는
우리의 자유, 우리의 평화, 우리의 성공, 우리의 행복이다.
진정한
자유는 개인적 자유의 추상적 개념들에 대한 철학적 사변이 아니다.‘
오늘은
세 측면에 걸쳐 자유인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목자'를 따라야 자유인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방금
우리는 신명나게 화답송 후렴을 노래했습니다.
목자인
주님을 따를 때 자유롭습니다.
목자인
주님은 우리 삶의 의미입니다.
그러니
목자인 주님 없이는 삶의 의미도 자유도 없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한 주님의 예언입니다.
"내가
그들을 돌보아 줄 목자들을 그들에게 세워 주리니,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주님의
예언은 실현되어 우리는 모두 착한 목자 그리스도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서 착한 목자 주님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시작하셨다.‘
이런
연민과 자비심이 가득한 참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배울때 비로소 자유인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목자이신 그리스도 없이는 자유도 없습니다.
둘째,
'평화'가 있어야 자유인입니다.
평화로워야
자유롭습니다.
평화와
자유는 함께 갑니다.
인류가
추구하는 최상의 가치가 평화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으로 평화를 희구하는 인류인데 전쟁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류역사와
더불어 시작된 전쟁입니다.
세상의
축소판이 각자의 마음입니다.
마음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내적갈등, 내적전쟁이 있는 한 세상의 전쟁도 계속될 것입니다.
평화에
답은 그리스도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신 참 좋은 선물이 평화입니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요한14,27).'
제가
가장 많이 써드리는 처방전 말씀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두려움과 불안으로 평화를 잃고 사는지요.
바오로
사도의 평화의 선언이 참 고무적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 셨습니다."(에페2,14.15ㄴ-16).
바로
미사은총입니다.
평화의
그리스도께서 서로간의 장벽을 허무시고
당신
안에서 우리를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고 적개심을 없애시어 참 자유인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그리스도의 평화'가 되어 우리를 완전 평화의 사람, 자유인이 되게 하십니다.
셋째,
'외딴곳'이 있어야 자유인입니다.
자유인이
되기 위해 주님과 만나는 장소는 필수입니다.
일상에서
벗어나 주님 안에 머물러 영육을 충전하고 영적시야를 회복해야 비로소 자유인입니다.
휴대폰을
충전하듯 영육도 외딴곳의 침묵과 고독중에 주님으로 자주 충전시켜야 살 수 있습니다.
이래서
조용한 곳을 찾아 피정입니다.
예수님도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꼭 외딴곳에 물러나
아버지와의
깊은 친교와 일치의 시간을 지니면서 영육을 충전시켰습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자
외딴곳의
쉼터에서 쉴 것을 명하는 주님이십니다.
활동과
관상은 영적 삶의 리듬임을 깨닫습니다.
쉼과
쉼터를 잃고 있는 현대인들입니다.
자기만의
외딴 곳의 쉼터 마련이 필수입니다.
주님과
함께 머물며 주님으로 충전시킬 때 비로소 살아나는 심신에 자유인입니다.
목자인
주님과 나의 평화, 외딴 곳의 쉼터, 셋이 삼위일체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자유인입니다.
1.과연
충실히, 항구히 착한 목자 예수님을 잘 따르고 있습니까?
2.그리스도의
평화로 충만해 있습니까?
3.주님과
함께 머물 수 있는 나만의 침묵과 고독의 외딴 곳, 쉼터가 있습니까?
