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 현장에서 / 홍속렬
가슴으로 가득 안은 그리움은 시간 시간이 기다림으로 가득합니다
기다림은 예전에 쓴 시에 “바싹 마른입에 껌을 씹는 것” 이라 표현
했습니다.
바싹 마른입에 껌을 씹는 일은 어쩜 기다림의 연속에서 좋은 소식 접하지 못하고 그 기다림이 무산되어 허탈에서 오는 후유증이라 할 수 있겠지요
나는 청년 시절 그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군인이었을 때 아가씨가 면회 오는 사람을 무지부러워 했었는데 나는 면회 올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6,70 년 대 군대는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입니다
그때 한창 젊은 나이에 축구선수로 특별히 선택받은 군대 생활을 했습니다
민가에 나가 합숙 훈련을 하며 운동만 했기에 다른 병사보다 선택받은 군인이었습니다
법원리 미군 기지촌
기지촌 주변은 소위 말하는 양 색시가 많았습니다
한창 피가 끓는 젊은 나이에 법원리에서의 생활은 절제와 말씀에 의지해 육 적 유혹을 물리치는 과정이었고 가장 쫄병이었던 나는 언제나 식사 당번이었습니다.
저녁이면 불나방처럼 모두가 외출해 텅 빈 방을 지키며 혼자 운동장에 나가 운동을 했습니다
3월이 되었습니다
시즌이 시작되어 경기가 진행되는데 선배들은 운동량이 없어 쥐가 나고 헐떡 거리며 뛰지 못합니다
그때 주장이 홍이병 너 준비해 드디어 내게 기회가 왔습니다
나는 잘 준비된 몸 상태로 공을 받자마자 드리볼 해서 문전까지 가서 어시트를 했고 그 볼이 골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주전이 되었고 지휘관이 인정하는 선수가 되었습니다
군대는 운동만 잘하면 최고의 대우를 받습니다.
공수부대에선 축구 배구, 복싱, 씨름 이렇게 네 종목에 출전했습니다.
막강용사 그 이름 홍상사 날 모르면 적어도 특전사에서 날 모르면 간첩이었습니다
전두환 여단장께서는 “넌 3000명을 지휘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 라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군대가 내 적성에 맞았습니다. 군대는 날 키워주고 출세시켜주고 군대에서 결혼도 해서 마치 내겐 고향입니다
대 육군 대표 축구 감독이 되었습니다
무명선수 출신인 내가 어찌, 대 그것도 큰대(大)짜를 쓰는 감독이 될 수 있었을까요?
기껏해야 사단 선수 정도의 실력이었는데
그러나 나는 때를 잘못 만나 기회를 못 얻은 것뿐이지. 그러나 이젠 지도자로서 기회를 얻었으니 최선을 다하자, 결심하고 열심히 뛰었습니다
맡은 해부터 육군의 돌풍이 시작되어 성공적인 데뷔를 하게 되었고 승승장구해서 오늘에 이릅니다
지도자는 철학이 있어야 하고 카리스마가 있어 선수를 한 손에 움켜잡아 마음 먹은 대로 지휘할 수 있으면 성공하는 겁니다
특별히 스포츠는 지도자의 능력이 뛰어나야 성적이 오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도자로 성공했습니다
군대 생활과 축구지도자를 오랜 시간 하다 보니 성격이 칼날입니다
젊은 시절엔 대단했는데 이제 나이 들고 신앙으로 훈련된 모습이 예전 카리스마가 넘쳐 나던 시절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이젠 이 빠진 호랑이지만요
연이어 축구선교사로 7년 차입니다.
중미 땅 미지의 땅에 와서 청소년과 어린이를 가르치며 이 나라 문화를 이해 하고 이 사람들의 심령을 깊이 파고 들어가 함께 살아가며 깨닫는 것들이 있습니다
오랜 식민지 생활 속에서 비젼과 희망이 없습니다
빈부 차이가 너무 심해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가 없으니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며 매일이 그런 날들입니다
그래 나는 이들에게 희망과 비젼을 심어 줍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해줍니다
이네들에게 한글과 영어를 가르쳐 앞으로 한국 사회는 인구 절벽 시대가 이어져 이민을 받아드려야 하는데 이 아이들 잘 훈련 시켜 장차 한국으로 보낼 생각입니다
축구 훈련을 통하여 성경 구절 20구절을 매일 필사하고 암송해서 일꾼으로 키워 한국으로 보내 사람답게 노동의 댓가를 제대로 받아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게 해 줄 겁니다.