오늘도
착한 목자 주님은 이 외딴 곳의 쉼터인 성전에서,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당신 평화가 되게 하시어 평화의 사람으로, 자유인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아멘.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필요를 이미 아시고 채워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를 가엾은 마음으로 챙기시는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성당이
허전합니다. 휴가철이기 때문입니다. 일손이 한창 바쁜 시기이기도 하지만 휴가철이기 때문입니다. 어디를 가셨을까? 쉬러 가셨습니다. 쉰다는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쉬는 방법과 우리의 쉬는 스타일은 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쉬지만
우리는 사람도 많고 시끄러운 곳으로 휴가를 떠납니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곳으로 갑니다. 길도 막히고 잠자리도 불편하고.. 휴가를 다녀와서는
더 피곤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 휴식은 바람직한 쉼이 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건강한 휴식을 취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아주 바삐 지냈습니다.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마귀를 쫓아내며 주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예수님 앞에 모여서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자랑 삼아 보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아침에 계획한 것을 열심히 살고 저녁에 삶을 되돌아보며 자기가 지낸 하루의 시간들을 예수님께 보고하는 시간은 저녁기도 시간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고 하셨습니다.
왜
외딴 곳을 선택 하셨을까요? 동안에 열심히 할 일을 한다고 했지만 그것이 주님의 일이었는지, 내 일이었는지를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혹 하느님의
일은 접어두고 인간적인 일에 매달린 것은 아닌지 내적으로 반성하고 채울 시간을 가져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일에 치이면 마지못해 억지로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 일은 신성한 노동이 아니라 부역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휴식을 잘해야 합니다.
어느
수도원의 두 수사가 원장으로부터 들에 나가 밀을 거두어들이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 두 수사는 낫으로 밀을 베어 단으로 묶어나갔습니다. 한 수사는
시간마다 쉬곤 하는데 반해 한 수사는 한 번도 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날이 저물었을 때 보니 쉬면서 일한 수사가 쉬지 않고 일한
수사보다 훨씬 더 많은 밀을 베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열심히 일한 수사는 어떻게 그런 결과를 가져왔을까 궁금해 했는데 쉬면서 일을 한 수사가
말했습니다. “저는 틈틈이 쉴 때마다 제 낫을 갈았습니다.” 쉰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을 준비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세상일에 파묻혀서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때, 가족과 잘 지내고 있는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을 모시고 살고 있는지
되돌아보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은혜를 회복하는 시간이 휴식입니다.
쉼을
잘못하면 안 쉰 것만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음식을 잡수실 겨를조차 없이 바쁘시더라도 한적한 곳을 찾으셨고 이른
아침에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을 보내주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때때로 한적한 곳을 찾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체조배는 바로 훌륭한 휴식입니다. 자주 성체 앞으로 오십시오. 피정이나 성지순례도 꼭 필요한 휴식입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들은 일정기간 의무적으로 한적한 곳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연 피정, 월 피정을 해야 합니다. 피정이란 말 그대로 시끄러운 곳을 피해
고요한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교회법으로, 수도회 규칙으로 정해놓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 자기 소명의식을 새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대개는 침묵 피정을 합니다. 동안에 말을 많이 하고 살았으니까 침묵 가운데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내적성장의 토대를 다지는 것입니다.
우리
청주교구 신부수가 180여명입니다. 신부 전체가 모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 피정을 할 때는 특별히 주교님의 허락을 받은 분외에는
모두가 참석합니다. 그래서 어떤 신부님은 건의를 합니다. 침묵을 해제해 달라! 일 년에 한 번 전체가 모이는데 동안의 삶을 서로 나누며 선
후배간의 끈끈한 정도 쌓고 친교의 장을 만드는 것이 더 의미가 있지 않느냐?
그래서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침묵이냐? 해제냐? 어떤 결과가 나왔을 까요? 절대다수의 신부님께서 침묵을 선택하셨습니다.
한
번은 부산교구 정명조 주교님께서 피정 지도를 하셨는데 첫 시간에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피정은 “절대 침묵피정”입니다. 절대침묵이란, 내가 침묵을
지키는 것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문 여닫는 소리, 발걸음 소리까지도….. 왜 그렇게 침묵을
강조하셨겠습니까? 세상이 시끄러우면 시끄러울수록 그만큼 더 주님의 소리를 듣고 주님의 뜻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소란하고 들뜬 마음으로는
결코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고요함 속에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의 거울에 비춰진 내 속을 보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일상이 몇 일씩 시간을 내서 피정하기란 힘듭니다. 그러나 한적한 곳에 가서 쉬라는 주님의 말씀을 되새겨야 합니다. 이 말씀은 좋은
휴양지에 가서 먹고 마시고 즐기라는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휴가를 내서 요양원이나 복지시설에 가서 봉사를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들은 중환자실에서 똥, 오줌을 받아내고 식사수발도 하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배우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일깨웁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들의 휴가는 참으로 하느님 안에서의 휴식입니다.
시간이 없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휴가를 내서 성경연수에 참석하시는 분도 있고 단식원에 들어가 단식기도를 하며 주님 안에서 쉬기도
합니다.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어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정에서 실천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른 아침, 일상을 시작하기 전 또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 시간,
침묵의 시간을 꼭 챙겨야 합니다. 가능하다면 예수성심상이나 성모님 앞에서 하루를 살피고 부족함을 채울 수 있도록 자기를 봉헌하면서 주님과 더불어
시작하고 주님과 함께 마쳐야 합니다. 세상이 각박해지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쉼이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쉰다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재충전의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높은 곳에, 귀한 곳에,
천상에 두어야하겠습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넘치도록 채워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 받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찾아가기도 하셨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분께 능력이 있고 힘이 있으며 가르침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휴식을 취할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보다 먼저 그 휴식장소로 와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몸이 파김치가 되어서 휴식을 취하고 싶은데 군중에게 떠밀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충분히 짜증이 날 만한데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 같아 오히려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슴은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과 자비심으로
가득 차 귀찮고 짜증이 날 법한 상황에서도 꾸준한 사랑의 길을 가십니다.
과연
우리 주변에 사람이 모이고 있는가? 사람들이 나를 피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미리 가서 진을 치고 있던 사람들처럼 주님의 뜻을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지를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것엔 바쁘고, 주님 것엔 관심이 없으면서도 주님의 복을 청하는 모습에 부끄러운 하루입니다.
오늘 만큼은 외딴 곳에서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꼭 마련하시기 바라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착한
목자
-인영균신부-
진짜
양들은 목자를 알아봅니다. 누가 진짜 목자인지 가짜 목자인지 금방 알아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거짓이 진리로 둔갑하여 그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성령의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아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거짓 목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불행하여라, 내 목장의 양 때를 파멸시키고 흩어버린 목자들. 이제
내가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벌하겠다.” 옛 이스라엘 임금들은 목자의 탈을 쓴 이리였습니다. 하느님 대신 목자로서 하느님의 양 떼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살피고 먹이고 살려야 하는데 그 본분에는 관심 없고 자신들의 탐욕과 이익만 늘리는데 혈안이었습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치자와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법의 허울로 사람을 몇 백명 죽이는데 눈깜짝하지도 않습니다.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IS(이슬람
국가)는 알라의 이름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거기에 쇄뇌된 사람들은 살인을 거침없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있는 국정원이라는 정보기관이 국민을 감시하기 위해 불법적인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국정원 요원이 이 문제 때문에 자살까지
했습니다. 어떤 이유이든 사람들이 죽는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예레미아 에언자를 통하여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백성들을 돌보아 줄 목자를 세워 주리니, 보라, 그날이 온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세워주신
목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 온 군중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고 알려줍니다.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당신 자신을 ‘착한 목자’ ‘어진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요즘 주님의 수난을 매일 묵상하고 있습니다. 수난의 시간을 24시간 나누어 저술한 책(루이사 피카렛타 지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시간들’)을 가지고 묵상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수난하신 24시간 가운데 하루 한 시간씩 묵상하고 있습니다. 이 묵상을 통하여 깨닫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참으로 우리를 위한 ‘목자’이심을 몸으로 느낀다는 것입니다. 말로만 목자가 아니라 당신 몸과 마음과 영혼과 정신으로 우리 양들을 위해
보속하시고 고통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탓 때문에 당신 생명을 온전히 내 놓으셨습니다. 고통과 수모, 굴욕과 능욕을 자발적으로
받으셨습니다. 심지어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셨다”(2코린 5,21)고까지 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표현입니까? 하느님이 예수님을 죄로 만드셨다는 것, 이는 우리 머리로는 상상조차 못할 정도입니다. 남의 탓을 내 탓을 삼는 것,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자께서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측은지심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목자를 우리의 유일한 목자로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목자의 양떼입니다. 감사할 뿐입니다. 고마울 뿐입니다.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이러한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냥 죄인뿐입니다. 단죄받을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우리를 당신 양 떼로
삼으셨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조건도, 무슨 담보도 없습니다. 우린 빈털털일 뿐입니다. 은행에서는 이런 빈털털이를 신용불량자로 취급합니다. 돈을
갚을 무슨 조건이나 담보가 없기 때문에 절대로 대출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이신 주님은 우리와 신용 거래를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당신 양 떼로 신뢰하기에 그냥 거저 주십니다. 우리 삶 자체가 주님의 선물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라는 오늘 화답송 시편
말씀이 절로 우리 입에서 나옵니다. 우리 심장 박동와 함께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가 고동칩니다.
이
선물을 우리 마음으로 감사히 받아들이고 이 선물의 힘으로 살 때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2코린 5,15). 우리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한 목자입니다. 착한 목자처럼 목숨을 내 놓습니다. 더 나아가 이 세상의
거짓 목자들을 거슬러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다스리시는 참 목자임을 온 세상에 우리 삶으로써 증언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아멘.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마르 6,31) -오상선신부-
우리
인생살이는 충분한
여유를 갖고 살 때가 별로
없습니다.
별로
한 일도 없어보이는데 바쁘게
살다보면 한달이
훌쩍 가 버리는 걸 보면 언제
한번 여유롭게 좀
쉬어보나 할 때도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여름
성수기가 시작된다니 휴가철이
시작되나 봅니다.
여러분들은
휴가계획을 세우셨나요? 어떤
분들은 좀 길게 또
어떤 분들은 짧게라도 휴가를
갖게 되겠지요.
그런데
휴가를 마치고나면 더
피곤하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안
그래도 사람들에 치여 사는데 휴가
때도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보내기 때문이지요.
주님께서는 이번
휴가는 좀
외딴 곳으로 가
보라시네요. 참으로
조용히 잘 쉬고 올
수 있는 곳으로 한번
잡아 보세요.
평소에
꼭 만나뵙고 싶었던 분을 잠시라도
찾아뵙는 것도 좋은
휴식이 되겠지요.
그래서
이번 휴가를 다녀와서는 피곤하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도록 해봅시다. 잘
놀다왔다가 아니라 잘
쉬고왔다고 말하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주님 안에서 잘
쉬는 주일 되시길 축원합니다.
-한상우신부-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곡식을
돌보는 농민의
마음에서 생명을
참으로 소중히
여기는 생명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와 생명의
가치를 배우게
됩니다.
모든 생명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야말로 모든 생명을
풍요롭게하는 진정한 사랑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연민의
마음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우리처럼 판단의
돌을 사랑이
필요한 우리들에게 던지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다려주시며 사랑으로 도와
주십니다.
우선시하여야
할 삶의
가치는 생명의
존귀함을 지켜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주일복음을
통해 우리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변화되어야
할 우리의
마음이란 예수님을
닮은 봉사의
마음입니다.
봉사의
가치는 생명의
가치이며 복음의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우리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에서 사랑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는
주일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진정으로
우리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가치는 진정한
사랑의 가치입니다.
가치를
향해 나아가는 생명의
자녀들이 되십시오.
-서공석신부-
예수님
시대 유대교는 구원을 볼모로 사람들을 율법준수와 제물봉헌에 얽매여 살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떤 것이든,
자비하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배워 실천하며 사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 유대교는 함께 계시는,
자비하신
하느님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율법
준수와 제물 봉헌에만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습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직업적 율사와 제물 봉헌을 담당하는 직업적 사제들이 생기면서 시작된 탈선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우리 삶의 질서를 적용하여,
잘
지키면 상 받고,
못
지키면 벌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제물
봉헌에는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우리 욕심의 질서를 적용하여 많이 바치면,
많이
바칠수록 하느님이 좋아 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도
이스라엘 사람으로 유대교 신앙인이었지만,
그분은
율사와 사제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그들을
비판하셨습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이 “눈먼
길잡이들”(23,16)이라고
그들을 혹평하셨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율사와 사제들은 백성을 하느님에게 인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살겠다는 신앙인은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배워 실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인류에게 생명을 베푸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그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배워 실천하여 하느님의 생명이 자기의 삶 안에 살아계시게 해야 합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거나,
제물
봉헌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을 모두 죄인이라고 단죄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런 이들도 하느님이 사랑하신다고 믿었습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 제자들은 전도 여행에서 돌아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에 대해 예수님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데리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여들자 ‘그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고 돌보아주는 마음입니다.
복음서들은
제자들이 기억하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문서들이지만,
그
안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이 한 결의(決意)도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전도 활동 후,
예수님에게
보고합니다.
이제
그들은 율법과 성전을 기준으로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준해서 실천하고,
반성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에 대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것을 근거로 그들은 세상을 바라보고 행동합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외딴곳으로
가서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열어놓은 시야(視野)에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업적만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만 보이는 시야를 벗어나 예수님이 열어놓은 시야로 들어가라는 말씀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이 우리를 쉬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수고하며
짐을 진 여러분은 모두 내게로 오시오.
그러면
내가 여러분을 쉬게 하겠습니다.”(11,28).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욕망과 성취욕에서 우리를 벗어나 쉬게 하여 하느님의 사랑 안에 우리를 눈뜨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말할 때는 그분이 사랑하고 베푸시는 은혜로운 분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들은 예레미야예언서는 하느님이 은혜로우시다고 말한 다음,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절을 가장 큰 축일로 기념한 것도 우리를 중심으로 한 좁은 시야를 벗어나 은혜로우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해방을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자기중심의 좁은 시야에 갇히면,
하느님은
은혜로운 분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자기 위에 군림하는 무서운 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오로지 지키고,
바쳐서
그분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얻어내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그분이 은혜로우시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도 은혜롭게 행동합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기의 감사에 참여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자기의 업적에만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예수님으로부터 참다운 자유를 배우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는
“그대들은
내 벗입니다.
나는
그대들을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요한
15,14-15)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할 일은 삶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을 측은히 여기고,
그들이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깨닫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자기 삶의 중심으로 삼고 사는 것이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삶의 방향을 잃고 헤매기도 합니다.
재물
혹은 권력이 우리 삶의 유일한 보람으로 보여서 그 욕심을 쫓다가 하느님 자녀의 자유를 잃을 때도 있습니다.
입신출세(立身出世)하고,
많은
것을 얻어 누리고 싶은 욕심은 인간 모두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 하여 매진하면서,
비굴하게
행동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은 아닙니다.
이
세상은 나 한 사람을 위해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웃을 위해주며 살아야 합니다.
이웃을
측은히 여기고,
이웃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할 때,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사는 곳이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친 진리입니다.
요한복음서(8,31-32)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내
말에 머물러 있으면...진리를
알게 되고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하느님은
측은히 여기고 사랑하시는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그분의
사랑과 은혜로우심을 실천하는 사람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수양하지 않으면,
자유로워지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참다운 자유를 배웁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자기 한 사람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속물근성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참다운 자유를 예수님으로부터 배워 하느님의 질서,
곧
하느님의 진리를 살게 해 줍니다.
이웃을
측은히 여기는 은혜로운 사람이 하느님 자녀의 품위를 유지합니다.
◆
|
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